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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상 글 >
님이시여! 당신을 알고부터...
안산 원곡성당 FB
김 세실리아 (상희)
님 향한 일편단심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는 님이시여!
피 끓는 그 사랑을 바치신 이름 모를 넋이여!
그 사랑의 몸부림 되어
하얗게 웃는 고운 모습으로
말없이 길가에 피어난 님이시여!
그렇게 조용히 웃으며 말없이 살라 하시네.
당신을 알고부터 슬픔도 잊었습니다.
당신을 알고부터 원망도 잊었습니다.
당신을 알고부터 사랑을 알았습니다.
당신을 알고부터 행복을 얻었습니다.
당신을 알고부터 용서를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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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 영적지도신부 훈화 >
“ 아, 김대건 신부님...! ”
글 : 윤 클레멘트 (양호) 신부님
<전주교구 소속 지도 신부>
“ 한 목숨 내어 던진 신앙의 용사들이 끝없는 영광 속에 하늘에 살아있다.
피꽃을 몸에 피워 천당에 올랐어라... 찰나의 죽음으로 영생을 얻었어라...”
순교선열들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그렇게 사셨고, 죽음을 넘는 사랑과 신앙으로 한목숨 바쳤습니다.
온갖 박해와 시련들 속에서도 순교의 삶과 길을 사시던 신앙의 선조(先祖)들은 김대건 신부님의 삶, 영웅적인 순교의 소식에도 슬픔을 넘는 신앙으로 더욱 굳건해집니다.
그들은 끝내 생명까지 흔연히 바치며, 땅의 삶을 버리면서 하늘의 삶을 위해 온갖 간난신고(艱難辛苦)를 받아들이셨습니다.
하느님과 신앙인의 삶을 위하여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살 수 있을까요?
순교영성(殉敎靈性)은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고난(苦難) 속에서도 믿음과 사랑으로 살면서, 바람처럼 자유로운 영혼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전(傳)하며 기도해가는 것임을 생각합니다.
이 세상 삶의 길 위에서 겪고 만나는 힘듦, 고통, 노고 속에서도...
사도 바오로는 ‘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사랑으로부터 그 어떤 세상의 세력, 고통, 박해, 죽음도 자신들의 사랑을 갈라놓을 수는 없다’ 하십니다.
아, 이 땅에 믿음의 횃불 되신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의 빛으로 다음과 같이 헤아려 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의 순교자들은 순교영성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지켰습니다.
하느님은 자비로우십니다.
우리 인간들의 죄 많고 가련한 삶에도 순교 선열(先烈)들은 하느님의 자비에 삶과 목숨을 드렸습니다.
하느님은 섭리이십니다.
순교 선현(先賢)들이 한 목숨 드린 하느님은 환자를 대하는 의사처럼 우리를 돌보아 주십니다.”
이 세상 삶의 시련에서도 믿음, 전교, 기도의 길에서 지치거나 포기하지 않은 채, 순교영성을 살 수 있기를 소망하면서, 옥중 편지에서 몇 말씀을 듣습니다.
“서로 우애를 잊지 말고 돕고 주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걷기까지 기다리라.
무슨 일이 있을지라도, 삼가고 극진히 조심하여 위주(爲主) 광영(光榮)하고 조심을 배로 더하고... 세속과 마귀를 쳐 덕공(德功)을 세울 때니, 사랑을 잊지 말고 서로 참아 돌보고 불쌍히 여기라.
천국에 만나 영원히 누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 성 김 대건의 옥중서신, 제 25신 내용 인용 >
- 신부님의 ‘영성의 물가’ 中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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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교구 사목국 가해 강론 자료 >
행복 선언 (연중 제4주일) - 제 2부 -
- 주님의 이름으로 주고 있는 이 충고를 따르는 이들에게 어느 누구도 해를 끼칠 수 없으리라고 예언자는 말한다.
이른바 “주님의 날”은 몇 년 후에 닥쳤다. 예루살렘은 파괴하고 통치자들, 부자들, 기술자들, 모든 쓸 만한 사람들은 유배지로 끌려갔다.
오직 가난한 이들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한 이들만이 뒤에 남겨졌다. 그들의 가난이 유배에서 그들을 구해주었다. 또 몇 년 후에 유다인들이 유배지에서 고국으로 돌아오도록 허락되었을 때, 적들의 땅에서 잘 자리 잡은 사람들은 귀환을 거절하였다. 예루살렘에 돌아오는 것을 선택했던 이들은 전체적으로 보다 가난한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고국에 돌아왔을 때, 그들은 뒤에 남겨졌던 이들과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가난했지만, 그들은 우선 성전을, 그리고 다음에는 도시의 성벽을 재건하였다. 종교적 쇄신이 사람들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의 법을 열심히 지킨 그들은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였다.
그들은 결코 커다란 물질적 번영을 손에 넣지는 못했다. 그들은 정치적 독립을 다시 얻어내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오실 메시아를 계속 갈망했다. 그리고 드디어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서 태어나셨다. 주님에 대한 그들의 신뢰가 헛되지 않았다!
2. 예수님께서는 가난을 미워하시고 가난한 이를 사랑하신다
이제 복음으로 돌아가 보자. 마태오복음에서 뽑은 이 대목의 예수님 말씀에서 그릇된 결론을 끌어내서는 안 된다.
가난한 것, 눈물을 흘리며 우는 것, 그리고 박해를 받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가난을 피하고 생활필수품을 얻는 데 최선을 다하기를 원하셨다. 결핍과 가난은 결코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게 아니다. 그런 악들은 사람들이 저지르는 죄악에서 빚어진 결과일 뿐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를 사랑하셨다. 게다가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것이 그분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이라고 주장하셨다. 그렇다면 가난과 결핍은 하느님께서 계획하시지 않았다고 조금 전에 말한 것과 모순되지 않는가?
가난하다는 것이 실제로 예수님의 마음에서는 무엇을 뜻하는가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성경으로 돌아가 보자...
원래 약속의 땅은 고르게 분배되었지만, 차츰 그 당은 소수의 소유가 되었다. 이것을 피하려고, 모세는 땅은 영구히 매각되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그 땅은 50년마다, 이른바 희년에는 원래 소유자에게 되돌려주어야 했다(레위 25, 28). 그러나 규정은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대부분의 땅은 소수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고, 가난한 사람들은 하루 품삯을 받고 소수의 부유한 이들을 위해 일해야 했다. 마태 20,1-16에 나오는 일꾼들의 비유는 이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성경은 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님의 가난한 이’ 또는 ‘땅의 가난한 이’ - 즉, ‘땅이 없는 가난한’ 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가난한 이들은 종종 그들을 착취하는 부자들이 좌지우지하였다. 그들의 가난 속에서, 가난한 이들은 주님께만 신뢰를 두었다. 그리고 몇 번이고 주님께서는 당신 예언자들을 통하여 가난한 이들의 권리를 옹호하겠다고 약속하셨다.
- 사정은 예수님 시대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가난한 이들을 업신여겼다. 그들은 가난이 모세법을 소홀하게 지킨 결과라고 가르쳤다. 그들의 생각에는, 이 가난한 사람들은 구원받을 기회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감히 예수님을 칭송하고 나선 이들을 거슬러 유다 지도자들이 내뱉은 말은 다음과 같다.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요한 7,49)
오늘 복음이 광범위하게 보여주듯이, 가난한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과 감정은 아주 달랐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가난을 딱하게 생각하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이 그것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디딤돌로 쓰도록 도와주셨다.
- 8월호에 제3부 연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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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안드레아 사제순교자 대축일
2017. 7. 2
마태오 10, 17~22
♠ 복음 연구
* 17-18절 : 여기서 제자들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받는다. 특히 그들이 첫번째 선교를 수행해야 할 유대인들 가운데선 더욱 그러할 것이다. 로마 총독들과 헤로데 일가의 유대 왕들이 관여하여 그들을 다루게 될 것이다. 그들 앞에서 사도들은 자신을 변호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변호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언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고발되며, 일간의 경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변함없는 충성심을 가지고 비난과 단죄를 받는 가운데 예수님을 증거한다. 이것이야말로 놀라운 증언이 될 것이며, 인간의 약함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이 계시될 것이다.
* 19-20절 : 법정에 잡혀 가게 되면 결코 자신의 지혜에 의존해서는 안 되며 적절한 답변을 찾느라고 걱정해서도 안 된다. 순수하고 명확하게 신적인 증거만 하는데 만 온 마음을 쏟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성령은 그리스도인들의 협력자요 옹호자로서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해 주시고 비난하는 자들로부터 지켜 주신다.
* 21-22절 : 집 안에서까지 박해자가 발견되며 증오가 가족들을 분열시키고 있다. 사람들은 몹시 마음이 삐뚤어지고 정신이 혼란해져서 가족이라는 자연적인 유대 관계마저 산산이 부서지고 말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묘사하신 것 역시 같은 것이다. 즉, 그분의 특사들이 가는 곳이면 어디서나 미움이 일어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야 할 일은 끝까지 견뎌내는 것이며, 온갖 맹렬한 비난과 실망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낙담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런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약속하신다.
♠ 복음 요약 : 하느님의 영원한 구원은 보장된 것이기에 그는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조금도 절망할 이유가 없으며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절망할 까닭이 없다. 법정에 끌러갔을 때 성령께서 그들을 도와주러 오시는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말없는 무수한 영웅적 행위들과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충실함 속에서 예수님의 이 말씀이 참된 것으로 입증될 것이다.
♠ 대화 방향 : ① 신앙생활을 하면서 박해가 왔을 때 주님의 도우심으로 끝까지 견뎌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②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의 신앙이 흔들릴 때 순교자들의 삶을 생각해 보고, 내가 내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받아들여야 할 신앙적 결단에 대해서 나누어 봅시다.
♠ 참고 문헌 : ▪ 영적독서를 위한 마태복음 (성요셉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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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4주일
2017. 7. 9
마태오 11, 25~30
♠ 복음 연구
* 25-26절 : 마태오 복음서 가운데 여기서만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라는 엄숙한 인사말을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예수께서는 당신의 아버지나 우리의 아버지에 대해서, "아버지" 라는 이러한 인사말의 형태가 갖고 있는 평이하고 친숙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버지는 또한 전능하신 창조주시요 세상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명백하게 말씀하신다. 아버지는 하늘과 땅을 "태초에 창조하신" (창세기 1,1) 하느님이시다. 그분 외에 다른 신은 있을 수 없다. 온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절대적인 주이신 그분께 속해 있다.
* 27절 : 이 말씀은 지식과 관계된다. 그러나 이것은 순수한 지성적인 지식이 아니다. 성서에서 "안다" 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안다는 것은 더 나아가서 어떤 것과 친숙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면서 자기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감사기도의 뜻이 밝히 드러난다. 유다교 지도급 인사들에게 배척을 받아 전도가 사실상 실패하던 무렵에 아주 조금 성공을 거두신 때에 이 감사기도를 바치셨다.
* 28절 :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져보려고 항상 그분 주위로 몰려들었다. 예수께서도 친히 언제나 그들을 찾아 나섰으며, 냉대 받는 사람들과 식사를 함께 하셨다. 이제 예수께서는 그들 모두를 당신께로 부르시며, 그들을 편히 쉬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신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들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처럼 율법에 억눌려 있는 사람들이다. '짐'은 613가지의 율법계율을 말한다. 그들은 구원과 생명을 위해 주어졌던 율법을 수백 가지의 특수한 규정으로 만들어 견딜 수 없는 짐이 되게 하였다.
* 29절 : 억눌리고 고된 그들의 생활의 짐이며 특히 율법의 해석으로 인해 생겨난 견딜 수 없는 규정들의 짐이다. 이러한 이중적인 짐 때문에 그들은 지쳐 있고 억눌려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발걸음을 가볍고 기쁘게 해주실 것이다. '배우다' '온유하다' '겸손하다'는 예수님의 돋보이는 모습이다. 예수님은 해석이 까다로운 율법의 멍에 대신에, 편히 쉬게 할 말씀에 순명하는 멍에를 쓰라고 권유하신다.
* 30절 : "하느님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니다." (Ⅰ요한 5,3) 왜냐하면 이 계명은 간단하며 두 가지만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즉 헌신과 사랑이다. 왜 예수님이 지우시는 짐은 가벼운가? 613 가지의 계율을 예수님은 황금률(7,12)과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환원시키셨기 때문이다.
♠ 복음 요약 :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강력한 행업의 의미를 거부하는 반면, 철부지 어린 아이들은 그것을 다 받아들였다. 보고 믿는다는 것은 아버지의 계시에 달려있지만, 이 계시는 마음을 열고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에게 주어지고 교만한 사람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또 그분과 아버지 사이에는 지식의 완전한 상호교환이 있기 때문에 모든 신비를 말할 수 있으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 맡겨진 것은 모두 그분이 원하는 사람에게만 계시된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들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는 말씀들은 우리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다. 즉, 인생고와 나날의 긴장에 지친 우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서 위안과 휴식을 찾고 안식을 얻게 된다.
♠ 대화 방향 : ① 기도할 때 예수님은 하는님을 "아버지" 라고 부르며 찬양과 감사로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삶을 살고 있는지 나누어 봅시다.
② 당신은 고생하고 지쳐있을 때 어디서 위안을 찾습니까? 예수님입니까? 다른 무엇입니까?
♠ 참고 문헌 : ▪ 영적독서를 위한 마태복음 (성 요셉 출판사)
▪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 출판사)
▪ 주석 성서 [신약] (성요셉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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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5주일 / 농민 주일
2017. 7. 16
마태오 13, 1~9
♠ 참고 자료 : 아래 내용을 기초로 해서 각자 주제발표를 준비하면 됩니다.
※ 오늘날같이 농사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평지가 그리 많지 않는 유다 땅에서 농사를 짓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지금과 같이 미리 고랑을 내어서 씨를 뿌릴 수가 없기에 농사 지을만한 땅에 미리 씨를 뿌리고, 그 위로 흙을 덮어주기에 반드시 뿌린 씨앗이 흙이 많은 곳에서만 떨어지지 않게 되고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에서의 소출을 기대한다. 씨앗을 뿌리는 이는 하느님이시고, 이를 씨앗을 받아들이는 곳은 우리가 가꾸는 밭인 신앙의 밭을 의미한다고 한다. 아마도 이는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신앙심을 가지려고 노력하지만, 우리가 속한 교회나 주변 공동체의 영향을 받는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 하느님의 다스림, 그 왕국의 시작은 아직 경작되지 않은 휴경지에 씨를 뿌리는 농부와 같습니다. 희망 없는 휴경지가 모든 기대와 이해를 넘어설 만큼 풍작으로 물결치는 밭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 자신의 하느님 나라 선포의 성과에 대한 의혹을 불식하고 하느님 나라의 특성과 그에 대한 자신의 확신을 보여 주십니다. 인간의 눈에는 많은 노력이 헛되고 실패를 거듭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예수님은 기쁨과 확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확신은 이 지상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려는 오늘의 교회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확신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반드시 그 뜻을 이루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이 모든 피조물 안에서 실현되기 위해서는 모든 어려움과 진통을 참고 인내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광스러운 추수를 기다리며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 복음 공부
* 1절 : 집에서 나와 - 예수께서 자신을 찾아온 가족들과 잠시 집으로 들어가셨다가 다시 집 밖 호숫가로 나오시는 장면일 것이다. 예수는 집안에서는 비교적 구원된 무리들, 즉 12제자를 중심한 그 가족과 동료들을 위한 제자훈련에 힘을 쓰셨던 것이다. 한편 옥외(屋外)에서는 많은 무리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시고 이적을 행하셨는데, 그 장소는 산(5-7장의 산상수훈), 호숫가, 길가, 뽕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등 다양한 여러 곳으로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느 곳에서든지 그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말씀을
전파하셨다.
* 2절 : 배 -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소형 어선은 보통 하나의 돛대와 두 개의 노(櫓)가 달렸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러한 배를 타시게 되었는데, 이 배는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듦으로써 순식간에 형성된 군중집회에서 하늘나라의 새 소식이 조용하게 때로는 엄숙하게 선포되는 설교강단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편 대개의 학자들이 인정하듯이 육성(肉聲) 이외의 특별한 기계설비가 없던 때였으므로 비록 군중집회였다 하더라도 예수의 이 호반(湖畔) 설교의 분위기는 매우 고요하고 진지했을 것이다.
* 3절 : '씨 뿌리는 사람'이란 농사를 짓는 모든 사람, 즉 농부를 가리킨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말 속에는 '농부라면 일반적으로 다 경험하듯이'라는 뉘앙스가 은근히 내포되어 있다. 여기서 '씨 뿌리는 사람'이란 말은 결국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위시한 중근동 지방에서는 밭에 씨를 뿌릴 때 농부가 직접 손으로 갈아놓은 이랑에 뿌리기도 하고 가축을 이용하여(가축의 등에 씨앗 담은 주머니를 달아 이동할 때마다 주머니에 뚫린 구멍으로 조금씩 씨앗이 떨어지게 함) 씨앗을 뿌리기도 한다. 본문의 비유는 그러한 씨뿌리는 방법에 대한 관심보다 씨뿌려지는 밭으로 비유된 사람들의 마음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 4절 : 새 - 새에 의해 상징되는 악한 자, 즉 사탄은 공중의 권세를 잡고 있으면서, 복음의 씨앗을 그 자신의 내부로 받아들이지 않고 방치(放置)하고 있거나 나중 일로 미루어 지체하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는 진리를 경험할 가능성을 갖지 못하게 하는 자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이 받아들이지 않은 복음의 씨앗은 그대로 방치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들에 의하여 신속히 제거된다고 하는 사실을 강하게 암시받을 수 있다.
* 5절 : 흙이 많지 않는 돌밭 - 팔레스틴에서는 매우 흔한 지형으로, 석회석 지층 위에 얇은 지표가 형성되어 있어서 자연히 바위의 온기(溫氣)에 의해 뿌리가 쉽게 나오지만 흙이 깊지 않아서 뿌리가 계속 성장할 수 없는 곳을 가리킨다.
* 6절 : 해가 솟아오르자 - 식물은 뿌리에서 올라오는 습기와 영양분도 필요하지만, 태양열 또한 필요한 것이다. 태양열은 탄소동화 작용 등을 통하여 식물의 생장에 결정적 원동력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흙이 씨로 비유된 복음을 받아들이는 영혼의 상태를, 뿌리가 씨(복음) 자체에서 나온 생장력을 가리킨다면 여기 해는 그 복음의 씨가 계속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각종 연단과 훈육을 가리킨다 하겠다. 즉 씨뿌리는 행위가 단회적인 반면, 여기 해는 계속적인 에너지 공급 행위, 즉 일반적 신앙생활을 통한 신앙 훈련을 가리킨다 하겠다.
* 7절 : 가시덤불 - '열매가 없어서 쓸모가 없는 것'을 가리키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기후가 건조한 팔레스틴에서는 거의 사계절에 다 볼 수 있으며, 그 종류도 약 200여 가지가 된다고 한다. 본문에서의 가시덤불은 천국복음에 대한 신앙적 장애요소로서, 복음의 씨의 기운을 꺾어 버리게 하는 모든 것들을 가리킨다.
* 8절 : 좋은 땅 - 땅이 기름지고 수분이 충분할 뿐만 아니라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위치하며, 적절한 지력(地力)이 보존되어 있고, 그리고 또 잡초들과 같은 씨앗의 성장에 불필요한 것들이 미리 제거된 순수한 땅을 가리킨다. 이는 결국 이 비유의 원래 의미와 연관시켜 생각해 본다면 진리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영혼의 심지가 깊고 성실한 자, 신앙적 줏대(fixed principle)가 있고, 진리에 대해 순박한 자를 가리킨다 하겠다.
* 9절 : 귀는 이해력과 아울러 순종하려는 마음 자세를 가리키는 말로 자주 쓰였던 것이다. 이처럼 추상적 개념을 눈에 보이는 구체적 사물로 대치시켜 표현하는 것은 특히 히브리인이 즐겨 쓰던 표현법이다.
♠ 복음 요약 : 마태오는 산상 설교와 파견 설교에 이어, 이제 일곱 가지 비유들을 모아서 비유 설교를 엮는다. 전반부에서는 군중을 상대로 네 가지 상장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그 비유들의 출처를 명시하면
다음과 같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후반부에서는 오직 제자들을 상대로 고유 사료에서 따온 비유 세 가지를 말씀하셨으니, 곧 보물의 비유, 진주의 비유, 그물의 비유이다. 13장의 비유들은 거의 전부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비유들이다. 오직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만이 비유의 주제가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이 역시 원래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였을 것이다. 그러니 여기 일곱 가지 비유는 일차적으로 하느님 나라의 성격, 곧 하느님 통치의 성격을 전하는 상징적 이야기들이다. 비유는 저마다 하느님 나라의 어느 한 측면을 풍경화처럼 펼쳐 보인다. 아울러 이 비유들은 부차적으로 하느님 나라의 선포자요, 구현자이신 예수님의 처신을 암시하는 상징적 이야기들이기도 하다. 예수님이야말로 어느 누구보다도 하느님 아빠를 깊이 체험하고 맑게 반사한 분 아니신가? 가이 없는 사랑이신 하느님이 바치시는 명경지수 아니신가? 아니 자비 지극하신 임의 화신이 아니신가! 그러니 하느님 나라의 비유들에는 함축적이기는 하지만 예수님의 신상 발언이 들어 있다.
♠ 대화 방향 : ① 예수님 말씀을 받아들이는 당신의 마음자세는 지금까지 어떠했습니까?
② 농사는 농부가 아무리 부지런하다 해도 하늘의 기후와 땅의 물에 영향을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본인이 속한 코이노니아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성서형제회에 어려운 환경이 다가오고 위축되어 있다면 나는 그 안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요... 혹시 주님께서 성서형제회 안에서 내가 생각하지 못하는 다른 역할을 명령하시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눠 봅시다...
♠ 참고 문헌 : ▪ 200주년기념 성서주해서 ▪ 소공동체를 위한 복음해설(수원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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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6주일
2017. 7. 23
마태오 13, 24~30
♠ 복음 공부
* 24~26절 :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이 자고 있는 동안에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 모르고 지내다가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가라지들은 이처럼 처음에는 밀과 모습이 비슷하여 구별이 안되지만, 가리지는 밀로 바꿔지지 않기 때문에 나중에는 모습을 드러낸다. 실제로 추수 때가 되면 밀은 통통한 열매를 맺지만 반면에 가라지는 열매가 없는 껍데기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라지의 비유 앞에서 주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과 열매에 대해 말씀하셨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마태오 13, 23)” 가라지는 아무런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한 우리가 맺는 열매에는 독보리나 가라지가 들어 있어서는 안 된다.
* 27절 : 주인은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뿌린 것을 알았지만 일단 그대로 둔다. 왜냐하면 밀들이 다칠까 봐서 그렇다. 주인의 깊은 뜻을 모르는 밀은 추수 때까지 가라지의 괴롭힘을 견뎌야 한다. 왜냐하면 가라지는 밀이 취할 영양분을 뺏어 가기 때문이다.
* 28~30절 : 그러나 주인은 밀들에게 준 영양분을 옆에서 뺏어 먹고 자란 가라지를 결국 수확할 때 뽑아서 태워버린다
♠ 복음요약 : 우리는 세상이 어지러워 보일 때 마다 의문을 품게 된다. 도대체 하느님이 살아 계신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이렇게 흘러 갈 수 있단 말인가? 주님께서 복음에서 말씀하신 비유에 의하면 답변은 이러하다. “세상은 날마다 좋아지고 있는 동시에 날마다 나빠지고 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두 가지 씨 뿌림이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세상에 좋은 씨앗을 뿌리고 계시고, 원수는 나쁜 씨앗을 세상 안에 뿌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상을 영적 전쟁이라고 부른다. 매일의 삶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 우리가 성령의 뜻에 순명하면 하느님의 자녀로 살 수 있고 육정을 따라 움직이면 가라지가 될 수 있다. 원수는 신앙적 모임에서도 가라지를 뿌린다. 정통 가르침과는 다른 이단적 가르침을 교회 안에 퍼뜨리려 하고 성령의 인도 속에서 살아가야 될 신자들 내면 안에 교만과 탐욕을 심어 자신의 노예로 삼고자 한다. 하느님께서 살아 계신다면 어떻게 악인이 잘 될 수 있겠는가? 하느님의 정의가 있다면 어떻게 저런 악당이 아직도 활개를 필 수 있다는 말인가? “주님, 언제까지 이 불의를 참고 계실 것입니까?” 하고 주님께 여쭌다면 주님께서는 분명히 대답하실 것이다. “추수할 때까지...! ”
♠ 대화방향 : 나는 밀인지 가라지인지 그것은 마지막 추수 때에 주님만이 판단한다. 사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많은 말씀을 듣고 살고 있다. 내 마음 안에 좋은 씨가 뿌려져 있다면 나는 세상의 선하고 좋은 것들에 마음을 두게 될 것이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사도행전).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을 몸소 보여주신 것이다. 라틴어로 '네모 다트 쿠오드 논 하베트(Nemo dat quod non habet / 자기가 가지지 않은 것은 남에게 줄 수 없다)란 말은 스스로 불행하게 여기는 사람은 남들에게 불행과 신경질 밖에 줄 수 없다. 먼저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해 행복하게 여겨야 남에게도 그것을 줄 수 있다. 주님 보시기에 좋은 열매를 맺는 밀이 되기 위해 비판과 흠집만을 찾는 사람이 되지 말고, 긍정과 감사와 배려의 인간이 되어야 한다. 밀은 열매를 맺고 추수 때까지 묵묵히 기다린다. 우리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대화해 보자.
♠참고문헌 : ▪ 삶 속의 영적 전쟁 (송봉모 신부)
▪ 교부들의 성경 주해 (오리게네스 / 분도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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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7주일
2017. 7. 30
마태오 13, 44~52
♠ 복음 공부
* 44절 : 보물은 하느님 나라이며 또한 성서에 숨겨져 있는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진정한 자기의 상징이기도 하다. 진정한 자기, 내 안에 있는 하느님의 훼손되지 않는 모상은 보잘 것 없는 흙에 숨겨져 있다. 내가 진정 참된 자아를 찾고자 한다면 나의 땅을, 지저분한 바닥을 파야한다. 자신의 진정한 핵심을 만난 사람에게는 그러한 과정들이 결코 두렵지 않다.
* 45-46절 : 진주가 조개 안에서 자라듯이 그리스도께서는 동정마리아를 통해 태어나셨다. 조개안의 진주처럼 그리스도의 신성은 육신 안에 숨겨져 있고, 내 육신 안에도 숨겨져 있다. 좋은 진주를 찾아 나서는 장사꾼처럼 우리는 자신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진리를 찾아낼 수 있도록 헌신하며 노력해야 한다.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자는 삶의 자리로 돌아가더라도 소유물에 집착하지 않으며 내적 평화를 누리며 살아간다.
* 47-48절 : 그물은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가 들어 있는 교회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이 비유는 좋은 물고기에 속하기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하라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청하는 경고의 비유이다. 선을 위한 결단을 통해 좋은 물고기들 사이에 있게 되는 것은 그들 자신에게 달려있다. 마태오는 심판의 상징으로 벌하시는 하느님상을 우리에게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 태도의 결과를 가리키고자 할 뿐이다. 이 비유는 예수님의 말씀에 어떻게 응답하며 행동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한다.
* 49-50절 : 인간의 삶속에 감춰져 있는 악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존경과 숭배를 받고 외적으로 아무런 잘못이 없는 자라 할지라도 그의 참된 자질은 “마지막 날”에 밝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때를 아시는 분은 하느님뿐이시며 모든 사람은 이를 깊이 생각해야한다. 밭에서 보물과 값진 진주를 발견할 그리스도인들도 여기에서 예외는 아니다. 신심이라는 가면 아래 자신의 실제를 덮으려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을 찾는 또 다른 악일 수 있다. 선과 악을 가려낼 능력이 인간에게 없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그분에게 빛과 은총을 청해야 하는 것이다.
* 51-52절 :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중요한 것은 이해하는 것이다. 이제 올바fms 이해력을 받은 새로운 “율법학자”들이 생기게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과거와 철저히 관계를 끊기를 원치 않으시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일치를 원하신다. 마치 가장이 가족을 돌보며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듯 교회의 교사는 새로운 것에만 한정 될 수 없으며, 옛것과 현대적인 것을 결합시켜야 한다. 옛것은 교회의 전통 안에 실재해야 하지만, 언제나 보다 깊은 이해와 통찰력을 통해 더 나은 실현을 추구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지혜의 화신으로 모든 것 안에서 조화를 이루어 내시는 분이다.
♠ 복음 요약 : 하느님의 사랑과 그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선물들은 우리의 눈에 과연 다른 어떤 것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비쳐지고 있는가? 사랑한다는 것은 나 아닌 다른 이에게 모든 것을 내어 주는 것이다. 그럴 수 있으려면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며, 그럴 수 있는 힘과 행동은 하느님께로부터 온다. 우리의 삶이 의미 없고 힘들게 느껴지는 것은 거저 받는 그 사랑에 대한 믿음을 키우는 인내를 선택하기 보다는 더 빠른 세상의 방법에 에너지를 쏟아버리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지고의 가치가 어떤 것이지를 제대로 깨달아 보물을 캐닐 수 있기를 바라시며, 그분 사랑에 힘입어 나날이 새롭고도 희망에 찬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신다.
♠ 대화 방향 : ① 우리 인간에게 있어 최고의 가치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분의 사랑을 느끼며 살고 있습니까?
② 개인적인 체험이 있다면 나눠주시고, 그 사랑을 발견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 참고 문헌 : ▪ 예수, 구원의 스승 (분도 출판사)
▪ 영적독서를 위한 마태오 복음 (성요셉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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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 큰모임 스케치 >
큰모임 잔치, 안산의 반란
안산 원곡동 세르브스 팀 FB
서기보 권 토마 (순)
+ 찬미 예수님
7시40분 소집시간에 버스에 당도하니 거의 관광버스 안이 가득 찼다. 안산의 반란은 시작되고, 주최 측은 음식을 나눠주고 기도를 한 후에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멘트를 연거푸 해주신다. 마치 우리가 오늘 기도를 드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완전히 자매님들의 관광단이라 여길 정도였다.
성거산 입구에 도달하면서 진행자는 산에서 성모님의 형상이 보인다고 하셨다.
다른 팀이 오기 전에 안산 인솔자는 소학골로 모두를 인도해나간다.
그 사이에 서울, 전주, 인천 등에서 사람들이 도착하고, 안산 원정대가 미처 되돌아오기 전에 성서형제회의 큰모임은 시작된다.
전국조정의 오늘 모임에 대한 설명이 시작되고, 팜필로 형제님이 초창기 회원으로서 ‘큰모임’에 대한 취미 말씀을 하신다. 어느 누구보다 성서형제회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시고 애정도 많으신 분이시다. 건강이 그리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성서형제회가 이문동에서 자리 잡아가는데 큰 역할을 하고 계신다. 필자는 오랫동안 서울교구에서 몸담고 있을 때 단체를 유지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기에 그분의 열정에 감화될 뿐이라고, 그리고 그분은 상당히 감수성이 많은 분이라 여겨 본다.
그때에 안산원정대는 돌아오고, 사람들은 줄무덤으로 가서 두 그룹으로 나누어서 그곳에서 합송으로 기도/ ‘순례자의 길’을 바치고 바로 ‘십자가의 길’로 나아간다. 안산팀은 차 안에서 미리 인쇄물을 배부하였지만,
처음 하는 일인지라 대부분이 차에 놓고 내려와서 기도문을 조금 바꾸어서 교송으로 하는 대신에 주송자가 기도문을 읽으면 ‘아멘!’ 으로 응송을 하도록 했다. 호칭기도는 이곳 순교자분들의 이름을 호명하면서
저희를 위해서 빌어달라고 했다.
그리고 잠시 머문 이후에 그들은 십자가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한다. 필자는 따라가지 못하고 처음 만났던 장소로 돌아와 그곳에 남아있는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사람들이 돌아오자, 신앙체험발표 등 신앙고백이 이어지는데, 필자가 제일 먼저 발표하기로 하였지만 잠시 자리를 떠난 까닭에 원곡성당의 오 에메렌시아나(혜영) 자매님이 먼저 발표했고, 이어 필자가 신변잡기 등 그동안 살아온 얘기를 하였다. 특히 얼마 있지 않아서 안산공동체를 떠나 고향땅인 경상도로 간다는 말도 남겼다. 이어서 각 지역별로 한사람씩 나와서 그들의 체험담을 발표했다.
특히 오늘 선서를 하는 목동팀원 중 한 자매님이 나와서 신앙체험고백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준비해온 점심식사를 하였다. 삼삼오오로 나눠 앉았는데, 특히 어르신들에게 먼저 배식하도록 하였다. 함께 하는 공동식사... 역시 맛있고 풍성한 식사였다.
우리들이 식사 이후 휴식시간에 우리들이 앉은 자리에도 다른 많은 순례객들이 자리에 모여들었다. 우리들은 오후 프로그램을 아래쪽 성당으로 옮겨서 진행하기로 했기에 잠깐 동안의 휴식을 취한 후 정지풍 신부님의 강의가 진행되었다... '성서형제회의 정체성‘ 에 대한 강의였다. 또 평신도의 역할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알려줄까?‘ 하는 열정에 가득 찬 강의이자 충고이고, 미래에 대한 바람이셨다. 성서형제회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강하게 느껴졌다.
창설자 최 바오로마리아(규업) 신부님이 에쿠아도르로 떠나신 이후의 공백기에 정 신부님께서 항상 우리 곁에 머무르시면서 지금까지 성거산에서 FB 큰모임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셔왔다.
이어서 우리는 주일 파견미사를 드렸다. 미사 중에 ‘목3동 성가정 팀’ 의 세 자매님에 대한 뜻 깊은 ‘FB 입단선서식’이 있었다. 우리는 봉헌시간에 ‘개인신앙고백서’를 봉헌하고, 끝에 주최 측에서 준비한 소박한 선물을 받고 모두들 귀가했다.
저는 이글을 작성하다 보니, 여러분들에게 감사드릴 수밖에 없었다. 다만 제가 일일이 챙겨보지 못해서 자세히 서술하지 못하고 일일이 거명하지 못해 죄송할 뿐이다.
먼저 원곡동성당이 버스 한 차로 오게 하시고, 왕복 차안에서의 프로그램을 준비해주신 여러 봉사자들과, 같이 하는데 협조해주신 원곡성당 여러 교우분들께도 감사드린다...
그리고 본당행사로 인하여 바쁘신대도 불구하고 원곡 교우들을 알뜰이 살펴주시고, 돌아갈 때에 차안에서 먹을 것을 마련해주셨던 전주팀 식구들에게도 감사드리고, 외국여행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을 쪼개서 참석하여 선서하신 목3동 팀 식구들과 데레시아 수녀님께도 감사드린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기쁘게 달려오셔서 미사예물을 모두 후원금으로 내주시고 기도문카드를 주신 정 아퀼레오(지풍) 신부님께도 감사드린다.
여러 번의 계획 변경으로 우리를 쭉 지켜봐주시고 혼란되지 않고 기쁨 맘으로 ‘큰모임’ 행사를 마치게 해주신 오늘의 주인공이신 ‘성령’께 찬미와 감사와 영광을 올린다. 아멘!
끝으로 필자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이다...
가식으로 하든 진실로 하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니, 나는 그 일로 기뻐합니다. 사실 나는 앞으로도 기뻐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도움으로 이 일이 나에게는 구원으로 끝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필리비서 1,18~19)
우리는 어떤일 이든 서로 돕고 격려하고,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만일 지금 어떤 일로 인하여서 함께 하지 못하거나 나아가지 못하면서 우리가 진정으로 코이노니아를 한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픈 만큼 성숙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수난 후 부활의 영광에 이르셨듯이
우리의 고통도 그러하리라 여겨봅니다.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라는 <주님의 기도> 대로 살아가시기를 요번 큰모임을 보내면서 새로이 다짐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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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원 기고 >
성거산 성서형제회 큰모임행사(성령강림 대축일)을 마치고...
서울 당산동 산상수훈 팀 FB
안 첼리나 (선희)
* 회원은 예수 마리아의 정신인 아나윔(Anawim) - 겸손, 가난, 순명으로 살아야 한다. 또한 언제 어디서나 성서의 말씀이 사랑받고 실천되도록 온갖 노력과 기도를 다해야 한다.
* 큰모임은 회원들의 사랑의 친교를 실천하고 체험하고자 아나윔 정신을 살기 위해 하느님 말씀을 나누고 기도하는 주님 안에서의 가족 잔치이다(교본 69쪽).
성거산(聖居山)명칭의 유래는 고려 태조 왕건이 삼국 통일을 이룩하기 위하여 분주 할 때 직산면 수헐원에서 잠시 머무는 동안 동쪽 산을 바라보니, 오색구름이 영롱함을 보고 신령(神靈)이 사는 산이라 하여 거룩할 성(聖)자와 거할 거(居)를 써서 성거산이라는 명칭이 지어 주었고, 친히 이곳에 와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조선시대는 세종대왕도 이곳에 와서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천안 성거산 성지는 지리적으로 경기도와 충청북도 경계선에 자리 잡고 있는 한국의 성지 중에서도 보기 드문 해발 579미터의 차령산맥 줄기의 높은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천연(天然)성지이다. 특히 봄. 가을에는 들꽃과 단풍으로 여름과 겨울에는 울창한 숲과 환상적인 눈(雪) 경치로 장관을 이루어 찾아온 순례자들의 감탄을 자아내고 있다.
성거산 자락의 교우촌들은 1800~1920년대까지 무려 7개의 교우촌이 형성되었으며, 성거산 자락의 동쪽뜨락의 소학골 교우촌, 남서쪽 서덕골(서들골)과 병인박해이후 성거산 뜨락의 주위에 형성된, 먹방이,매일골,사리목, 석천리, 도촌, 납안리 교우촌으로 박해시기에 마을에서 살수 없었던 신자들의 이주 현상이 일어나면서 형성된 교우촌과 이 교우촌에서 사목 및 활동하셨던 선교사들, 신자들이 잡혀 순교하신 23명의 순교자와 제1줄 줄무덤, 제 2줄무덤으로 조성되어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이 이곳에 묻혀 계신다.
성거산 뜨락에서의 첫 느낌은 마을 어귀에서 강하게 풍겨오던 인분 냄새가 후각을 마비시키고 이 공간을 벗어나고픈 생각이 스치듯 지나갈 쯤 잠시 후 좁은 도로가로 펼쳐진 차 창밖의 풍경은 내면에 햇살 같은 작은 파문을 던지며, 바람결에 살랑 거리는 초록잎들의 싱그러움과 울창한 숲이 주는 편안함과 소박한 내면 풍경이 마음의 결을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 라는 말을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
또한 구불구불 올라야 하는 옛사람들의 걷기의 수고로움과 문명의 편리한 이기를 누리는 이 시간 이장소가 주는 인생의 길 위에서 차오르면 내려가야 하듯이 반복되어 성장하고, 그 속에서 감사하며, 장미의 화려함 보다는 들꽃의 소박한 삶으로 내면이 청정한 마음으로 살고 싶은 바람을 자동차의 속도감에 비례하여 느리게 음미하고 싶은 소중한 시간으로 다가왔다.
성거산 큰모임 행사에서 느꼈던 행복한 감정들은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아늑함과 이곳만이 가지고 있는 높고도 깊은 청정한 소나무의 간결하면서도 숭고함에서 느껴지는 역사성의 깊이감과 소박한 숲길로 이어지는 순교한 23명의 순교 성인들과 무명의 이름 모를 순교 성인들을 닮은 야생화 꽃의 어우러짐, 목동 조 데레사(지형) 자매님의 진솔하고 울림이 있는 간증, 여러 자매님들이 정성으로 준비하신 점심식사는 친교의 시간을 덤으로 주신 시간이었고, 햇살과 나무와 풍경이 그대로 마음속에 들어와 넓은 시야를 확보 할 수 있는 단순함의 아름다움이 그대로 전해지는 소박한 야외 성당은 낮은 데로 임하시는 겸손의 모습과 충만함이 그대로 전해지는 공간의 지혜를 엿볼 수 있었다.
또한 정 아퀼레오(지풍) 신부님의 담백하고, 진솔한, 맑은 강의는 울림으로 다가왔다.
인식, 지식 중심에서 체험중심으로 삶을 내면화 하고 높은 영성으로 나아가기 위해 체계적인 실천적인 실행 프로그램으로 성서형제회의 코이노니아는 좋은 본보기임을 강론하시며, 농번기의 모내기를 함께 하시며, 장소에 구애 받지 않고 찾아가는 소박한 미사와, 86세 할머니의 장애인 아들을 세례를 받기위해 ‘주님의 기도’ 하나라도 외우면 세례를 주겠노라고 하셔서 그 말씀에 할머니는 ‘주님의 기도’를 벽에 붙여놓고 1년 가까이 반복하게 읽어주어 아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신 할머니의 열정과 헌신, 하느님 사랑 체험으로 승화시킨 마음이 전해져 가슴이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한 순간이라도 이렇게 열정적인 순간이 있었던가?
열망과 소망을 다하여 뜨거운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간 적이 있던가?
세례 때의 초심으로 돌아가 그때 느꼈던 감정들을 실천의 밑거름으로 삶아 ‘천 톤의 생각보다 1그램의 실천이 중요하다’는 말을 가슴에 새기고 생활 속 실천의 중요함을 마음속에 되새기고 되새겨 본다.
2017.6.4일 성령 강림 대축일을 맞이하여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요한복음20.21)
성령의 은총은 진리로 이끌어 주고, 중요한 순간마다 지혜를 주시고, 정신과 육체를 치유 해주시며, 사랑으로 충만한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는 일치의 시간임을 강조하시기도 했다.
그러므로 정 신부님께서는 성령은 은은한 신자 생활 중에서 마치 겨울눈이 봄빛에 녹는 것처럼 끊임없이 줄 수 있는 사랑, 성령이 충만한 사랑,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가는 우리 삶의 여정 안에서의 은총임을 말씀하신다.
늘 신앙에 목마르고 체험에 목이 마르다.
그에 앞서 나는 얼마만큼의 넓고, 깊고, 높이로 하느님을 잘 알려고 노력 했던가?
주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을 행하며 살아가는 삶을 살려고 노력했던가?
나의 틀 안에서 경계의 선을 그어 더 이상 다가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 마음의 깊이가 너무 작았음을 안다.
힘든 이웃을 만나면 외면하는 일이 더 편하다고 생각되어 무관심 했고, 외면했던 이기심의 순간들이 많았다.
‘두려워하지 마라’ 했던 말씀을 듣지만 두려워 한 발자국도 내 디디지 않고 나이테 밖에서 맴도는 나 자신의 나약함, 신앙의 심도를 깊이 있게 반성해 본다.
하느님과 진리를 위해 생명을 바쳐 증거한 예수님과 이 땅의 순교자들과 무명의 순교자님들에게서 나는 무엇을 배우고, 그것을 통해서 삶의 긍정적인 방향을 어떤 모습으로 내면화 하고 실천할 것인가?
숙제이자 물음이고 답이자, 느낌표이다.
‘당신이 있어 비로소 행복한 세상’책에서 공지영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살아도 바람 같고, 저렇게 살아도 하룻밤의 꿈같은 거라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좀 더 다른 의미의 어떤 것 하나 남기고 갈 수 있으면 좋겠다.
“지구가 너라는 생명체를 가져서 정말 참 좋았다.” 라는 것 하나라도 좀 남기고 갈수 있으면 좋겠다고.
나 또한 그랬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2017.6.6.(현충일) 이 땅의 또 다른 영령들에게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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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봉사자 월례회합 스케치 >
병원에서 신부님과 함께 한 봉사자 월례회 모임
안산 원곡동 세르브스 팀 FB
<차기 봉사자 오 스테파노(광근)>
+ 찬미 예수님!
날씨도 좋았던 어제(6.17(토) 11:00 ~ 16:30), 6월 봉사자월례회 모임은 지도신부님께서 통원치료중인 경기도 양평군에 위치해 있는 양평국립교통재활병원 1층 로비에서 개최하였다.
신부님께서 우리 회원들과 함께하시고 싶다하셔서 마련한 자리였다. 다 아시겠지만, 신부님께서는 아직 병원치료중이시라 몸이 불편하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회원들과 같이 하시고 싶다 하셔서 이번 모임을 가지게 되었다.
많이 좋아지신 모습의 신부님을 뵙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운 느낌이다. 빨리 신부님께서 쾌차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셨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우리 모두 신부님의 쾌유를 위해 기도해주시길 빈다.
<서기보 권 토마 (순)>
필자가 속한 안산팀은 각기 6분이 두 대의 차를 이용해서 병원으로 향했다. 일찍 출발한 차는 여유있게 병원에 도착했으나, 그 시각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도착한 전주팀을 발견했다. 병원 내에 있는 기도모임에 와 있는 전주팀은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이어서 인천, 서울팀이 오고, 잠시 이후에 그 병원에 신부님이 오시고 계셨다. 신부님이 기도실에 들어서자, 모두들 반가워서 신부님께 말을 나누기 시작했는데 아직도 나를 기억하고 계셨다. 아직 걷지 못해 휠체어를 타고 오신 신부님의 몸은 불완전하고 목소리는 다소 어눌했지만, 그분의 목소리 색깔은 분명해 보였고 눈빛은 초롱한 모습이었다. 실내 형광등에 반사되는 눈동자는 너무나도 100% 검은 빛이었다.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 제 마음 속으로 훅 들어왔는데, 마치 몇 년 전의 문정동에서 처음 뵙던 그 눈빛이었다. 너무나도 보고 싶은 모습이었다. 신부님의 동생과 조카가 그분을 돌보고 계셨다.
병원입구 넓은 구석에 흩어져있는 탁자와 의자를 한곳에 모아서 우리는 전주팀에서 준비해온 점심식사를 했다. 신부님도 전주봉사자의 도움으로 식사를 했다.
식사 이후 신부님을 모시고 삼종기도와 함께 코이노니아를 가졌다. 누가 봐도 어눌한 목소리로 분명한 소리로 성호경을 그으면서 말씀하셨다. 이번 주 성체성혈대축일 복음인 요한복음 6장 51~58절을 한절씩 읽고 몇 분이 복음묵상나눔을 하였다. 필자는 과거 문정동에서 신부님과의 처음 만남과 그 이후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알아들으셨는지는 잘 기억되지 않았지만, 신부님의 엷은 미소와 또렷한 눈빛은 모두가 기억하고 있는 듯하였다. 복음묵상나눔을 끝낸 후 신부님이 직접 강복해 주셨다.
그동안 짧지 않는 시간 동안 신부님은 개인적으로 아마도 충격적인 시간이었을 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래서 아마도 전주팀을 비롯해서 우리 성서형제회원들이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동안 우리 회원들을 마치 친형제들처럼 대해주셨던 지난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주님은 이렇게 신부님과 우리를 더욱 더 강하게 묶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여름 FB연수회 일정과 이 빈첸시오(병호) 주교님 접견일정을 조율하였으나, 50주년에 대한 준비협의는 준비위원장의 불참으로 생략되었고, 다음 달 봉사자 월례회합은 서울 당산동에서 갖기로 하였다.
그리고 아직 병환 중인 신부님이시기에 서둘러서 월례모임을 끝내고서 모두들 신부님과 인사를 나누었는데, 저도 무엇인가 인사를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마치 부활하여 승천하시기 전에 예수님께 드리는 베드로의 고백이었다.
“신부님 제가 신부님을 사랑하는 줄 아시죠...?”
신부님은 웃음으로 응답하셨다. 저는 신부님께 “사랑합니다...!” 라고 하면서 얼굴을 계속 그쪽을 향했다.
저와 오랫동안 함께 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신부님은 조카의 도움을 받아서 가까운 집으로 돌아가셨고, 다른 회원들도 서둘러서 돌아갔다.
전주팀과는 함께 안산으로 돌아오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제2의 코이노니아였고, 여러 가지 표현이 부족했던 나눔도 가졌다. 전주의 세 천사들은 주님의 뜻에 따라 1시간 늦은 6시30분 버스로 떠나셨다.
주님의 놀라운 은총으로 우리들의 고백을 했던 오늘의 기억은 아마도 주님이 배려하셨던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기억은 우리들에게 오랫동안 남아 있으리라 여기고, 신부님이 겨울 FB묵상회 때에는 종전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셨으면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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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I 재정 회계 보고 >
☧ 매월 FB본부로 보내주시는 의연금은 본당별로 보내지 말고, 각 팀별로 회계 정산하시어,
금액이 크든 적든 매월 꾸준히 보내주셔야 합니다.…….
✟ 2017년 5월 입출금 내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