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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사도행전 1:6-8
제목: 이중 국적
일시: 2018. 6. 3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독일 말 가운데 가장 많이 하고 잘하는 표현 몇 가지 중에 하나가 있다면 Ich komme aus Korea 일 것이다. 나의 아덴티티를 밝힐 수 있는 가장 좋고 분명한 것이 국적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나를 남자냐 여자냐? 싱글이냐 기혼이냐? 학생이냐 일하는 사람이냐? 예수 믿는 사람이냐 안 믿는 사람이냐 등으로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나라 사람인가를 가장 궁금해 한다. 공항을 통과하든 관공서를 가든 자신을 증명하는 신분증을 가져가는데 가장 분명한 것은 국적이 담긴 패스포트이다. 국적이 어디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라고 하는 존재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나를 통해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알게 되는 것이다.
II. 국적은 그 사람의 정체성(Identity)을 말해주는 것이다. 한국 사람이면 한국어를 하고 한국문화를 알고 한국의 역사도 알아야 한다. 또한 대한민국국민이라고 할 때 외국 사람들은 북한 김정은과 미국 트럼프대통령의 정상회담도 관심을 가지고 한국인인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물어볼 것이다. 우리의 국적이 한국일 때 외국인들은 우리의 이덴티티를 그렇게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폴크혹스슐레에서 공부할 때 아프리카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몰라도 프랑스어를 잘 한다. 그때 선생님이 당신나라의 공식어가 뭐냐고 하니 불어라는 것이다. 프랑스 식민지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선생님이 묻는다. 그러면 당신의 Muttersprach가 있느냐? 그 말을 할 수 있느냐?라고 물었을 때 있기는 한데 자신은 하지 못한다고 했다. 불어를 하니 우아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측은하고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자신의 정체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이곳에 사는 교회가족들도 아이들에게 정체성의 혼돈을 주지 않기 위해서 한국적인 교육도 시킨다. 악수나 손흔드는 할로우를 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에게 꼭 배꼽인사를 하도록 시킨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한국문화와 한국 언어 한국의 역사를 소개해주고 교육을 한다. 그리고 한국에도 방문하여 한국을 익숙하게 해 준다.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하는 부모들의 노력이다. 국적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갖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국가가 없으면 나를 소개할 수도 없고 국제미아와 같이 잃어버린 자로 남을 것이다. 국제고아와 같이 아무도 돌보지 않을 것이다.
히틀러가 홀로코스트만행을 저지르면서 없애고자 한 부류의 사람들이 다섯 가지이다. 장애인들(장애인들에게 잘해주고 있다), 동성애자들(합법화시켰다), 공산주의자들(공산당도 있지 않는가?), 집시들, 그리고 유대인들이다. 그런데 끝의 두 부류 즉 집시들과 유대인들 가운데 집시에게는 보상이 없고 오직 유대인들에게 잘 보상하고 있다. 왜 그런가? 나라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시들은 전 유럽에 흩어져 있으면서 나라가 없고 각 나라에 흡수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곳에서 인정을 받고 살아가는 것도 아니요 최소한의 거처를 받고 있을 뿐이다. 자기에 대한 자긍심이나 정체성은 희박하다.
주님의 제자들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정체성의 회복이 필요했던 것이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통치아래 있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히브리인이지 로마인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로마의 압제 하에 있었던 유대인들은 언젠가 메시야가 나타나 유다의 왕으로 통치해 주기를 학수고대했다. 어느 정도까지 힘들었는가? 만일 로마 군인이 가만히 길가는 사람 불러다가 “야 너 이거 들고 오리를 가자”라고 하면 가야만 했다. 그 지역 분봉왕에게 세금을 바칠 뿐 아니라 로마황제에게까지 조공이 올라 가야 하니 과중한 세금에 눌리면서 살았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의식 속에 세리들은 로마에 빌붙어 먹는 앞잡이로 생각했다. 메시야가 나와서 왕이 되어 이스라엘 나라를 재건해 주기를 바랬다. 그래서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아와 임금 삼으려고 했다. 심지어 주님의 제자들인 야고보와 요한의 어미는 예수님께 나아와 주의 나라가 세워질 때 하나는 좌에 다른 하나는 우측에 앉혀달라고 선거운동까지 했다. 주님의 나라를 독립 유대로 생각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희망을 걸었다. 주님이 태어나실 때도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셨고 행하시는 삶도 왕이 되실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으실 때도 유대인의 왕으로 죽으셨기에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결국 주님은 못 다 핀 꽃과 같이 십자가에서 꺽여진 유대인의 왕일 뿐이었다. 로마의 사형방법인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실 때, 그 십자가의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씌여졌다. 그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회복하게 해 줄 메시야로 기대하고 있던 사람들은 얼마나 실망했었을까? 그런데 그런 주님이 부활하셨으니 제자들은 부활한 주님을 보고 그렇게 고대하던 이스라엘의 회복의 때가 이제 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라고 묻는다. 제자들은 애국자들이었다. 히브리민족으로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기를 원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하고 있다.
III.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동문서답하고 계신다.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 묻는데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서로 언급하고 있는 나라가 다르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여전히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 관심이 있었지만 다시 부활하셔서 그들 앞에 나타난 주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시고 있다. 사람이 한번 태어나는 것은 Born 한 것이다. 그때 우리는 어느 나라 국민으로 태어나고 정체가 결정이 된다.
그런데 다시 태어나게 될 때(Born-again) 우리는 어느 나라에 속하게 되는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사역초기에 이미 그러한 천국국적을 계획하고 계셨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을 때 “네 말이 옳도다”라고 했다. 그때 빌라도는 네가 유대의 독립을 위해서 투쟁하고 있느냐를 물은 것이었지만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했다. 이 최후 변론에 대해 빌라도는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을 로마의 법에 따라 십자가에서 달리는 사형을 재가한다. 하지만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독립투쟁의 역모에 따른 벌이 아니라 죄를 사하시기 위한 사망과 율법과의 싸움이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영적인 싸움이었던 것이다.
제자들의 정체성은 이제 새로운 국적으로 결정이 된다. 그 국적을 따는 방법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 안에 있음으로이다. 국적을 따는 방법은 나라마다 다르지만 하늘 나라의 국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라고 하는 영혼의 산실에서 Born-again 하게 해 주실 때 딸 수 있는 국적이다. 우리의 정체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갖게 되는 것이다.
사람을 구분할 때는 그 기준이 있다. 사람을 황인 백인 흑인으로 구분을 하면 피부색갈로 사람을 구분하는 것이다. 한국이냐 독일이냐 미국이냐 러시아냐? 패스포트를 가지고 결정을 한다. 선진국이니 후진국이니 혹은 잘 사네 못사네 하는 구분은 돈과 물질로 구분하는 것이다. 무식하고 유식하고 배우고 못 배우고로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학위를 가지고 구분하는 것이다. 잘생기고 못생기고? 미모를 가지고 한다. 어느 도시 어느 지역 출신임을 가지고 선을 그을 때는 지역을 가지고 사람을 구분하는 것이다.
원래 이러한 선은 없었는데 인간이 만들어 버린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실 때는 반목과 갈등을 일으키는 그러한 구분이 없었다. 오직 세움과 조화와 질서가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죄와 욕망이 구분짓는 선들을 만들어 내었다. 이러한 경계선들은 서로 간에 갈등을 일으킨다. 국경을 통과할 때는 언제나 긴장되지 않는가? 무슨 꼬뚜리를 잡거나 혹 거부당하면 어떻게 하지 등 너네 나라와 우리나라 사이에 갈등이 첨예하게 존재하는 곳이 국경이다. 대한민국의 휴전선은 언제나 우리에게 긴장을 준다. 비행기를 탈 때 팔걸이가 네 것이냐 내 것이냐? 어릴 때 책상에 선을 긋고 넘어오면 찢는다고 위협하는 개구쟁이들도 있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기의 기준과 생각으로 선을 긋고 경계선을 가지고 있다. 자기의 욕망과 권리와 이익을 위해서 그 경계선을 철통같이 사수하고 있다. 결코 양보하지 못하는 이러한 경계선에는 언제나 갈등이 있다.
사람들의 구분선은 갈등과 반목을 가져오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유일한 선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이다. 그 안에서는 인종도, 땅의 국적도, 지식의 유무나 재물의 다소도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우리를 구분 짓거나 정체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신분증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정체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주민등록증뿐 아니라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된 이중국적의 소유자이다. 이 땅에서 우리의 국적이 다를 수 있다. 권사님과 김기숙집사님은 한국 사람이면서 독일국적, 청송형제는 한국사람이면서 중국국적, 다른 지체들은 한국사람이자 한국국적, 저는 5년 동안 독일암트에서는 인민민주주의공화국Nord-Korea국적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장기체류를 받을 때 국적 변경하여 남한사람으로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궁극적인 국적은 하늘나라이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께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라고 묻지만 주님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신다. 이제 땅의 나라들 사이에 있던 경계선이 없어진 것이다. 유대와 사마리아 사람들은 상종치 아니했다. 그러나 그 선이 허물어진 것이다. 그리고 유대 땅을 지나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이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한 일은 성령께서 하신 소통의 역사인 것이다. 이제 사도행전은 오순절 성령의 소통케 하심으로 시작하여 사도들이 복음을 소통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도였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0). 하나님의 나라가 이곳에도 머물러 있는 것이다. 올 한해의 주제가 무엇인가? “신앙생활 하십니까?”이다. 올 전반기의 마지막 달을 보내면서 다시 한번 기억할 수 있기 바란다. 하늘 신앙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요 그렇다고 땅의 생활에만 집착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의 것이 우리의 삶으로 표현되어야 하고 우리의 삶이 하늘의 것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IV. 6월은 특별히 조국을 기억하고 기도해야 하는 달이다. 6월 6일 현충일이 있다. 625라는 민족전쟁이 있었다. 그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휴전 상태이다. 하지만 요즈음 남북 분위기가 무척 좋다. 종전 선언을 하자고 말하고 있고 비핵화를 말하고 있다. 북미회담이 다음 주에 있을 것이라고 한다. 세계인들이 대한민국 한반도를 지켜보고 있다. 육신을 입고 있는 한,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라. 대한민국국민으로서 긍지를 가져야 한다. 있는 곳에서 국위를 선양하라. 다음주부터 월드컵이 열린다. 한국과 독일을 응원한다. 누가 이겨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대한민국국민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인 것이다. 우리는 천국파스를 가지고 있는 이중국적자이다. 천국파스를 가지고 이곳에 나와 있는 우리는 특별한 미션을 띄고 있는 것이다. 선을 자꾸 만들어가며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경계선을 넘어 땅 끝까지 이르러 하늘나라의 증인이 되라. 주님의 명예를 걸고 살아가라. 태극마크를 달고 운동장에서 뛰는 선수와 같이 하늘나라마크를 내 가슴에 달고 삶의 경기를 풀어나가라. 나를 위해 순국하는 애국지사와 같이 하늘 나라를 위해 순교하는 천국시민으로 신앙생활하는 지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