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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 안드레아
2010년 9월 22일 수요일 한가위 오늘은 추석 명절입니다. 옛날부터 한 해의 수확에 감사드리는 날이었습니다. 하늘의 도움 없이는 풍성한 결실을 거둘 수 없기에 이런 명절이 생겨났습니다. 우리의 가정을 새롭게 축복해 주시고 우리가 하는 일에도 은총을 내려 주시기를 청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앞서 가신 조상님들과 부모 형제, 은인들의 영혼을 기억하며 미사를 봉헌합시다.
말씀의 초대 ☆☆☆ 제1독서 요엘 예언서. 2,22-24.26ㄱㄴㄷ 제2독서 요한 묵시록. 14,13-16 복음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5-21
☆☆☆ 오늘의 묵상 ☆☆☆
잘 사는 것과 ‘잘 못 사는 것’의 구분은 어렵습니다. 재물이 많고 지위가 높다고 잘 사는 것은 아닙니다. 성공한 삶이 될지는 몰라도, ‘잘 사는 것’과는 구분됩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대개는 잘 못 산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신앙인은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때 진정 ‘잘 사는’ 삶이 됩니다. 주님께서 그의 삶을 책임져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엘 예언자는 하느님의 섭리에 따른 땅의 풍요로움을 노래한다. 그는, 하느님께서는 정의에 따라 가을비와 봄비를 내려 주시고, 모든 햇곡식에 기름이 넘쳐흐르게 하신다고 말한다(제1독서). 천사는 하느님께 “낫을 대어 수확을 시작하십시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왔습니다.”라고 외친다. 세상의 종말은 곧, 하느님께서 낫을 휘두르시어 땅의 곡식을 수확하시는 것과 같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탐욕을 경계하라고 하신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재산에 모든 것을 거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이다. 재산은 결국 없어지고 마는 것이기에, 모든 것을 내시고 또 거두시는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의탁할 줄 아는 이가 곧 지혜로운 사람이다(복음).
22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마라. 광야의 풀밭이 푸르고,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도 풍성한 결실을 내리라.
23 시온의 자손들아, 주 너희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여라. 주님이 너희에게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 주었다. 주님은 너희에게 비를 쏟아 준다. 이전처럼 가을비와 봄비를 쏟아 준다. 24 타작마당은 곡식으로 가득하고, 확마다 햇포도주와 햇기름이 넘쳐흐르리라.
26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13 나 요한은,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이들은 행복하다.’고 기록하여라.” 하고 하늘에서 울려오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그들은 고생 끝에 이제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14 내가 또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그 구름 위에는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 앉아 계셨는데, 머리에는 금관을 쓰고 손에는 날카로운 낫을 들고 계셨습니다.
15 또 다른 천사가 성전에서 나와, 구름 위에 앉아 계신 분께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낫을 대어 수확을 시작하십시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왔습니다.” 16 그러자 구름 위에 앉아 계신 분이 땅 위로 낫을 휘두르시어, 땅의 곡식을 수확하셨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15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1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17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18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19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20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21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우리 민족의 명절인 한가위는 멀리 신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음력 7월 보름부터 서라벌 여인들이 편을 갈라서 길쌈놀이를 하다가 8월 대보름이 되면, 길쌈을 거두어 서로 견주어 승자와 패자를 가름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날은 승자도 패자도, 모두 서로의 노고를 칭찬하면서 축제를 지냈다고 합니다. 이날의 절정은 동산 위에 크고 둥근 달이 떠오를 무렵, 임금이 문무백관들과 백성을 한자리에 불러 놓고 천지신명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위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제사 음식을 골고루 나누면서, 한편으로는 천지신명께 감사를 드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상의 은덕을 기렸다고 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맨 먼저 천지신명이신 하느님께 감사의 제사를 올렸고, 그다음으로 선조에게 감사를 드렸으며, 마지막으로 형제자매들이 서로 함께 기쁨의 축제를 보냈던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세월이 흐를수록 이러한 미풍양속은 점차 사라져 가고, 오늘날에는 개인주의와 못된 탐욕만이 남아 있는 것 같아 씁쓸해집니다. 조상 제사라는 의무감에만 사로잡히지 말고, 오늘 하루만이라도 일가친지들과 주변의 이웃들과 서로 기쁨과 생활을 나누는 시간을 만들어 봅시다.
복음에 나오는 부자는 물질적으로 풍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영혼은 메말라 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삶이란 재물을 모으는 일이 전부였습니다. 육체는 할 일이 많았지만, 영혼은 억눌려 지내야 했습니다. ‘영과 육의 균형’이 맞을 리 없습니다. 결과는 불안과 허무입니다. 영혼이 보내는 ‘목마름’의 신호인 것이지요.
잘 사는 삶이란 ‘감사드리는 삶’입니다. 감사의 시각으로 보면 ‘어느 것 하나’ 고맙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반드시 축복이 돌아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쉽게 불평의 유혹에 넘어갑니다. 잘 살고 있으면서도, ‘다른 이’와 비교해 ‘못 산다’고 생각합니다. 잘생긴 용모인데도, ‘어느 누구’와 비교해 못생겼다고 판단합니다. 상대적 빈곤감입니다. 비교함으로써 ‘스스로’ 가난해지는 모습입니다.
감사드리는 생활을 하면 자신도 모르게 극복됩니다. 그러기에 옛사람들은 추석 명절을 만들어 억지로라도 감사드리게 했습니다. 감사만이 하늘의 기운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 것, 자유의 첫걸음 - 이요한 신부- 한때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의 관심은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식 · 부동산 등 재테크에 관한 책들이 서점에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요. 왜 모두들 부자가 되고 싶은 것일까요? 삶의 여유와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삶의 진정한 자유는 버림에서 시작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으로 가득 채우기 위해서 비우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이 이루신 것! -김찬선신부- 명절이 대개 그러하지만
풍요와 감사 -전삼용신부- 오늘은 즐거운 추석입니다. 추석은 외국으로 말하면 추수감사절 정도가 될 것입니다. 특별히 이렇게 모든 것이 풍성할 때 조상들에게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하는 것은 참 좋은 전통 같습니다. 모든 것이 풍성할 때 그 소출들의 가장 좋은 것들을 조상에게 먼저 차례 상에 올려 드리는 것은 아마도 이 모든 축복이 자신의 노력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며 조상께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 느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오는 모든 것들이 조상들 덕이 아니라 하느님의 덕임을 믿는 신앙인들입니다. 따라서 신앙인들에게 한가위란, 하느님께 감사하고 그 감사하는 마음으로 서로 가진 것을 나누는 감사와 풍요의 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서로 나누지 못하는 마음은 모든 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그런 마음 때문에 지구상에 극빈자가 3분의 1이나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세상에 돌고 있는 재화나 식량은 세상 모든 인구들이 충분히 먹고도 남는 양인데 나누지 못하는 마음 때문에 굶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는 수확을 많이 올려 곡간을 늘려야 할 정도가 되었지만 바로 그 날 밤에 하느님께서 그를 불러 가십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그만큼 부자가 되게 해 주셨지만 그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잊고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부자가 다 일찍 죽는다는 말씀을 하시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꼭 쥐고 있는 손을 좀 풀어서 이웃과 나눌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적어도 오늘만은 실천해보자는 의미에서 이 복음을 한가위 복음으로 넣었을 것입니다. 제가 첫 영성체 받을 때 교리를 가르쳐주시던 수녀님이 하늘나라에는 우리 각자의 이름이 쓰인 창고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좋은 일을 많이 하면 그 창고에 돈이 쌓여 나중에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되면 그 재산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원히 살아야 할 하늘나라에서 부자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토마사도의 이야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인도에서 전교를 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인도의 어떤 왕은 매우 부강하여 자신을 위한 큰 왕궁을 짓기를 원했고 기술자를 찾기 위해서 이스라엘 쪽으로 사신을 보냈습니다. 이 사실을 계시로 알고 있던 토마사도는 그 사신에게 자신이 훌륭한 건축가임을 말하고 그를 따라갔습니다. 그 큰 건물을 짓겠다는 그의 담대함에 놀란 왕은 궁전 지을 비용으로 많은 양의 금을 주고 자신은 2년 동안 다른 곳에서 살았습니다. 토마는 금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선교를 계속했습니다. 2년이 지난 뒤 왕이 귀국하여 이 상황을 알자 곧 토마를 잡아 가두고 어떻게 고통스럽게 죽일까 생각하다가 생가죽을 벗기고 화형을 시키기로 하였습니다. 그 때 왕의 동생이 죽었다가 나흘이 지난 뒤에 살아난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형에게 자신이 죽어서 겪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늘나라에 가 보았더니 이 세상에서는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궁전이 하나 있더라고 합니다. 그는 그 궁전의 문지기라도 하면 좋겠다고 함께 있던 천사에게 말을 했습니다. 천사는 이 궁전은 토마사도가 당신의 형을 위해서 지어놓은 것인데 그는 여기에 살 자격이 없으니 원한다면 다시 살려줄 테니 형에게 그 돈을 갚고 영원히 그 궁전을 차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왕은 토마사도에게 회개하고 값비싼 옷을 입으라고 내어 놓았습니다. 토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모릅니까? 하늘에서 영광을 얻기를 원하는 사람은 육신이나 현세에 관계되는 것은 무엇 하나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쉰들러는 자신의 재산을 잘 사용할 줄 안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으로 가스실에서 죽어야 할 유태인들을 빼냈습니다. 이 영화의 명장면은 나중에 생명을 구한 사람들이 앞에 앉아있는데 자신의 차와 시계와 반지 등을 팔지 못한 것을 크게 후회하는 장면입니다. 그것들을 팔았으면 10명은 더 구해낼 수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늘나라에 큰 보화를 쌓은 것입니다. 도울 수 있는데 돕지 못하는 것도 죄가 됩니다. 우리 옆에서 배고파 쓰러져가는 사람이 있는데 모른 척 하였다면 선행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악행을 한 것입니다.
물질에 집착하는 것이 부자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2주 동안 행려자들 무료급식소에서 봉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분들은 툭하면 싸우시는데 그 원인이 아주 사소한 것들입니다. 한 번은 다른 행려자분이 한 행려자분의 신문지를 집어가서 크게 싸움이 났었습니다. 왜냐하면 신문지가 그들에게는 유일한 이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잃어버린 분은 많은 신문지를 더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많은 가운데서 하나를 잃어버렸다고 다른 사람을 그렇게 심하게 나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못살아서 더 집착하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그렇게 집착하기 때문에 더 못살게 되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던져보았습니다. 아담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카인과 아벨이었습니다. 카인은 농부였고 아벨은 목축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아벨의 제물은 즐겨 받으셨고 카인의 제물은 즐기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봉헌’엔 ‘감사’의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그 감사의 마음을 아벨은 지니고 있었고 카인은 지니지 못했던 것뿐입니다. 감사하지 못하니, 추수 때가 되면 카인은 먹지 못해서 버려야 할 것들을 하느님께 바쳤고 아벨은 작은 것에도 감사하니 남들이 보기에도 가장 아까운 살찐 짐승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결국 하느님은 예뻐 보이는 아벨을 더 축복해 주셔서 재물을 더 풍족하게 해 주셨고 카인은 시간이 갈수록 흉년만 들게 되어 더 가난해졌습니다. 누구라도 더 감사한 마음을 갖는 사람에게 더 많이 주고 싶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왜 물질에 집착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교만의 원죄 때문입니다. 하와는 눈이 밝아져 “하느님과 같아질 수 있다”는 뱀의 유혹에 빠져 죄를 짓게 됩니다. 아담도 다른 모든 것은 먹어도 된다고 허락되었지만 굳이 먹지 말라고 한 것까지 먹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조금이라도 당신 것을 떼어 놓으라고 하시며 ‘모든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해 주셨습니다. 인간은 그 영역까지도 침범함으로써 모든 것이 자기 것인 양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입으로는 ‘주님, 주님!’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이 모든 것의 주(인)님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의 주인이신데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인간이 ‘이것도 내 것, 저것도 내 것’ 하며 하느님 행세를 하게 되는 것이 교만의 원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내 여자!’라고 하지만 사람은 사람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내 아이!’라고 하지만 부모님은 아이의 머리카락 하나도 만들지 않았습니다. ‘내 집!’이라고 하지만 죽으면 다른 사람이 들어 와 살게 될 것입니다. ‘내 돈!’이라고 모두가 돈을 움켜쥐고 있으면 경제는 망하고 맙니다. 돈은 피와 같아서 순환해야 하는데 꼭 쥐고 풀지 않으면 나도 죽고 다른 사람들도 죽게 만듭니다. 물이 들어와 빠져나가지 않아 죽은 바다가 되어버린 사해를 생각하면 집착이 자신도 주위 사람도 죽인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내 목숨!’ 누가 나에게 생명을 주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누군가가 나에게 생명을 주지 않았다면 내가 어떻게 태어났겠습니까? 그런데도 내 목숨이니 내 맘대로 할 수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원초적인 소유욕에서 벗어나야합니다. 어떤 가난한 집에서 살다가 부잣집으로 시집 간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그 자매님은 부자처럼 보이려고 온갖 보석이며 옷을 사고 걸치고 다녔습니다. 보다 못한 시어머니께서 며느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얘야, 네가 왜 부자로 보이려고 하는지 잘 모르겠다. 이미 우린 부자란다. 남들은 네가 가짜 다이아를 하고 가짜 밍크를 걸쳐도 다 진짜라고 믿는단다.” 그렇습니다. 우린 어쩌면 꼭 필요해서가 아니라 남들과 비교해서 더 돈 많은 것처럼 보이려고 돈을 모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상속을 약속받은 부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걱정은 오늘 하고 내일 걱정은 내일 하라고 하시며 필요한 만큼 채워줄 터이니 돈 걱정 하지 말고 살라고 가르치십니다. 나에게 있는 아주 작은 것부터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기 시작합시다. 그러면 부족한 가운데서도 나눌 줄 알게 되고 그렇게 나눌 줄 아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는 되로 흔들어서 가득 채워주실 것입니다. 자신에게 있는 재물을 잘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 보름달처럼 꽉 찬 신앙인일 것입니다. 감사와 나눔의 한가위가 되시길 빕니다. ^ ^*
새벽을 열며 금을 귀중하게 여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반짝반짝 빛나서? 아니면 사람들이 금을 좋아하니까? 색깔 때문에 귀하게 여기는 것도 아니며,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이유만도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금보다도 예쁜 색깔이 많으며, 그 색깔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 꼭 귀한 것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꼭 귀한 것도 아닙니다. 저는 라면을 무척 좋아합니다. 그런데 라면을 좋아한다고 해서 ‘라면이 귀하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빠다킹신부 죽음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양승국신부- 연초에 한 가정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는 중이었는데, 문간 방 안에는 아주 연세가 많으신 할머님 한분이 계셨는데, 그 할머님께도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집 분위기가 약간은 경직되어 있는 것 같아서 본의 아니게 저는 조금 오버를 하게 되었습니다.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반전시켜보려고 그 할머님께 새해인사도 드릴 겸, 농담도 건넬 겸, 큰 소리로 이렇게 인사드렸습니다. “할머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오래 오래 사세요. 그러나 너무 오래 사시지 마시고 100살까지만 사세요.” 그 말을 마친 저는 썰렁했던 분위기가 좀 부드러워지려니 했었는데, 분위기가 더 썰렁해졌습니다. 할머니 얼굴도 안 좋아지시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다들 난처해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 할머니 올해 연세가 99세였습니다. 99세 할머님께 100살까지만 살라고 했으니 얼마나 속상하셨겠습니까? 최근 우리나라 사람들, 평균 수명이 엄청 높아져서 OECD회원국 평균을 따라잡는다는 이야기 들으셨죠? 여성들은 80세 남짓, 남성들도 75세 정도라고 하니 대단한 수치입니다. 오늘 추석입니다. 먼저 떠나신 선조들 기억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남은 날들도 헤아려보며 ‘죽음’이란 단어에 대해 조금은 생각해봐야하는 날입니다. 과연 몇 살까지 살다 이 세상 떠나는 게 적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80살까지? 아니면 100살까지? 그도 아니라면 150살까지? 혹시 200살까지 살면 행복할 것 같습니까? 오히려 반대일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정말이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이미 친구들은 다 세상 떠났을 것입니다. 아들들이나 손자들도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새해만 되면 KBS, MBC, SBS, 세계 기네스 협회에서 다들 찾아와 난리들일 것입니다. “시청자 여러분, 놀라지 마십니다. 올해 200세를 맞이하시는 어르신이 아직도 멀쩡히 살아계십니다. 그럼 취재나간 리포터를 연결해보겠습니다.” 그 정도 되면 오래 산다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 고통입니다. 불행입니다.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임종자들을 떠나보내며 드는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죽음이 있어 정말 다행이란 생각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죽음은 하나의 은총입니다. 죽음은 해결사입니다. 만일 죽음이 없다면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 방황의 세월을 어떻게 할 것입니까? 죽음이 없다면 끝도 없이 되풀이되는 이 악습의 굴레를 어떻게 할 것입니까? 죽음이 없다면 이 처절한 소외감, 이 심연의 고독, 이 비참한 현실을 어떻게 한없이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죽음이 있어 행복합니다. 죽음을 통해 거칠고 험난했던 오랜 여행길을 마칠 수 있습니다. 결국 죽음은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군요. 그 오랜 세월, 상처와 고통의 나날을 접고 마침내 하느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한 영혼을 바라보며 죽음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궁극적인 해결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죽음은 결코 마지막 날, 인생 종치는 날, 밥숟가락 놓는 날, 쫄딱 망하는 날, 무작정 슬퍼할 날이 아님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죽음은 그간 힘겹게 지고 왔던 모든 멍에를 홀가분하게 내려놓은 날, 기쁜 얼굴로 주님의 얼굴을 마주 뵙는 날, 환희와 축제의 날이 되길 기원합니다. 오늘 먼저 떠난 분들 위해 제사상을 차려놓고 아직도 마음이 정리되지 않으신 분들도 많으시지요. 뭐가 그리 급해서 그리도 경황없이, 잘 있으란 말 한마디 없이 떠나간 그가 야속하기도 하겠지요. 마음이 허전하고, 싱숭생숭하시겠지요. 너무 그렇게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는 우리보다 훨씬 사정이 낫습니다. 영원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품에 안겨 영원한 복락을 누리고 있습니다. 편안한 얼굴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더 이상 고통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원망도 없는 곳에서, 자비하신 주님 품안에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김인한 신부- 우리말 표현 중에 ‘고맙습니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아시는 분들도 한민족 전체의 명절로 -변진흥- 추석, 곧 한가위를 ‘중추가절(仲秋佳節)’이라 부릅니다. 음력 8월은 가을의 정점으로 만물이 성숙하는 좋은 결실의 계절입니다. 한가위에 온갖 음식과 과실을 풍성하게 장만하는 것은 그 풍성한 결실을 나누는 우리 민족의 넉넉한 마음과 정서를 보여줍니다. 추 석 -윤경철 신부-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저기 저기 저 달 속에 계수나무 박혔으니/ 금도끼로 찍어내고 은도끼로 다듬어서/ 초가삼간 집을 짓고 양친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고지고 천년만년 살고지고 요사이는 달에 우주선이 갔다 오고, 달에 대한 탐사를 넘어 화성까지 탐사선을 보내고 발전이 많이 이루어진 시대라, 별 감흥은 없지만 그래도 나이가 지긋한 분들은 밝게 떠오른 추석 대보 달을 올려다보며 소망을 간구하고, 마음속으로나마 이 노래를 불러본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설날이 한 해의 출발을 뜻 깊게 맞으려는 것이라면 추석은 한 해의 맺음을 알차고, 기쁘게 받아들이는 일종의 감사축일입니다. 농업이 우리의 주업이었기에 생활풍속은 봄이면 씨앗을 뿌리고, 한여름 내내 땀 흘려 가꾼 것을 가을에 수확하는 것에 각별한 뜻을 두어 왔습니다. 그건 땅에 대한 감사요, 하늘에 대한 감사요, 우리에게 삶의 터전을 넘겨준 조상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그리곤 정성어린 식탁을 마련해서 온가족이 모여 차례를 지내고 음식을 나누며 성묘로 하루를 보내곤 하였습니다. 그저 좋다는 말이 있듯이, 이런 추석날을 맞이하면 기쁩니다. 전도서 3장 1절의 표현처럼, “모든 일에 제 때가 있고, 하늘 아래 만사에 제 시기가 있듯이”, 추석명절을 맞이하면 우리는 우리보다 먼저가신 조상들을 회상하면서 효도의 정신으로 차례를 지내고, 조상 묘를 찾아 인사도 하게 됩니다. 이런 것을 일컬어 미풍양속이라고 했습니다. ‘차례’ 혹은 ‘제사’가 자연적인 효도에서 기인한다면, 우리 교회의 위령미사는 어떠한 성격이겠습니까? 외교인들의 제사를 살펴보면, 지금은 가정의례준칙대로 하는지 모르지만 그 격식이 매우 엄하고 정중했습니다. 출타중인 사람을 제외하곤 다 모이는 것으로 빠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사가 끝난 다음, 제사에 참여한 모든 이가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음복(飮福)의 부분은 특히 인상이 깊습니다. 음복하는 부분은 우리 교회에서의 영성체 부분에 해당한단는 생각도 해 봅니다. 미사참례는 하면서도 성체를 받아 모시지 못한다면, 이는 마치 일반가정에서 제사에 참석하고서도 그곳 음식을 먹지 않는 결례와 비슷합니다. 감히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는 성체성사와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추석을 맞아 위령미사의 중요성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추석 명절에 우리는 불우한 이웃형제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소외된 분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특히 전후방에서 나라를 몸 바쳐 지키고 있는 우리들의 자식인 국군장병들을 기억합시다. 그들에게도 우리와 똑같이 고향산천이 있고, 부모형제가 있지만 추석명절을 맞아도 이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고향도 갈 수 없고, 부모와 형제들을 만날 수도 없습니다. 가고 싶어도 못 가는 고향,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부모, 형제, 친척들. 이 국군장병들이 바로 살아있는 나의 자식입니다. 추석명절이 군에 가 있는 우리의 자식들에게는 오히려 고통스러운 날일 수도 있습니다. 이들에게 부모님 같은 따뜻한 사랑의 마음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추석을 지내는 오늘, 모든 연령에게는 따뜻한 자비가, 모든 교우 분들의 가정에 추석이 주는 그 풍요로움 같이 크나큰 은총 있으시길 기도합니다.
풍성한 은총에 감사를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박상대신부-
우리 본당 청년들은 훈련이 되어서인지 정리를 아주 깨끗하게 잘 합니다. 바닥까지 깨끗이 닦으면서 정리정돈을 잘 하지요. 그런데 잘 보면 하는 사람만 설거지를 하고, 하는 사람만 걸레질을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항상 뒤에서 잔소리만 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친구들도 있지요.
한 청년은 매번 설거지를 하러 부엌으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이 친구의 단점은 적극적으로 일을 하기는 하는데, 자주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즉, 그릇을 깨뜨리는 일이 빈번하지요. 그래도 늘 먼저 부엌으로 들어갑니다.
또 한 청년은 아예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설거지 좀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런 말을 해요.
“신부님, 제가 설거지 하면 그릇 다 깰 거예요. 그릇 깰까봐 설거지를 못하겠어요.”
제가 이 두 청년 중에서 누구를 더 좋아할까요? 당연히 그릇을 깨뜨릴지라도 설거지를 하러 들어가는 청년이겠지요. 누군가 이런 말을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접시를 닦다가 깨뜨리는 것은 용서받을 수 있어도, 접시를 깨뜨릴까봐 아예 닦지 않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으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행동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들이 이런 모습을 취할 때가 얼마나 많았던 지요? 제가 청년 중에서 설거지를 해서 그릇을 깨 먹더라도 적극적으로 일하려는 청년을 더 좋아하는 것처럼, 우리 주님께서도 실수를 많이 하더라도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더 좋아하시지 않을까요?
오늘 우리들은 한 해를 마무리 해가는 풍요로운 결실의 계절, 그 절정에 자리한 팔월 한가위를 맞이합니다. 그러면서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겠지요. 그리고 이제까지의 우리 모습을 다시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서 지금 이 순간을 최대한 노력하며 살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그래야 나중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거둔 수확물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칭찬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도말고 덜도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이 있지요. 이렇게 가장 좋은 오늘, 우리의 모습을 다시금 반성하면서 주님 앞으로 한 발 더 나아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에게 삶의 여유과 자유를 주는 것 가운데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가전제품입니다. 집안일에서 해방되어 여가 시간을 자기 개발과 문화생활을 위해 활용한다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텔레비전을 보는 데 사용되고 결국 드라마와 예능프로그램에 중독되어 가지는 않는지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자기 발전을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한다고 하더라도 대부분 외모 가꾸기와 영어를 비롯한 경쟁력을 위한 학원 다니기에 소모된다면 결국 우리는 여유로 얻은 시간을 다시 부자 되기 위한 노력으로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 편리한 가전제품을 사고 더 좋은 것을 사기 위해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유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결국 남는 것은 우리집 텔레비전은 몇 인치짜리고, 냉장고는 몇 리터라는 식의 초등학생 같은 자랑만 남을 뿐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스스로 잘 알고 있습니다. 물건이나 사람이나 어떤 것에 매이지 않고 스스로 인정하고 만족하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볼 줄 아는 것,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신앙의 언어로 이야기하면 '하느님께서 만드신 본연의 모습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는 것입니다.
오늘은 한가위입니다.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일 년의 은총에 감사드리며 가족과 함께 지금까지 받은 것에 만족하고 감사할 때 우리는 평화를 간직할 수 있습니다. 내 가족은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대로 충분히 사랑할 만하지 않습니까? 지금 곁에 있는 가족의 손을 꼭 잡고, 지금 곁에 없는 가족은 마음속에 떠올리며 사랑한다고 말해 봅시다.
특히 한가위 명절은 명절을 지낼만한 사람에게 명절이지
모든 사람에게 다 명절인 것은 아닙니다.
애쓴 만큼 수확이 풍성한 사람은 그 보람을 사람들과 나눌 때
배가 되기에 명절답게 명절을 지내겠지만
한 해 농사가 쫄딱 망한 사람에게는 한가위가 원망스러울 것입니다.
그래서 수확이 풍성하여
명절이 즐거운 사람은 이 명절에 조심해야 합니다.
명절에는 그늘이 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풍성한 수확을 앞에 놓고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비유를 들은 부자처럼
자기가 이룬 것에 대한 자기도취를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다윗은 세상을 평정한 다음, 말년에 인구조사를 하였습니다.
인구조사를 통하여 나라가 얼마나 부유해지고
병력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라를 강하고 부유하게 한 자신의 통치에
자기만족하고 도취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곧 자기가 무슨 짓을 하였는지 뉘우칩니다.
하느님께서 뽑으시어 왕이 되고
하느님께서 함께 싸워주시어 모든 적을 물리쳤던 것인데
나이를 먹으니 노망이 들어 하느님이 해주신 것을 깜박 잊고
마치 자기가 다 이룬 것인 양 자기 업적에 도취한 자신 본 것입니다.
저도 자주 그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저에게 창의력을 주시고
그것을 실천하려는 마음을 일으키시어 많은 것을 시도하게 하시고
실패한 것도 많이 있지만 많은 것을 이루어주셨습니다.
그것에 대해 어떤 때 제가 이룬 것인 양 만족해합니다.
언젠가 과거에 있던 본당 40주년 맞이에 대해 얘기를 하다가
지속적인 성체조배회가 아직도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지를 얘기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나라에 지속적인 성체조배가 본격 시작되기 전
제가 필리핀에 갔다가 영감을 받아 시작한 것이었는데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입니다.
그것을 얘기할 때 제가 한 것에 대해 만족하고
은근히 자랑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저에게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 하느님께서 하게 하신 것이지요.
필리핀을 방문하게 하신 것에서부터
그것을 할 마음을 가지게 된 것까지 하느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실상 창의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는 다 저의 성향 때문인데
이런 성향과 성격을 주신 것이 하느님 아니겠습니다.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이 “받으소서, 오! 주여,
나의 모든 자유, 나의 기억, 나의 마음,
그리고 나의 의지, 모든 것을 받으소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나 당신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당신의 의지에 의해 완전히 지배받기 위해서
당신에게 그 모든 것을 돌려드립니다.”라고 기도하셨듯이
저의 능력, 마음, 심지어 의지까지 주님께 받은 것이니
제가 한 모든 것은 제가 이룬 것이 아니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저의 어머니는 늘 지혜로우십니다.
어떤 때 은근히 당신을 자랑하시기도 하지만
명절 때나 생일잔치 때 당신의 자손이 다 모이면
매우 흐뭇해 하시면서도 꼭 그 모든 것이 하느님 은총이었음을
주님께 대한 기도로서 감사드리고 자손들에게도 가르치십니다.
이 한가위 명절,
하느님께서 내 안에 이루신 많은 것들,
나를 통해서 이루신 많은 것들 돌아보고
그 하느님의 모든 업적을 가족이 함께 찬미하게 되기를,
명절날 새벽 저는 대구 외진 곳에서 여러분을 위해 기도합니다.
금을 귀중하게 여기는 이유는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금이 세상의 모래처럼 이 세상에 엄청나게 많다면 지금처럼 귀하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모래가 이 세상에서 아주 적다면 어떨까요? 아마도 모래를 금고에 모셔놓고 애지중지할 것이며, 중요한 행사의 경품으로 모래가 나면 사람들은 최고의 경품이라고 말하면서 서로들 그 경품을 타기 위해서 앞 다툴 것입니다.
그 밖의 모든 사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지 않은 것이 흔한 것보다도 훨씬 가치가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고 흔하지 않은 것들을 모으는데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듭니다.
“왜 이렇게 흔하지 않은 사물에 대해서는 높은 격을 부여하면서도, 사람에 대해서는 왜 높은 격을 부여하지 않을까?”
사람들 중에 똑같은 사람이 있을까요? 쌍둥이라 할지라도 다른 점이 분명히 있다고 하지요. 또한 사물들처럼 아무런 행동을 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각자 고유의 재능과 능력을 발휘하여 또 다른 창조 활동을 할 수 있는 놀라운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귀하고 소중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아닌 사물에만 더 소중한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서 어떤 것을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할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이 세상에서만 필요한 재물에만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필요한 보화를 쌓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늘만 같아라.'라는 한가위입니다. 이렇게 기쁜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한가위에 나는 과연 무엇을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지 반성해 보았으면 합니다. 한가위는 풍요로운 결실의 계절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지요. 따라서 먹고 마시면 그만인 시간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조상님들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지요. 이렇게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과 조상님 덕분이라고 말하면서 감사의 제사를 바쳤던 것입니다. 즉, 내가 얻은 그 물질 자체에 소중함을 부여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조상님 그리고 함께 일한 사람들에게 더 큰 소중함을 부여했기 때문에 이렇게 큰 명절을 통해 함께 나누었던 것입니다.
조상님들의 이 정신을 이어받아 우리들은 한가위 명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나는 무엇을 더 소중하게 여기고 있을까요? 사물인가요? 아니면 사람인가요?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합시다.
계시겠지만 ‘고마’란 말이 우리나라의 옛말로 땅 신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결국 고맙습니다라는 표현은 당신이 나의 신이 되어주었다는 말입니다.
나에게 그만큼 소중한 존재로 여겨진다는 표현입니다.
아시다시피 오늘은 우리 땅의 명절인 한가위입니다.
조상들 덕분에, 그리고 다른 이들 덕분에 이렇게 우리가
살아갈 수 있음을 되돌아볼 줄 아는, 우리네들입니다.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처럼 우리가 누리고 사는 것들이
내가 이루어낸 것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고, 우리의 모든 것이 주님의 은총이며 다른 많은 이들의
사랑과 희생의 선물임을 알고 고마워하며 사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신라시대에는 8월 보름이 되면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길쌈놀이를 했다고 합니다. 양편의 길쌈 결과물이 많고 적음을 따져 내기에 진 편이 술과 음식을 마련해서 이긴 편에게 대접했습니다. 이기고 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길쌈놀이를 하며 서로 땀 흘려 거둔 결실을 축복하고 나누었던 것입니다. 이때 노래와 춤을 추며 온갖 놀이를 즐겼는데, 이를 가배(嘉俳)라고 합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한가위만 같아라.’는 속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 민족은 풍요로움 속에서 조상의 은덕을 기리고 밝은 한가위 달과 함께 결실을 노래하는 풍속을 지켜왔습니다.
아직도 우리에게 추석은 큰 명절입니다. 고속도로를 주차장으로 만드는 귀성 인파는 결코 줄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추석은 남쪽에서만 명절입니다. 허리가 잘린 북한에서는 이러한 풍요를 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북녘의 동포들도 조상의 은덕을 기리며 풍성한 음식을 나누는 행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하는데 그들은 한가위에도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그들 자신의 탓입니다. 그러나 한가위를 맞는 우리는 북녘 형제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남쪽 사회가 주님께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으로 책망받지 않는 길일 것입니다.
“연옥이 존재하고 여기에 갇혀있는 영혼들은 살아있는 신자들의 기도와 특히 미사성제로써 도움을 받을 수 있다”(트리엔트 공의회 <1545-63녀>의 선언)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교우들이 다 함께 모여 기도하고 미사를 지냄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모든 성인들의 통공인 지상의 교회인 우리들이 연옥교회의 영혼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런데 어떤 때에는 어리둥절하기도 합니다. 합동 위령미사를 봉헌한다고 발표하고, 여러번 알려주어도 도무지 관심이 없는 교우 가정이 많다는 점입니다. 미사 예물 때문에 그런 것일까? 그런 이유는 아닌 것 같은데…? 어째든 간에 왜 무관심한가? 만일 신자가정에서 외교인과 같은 제사를 지내지 않고, 그렇다고 성당에서의 합동 위령미사의 대열에도 끼이지 못한다면 정말 슬픈 현실이요, 납득하기 어려운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일년내내 돌아가신 분을 위해 위령미사 한번 드리지 못한다면 깊이 생각해 볼 일이요, 한마디로 악한 표양을 주는 교우가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김정호 신부-
“오곡백과가 땅에서 났으니, 주 우리 하느님께서 복을 주심이로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명절의 기쁨을 전하면서 인사를 드립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1년 12달 오늘만 같아라”하는 한가위 명절을 맞았습니다.
여러분도 오늘 조상님들께 차례를 모시고 온 가족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계시겠지요?
여러분들의 각 가정마다 오곡백과의 풍요로움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으로 항상 머물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우리 민족이 갖는 고유한 명절입니다. 물론 중국에서도 8월 보름에 월병을 빚어 먹으며 즐거움을 나누고, 일본에서도 그와 비슷한 풍습을 일부 지방에서 갖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처럼 민족의 대명절로 지내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오늘은 우리 민족 고유의 커다란 잔칫날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 명절을 가리키는 말들이 많이 있지요? 흔히 秋夕이라고 합니다만, 이 말은 四書五經 중의 하나인 禮記에 나오는 “朝春日 秋夕月”이라는 표현에서 빌어온 것이라고 합니다. 또 仲秋節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이건 가을에 해당하는 3달을 初秋 中秋 終秋라고 하는데, 음력 8월이 중간에 들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이름 “한가위” 혹은 “가윗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이름은 그 역사가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는데, “가운데”라는 말마디와 관련이 된다고 합니다. 음력 8월 15일은 봄부터 시작해서 겨울에 이르기까지 1년중 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면서 달이 가장 둥그렇고 가깝게 보이는 대표적인 명절이기 때문에 한가위라고 부르게 된 모양입니다.
오늘 명절을 추석이라고 하든, 중추절이라고 하든, 한가위라고 하든, 가윗날이라 하든, 이 모두가 바로 오늘의 이 풍요로움, 이 넉넉함, 이 복스러움을 함께 나누려는 마음에서 나온 이름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오늘 멀리 떨어져 지내던 가족들이 함께 모여서,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비옥한 땅을 맡겨주시고 풍성한 결실을 맺게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또 한편으로는 오늘의 우리가 있기까지 애써주신 조상님들을 기억하면서 후손된 도리를 다시금 되새기기는 것입니다.
보도를 통해 들어보니까, 이번 명절에도 온 나라가 고향을 찾는 행렬로 줄을 잇고 있습니다. 얼핏 헤아려봐도 1000만을 훨씬 넘는 사람들이 대이동을 한다고 합니다. 아마 고향을 찾아, 부모님을 찾아, 또 친지들을 찾아 전 국민의 1/3가량이 움직이는 모습은 우리 민족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전 세계 그 어디서도 이런 예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오로지 우리 민족만이 갖고 있는 자랑스럽고 아름다운 관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이런 풍요로움을 허락하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오늘 복음에서는 소출을 많이 얻게된 어떤 부자 한 사람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아마 기후도 좋고 병충해도 없어서 풍년이 들었나 봅니다. 남아넘치는 곡식단을 바라보면서 부자는 너무도 기뻤습니다. 그리고는 “이 많은 곡식을 어디에 다 보관해야 하나?”하면서 행복한 고민에 젖어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이 부자는 “지금 있는 작은 창고를 헐고, 더 크고 튼튼한 창고를 지어서, 거기에 곡식을 꽉꽉 채워놓고, 그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리라” 하면서 행복해 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바로 그날 밤, 이 세상을 하직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 많은 소출이 그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제 아무리 부요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하시면서, 자기를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면서 하느님과 이웃에게는 인색한 삶을 살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오곡백과의 풍성한 수확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풍요로움에 기뻐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하느님께서도 만족스러워 하십니다. 우리에게 이 명절을 기쁘게 지내게 하시면서 천상 도시의 잔치를 미리 즐기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허락된 부유함을 즐길 권한을 받았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허락된 이 풍요로움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내 것으로만 삼으려 하지 말고, 이웃과 함께 나누려는 마음가짐도 아울러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 하느님, 저희 조상과 저희에게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베풀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저희가 이제 주님께 받은 재물을 이웃과 나눔으로써 하늘에 보화를 쌓아, 세상을 떠난 조상과 부모, 형제, 친척들을 천국에서 만나게 하소서. 아멘.”........◆
한 억만장자가 죽으면서 자식들에게 이상한 유언을 남겼다. 유언인 즉, “내가 죽거든 관 양쪽에 구멍을 내고 나의 양팔을 밖으로 내어 놓은 채 장례를 치러라.”는 것이었다. 왜 이런 유언을 남겼을까? 자녀들은 물론이고,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아버지의 유언대로 장례식을 치른 후 며칠이 지나 큰아들이 동생들을 불러 모아놓고 아버지의 유산을 몽땅 털어 자선사업을 하자고 했다. 그는 아버지 유언의 뜻을 깨달았던 것이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사람은 빈손으로 이 세상에 와서 빈손으로 돌아간다는 불교계의 진리와 같은 가르침이다. 누가 우리 중에 태어나면서부터 땅문서를 손에 쥐고 이 세상에 나왔거나, 돈을 쥐고 나온 사람 있는가? 아무도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죽을 때면 아무 것도 손에 쥐고 갈 수 없는 운명의 존재이다. 일 센트짜리 동전은 고사하고 지푸라기 하나도 쥐고 갈 수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이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에 어떡하든 많이 가지려 애쓰는 것인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만 사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현대판 금송아지를 인생의 전부이며 목적인양 착각하며 산다. 돈으로 모든 것이 계산되고, 돈만 있으면 안 되는 것이 없고 돈이 최고라는 생각은 거의 모든 현대인들의 몸에 베여 있는 사실임을 부정할 수 없다. ‘돈은 더러운 것’이라들 말하지만 이 더러운 돈을 사람들은 다 좋아한다.
돈은 분명히 필요한 것이고 좋은 것이다.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편하다. 그러나 이런 돈이 우리 인생의 전부가 되고, 돈에 대한 탐욕 때문에 “돈방석에 한 번이라도 앉아 보면 다른 소원이 없겠네, 죽어도 좋겠네!”라는 말을 일삼는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혹자는 “공수래공수거”의 진리에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요즘같이 물질이 풍요로운 시절에 태어나는 아이들은 “만수래(滿手來)”의 행운에 빠져있으니 말이다.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으레 “만수거(滿手去)”하려 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가지고 태어나며, 과연 무엇을 가지고 갈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을 가지고 태어나는가? 그것은 우선 생명이다. 생명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 생명이 있으면, 다른 것은 덤으로 주어지며, 많은 것을 자신의 노력으로 가질 수 있다. 시간, 능력, 건강, 재물, 권력, 명예, 배우자, 자녀 등이 그런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에, 즉 육체를 가진 동안에 사람은 이런 소유들을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러서는 모두 소유한 것에서 손을 떼야하며, 놓아두고 가야한다. 결국 이것들을 주신 하느님께 돌려 드려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 복음(루카 12,15-21)에서 보듯이 부자는 밭에서 난 소출을 전부 자기의 것으로 착각한다. 착각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부자의 잘못은 자기 영혼에게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고 한 약속에 있다. 사람이 현재의 소유를 마음껏 누릴 수는 있겠지만, 누가 그 미래를 장담할 수 있겠는가? 하느님 말고 누가 감히 한치 앞을 예견하며, 몇 년 앞을 아무 걱정 없다고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장담하던 바로 그날 밤에 부자의 생명은 왔던 곳으로 돌아가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부자가 재산을 부당하게 모은 것도 아니고, 그가 재물을 탐한 것도 아니다. 그저 재물이 자신의 전부이며 생명과 미래까지 보장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그의 잘못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가지고 가는가? 물질에 속하는 육체가 없으니 육체와 관계되는 어떤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 따라서 영혼이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을 소유하려고 애써야 한다. 그것은 하느님이 계신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이다. 내가 소유한 것이 많고 적고 간에 한가위의 보름달이 더 커지거나 줄어들지 않듯이 모든 것에 한결같은 마음으로 하느님께 감사하며, 하늘에 보물을 쌓고 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