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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10월18일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청주] 한 눈 팔지 마라.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2티모 4, 10 - 17ㄴ
† 복음 : 루카 10, 1 - 9
전승에 따르면, 루카 복음사가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현재는 터키의
안타키아) 출신이다. 바오로 사도의 전교 여행에 함께하였던 그는 주님의
복음과 복음 선포의 상황을 기록하였다. 곧 루카 복음과 사도행전이다.
루카는 다른 복음사가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관한 부분을
성모 마리아와 함께 상세하게 묘사함으로써 ‘성모 마리아를 최초로 그린
화가’라고 불리기도 한다. 또한 그의 직업이 의사였다는 전승이 있는데,
예수님의 치유의 기적들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 로마의 감옥에서 지내며 재판을 앞두고 있는 바오로 사도는 루카를
제외한 많은 이가 자신을 떠났으며, 심지어 첫 변론 때에는 그 누구도
자신을 거들어 주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바오로는 이러한 고통을
주님 안에 머물면서 이겨 내려고 노력한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제자를 각 고을과 고장으로 파견하신다.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 같다며 염려하시면서도 그곳에서 평화와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라고 명령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제자를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파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사실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데 굳이 다른 이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십니다. 당신 혼자만으로도 충분히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하시면서 제자들을 양성하셨고, 그들과 함께
구원 사업을 펼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다음의 예화를 통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느 백인 교사가 인디언 보호 구역의 한 학교로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학생들에게 시험을 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이 갑자기 책상을
가운데로 끌어당기더니 한데 모여 앉았습니다. 교사는 의아하게 생각하며
부정행위는 안 된다고 훈계하였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은 선생님을 보고
도리어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희는
지금껏 어려운 문제는 함께 힘을 합쳐야 해결할 수 있다고 배웠는데요?”
예수님께서는 모든 문제를 다른 이들과 함께 힘을 모아 해결하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 자체가 이미 공동체성을 본질로 지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곧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공동체 안에 머무르십니다.
그리고 우리와도 그렇게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일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렇게 다른 이들과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하느님께는 우리가 필요하신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한 눈 팔지 마라 |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3년 다해 10월18일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루카10,1-9)
한 눈 팔지 마라.
고등학교를 다닐 때 자취생활을 하였습니다. 신부가 된 후에도
특수사목에 종사하다 보니 자취 아닌 자취생활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
안타까웠는지 많은 분들이 맛있는 반찬도 해 주시고, 곰국도 끓여
주셨고 좋아하는 미역국도 준비해 주셨습니다. 참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가끔 냉장고에 있는 국을 꺼내보면 국물에 기름이 떠올라
있습니다. 따뜻하게 데우면 기름이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랑이 뜨거울 땐 상대방의 단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좋은 것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콩깍지가 씌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으면 상대편의 단점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잔소리가 시작됩니다. 불평불만이 늘어 갑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열정도 그렇습니다. 뜨거운 열정이 있을 땐 기도시간도
많고 성경도 읽으며 성체조배도 하고, 활동도 적극적입니다. 열정이
식으면 내 것 먼저 챙기고, 하느님의 몫을 뒤로 밀치게 됩니다. 해야
하는 일 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것 다하고 그 다음에 하느님의 것을
챙기려 하니까 찜찜하기도 합니다. 사랑의 열정을 다시 일으켜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일흔두 명의 제자를 뽑아 파견하시면서 분부한 말씀을
기억합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 주머니도 여행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가10,3).
이 말씀은 온전한 투신을 위해서는 한 눈 팔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선교사명을 받았으면 그것에 충실해야지 돈 주머니나 식량자루, 다른
어떤 것에도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장황하고 의례적인
인사에 허비할 틈도 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처럼 안쓰러운 마음이 있지만 내 사랑이 그 안에 함께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면 엉뚱한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듯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요한15,9-10). 엉뚱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근본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일상 안에서도 내 본업이 무엇이고 그것에 충실하고 있는가? 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혹 다른 부업에 마음을 더 쏟는 것은
아닌지…….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그리고
자녀는 자녀로서의 본분이 있고 윗사람은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은
아랫사람으로서의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사실 근본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은 것입니다. 한 눈 팔지 말고 각자의 본분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나 혼자만의 구원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웃을 구원해야
할 소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루카10,2)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 일꾼이 바로 우리
자신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실 온 세상이 우리의 활동 무대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부르짖음이 우리 안에 숨겨지지 않도록 우리는 능력에 따라
하느님 나라를 이웃에게 전해야 합니다. 선교의 사명은 우리 모두의
의무입니다.
기왕이면 돈 주머니도 여행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않은 채 더욱이
길에서 인사하느라 지체함도 없이 오로지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또 그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일꾼이 나오길 희망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가 있어야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한, 잘난 사람에게나 못난 사람에게나 가난한
이에게나 부자에게나 모든 계층과 연령의 모든 사람에게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하느님의 온갖 뜻을 꾸준히 전파하도록 합시다!”
(성 그레고리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나약한 사람이 아닌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전에 고등학교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 친구가 어젯밤에 이상한 꿈을 꿨다면서 이야기를 합니다.
“어제 꿈을 꿨는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운동화를 잃어버린 거야. 이 운동화
찾는다고 계속 헤매다가 잠에서 깼어. 이 꿈이 좋은 거냐? 아니면 나쁜 거냐?”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은 친구이기 때문에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별
것 아닌 꿈에도 신경을 많이 쓰더군요. 그런데 어떤 친구가 말을 합니다.
“야! 신발 잃어버리는 것이 좋은 꿈이라는 것도 몰라? 꿈은 반대라고 하잖아.
너한테 복덩이가 들어온다는 꿈이야. 오늘 네가 술 사!”
이 말에 “그래? 그럼 술 사야지.”하면서 기분 좋게 자신의 꿈을 받아들였고,
좋은 시간을 우리 모두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우연히
인터넷에서 ‘신발을 잃어버린 꿈 해몽’이라는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친구들과의 만남이 생각나면서 이 글을 열어 보았지요. 그랬더니만 이
꿈은 좋은 꿈이 아니라 나쁜 꿈이라고 합니다. 즉, 연인이나 배우자와
다투거나 헤어지는 나쁜 꿈이랍니다. 하지만 제 친구는 그 꿈이 좋은
꿈이라고 하면서 축하를 받았고 같이 있었던 우리 모두가 기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문제의 꿈을 꾸었던 친구에게
그 뒤 어떻게 되었는지를 물었더니, 정말로 좋은 일만 계속 생겼다는
것입니다.
나약한 사람이 꾸는 꿈은 모두 악몽이라고 하지요. 반면 지혜로운 사람이
꾸는 꿈은 모두 좋은 꿈이라고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꿈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꿈에 대한 해몽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내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쁜 상황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 들이냐에 따라
가장 좋은 상황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별로 좋지 않은 상황으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가는 전교여행. 어떻게 좋은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눈에 보이는 상황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전하면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심어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제자들은 성공적으로 자신들의
사명을 수행하고 돌아오지요.
나약한 사람은 불길한 징조를 만들어 스스로 운명에 갇히고, 지혜로운
사람은 불길한 징조를 만나도 그 안에서 용기를 얻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나약한 사람이 아닌,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즉, 어떤 상황이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기쁘게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주님을 따르는 참된 제자의
모습입니다.
올바로 나이 드는 건 올바로 사랑하는 것이고, 올바로 사랑하는 건 그
사랑으로 내가 자라고 서로를 키우는 것입니다(김흥숙).
어제 강의를 했던 동탄 능동성당. 부족한 강의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입술 자국 없애기
어느 여자 고등학교에서, 립스틱을 사용하기 시작한 여고생들이 많아진
것입니다. 아름답게 보이기 위한 것이니까 그럴 수 있다 싶은데, 문제는
이상하게도 화장실에서 립스틱을 바르고는 거울에 키스를 해서 입술자국을
남겨놓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교장선생님은 여학생들 전원을 화장실로 불러놓고 여러분들의
이 행동으로 인해 거울을 청소하는 청소부가 얼마나 큰 수고를 당하고
있는지 훈계하며 설명했지요. 그러나 학생들은 ‘그럴 수도 있지’라는
모습을 지으면서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듯이 딴청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거울청소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겠다면서 교장선생님은
청소부더러 거울 하나를 청소해보이라고 했습니다.
청소부는 긴 자루가 달린 브러시를 들고 먼저 변기에 한참 담그고 나더니
그 브러시를 들고 거울을 박박 닦았습니다. 학생들은 경악했지요. 자신이
입을 맞췄던 거울을 변기의 물로 닦고 있다는 사실에 말입니다. 그 후로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학교 화장실에 달린 거울에는 입술자국이 더 이상 생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백 마디를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더 낫다고 합니다. 주님의 말씀 역시
듣기만 할 것이 아닙니다. 미사에 가서 신부님 강론 말씀만 듣는다고 해서,
주님의 구원이 내 것인 양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우리의 삶 안에서 적극적으로 실천할 때 비로소
살아계신 주님을 만날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오늘 하루도 멋진 사랑의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 인천 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아름다운 사람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2013년10월18일 연중 제 28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아름답게 사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루카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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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하신 말씀이다. 파견하시는 마음과
파견되는 마음들을 헤아려본다. 양쪽 모두의 마음은 가볍지 않다. 아니
무겁다. 사랑하는 제자들을 보내야만 하는 예수님께서도, 명을 받고
떠나가야 하는 제자들도 다가올 상황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제자들을 세상의 악이라는 이리 떼 속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양들이라 하신다.
얼마나 안타까우셨을까?
세상의 논리로는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양들이 이리 떼와 싸워야 한다.
피를 흘리기도 하고 먹히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제자들을 보내야 한다.
제자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들이 스승의 명을 따르는 이유는 단 한가지다.
스승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스승의 사랑을 알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스승께서 말씀하시는
가치와 세상이 따르는 가치가 분명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스승의 명을 받든다는 것은 세상과 부딪힌다는 의미이다.
더욱이 스승의 말씀처럼 이리 떼 같은 세상 앞에 자신들은 힘없고
호전성도 없는 양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스승이 보여준 희망의 세계에 희망 걸고 따르는 것이 최선임을
결단한다.
순교의 역사는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결단과 실천은 세상의 악이 허락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도전이다.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와 아름다운 이들의
값진 삶으로 오늘의 교회는 이루어졌다. 그렇다.
순교 영성을 생각하지 않고는 그리스도 신앙은 거짓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 안으로 파견하신다.
우리는 가능하면 쉬운 길을 원한다.
편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신앙생활이기를 바란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두려움 없이 늘 웃으면서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실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악의 세력이 존재하고 세상을 악으로 만들려는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는 한, 그 악을 막아야만 하는 소명으로부터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다.
복음이 그런 것이고, 사랑이 그런 것이고 신앙이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우리가 살다가 떠나야 하는 존재로 이 세상에 왔다면, 옳음을
위해 살다가 떠나야 한다. 그럴 수 있을 때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그분의 말씀을 믿으면서 말이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서울]
- 서울 대 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몰입의 행복
2013년 다해 10월18일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복음 : 루카 10,1-9
<몰입의 행복>
네델란드에서 아주 규모가 큰 지역정신건강센터의 책임자로 있는 정신의학자
마르텐 데브리스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수록 더욱 행복할 수 있다는
명제를 강하게 시사 하는 사례를 보고하고 있습니다.
병원 당국은 EMS(Experience Sampling Method:경험추출법)을 통하여
환자들이 하루 종일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느낌을 받는지를
조사하였습니다. 그 병원에는 12년이 넘도록 심한 정신분열증으로 앓고 있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다 그런 것처럼
그 여자도 머리가 산만하고 감정도 무디기가 이를 데 없었습니다. 의료진은
두 주일의 EMS 조사를 통하여 그 여자가 딱 두 번 만족스러워 하였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것은 두 번 다 그 여자가 손톱을 다듬고 있을 때였다는
사실입니다. 의료진은 그 여자가 손톱 다듬기 전문가에게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선하였습니다.
그 여자는 그 강의를 열심히 듣고는 얼마 안 가서 병원에 같이 있는 환자들의
손톱을 도맡아서 다듬어주었습니다. 그 여자는 손톱 다듬기에 몰입하는 동안
자신감을 회복하고, 집중력을 길러나갔습니다. 마침내 그 여자는 정신분열증
에서 벗어나 새 사람이 되었고, 다시 사회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 여자는 손톱 다듬는 미용 전문가로 개업하였고 일 년도 못되어
생활 기반을 잡았습니다.
그 여자가 왜 손톱 다듬기에 매료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런 사례를
정신분석학적으로 이리저리 해석할 수 있겠으나 중요한 것은 그런 해석이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여자가 인생의 어느 단계에서 손톱 다듬는
일을 하면서부터 어렴풋하게나마 몰입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몰입할 때 행복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 몰입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위의 여자는 우연히 손톱 다듬기를 통하여 몰입을 경험하였습니다만
몰입하는 데는 이것이 최고다 하는 것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내가 몰입 할 수 있는 내 나름의 삶의 방식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칙센트미하이에 의하면 몰입이란 약간은 힘겨운 과제나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의 실력을 온통 쏟아 부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발췌: 칙센트미하이, 몰입의 즐거움, 해냄, 56-57]
오늘 우리는 복음사가 루카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루카가 쓴
복음에는 다른 세 복음서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특별히
성모님께서 가브리엘 천사를 만나 어떤 대화를 나누었고 어떻게
처녀의 몸으로 성자께서 사람이 되시는지가 나옵니다.
이 사건은 가브리엘 천사와 성모님, 두 분의 비밀스런 에피소드
였습니다. 성모님은 당신이 원죄 없으심을, 그것이 교의로 선포
된지 4년 뒤인, 1858년에 루르드 발현으로 벨레뎃다에게 알려주십니다.
이처럼 겸손하신 성모님은 당신의 비밀을 좀처럼 드러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카는 베일에 쌓여있던 성모님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었고 그것을 적어 후대의 사람들도 그것을 읽고
그리스도 잉태의 신비를 알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루카는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었으면서 이 깊은 비밀을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일까요? 루카는 나중에서야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이었지만, 집요하게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했을
것이고, 성모님도 직접 만나 귀찮을 정도로 그 비밀을 알려달라고
졸랐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왜 굳이 그런 것들을 알려고 하세요? 그냥 알고 있는
것이나 잘 지키며 살면 되지. 때 되면 안 알려 주시겠어요?”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 루카가 그렇게 넋 놓고 앉아만 있었다면
감추어진 예수님의 잉태 비화는 성경에 실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신비를 더 알려고 한 루카의 열정이 감추어진 비밀을 열리게
했고, 이웃에 대한 그의 사랑이 그 비밀을 글로 기록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루카는 성령강림이나 사도들의 복음전파 한
내용들을 정리해서 사도행전을 썼습니다. 사도들의 행적도 기록에
남겨놓아야 후대에 초대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성장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시작했을 것입니다.
만약 자신만 복음전파를 열심히 하고 그런 것들을 글로 남겨놓지
않았다면 현 시대에, 교회는 후대에 제자들이 작당하여 만든
집단이라고 해도 그것을 반박할 증거가 희박했을 것입니다. 루카는
이렇게 끝까지 알아내고, 그것을 후대에 전하는 사명을 완수하였습니다.
이런 면에서 루카는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무언가를 세상에
전해주기 위해 그 진리를 수집하는데 평생을 몰입할 줄 알았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몰입할 줄 안다는 것은 그것에 흥미를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내가 흥미 없으면 다른 사람도 흥미 없습니다.
라틴어에서 흥미(inter-est)라는 단어는 “사이에 있다”라는 뜻을 가진
inter sum의 삼인칭 단수 현재 서술형입니다. 흥미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두 가지 사이에 개입하는 일을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흥미는
가지는 것이 둘 사이에 서서 연결시켜주는 것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사람에게 흥미가 있다면 하느님과 사람을 알려고 하는 사이에
둘 사이를 중재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정신분석학 용어 사전에서는 흥미를 “물건이나 사건이 만드는 변화에
대한 태도나 감정, 혹은 자신에 대한 관심 대상의 특징에 대하여 완전히
알려고 노력하기”라고 정의합니다. 무언가를 완전히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그것에 전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멀리 나가야만 선교가 아닙니다. 오늘 루카 성인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행적에 흥미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자료를 수집하는데 온 에너지를
쏟으며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장사를 하는 사람이 자신이 파는 물건에 대해 흥미가 없거나 자세히
알지 못한다면 누구도 그 물건을 사도록 설득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하면서 그 분을 알기 위해 온 정신을
쏟아 몰입할 정도로 흥미를 지니고 있는지부터 살펴야겠습니다. 내가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남도 알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내가 먼저
맛 들입시다. 남들은 내가 좋아하는 모습만 보아도 그것에 흥미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평화가 깃들기를 기원하라고 하신 점
2013년 다해 10월18일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평화가 깃들기를 기원하라고 하신 점
친구나 남의 집을 방문 때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라고 말합시다.
첫마디로 말입니다. 다음은 자유입니다.
몇 평인지 얼마 줬는지 가구나 주방 같은 건 말입니다.
무슨 관점으로 남의 집을 생각하며 사는지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직업 직위 봉급 자녀들 수준 자동차 가구 등 외형적 모습에 관심 있지요?
예수님은 이런 관심 말고 평화가 깃들기를 기원하라고 하신 점 명심합시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루카 10,5)”
-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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