1, 老論의 바탕 위에 노론에 의해 왕이 된 英祖는 당쟁의 피해를 몸소 겪은 군주였고,당쟁속에서 아들인
사도세자도 잃었다.따라서 그는 당쟁의 폐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런 만큼 그는 당쟁 타파에 주
력하는 한편,왕의 탕평으로 자신의 치세를 일관하는 정국운영을 실시했다.그 결과 영조는 당파간 극단
적인 대립을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는데 일정한 성과를 거둘수 있었다.그러나 한편으로 영조의 탕평은
외척세력을 더욱 강화하는 세도정치란 역기능을 수반하여 새로운 부작용을 낳았다.世孫으로 왕위를 이
어받은 정조(이산,1776~1800)도 당쟁의 폐단을 누구보다 잘알고 있었다.따라서 정조의 탕평도 기본적으
로 영조의 탕평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했다.종친들이 정치에 참여할수 없는 이유로 믿을 만한 사람을 옆
에 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따라서 正祖도 영조 처럼 군주 주도의 탕평을 선호했다.정조가 탕
평의 실효를 거둘려면 최우선으로 해야 할일은 외척 세력들을 제거하는 일이 였다.외척들은 기성의 당파
들과 연대해 탕평의 본질을 왜곡하고 왕권을 위협하며 臣權을 강화하려는 세력이었다.영조 말기에는 정
치적 혼란을 야기 하면서 세손(정조)을 모해하려는 외척세력(홍인한)들까지 등장했다.
2, 정조는 세손 시절에 외척의 노골적인 협박속에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이점에서 외척은 곧 정조의
정치적 정적이기도 했다.이런 정황을 고려할때 외척은 탕평을 함에 있어 일차적인 타도 대상이었다.따라
서 정조는 탕평을 위해 외척과 그 측근 세력을 철저히 배제하려 했다.또한 환관들에 대해서도 경계도늦추
지 않았다.그렇다면 정조는 누구와 함께 탕평을 추진할 것인가? 정조는 외척과 환관들의 공백을 '사대부의
등용' 을 통해 채우려 했다.유교적 학식이 충만하고 의리에 투철하며 논의가 峻切(매우 위엄있고 정중한)한
인사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결국 정조는 親王的 이면서도 학식과 의리는 물론 참신한 기풍을 겸
비한 엘리트들을 측근으로 두고자 했다.근거로 집권후 정조가 설치한 '奎章閣,秒啓文臣制' 등 이 인재를 양
성하고 규합하는 토대가 되었다.여기에 서양문화를 일찍 접하고 이해하는 실학자 정약용을 비롯해 南人들
로 천주교(사학) 세력들을 접목시켰다.정조대의 정치세력은 기본적으로 '노론,소론,남인' 으로 구분 되었다.
5색 당파는 없어 졌지만 내부에서는 여전히 상존의 시파(신파)와 벽파(구파)로 양분되어 있었다.
3, 정조는 우선 외척을 제거해야 만 했다.영조의 그늘에서 우후죽순으로 성장한 외척 세력들은 권력의 핵심
을 장악하면서 맹렬한 주도권 싸움을 펼치고 있었다.정조가 볼때 외척인 이들은 거대한 권력의 덩어리로 자
신을 모해하려는 추악한 정치집단으로 보였다.당시 대표적인 외척 가문으로는 풍산홍씨 가문인 홍봉한가문
(사도세자 장인이자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부친)과 경주김씨 김구주(정순왕후 집안)이 있었다.홍봉한은 정조
의 외가로 '扶洪派' 의 핵심이며,경주김씨는 의리상 사도세자의 외가로 '攻洪派' 였다.兩者는 학문적,지역적
특성에 따라 북당과 남당으로 지칭되기도 하고, 정치적 성향에 따라 時派와 僻派로 분류되기도 한다.단 두파
의 유일한 공통점은 '정조(세손)의 대리청정을 반대' 했다는 점이다.정조도 대리청정시 이들 모두를 거절했다.
이유는 이들이 정국 운영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었다.여기서 정조는 비척신 계열과 '洪國榮' 의 비호를 받아
새로운 세력들과 규합하고자 부홍파들과도 결별을 선언했다.이때 부홍파로 홍봉한의 아우이자 정조의 외종
조부인 洪麟漢은 영조 51년(1775) 세손의 대리청정을 앞장서 반대했고,정조의 등극후 당연히 귀양을 갔다.
부홍파들의 협박과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영조 51년(1775)12월 세손의 대리청정은 실현되었다.이는 홍국
영의 탁월한 정치력이 작동했기 때문이다.그로부터 3개월이 지난 1776년 3월 영조가 사망하고 정조가 이씨
왕조의 22대 왕으로 등극한 것이다.정조는 즉위하자 마자 홍국영을 軸으로 비척신계열 '鄭履煥,金鍾洙,徐命善'
등을 등장시켜 외척세력 제거에 착수했다.이어 외척의 정후겸은 경원,홍인한은 廬山(반도의 여천이나 익산의
여산이 아님)으로 유배 되었다.그리고 홍인한을 비호했던 '尹若淵,洪相簡,閔恒烈,李善海,李相魯' 등을 처벌했
다.다만 왕실의 권위를 고려하여 외조부 홍봉한과 고모인 화안옹주는 처벌하지 않기로 했다.
4, 扶洪派의 제거에는 김종수와 정이환등 공홍파이자 비척신계열의 공이 컸다.특히 김종수는 공홍파의 맹장으
로 후일 벽파(사도세자 죽음을 동조했던 파)의 거두가 되었다.이처럼 정조는 공홍파의 도움으로 외척인 부홍파
들의 수뇌부들을 제거하는데 성공했다.정조는 그 여세를 몰아 또다른 외척들인 김구주 계열의 척신들을 제거하
고자 했다.여러 이유들 중 김구주가 병세가 위중한 혜경궁 홍씨를 위문하지 않았다는 이유(트집)를 들어 흑산도
로 유배하였다.이로 인해 경주김씨 외척도 몰락하고 말았다.이어 정조는 그동안 잘 써먹었던 홍국영을 축출하고
3년(1779)에 비척신계 서명선을 영의정에 앉히는 특단의 조처를 단행한다.탕평과 개혁을 위해서라면 절친의 내
편도 쳐냈다.사실 홍국영은 굴지의 명문가문에 속하는 京都의 풍산홍씨 가문 출신이다.정조의 외할아버지 홍봉
한은 홍국영의 10촌 할아버지이며,혜경궁 홍씨는 11촌 아주머니였다.영조 48년(1772) 25세에 급제한 홍국영은
시강원 司書로 임명되어 왕세손인 정조와 인연을 맺게 된다.그는 정조의 스승,친구,참모,정치적 대변자가 되었고,
유일한 정신적 은신처 이기도 했다.그럼에도 그가 신하로서 분수와 선을 넘자 제거해야 만 했다.
5, 1776년 3월 영조가 사망하자 홍인한등은 세손의 즉위를 막는데 총력을 기울였지만 반전의 기회는 오지 않았
고,오히려 홍인한이 여산(강서성 여산)으로 귀양을 갔으니,이때 정조 등극의 원훈공신 홍국영의 나이는 29세 였
다.정조 등극에 혁혁한 공을 세운 공로를 세운 인물은 '홍국영,김종수,서명선 鄭民始' 등 4인을 들수가 있다.이들
4인은 홍인한을 탄핵한 날을 기념해 모임을 가질 정도로 유대가 돈독했다.이중 권력의 핵심은 당연히 홍국영 이
었다.정조 등극 3년 동안은 '홍국영 정권' 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그는 정조의 신임과 지지는 물론 정권 창출의
공로를 인정받아 '도승지,훈련대장,금위대장,숙위대장' 을 겸임하는 등 조정의 인사권과 군권까지 장악한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정조는 생각하기에 강력한 왕권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병권을 장악해야 한다고 생각해 홍
국영을 숙위대장(경호대장)에 임명했던 것이다.병권이 외척에게 부여되는 것이 관행 이었지만,정조는 초기에 외
척을 제거한후 병권을 믿고 맡길 만한자가 없어 숙위대장,훈련대장,금위대장이란 막강한 직책까지 홍국영에게
맡겼다.
6, 홍국영은 정조의 신임을 바탕으로 요직을 독점하는 한편,유림의 山林을 포섭하여 지지기반을 강화하고자 했
다.정조는 그의 권력이 비대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한편으로 공로와 개혁을 위해서는 어느정도 필요한 직책
으로 생각해 묵인해 주었다.또한 즉위 초반 어수선한 정국을 수습하고 강력한 왕권,친정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
는 홍국영과 같은 인물이 필요하기도 했었다.욕심이 지나치면 화를 부르기 마련이 듯이 정국이 안정 되어가면서
홍국영은 자기도 모르게 왕이자 정조의 권력을 남용하고 있었다.즉 '외척의 제거' 라는 정조의 정치적 소신을 거
스르는 순간 막강한 홍국영의 권력도 떨어지기 시작했다.당시 중전 김씨(청풍 김시묵의 딸)가 지병이 심해 왕실
의 후사를 기약할수 없게 되었다.이에 홍국영은 자신의 누이를 정조의 후궁으로 들였다.이제 그 스스로가 외척이
된 것이다.이는 정조의 정치 신조와는 어긋나는 행동이었다.불행이도 홍국영의 누이 元嬪홍씨가 자식을 낳지 못
하고 1년 만에 사망하자 홍국영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7, 이에 홍국영은 차선책으로 정조의 이복동생인 恩彦君의 아들 常溪君 李湛(담) 을 자신의 여동생 원빈 홍씨의
양자로 삼아 完豊君에 봉했다.그런 다음 같은 편인 송덕상을 조종해 왕세자 책봉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게 하였다.
즉 홍국영은 완풍군을 정조의 후계자로 삼을 생각이었던 것이다.이에 정조도 그가 신하로서의 분수를 넘는 행동
을 하자 달라질수 밖에 없었다.즉 홍국영에게 막강한 권력을 허락했지만,왕위계승 문제는 왕실(종실)의 문제로
조정 신하가 관여하는 일은 용서할수 없었다.정조 3년(1779) 9월 29일 정조는 홍국영의 입조를 명했고,여기서
홍국영은 사직서를 올리고 致仕를 선언했다.말이 사직이지 정조의 요청에 의한 관직 삭탈과 추방이었다.그는 막
강한 권력을 차지하고도 이것도 모자라 외척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퇴출 될때 죄인이 아닌 은퇴의 수순을 밟게
해준 것은 그 동안의 친분과 공로를 인정한 정조의 배려였던 것이다.홍국영을 추방한후 그가 설치했던 숙위소는
폐지 되었다.이후 홍국영은 호시탐탐 재기를 노렸으나,정조의 마음은 이미 홍국영에게서 멀어져 있었고 가교 역
할을 했던 사람들도 문책 당했다.개혁의 동지였던 비척신의 김종수등을 통해 홍국영의 재기 음모를 무력화 시키
기도 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