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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수르왕이 북이스라엘을 점령했다(왕하 17:6) "점령하고"
점령? 그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왕 호세아 9년에 북이스라엘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BC721년
앗수르가 지배국이고 북이스라엘이 피지배국이 되었다.
이방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배하게 되었다.
성경은 그 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17:7-8) 다 같이 찾아 읽어보자.
"하나님 여호와께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7)?
이 구절은 두 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1) 죄는 하나님 앞에서 저지른 범죄행위를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는 죄라고하면 사람 앞에서 저지른 범죄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경찰서 앞에서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와 질문 공세를 받는 범죄자들을 상상한다.
부모님들이 자녀에게 "나쁜 짓하면 저렇게 된다"라고 훈계한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죄를 하나님앞에서 저지른 범죄행위를 가리킨다.
<죄>? 하느님의 표준에 어긋나는 행동이나 감정이나 생각을 가리킨다.
헬) "하마르티아"? 과녁을 벗어난 화살을 의미.
우리는 사람들에게 실수하고 잘못했다는 사실보다는 하나님께 실수하고 잘못했다는 사실로 인해 더 두려워하셔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께 실수하고 범죄하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죄는 하나님앞에서 지저른 범죄행위를 가리킨다.
2) 여호와께 범죄했다는 사실은 어떤 행위를 가리키는가?
범죄? 법규를 어기는 행위를 말한다.
법에 반하는 행위를 했을때 범죄행위로 규정된다.
여호와께 범죄했다는 말은 여호와의 법에 반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것은? 다른 신을 섬기는 행위와 이방의 규례를 따라 사는 행위를 말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억하셔야 한다.
우리가 세상에서 예수를 제대로 믿지 않으면 세상사람들로부터 지배를 받게 된다.
그러니 성도들은 직장에서 예수 믿는 성도답게 살아야 한다.
그러면 동료들이 여러분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예수 믿는 흉내 내면 저들이 우리의 수준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동료들이 우리를 쉽게 생각한다.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대한다.
우리가 예수를 제대로 믿으면 세상이 우리를 못 건들린다.
저는 여러분들이 세상사람들의 지배를 받지 않기를 원한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시면 지배국 앗수르가 피지배국 북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정책 중 하나를 찾을 수 있다.
"이주정책이다"
앗수르 정부는 북이스라엘을 점령한 후 북이스라엘 사람들을 앗수르로 강제로 이주시켰다(17:6)
"이스라엘 사람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끌어다가"
그 후 정책적으로 앗수르인들을 북이스라엘로 이주시켰다(17:24)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들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이주정책을 실시했다.
앗수르정부는 북이스라엘인들을 앗수르로 끌고 갔고 대신에 그 자리에 앗수르인들로 채웠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정부도 이주정책을 실시했다.
자국민들을 조선으로 이주시켰다.
조선으로 이주하는 일본인들에게 다양한 혜택을 주었다고 한다.
무상으로 여권을 발급, 이주비 지원, 토지를 저렴하게 할당, 세금 감면 실시, 금융 지원 등의 혜택을 주었다.
그리고 한국인들을 일본으로 이주시켰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본토는 태평양 전쟁으로 전쟁물자조달로 인해 많은 인력이 필요했다.
필수인력을 채우기 위해서 조선인들을 일본으로 강제이주시켰다.
이렇게 통상적으로 지배국은 피지배국을 지배하기 위해서 이주정책을 실시한다.
이때부터 앗수르인들이 북이스라엘 땅에 거주하기 시작했다(24)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다.
사마리아로 이주한 앗수르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25)
이주민들은 토착민들이 믿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사자(동물)를 보내 앗수르인들을 공격하게 만들었다(25) 이 사건으로 몇 사람이 희생되었다.
동물이 사람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앗수르 이주민들이 앗수르 정부에 호소했다(26) "어떤 사람이 앗수르왕에게 말하여"
이주민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이 섬겼던 그 지역신을 섬기지 않았기에 이런 사망사고가 발생했다고 호소했다.
고대 근동지역에는 ‘지역신’의 개념이 있었다.
앗수르에는 <마르둑> 이집트에는 <라> 이스라엘에는 <여호와>..
고대근동지역사람들은 자신들이 조상 대대로 섬기던 신이 있다고 할지라도, 한 지역을 옮겨 다른 장소로 이주했다면 그 지역을 다스리는 지역신을 반드시 섬겨야 한다고 믿었다.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이 로마에 거주하게 되었다면 로마사람들이 섬기는 지역 신을 섬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25절에서 발생한 사자 사건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했다. ‘그 땅 신의 법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자신들이 사마리아 지역에 거주하면서도 그 지역신인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고,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지,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였기에 그 지역의 신이 노하여 사자를 보내서 자신들을 벌하였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에 앗수르 정부는 대책을 강구했다(27-28)
북이스라엘에서 사로잡아 온 제사장 한 명을 사마리아로 파송한다.
그때부터 제사장이 벧엘에 거주하면서 앗수르 이주민들에게 하나님의 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제가 아는 어느 지인이 세종학당에서 파송받아 라오스에서 한글을 가르쳤다.
그는 라오스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약 1년간 한국문화와 한글을 가르치다가 지난해 겨울에 귀국했다.
한국인들이 사는 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마찬가지다.
파송받은 제사장이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앗수르 이주민들에게 가르쳤다.
결과는? (29-33)
앗수르 이주민들이 여호와를 경외하게 되었고 동시에 자기들이 섬겨왔던 신들도 섬겼다(33)
제사장이 앗수르 이주민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가르쳤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제사장으로부터 교육을 받고도 각 사람들이 자기들의 신(神)을 만들어 자유로이 섬기게 되었다(29-30)
이들은 주로 동물의 형상을 만들어 신(神)으로 섬겼다.
"숙곳브놋"은 암탉의 형상이고, "네르갈"은 수탉의 형상이고, "아시마"는 숫염소의 형상이고, "닙하스"는 개의 형상이고, "다르닥"은 나귀의 형상이다.
그리고 "아드람멕렉"은 공작의 형상이고, "아남멜렉"은 꿩의 형상이다.
"아드람멜렉"은 바람과 비의 형상, "아남멜렉"은 하늘의 형상이다.
분명히 제사장이 여호와 경외하는 법을 가르쳤다고 하는데(28), 이들은 하나님을 믿었고 동시에 우상도 믿게 된 것이다.
아주 상식적인 수준에서 두 가지 원인을 찾을 수 있다.
1) 제사장이 제대로 가르쳤는가?
벧엘로 돌아온 제사장이 앗수르 이주민들에게 유일신이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고, 오직 그분만을 경외해야 한다는 불변의 진리를 가르쳤을지 의문이 든다.
제사장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법을 제대로 가르쳤다면 이들이 여호와를 경외하면서 동시에 우상을 섬겼겠는가?
제사장이 앗수르 정부의 간섭이나 개입으로 인해 제대로 가르치기가 불가능했을 것으로 추측이 되긴 된다.
제사장이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2) 이주민들이 제대로 배웠겠는가?
파송된 제사장이 제대로 가르쳤는 돼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원인은 한 가지다.
이들이 제대로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단순히 여호와를 섬겨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이 섬기는 신의 명단에 여호와의 이름을 추가하면 된다고 해석했을 것이다.
가끔 이런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예수 믿는 일을 취미생활이나 동호회 활동 정도로 알고 계신 분들이 있다.
태권도 도장이나 필라테스 강습에 등록하듯이 교회에 등록하는 그 정도로 생각한다.
교회 다니는 일을 취미생활에 하나 더 추가한다는 사실로 받아들인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교회에서 하나님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다.
잘못된 자세를 가지면 제대로 배울 수 없다.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앗수르에 거주중일 때 자신들이 믿었던 신의 명단에 여호와의 이름 하나를 추가했을 뿐이다.
이들은 일시적으로 여호와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여호와를 섬겼던 것이다.
발등에 떨어진 불을 꺼기에 급급해서 하나님을 섬기기로 선택한 것이다.
그러기에 자신들이 섬겨왔던 이방신을 포기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각 민족들마다 각기 자신들의 신상을 만들었고 사마리아 사람들이 만들어 둔 산당 안에 신상들을 안치했던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만든 산당이란 이전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기 위해 만들었던 산당들을 말한다.
그들이 여호와는 공포심으로 섬겼고, 자기들의 신은 사랑으로 섬겼을 것이다
(Matthew Henry).
이제 말씀을 정리하려 한다.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제대로 배우지 않으면 우리도 이런 신앙을 가지게 된다.
혼합주의 신앙을 가지게 된다.
목회자들은 제대로 성경을 가르쳐야 한다.
강단에서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고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고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교리나 수단이나 방법은 없다고 가르쳐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만을 믿는다.
기도나 찬양이나 예배 자체를 믿는 것이 아니다.
기도나 찬양이나 예배는 신앙행위의 대상이 아니다. 이런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수단들이다.
기도 자체를 믿는 것은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것이 아니다.
누가 초신자에게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는 비결로 "기도만 하면 된다"라고 가르쳤다고 치자.
이 말을 들은 초신자가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할까? 극단적인 예이다.
아마 초신자는 기도를 자신의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겠는가? 절대적인 가치로 여기게 될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섬기는 수단이고 섬기는 행위 중 하나이다. 신앙의 대상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신앙의 대상이시다.
그리고 성도들도 제대로 성경을 배워야 한다.
홍수 때 마실 물이 없다고 하지 않는가?
현재 성경을 배울 수 있는 수단이나 장소는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그 많은 곳이 모두 제대로 성경을 가르치는 곳이라고 단정 짓지 못한다.
추측건대 목회자의 노파심에서 아주 어려운 말씀을 드린다.
제대로 성경을 배울 수 있는 곳은 별로 없다.
지금 한국교회 강단을 진단해 본다면 이 역시 안심할 수가 없다.
교회 안에 혼합주의 신앙이 팽배하다.
혼합주의란? 기독교와 불교를 동시에 섬겨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혼합주의란? 교회와 세상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사단은 오늘도 성도들이 다른 종교를 신뢰하도록 타 종교로 우리를 인도하지 않는다.
즉 사단은 우리로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만들지 않는다.
대신에 사단은 우리가 하나님과 겸하여 다른 어떤 것을 섬기도록 부추긴다.
이것이 사단의 전략이고 세상의 논리이다.
사단은 우리로 하나님을 믿으면서 다른 어떤 대상을 믿도록 유도한다.
교회에서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성도들이 제대로 배우지 않으면 교회 안에 양다리를 걸치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이런 행위가 신앙행위라고 자위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늘어가고 있다.
신앙생활의 대전제가 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믿어야만 하는 신앙의 대상은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제사장들이 "교회 건물"과 "교회의 전통" 아니면 어느 특정한 신앙인을 신뢰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신학교도 신학도 교리도 우리가 믿어야 할 신앙의 대상이 아니다.
어느 제사장이나 교회가 앞에서 열거한 이런 요인들을 우리가 믿어야 할 대상으로 추가해야한다고 강요한다면 그것은 혼합주의에 해당한다.
지금 이 세상은 여러가지 종교를 공존시키고 조화롭게 만들기를 교회와 성도들에게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유일성을 강조하는 행위를 마치 조화롭고 공존하는 안정된 삶을 해치는 행위로 간주하고 있다.
현재 교회와 성도는 혼합주의라는 새로운 형태의 이데올로기의 도전을 받고 있다.
사도행전 4장 12절은 단호히 말하고 있다. “다른 이름은 없나니”
우리가 믿어야 하는 이름, 우리가 경배드려야 하는 이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오직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믿으시는 미준교회 가족들이 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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