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귀웅신부-
머슬로우라는 심리학자는 인간에게 다섯 가지의 욕망이 있다고 정리했습니다. 첫째는 생리적인 욕구로 생명 유지와 연관된 먹고 싸고 자고 하는 것 등입니다. 이 욕구가 채워지면 두 번째로 생리적 욕구를 안정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하는 욕구, 즉 안전과 안정을 추구하는 욕구가 뒤따릅니다. 이어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단체나 사람들 속에 소속되기를 바라며 다른 이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소속과 애정을 추구하는 단계의 욕구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네 번째로는 그런 관계 안에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승인받으며 스스로 그 안에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싶어 하는 욕구 즉 승인과 자존의 욕구가 존재합니다. 이상의 네 가지 욕구를 “결핍 욕구”라고 합니다. 결핍된 만큼 의식에 자리를 차지한다고 하는 것이지요. 마지막 다섯 번째는 자기실현의 욕구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현재의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지 않고 참으로 인간다운 모습, 본래의 자기 자신이 되려는 욕구, 이 세상에 사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실현시키고 싶어 하는 욕구가 모두에게 있다고 합니다. 이 자아실현의 욕구가 인간을 참된 인간이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산을 바다로 옮길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도 그것이 앞의 네 단계 욕구를 위한 것이라면 우리는 늘 새로운 욕구에 목마를 것입니다. 간절히 기도했더니 이루어졌다는 것보다는 특별히 바라는 것 없이 늘 감사하며 지내고 싶습니다
-도희찬 신부-
이런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옛날 중국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에 첩자를 보내 은나라를 살펴보고 오라고 했습니다.
얼마 후 돌아온 첩자가 은나라는 혼란에 빠져있다고 했습니다.
무왕이 어느 정도로 문란해지고 있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사악한 자들이 충성스러운 자들을 억압하고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왕은 그 말을 듣고 “망하기에는 아직 멀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지 얼마 후 또다시 은나라를 염탐하고 돌아온 첩자가 무왕에게 보고하기를
혼란이 극에 달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어느 정도인가 하고 무왕이 물었습니다.
그러자 첩자는 지혜롭고 덕이 있는 사람들이 나라를 버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무왕이 “아직 멀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세 번째로 갔다 오더니 첩자는 망국의 조짐이 완연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왕이 “뭘 보고 그러느냐?”라고 물으니 첩자는
백성이 불평도 말하지 않게 됐다고 답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무왕은 군사를 보냈습니다. 겨우 3천명밖에 안되는 병력을 보냈는데도
별다른 저항도 받지 않고 손쉽게 은나라 왕 주를 사로잡았습니다.
원래 나라를 망치는 것에 관한 이야기인데 좀 더 다른 면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고인 물이 썩듯이 변화가 없을 때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끄는 것 중의 가장 위험한 것이 바로 무관심입니다.
사회든, 단체든, 삶이든, 고여있는 것을 생각 않고 무관심해지면 자연히 망하게 됩니다.
바꾸어 말해서 그냥 젖어 흘러가는데로 두고 무관심해질 때 변화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변화가 없으면 발전이란 없고 퇴보하거나 망할 수 있습니다.
나라를 망하게 하는 제일 좋은 방법이 무엇일까요?
분란을 일으키고 잘못된 일을 하면 잘 망할까요?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어떻게 돌아가든 무관심한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가정을 망치는 제일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안좋은 짓만 골라서 하는 것일까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이 서로에게 관심이 없으면 자연스레 망하게 됩니다.
농사를 망치는 데 제일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잡초를 뿌리면 될까요?
아니면 병을 옮길까요? 아닙니다. 그냥 가만 놔두고 관심을 안가지면 제대로 잘 망칩니다.
자기 삶을 망치는 제일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안 좋은 일만 골라서 하는 것?
아닙니다. 잘못 된 것이 있어 변해야 하는데도 그냥 거기에 젖어서 무관심하게 대충 사는것
그러면 자연스럽게 망칩니다.
교회를 망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사사건건 반대하고 분열을 일으키면 될까요?
굳이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냥 되는대로 흘러가고 대충 주일미사나 때우고 대충 지켜야 할 것만 지키는 것으로 무관심하게 내버려두면 알아서 망합니다.
물론 변하지 않아야 할 것도 있습니다. 의지하고 살 변하지 않는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나 정, 신뢰나 혹은 상식, 예의 등등입니다.
하지만 변해야 할 것도 있습니다. 잘못되고 고여서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참된 삶이란 이 두가지를 균형있게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가 조화를 이루어서 서로를 이끌면서 살아갈 때 삶이 충만해집니다.
안정에 집착해서 변화를 거 부하고 틀에 박힌 생활만 한다면 그것은 죽은 삶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아무런 바탕과 근본적인 것이 없이 바람이 부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생활한다면 아무 중심이 없이 막 살아가는 인생이 됩니다.
우리의 삶을 위해 몸담고 있는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변하지 않는 가장 확고한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그 믿음의 대상인 하느님께서 사랑과 자비에 있어 바위와 요새처럼
변함없으신 분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위안이 됩니다.
하지만 신앙의 삶이란 근본적인 것과 변화해 가는 것,
이 두가지가 조화를 이루어야만 참된 것이 아닐까합니다.
오늘 복음은 그러해야 할 신앙의 삶에 대해 가르쳐 줍니다.
오늘 이야기는 주님께서 분노하여 성전의 상인들을 내쫓으시면서 벌어지는
성전정화 사건입니다.
정화라는 말은 깨끗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바꿔말해 올바르게 변화시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행동은 단지 성전이라는 장소를 깨끗하게 만드는 일이 아닙니다.
거룩한 성전이라는 곳 답게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팔지 못하도록
장소를 정화시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성전을 통해 하느님을 흠숭하는 일에,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의 삶에 대해
올바로 생각하고 참된 관심을 가지라고 사람들 마음에 변화를 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기 위해 제물을 바치고
그 제물을 성전에서 파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고 편리한 일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진정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그릇된 것을 당연히 반복하고
계속 무관심하게 흘러가는 신앙의 모습에 대해 변화를 요구하십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합니다.
세상이 바뀌어야 하고, 경제가 바뀌어야 하고, 교회가 달라져야 한다고 합니다.
또 우리 남편, 아내, 자식, 부모, 시부모, 며느리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웃이, 친구가, 더 정확하게 말해서 니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짐나 정말 그 모두가 바뀌려면 내가 먼저 바뀌어야 합니다.
구태의연하게 지켜야할 주일미사와 의무적으로 바쳐야 할 기도나 금육,
삼종기도 등이 신앙의 전부인양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그저 소와 양이나 비둘기를 바치는게 다라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처럼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내 삶에 변화란, 바뀌는 것이란 없습니다.
신앙은 나에게 아무런 것도 주지 못하고 내 삶에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단지 보기 좋은 신앙인이라는 명찰만 달아줄 뿐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삶에서 변화되기를 바라시는 부분,
나의 삶과 신앙에서 내가 제대로 관심을 가지기를 원하시는 부분이 무엇인지
오늘 한번쯤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김종규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 뜰 안으로 들어가셔서 거기에 장사꾼들을 내쫓으시고 환전상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한탄의 말씀을 하십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거룩한 이곳을 너희들은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구나!”
성전은 유대인들에게서 신앙의 중심이자 하느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다는 거룩한 현존의 표지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서 하느님이 계신 거룩한 성전에서 기도하고 제물을 바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 공경과 감사와 찬미의 제사를 드려야 할 곳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 필요한 제물을 팔는 장사꾼들이 득실거리고, 성전세를 내기 위해서 로마나 그리스 화폐를 이스라엘 화폐로 바꾸어 주는 환전상이 판을 치게 됩니다.
그곳은 더 이상 정성껏 기도하고 찬미하는 거룩한 성전이 아니라,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돈과 물질로 판을 치는 강도 소굴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을 내쫓으면서 성전은 거룩한 기도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참된 제사는 비싼 제물이나 많은 헌금이 아닙니다. 그것은 과부의 동전 두 닢 봉헌을 가장 기뻐하시는 하느님을 우리는 알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마음과 정성에 있습니다.
많은 죄를 용서 받기 위해서 많은 헌금을 내야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잠시 다른 어떤 것에 자신의 마음을 빼앗겼다면 이제는 다른 어떤 것보다 하느님을 먼저 선택하고 그 분께 정성을 다해 섬기겠다는 마음, 그리고 그 분께 믿음을 고백하고 사랑을 고백하고 다른 이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겠다는 그러한 마음, 그리고 행동과 나눔 실천..... 그것이야 말로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크고 좋은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성전을 거룩한 곳으로 정화하신 것을 보면서 우리 모두는 자신의 성전 또한 더욱 거룩한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성전은 분명 하느님이 현존하시는 곳, 하느님과의 만남과 대화가 이루어 지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자신의 성전은 공동체 성당 건물만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 우리 개개인이기도 합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의 거룩한 성전이라는 말씀입니다. 성체를 통해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 안에 모시고 살기에 더없이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기 자신의 성전이 더욱 거룩한 곳으로 가꾸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좋은 제물을 봉헌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성전이 다른 물질적 욕망과 죄로 인해 강도의 소굴과 같은 곳이 되지 않고 정말 경건히 하느님을 모시고 찬미하고 기도할 수 있는 곳인지 늘 살펴보고, 그렇게 만들어 나갈려고 노력하는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바로 거룩한 하느님의 성전이기에 다른 쓸모없는 생각들, 욕심들을 다 몰아내고 순수한 자신의 마음들, 진실들, 그 믿음을 고백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거룩한 성전에서, 우리의 작은 성전에서 늘 천사의 환호와 노랫소리가, 그 찬미와 기쁨이 늘 울려 퍼질 수 있다면 우리 아마도 세상에서 훌륭한 하느님의 성전, 살아있는 거룩한 성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고 충만한 기쁨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아멘.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
-정복례 수녀 -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성전에 들어가시니 하느님의 집은 강도의 소굴로 변해 있었다. 하느님의 집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은 마치 분출하는 화산처럼 격정에 휩싸인다. 그러나 만민이 기도하는 집에 대한 그분의 속사랑은 깊은 강물처럼 그분 안에서 도도히 흐른다.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예수라는 존재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다. 예수님이 나타나기 전에는 모든 것이 안정된 모습이었다. 희생제물로 바칠 비둘기나 그 밖의 소나 양을 파는 장사들이나 로마―그리스 화폐를 이스라엘 화폐로 바꿔주는 환전상들도 그리고 성전 안의 상행위를 눈감아주는 성전의 지도자들도 서로의 이권이 개입된 이 일에 아무런 불평이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타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하느님 집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는 예수님의 가슴은 터질 것만 같았다.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성전을 정화할 거룩한 의무를 느끼기 때문이다. 당신이 떠나면 이 백성은 목자 잃은 양떼처럼 방황할 것이고, 대사제라는 것들은 이리떼나 마찬가지여서 불쌍한 백성들을 등쳐먹을 생각밖에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하리라”고 기록된 성서의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성전 정화에 열정을 쏟으신다.
우리는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예수님의 불 같은 열정과 목자 잃고 헤맬 양들을 생각하며 가슴 아파하시는 예수님의 연민의 정을 함께 느끼는 가슴을 가져야 하리라. 영화 ‘모터 사이클 다이어리’의 주인공 체 게바라가 생각난다. 이 영화는 그의 생애 전반부만 보여주므로 그의 진면목이 나타나지 않지만, 그의 생애 후반부를 보면 불의에 정면 도전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체 게바라는 “나를 이끄는 유일한 열정은 진리에 대한 열정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아르헨티나 출신 의사로서 불의가 판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갈 준비가 된 의로운 사람이었다. 피델 카스트로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통하여 그는 게릴라에 합류하며 쿠바 혁명에 가담하고 성공으로 이끈다. 그리고 제삼세계를 등쳐먹는 자본주의 국가들의 횡포와 맞서 싸우다가 결국은 볼리비아에서 젊은 나이에 피살된다.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체 게바라와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열 명만 더 있어도 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의로운 세상으로 변화되리라.
지나고보면 참으로 짧은 것이 우리 인생이다
- 성바오로 수도회 수사님들의 말씀 묵상-
나는 누구인가?
"여러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1고린 3,16)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성전이다.
내안에 거룩한 내용은 하나도 들어있지 않고,
반대로 불순하고 세속적인 것만 있을 때
나는 거룩하신 하느님을 질식하게 만든다.
하느님을 아프게 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나또한 아프게 되어 병든다.
내가 아무리 세상일로 바쁘다 하더라도
더러는 짬을 내어 하느님께 시간을 내어드릴 줄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시간을 내어 하느님과 대화를 나눌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않으면 나는 내안에 거룩한 것이 아닌
세속적이고 불순한 것들로만 나를 가득 채우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과 대화시간을 가지는 것은
어떠한 변명과 핑계를 대어서는 안된다.
그만큼 절대절명으로 중요하다.
이런 말을 하면
나더러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사실 그렇다.
그러나 나는 다행히도 믿음으로 영원한 삶을 알고있기 때문에
이세상에서의 삶만을 바라보는 짧은 안목이 아니라
영원한 삶을 바라보는 눈을 가질 수 있었다.
세속적인 현실을 보는 데는 근시안이지만
영적인 현실을 보는 데는 민감하기 때문에
과감하게 말할 수 있다.
내 삶에서 하느님께 시간을 내어드리지 않으면
나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언젠가는 방황하다가 후회할 날이 오게된다.
우리의 인생은 길어보이지만
지나고보면 참으로 짧은 것이 우리 인생이다.
오늘을 마감하기 전에 조금이나마 시간을 내어
'나'라는 성전안에 머무면서 조용히 기도해보자.
기도의 집으로 만들어보자.
참으로 큰 평화와 기쁨을 맛볼수 있을 것이다.
세속적이고 타산적인 불순한 계산으로
나를 하루종일 강도의 집으로 만들지 말아야 할 것이다.
믿음의 위대함
-조욱현신부-
"산을 옮긴다"는 표현은 유다인들의 생활 속에서 매우 친숙한 표현이다.
이 말은 아주 훌륭한 스승에 비유해서 말했는데,
즉 학생들의 곤란한 문제를 해결해 주었을 때,
'산을 옮기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러기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란 하느 님을 온전히 믿는 큰 믿음이며
이 믿음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정화하 신다.
이 때문에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미움을 사시고 없애려고 모의를 하게 된다.
성전에 서 하신 일이 그들에게 눈에 거슬렸던 것이다.
주님의 수난은 이렇게 조금씩 다가오고 있다.
성전에서 나와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있는 것을 보았을 때
제자들은 놀랐을 것이다.
이 때에 예수님은 강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하신다.
1. 기도는 믿음이 있는 기도라 야 한다.
믿음이 있으면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기도가 힘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솔직하게 어려운 문제, 곤란한 일,
즉 나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하느님께 가지고 나 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없는 것을 일부러 부풀리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하느님 께 맡길 수 있어야 한다.
또 그러한 일을 당할 때, 그것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라면
언제나 받아들일 마음의 자세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일을 해결 해 나갈 수 있다.
즉 믿음과 겸손한 자세이다.
2. 기도는 하느님께로부터 이미 받았다는 확신을 갖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
'이것을 주님께서 들어 주실 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그것은 의심하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들어주시지 않는다는 말을 어느 분 이 하였다.
온전히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기에 기도가 단순히 형식적 이거나, 경건한 의식에만 치우치거나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미한 소망이어서는 안된다.
하 느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다.
3. 기도는 용서를 통한 사랑의 기도여야 한 다.
하느님과 대화를 한다면 우리와 하느님 사이에
서로 통하는 친밀감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사랑을 통하여 가능하다.
그런데 기도하는 사람이 그 전에 용서하는
사랑의 마음이 없다면 하느님과의 사이에 장벽을
스스로 쌓는 결과가 될 것이다. 즉 기도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 로 자신을 돌아보며 타인을 용서하는 가운데
사랑의 마음으로 기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진정한 믿음을 갖고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그러면서 용서를 통한 사랑의 기도가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노력하여야 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이러한 삶으로, 이러한 기도로 우리는
하느님께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은총을 구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
† 성전정화 : 잃어버린 거룩함을 다시 찾는 것 †
-박상대신부-
일찍이 마르코는 예수께서 가파르나움에서 하룻동안 하신 일을 엮은 바 있는데(1,21-39), 마르코복음 11장을 예루살렘에서 사흘 동안 하신 일로 구성합니다. 즉, 예수께서는 매일 베다니아를 출발하여 낮동안 성전에서 활동하신 후에 날이 저물면 베다니아로 돌아오십니다. 첫날은 베다니아에서 출발하여 군중의 환호를 받으며 영광스럽게 입성하신 후에 성전을 돌아보시고 돌아가십니다.(1-11절) 둘쨋날은 성밖에 있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낸 후에 다시 돌아가십니다.(12-19절) 세쨋날은 무화과나무를 지나 유대교 지도자들과 치열한 논쟁을 벌인다음(20-33절), 성전을 떠나 올리브산위에서 성전파괴와 이스라엘의 파국을 예언하십니다.(13,1-3)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는 내용은 자연을 상대로 한 이적사화이기에 이해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이 징벌에 대하여 많은 설들이 있지만 많은 학자들이 동조하는 가설은 다음의 성서 구절이 참고가 됩니다. "아, 답답하구나. 여름 과일을 따러 나섰다가, 포도 송이를 주우러 나갔다가, 먹을 만한 포도 송이 하나 얻지 못하고, 먹고 싶던 맏물 무화과 하나 만나지 못하듯, 이 나라에선 하느님의 은덕을 보답하는 사람 만날 수 없고 정직한 사람 하나 찾아 볼 수 없구나. 모두가 피에 목말라 숨어서 남을 노리고 저마다 제 겨레를 잡으려고 그물을 친다."(미가 7,1-2) 또는 "내 말이니 잘 들어라. 이 백성 가운데 행여나 쓸 만한 자가 있는가 찾아 보았지만, 포도 덩굴에 포도 송이 하나 없고 무화과나무에 무화과 열매 하나 없이 잎마저 말라 버린 꼴이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을 시켜 불살라 버리리라."(예레 8,13)
열매가 없어서 저주받아 말라죽어 버린 무화과나무는 우리에게 주시는 따끔한 경고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맺어 길손의 허기를 채워주라고 그 자리에 있었지만, 불행히도 잎만 무성했지 열매가 없었습니다. 만약 우리의 삶도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고 허송세월을 보내버리게 될 때, 마침내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처럼 말라 비틀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순간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열심히 살아서 우리 삶이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야합니다. 사랑, 인내, 용서, 기쁨, 평화, 온화함과 같은 열매들이 사람들의 정신적인 갈증과 허기를 채워주고, 이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데 기여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성전 정화는 네 복음서 모두가 전하고 있는 사건입니다.(마태 21,12-13; 마르 11,15-18; 루가 19,45-46; 요한 2,13-22) 그런데 공관복음서들이 이를 예수님의 공생활 말기에 있었던 사건으로 전하고 있는 데 비해,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에 두고 있다는 점이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예수님의 성전정화사건이 정확히 어느 시점에서 발생했던 간에 그 내용은 같은데, 요한복음사가는 이 사건을 예수님의 공생활 서두에 둠으로써 성전정화의 의미가 공생활 시작과 큰 관련이 있음을 암시한고, 공관복음은 성전정화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재촉하는 사건으로 받아들입니다.(18절)
예수께서 열정으로 정화하시는 예루살렘성전은 이스라엘의 종교와 삶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 안에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의 궤가 모셔져 있었고 이는 야훼 하느님의 현존과 그들의 선민과 구원을 상징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전의 참된 상징은 장사꾼들의 지나친 상혼에 가려있었고, 그 뒤엔 제사장들의 권력과 결탁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강도의 소굴'이 된 성전을 정화하신 이유는 성전이 예수님의 집이기 때문입니다.(17절)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통틀어 하나밖에 없는 성전, 바로 그 집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도 "나의 집은 뭇 백성이 모여 기도하는 집이라 불리리라."(56,7)고 했습니다. 더럽혀진 성전이 상인들을 쫓아내는 것만으로 다시 성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화는 기도로 이루어지며, 예수님의 현존과 말씀을 통하여 성전은 자신의 잃어버린 거룩함을 다시 찾는 것입니다.
이는 적어도 예수께서 계시는 동안만은 가능하고, 그 다음에는 예수님 스스로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신약의 새로운 성전이요 하느님의 집이 되실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전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님은 빗자루를 손에 들었습니다. 이는 유대교를 말끔히 청소하기 위함입니다. 구약을 폐기하고 신약을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신약의 참된 성전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 바치는 건물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몸입니다. 신약의 성전이 또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성체성사를 통하여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시는 우리 자신들의 몸입니다. 이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1고린 3,17)이기 때문입니다.물론 신앙의 공동체가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하며 성체성사를 거행하기 위하여 함께 모이는 성당 또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성전은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요,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와 사랑을 체험하고, 우리 가운데 있는 하느님의 나라를 체험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성전은 무엇보다 기도하는 곳입니다. 기도가 없는 성당은 성전이기보다 하나의 건물이 되고 맙니다. 예수께서 아버지께 드렸던 기도, 예수님의 세상에 대한 열정으로 선포하셨던 말씀과 성사, 이것이 없는 성당은 하나의 건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자들은 물론 신자들도 예수님처럼 자주 손에 빗자루를 들고 우리의 성전과 마음의 성전을 정화하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