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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국은 자력에 의해 식민지 상태에서 해방되지를 못했습니다. 2차 세계전쟁에 승리한 연합국에 의해서 조국은 해방되고, 그들의 합의에 의해서 38선을 기준으로 남북의 선이 그어지고 6.25사변을 통해서 오도가도 못하는 국경선이 되었습니다.
세상이 변하여 세계 곳곳을 자유자재로 여행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유독 강 건너 북한 땅의 고향 산천, 부모형제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반 세기를 넘어 이제 한 세기가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남북한 분단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서로 서로가 양보하고, 손해를 보는 가운데도 평화적인 화합, 나아가 통일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 세대에 그런 날이 와서 북한 여행을 해보겠습니까?
우리의 조국은 38선이라는 경계선을 통해서 한반도가 반 토막 나고 구분이 됩니다. 우리 인생의(우리 삶) 경계선, 38선은 없을까요? 오늘본문에 의하면 믿음이 오기 전과 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믿음이 오기 전에’(23) 우리 인생은 율법에 매여 갇혀 있고, 율법이 우리의 몽학선생이 되었다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믿음이 온 후에’는 우리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말씀에 따라서 우리에게 믿음이 온 후에는 어떤 변화가 왔으며,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었으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온 후에 어떤 사람이 되었습니까?
1. 우리는 믿음이 온 후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25)
믿음이 오기 전에는 율법 아래서 매여서 연연하는 자였습니다. 율법이 몽학선생이 되어서 지시를 받아서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오기 전에는 어떻게 하면 율법을 범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을까를 염려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몽학선생이 되어 이렇게 저렇게 지시하고 통제를 받아야 했습니다.
며칠 전에 ‘서울의 봄’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하고 난 후에 신군부 세력, 전두환 장군을 중심으로 쿠데타과정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후에 군부가 세력을 잡고, 정의사회구현, 사회정화사업을 하면서 사회악의 요소를 정화한다는 미명 하에 조폭이나 불량배를 잡아드리고 삼청교육대에서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 시절에는 정말 살벌했습니다. 정치 이야기나 신군부에 반대하는 발언을 했다 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갔습니다. 억울하게 삼청교육대에서 인권을 유린당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대나 전두환 대통령 시대에 긴급조치법이나 계엄령이라는 비상사태의 법 때문에 우리의 부모나 선배 세대는 억압을 많이 받았습니다. 자율이나 자치보다는 법과 조직 그리고 무력에 의해 사회와 국가가 통치되는 시대였습니다.
법이 통치할 때는 지도자는 자비롭고 선한 이미지보다는 독재자와 핍박자의 이미지가 강하게 드러납니다.
믿음이 오기 전, 율법에 의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졌기에 인간에게 그려지는 하나님의 형상은 아무래도 진노와 심판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믿음이 온 이후로는 우리가 어떻게 됩니까?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26)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하니,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아버지이십니다.
어떤 아버지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놓으셨습니다. 독생자 예수님은 우리 죄의 속죄양이 되셔서 살 찢고 피 흘려 속죄의 보혈을 흘려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더 이상 진노와 심판의 하나님이 아니라 용납과 용서를 해주시는 자애로우신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믿는 자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된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27)
그리스도와 합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와 합한 사람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바로 영적인 세례입니다. 이 사건은 동시적으로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리스도와 합하는 것이요,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지상의 교회에서는 그것을 확인하고 증명하는 차원에서 물세례 - 세례의식을 가집니다.
그리스도와 합하여 영적인 세례를 받은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합당한 옷을 입히십니다. 바로 ‘그리스도로 옷’ 입힙니다.
여기서 ‘옷’이라는 본래 의미는 로마 사람들이 16세 이상 성인식을 치루고 나면 어른이 입는 옷을 입게 됩니다. 바로 토가 비리티스(Toga Virilis)입니다.
우리가 로마제국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생각해 보십시오. 대략 3.5 미터에서 6 미터 사이 길이의 반원형 옷감을 어깨와 몸 주변으로 걸쳐서 입는 그런 옷입니다. 이 옷을 입으므로 의젓한 로마시민이 되고 형세를 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하나님의 자녀에게도 거기에 합당한 옷이 바로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다움의 표징이요, 나타남(드러냄) 입니다.
우리가 옷을 입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옷을 입는다는 것은 내가 옷을 입는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우리 몸이 옷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말은 우리가 우리의 옷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 삶의 근원이요, 동력이요, 생명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우리가 찬송하듯이 살아갈 것입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죄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주님을 찬양하면서 …..”
2. 우리는 믿음이 온 후로 우리는 다 하나가 되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28)
예수님을 고백하고 믿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온 결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우리를 구별하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민족적인) 차별이 없습니다. 모든 나라, 인종, 피부색, 언어 등을 초월하여 믿음 안에서 하나입니다.
저는 뉴질랜드에 와서 후회되는 일이 하나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코클베이 스쿨의 강당을 빌려서 예배를 드릴 때입니다. 그때에 우리가 11시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9시 30분에 가서 의자와 음향시설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용하는 앞 시간에 섬나라 사람들의 교회가 와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8시 정도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데, 예배가 길어지면 9시 30분을 초과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못마땅하였습니다. 싫었습니다.
그들은 파파토에토에에 지역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임대료가 비싸서 호윅지역까지 와서 이른 아침에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몇 개월을 예배드리다가 없어졌습니다.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때를 생각하면 참 미안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만 생각했습니다. 섬나라 사람들의 교회는 남의 교회였습니다. 그들이 믿음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요, 그들의 교회와 우리 교회는 한 하나님을 모신 하나의 교회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더 넓은 마음으로 예배 시간을 조정하고, 그들이 약하면 우리의 것을 나눌 수 있어야 했습니다. 저는 그때를 생각하면 참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을 가집니다. 믿음으로 행동하지 못했습니다.
믿음이 오면 종이나 자주자의 구별(신분의 차이)도 없어집니다.
우리 모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아담 안에서 다 죄인,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 의인,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다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왜 교회 안에서, 분열과 당파가 일어나는 줄 아십니까? 오직 은혜로, 믿음으로 칭의 진리를 깊이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혹은 이 진리에 대한 무지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는 너 보다 낫다, 신분적으로, 경제적으로 높다’ 생각하면, 분열이 발생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자기가 잘나서 그렇고, 너는 못나서 그렇다는 생각입니다. 은혜는 겸손하게 합니다.
복음은 ‘남자나 여자의 차별’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합니다. 유대 사회나 고대사회에서는 동서고금을 떠나서 여성을 멸시와 학대를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는 그 차별이 없어지고 여권신장이 일어나고 하나되는 역사가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시대의 흐름을 보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신분에서 동등하나 역할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복음은 인종적, 신분적, 성적(남녀) 차이로 인해 서로 멸시하지도, 얕보지도 않으며, 누군가를 더 우대하지도 않고 업신여기지도 않는, 평등한 공동체를 이루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형입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타고난 피부 색깔이 하나로 통일되지 않습니다. 여전히 백인 흑인 황색인으로 살아갑니다.
믿음이 오므로 여자와 남자가 하나가 된다고 해서 여자가 남자가 되고, 남자가 여자가 되고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남성과 여성의 구분은 분명합니다.
이렇게 형성된 성별이나 인종이나 신분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러한 구별이 우리의 사귐에 전혀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는 빌레몬서에서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있을 때에 오네시모라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 사람은 빌레몬의 집에서 도망 나온 노예였습니다. 그 당시 로마법에는 신분 차이가 엄청났습니다. 노예가 도주하면 주인이 그 노예를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게 된 오네시모를 빌레몬의 집에 다시 돌려보내면서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사랑의 편지를 씁니다.
“빌레몬이여, 이 사람을 받아 주시오, 그러나 옛날처럼 종으로 받아주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오네시모도 예수님 때문에 당신의 형제가 되었으니 형제로서 받아주시오”
도망친 노예를 형제로 받아달라는 사랑의 편지가 빌레몬서입니다. 오네시모와 빌레몬의 신분의 벽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허물어버렸습니다. 신분의 벽을 허무는 것은 법과 제도 이전에 복음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All one person우리는 하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서로를 이해하고 섬기고 사랑하기에 합당한 사람들입니다.
믿음이 온 이후로 우리는 어떤 자가 되었을까요?
3. 우리는 믿음이 온 이후로 그리스도의 유업을 이을 자가 되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29)
우리에게 믿음이 온 이후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란 어떤 사람입니까? 그리스도의 것, 그리스도의 소유가 된 사람을 말합니다.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자신의 소유권을 그리스도께 맡긴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자기가 자기 것이 아닙니다. 내 것이 내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19장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습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내 소유’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로 세귤라(segullah)입니다. 이 말의 뜻은 ‘소유’ 혹은 ‘보배’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배가 됩니다. 단순한 소유물,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냥 그런 존재가 아니라, 없어서는 안되는, 너무나 복되고 값진 존재, 그리스도의 보배가 됩니다.
그런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 우상을 만들며 살아가는 그저 그런 아브람을 선택하여 부르십니다. 아비 친척 집을 떠나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길은 정처 없은 방랑자의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걸음을 걷는 자가 되었습니다. 길 잃은 표류의 걸음이 아니라 믿음의 자손을 얻고 하나님의 백성과 그 나라를 세우는 분명한 목적이 있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소유가 된 자는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그 약속을 유업을 이어갈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의 대를 이어갈 것입니다. 비록 무명한 사람으로 살아갈지라도 하나님께서 약속의 유업을 이어가게 축복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믿음이 온 후에 여러분은 어떤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가십니까? 간증입니다. 간증을 해 보십시오. 어렵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 보십시오.
첫번째로, 믿음이 오기 전에 나는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고백하십시오.
두번째로, 나에게 어떻게 믿음이 들어왔는지, 내가 어떻게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신 이인 예수님을 만났는지를 설명하십시오.
마지막 세번째로, 믿음이 온 후에 나는 어떻게 변했는지를 말해 보십시오.
믿음이 온 후로 내 인생의 높이와 넓이와 길이가 어떻게 변했는지 설명하십시오. 오늘 말씀을 근거해서 한 번 해 보십시오.
나는 믿음으로 우주의 창조자요, 주권자 되신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 지고 하나님의 자녀로 높아진 위상을 말하십시오.
나는 믿음으로 세상에 인종과 신분의 장벽을 넘어 흩어진 많은 형제와 자매를 가진,폭 넓은 삶을 이야기 하십시오.
나는 믿음으로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약속의 유업을 이어받고 이어가는 영원을 사모하는 인생 임을 증거해 보십시오.
그래서 믿음이 나에게 온 후로 나는 너무나도 소중한 존재이고, 나의 삶은 너무나도 위대하고, 나의 매일 매일은 너무나도 행복하고 감사합니다고 ….
믿음이 온 이후로 이런 간증이 있는 여러분과 저의 간증이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