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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8. 묵상글 들( 연중 제20주간 수요일-누구를 어떻게 뽑을 것인가?. 등 )
## 앞 부분에 비대면 미사 신부님 강론을 안내합니다.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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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18일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매일미사
https://youtu.be/vWwi8bi31rA 31:10
2021. 8. 18.
cpbc TV_가톨릭콘텐츠의 모든것
나종진 스테파노 신부 (서울대교구 노인사목팀 담당) 집전
***신부님 강론 11:02부터 16:55까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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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18일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목동 성당 미사
https://youtu.be/2o8IPp6Nwa8 45:13
** 04:34부터 시작
21. 08. 18. 10:00
천주교목동성당
***주임신부님 강론 17:23부터 26:33까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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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8.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누구를 어떻게 뽑을 것인가?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비유로서
주님 포도밭, 곧 하느님 나라에서는 일찍 일한 사람이나
늦게 일한 사람이나 똑같이 상급을 주신다는 가르침입니다.
이렇게 차이가 나게 일했음에도 똑같은 상급을 주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 인간의 공정인 데 비해
하느님의 공정은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과 비를 주시는 사랑의 공정이기에
옛날에도 이것은 문제고 지금은 더더욱 예민한 문제입니다.
특히 요즘 젊은이들은 정의나 평화나 사랑보다도 공정에 더 예민하기에
이 문제를 가지고 복음 나누기를 하고 싶은 마음도 있으나
지금까지 오늘 독서에 대한 강론은 한 적이 없기에 오늘은
판관기의 말씀을 가지고 나눔을 하고자 합니다.
오늘 얘기는 왕이 다스리지 않고 판관들이 다스리던 이스라엘이
왕이 있는 주변 나라들과 비교하며 왕을 세우려는 것에 대한 비유입니다.
어느 집단이든지 안정과 질서를 위한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필요하기는 한데 문제는 그 필요한 지도자가 악인 경우가 많지요.
가끔 아버지가 없는 사람과 아버지가 폭군인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이 더 불행한지 비교하는 얘기를 하곤 합니다.
아버지가 없어 불행하다고 생각한 사람은 자기가 더 불행하다고 하고,
아버지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한 사람은 자기가 더 불행하다고,
차라리 아버지가 없는 것이 낫다고 하지요.
제 생각에도 아버지가 필요하긴 하지만 폭군인 경우에는
없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경우 왕들도 마찬가지로 필요악입니다.
그래서 오늘 판관기는 아주 재미있는 비유를 듭니다.
사람을 이롭게 하는 올리브 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는 왕이 되기를
거부하는데 가시나무만 자기가 왕이 되기에 합당하다고 하며 수락합니다.
그런데 재미있지 않습니까?
가시나무는 남을 찌르고 아프게하는 나무잖습니까?
우리의 현실에서도 남을 이롭게 할 것같은 사람은 장의 자리를 피하고,
남을 아프게 할 사람들이 장이 되고자 하며,
사람들은 속아서 그런 사람을 자기들의 장으로 뽑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즘 대선 후보들이 출마를 하고
누가 적합한지 많은 분이 저에게 묻습니다.
제가 대답할 리 없지만 신자들이라면
신앙의 눈과 복음의 눈으로 식별해야 한다는 정도는 얘기합니다.
신앙의 눈으로 식별한다는 것은 인간적인 정파성에 따라 보지 않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누구일까 그런 시각으로 보는 겁니다.
구약에서 왕도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판관도 이스라엘을 다스리지만
그 차이점이 판관은 하느님을 대신하여 다스리는 데 비해
왕은 자신이 바로 왕들의 왕인 하느님인 양, 다시 말해서
하느님 밑이 아니라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다스리는 자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복음에서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에게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셨고
Servant Leadership, 곧 섬김의 다스림에 대해서 말씀하셨지요.
그러므로 복음적인 시각이란 정파와 나의 이익을 떠나서 이 복음 말씀에
비추어 현재의 지도자들도 판단하고 미래의 지도자도 식별하는 것입니다.
부디 어느 정치가의 똘마니가 되지 마시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복음을 가지고 정치가들을 판단하고 식별하는 우리가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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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8.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어떤 일이든 사랑을 담아서 하라
하느님께서 주신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애정이나 남을 동정하는 마음을 인정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고 또한 나누며 살아갑니다. 그 안에서 어떤 사람은 따뜻한 마음을 지녀서 인정미 넘치는 사람으로 부르고 어떤 사람은 야박하여 인정머리가 없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자기도 모르게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바로 몰인정한 사람입니다. 몰인정한 사람은 세상에는 좋은 것이 많은데 좋지 않은 것을 더 많이 얘기하고 그것으로 마음에 화를 담기도 합니다. 물론, 더 좋은 것을 만들기 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자꾸만 부정적으로 생각하여 봐야 할 것을 올바로 보지 못하게 됩니다. 자기는 잘하고 있다고 확신을 하고 있는데 남들이 보면 전혀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잘한다고 하는 것이 자기모순에 빠진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인정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포도원 일꾼과 품삯에 대한 비유입니다. 9시, 그리고 12시와 오후 3시, 그리고 오후 5시쯤에 일꾼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일꾼들의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하였습니다. 주인이 품삯을 계산하는데 5시에 온 사람을 먼저 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일찍 와서 일하던 사람들은 약속과 다른 더 많은 기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대가 무너지자 실망하였습니다. 그래서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주인이 약속을 어긴 것도 아닌데 상대적인 박탈감, 시기심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입니다. 그는 정의를 강조하는 모습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다른 이가 좋은 것을 얻는 모양새를 두고 내 안에서 악을 꺼내는 감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상대의 좋은 것을 파괴하고 싶어 하는 못된 욕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생각을 바꿔보면 어떨까요? 어렵고 힘든 사람이 그 시간에 일해서 당당하게 그만큼을 벌었다고 한다면 그는 남에게 손을 벌려 동정을 받지 않았기에 자존심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절박함에 처한 사람이 그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겠습니까? 내가 그들의 부족함을 채워주지 못하였는데 누군가 챙겨주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정의보다는 사랑이 먼저입니다. 사랑은 정의를 포용하지만 정의는 결코 사랑을 포용할 수 없습니다. 사실 불평불만도 습관이 됩니다. 그러니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서 만족하고 더 나은 내일을 위해서 노력할 것이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불평할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후하다고 해서 시기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비에 감사하고 나도 크게 베풀 줄 아는 인정을 지녀야 합니다. 주인이신 하느님의 것을 세상의 것처럼 생각하는 우리가 잘못이 아닐까요?
인력시장에 가보신 적 있으시나요? 많은 사람이 이른 새벽부터 일을 하기 위해서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야말로 매일 팔려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날은 누구도 자기를 선택하지 않습니다. 종일 기다리다 허한 마음으로 쓰디쓴 하루를 마감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수가 좋아서 일찍 팔려나갑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기쁨이고 감사입니다.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고역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찍 일을 나간 사람이 뒤늦게 일을 한 사람과 똑같은 임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찍부터 일을 한 것이 재수가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마음이 한순간에 사라졌습니다. 주인에게 실망해서 불평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주인이 잘못한 것인가요? 실망과 좌절로 기다림에 지쳐있다 뒤늦게 일을 한 사람은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주인의 자비가 얼마나 크고 사랑이 많은지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기쁜 소식이고 복음입니다. 만일 우리의 업적에 따라 보상이 결정된다면 우리는 더이상 희망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족함에도 후하게 주시기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일을 많이 하고 적게 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어떤 정성을 쏟았느냐가 중요합니다. ‘얼마나’가 아니라 ‘어떻게’가 먼저입니다. 그러므로 매사를 긍정으로 생각하고 정성을 쏟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늘나라의 관점은 정말, 일의 성과가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을 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잘 가꾸어야겠습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하였어도 사랑이 담기지 않으면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한 것처럼 보여도 사랑이 담기면 많은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일을 하든지 사랑을 담아서 하기 바랍니다.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마태6,23)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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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8.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오."
오늘 <복음>은 하늘나라를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해주십니다. 이 비유 속에는 하느님의 보화, 곧 하느님 자비의 신비가 있습니다.
이 신비는 <첫째>로, 포도원 주인은 대체 때를 가리지 않고 품꾼을 불러들입니다. 그는 이른 아침부터 하루 일과가 다 끝나갈 저녁 무렵까지, 다섯 차례나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손수 장터로 나가, 품꾼을 불러들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일의 능력이나 실적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도 않고, 오히려 병들고 노쇠해서 팔려가지 못하고 남은 사람들을 포도원으로 불러들입니다. 도대체가 계산이라고는 모르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주인입니다. 사실은 애시 당초부터 일을 부리기 위해 품꾼들을 불러들인다기보다, 그들을 살게 하기 위해 불러들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르심 그 자체가 이미 은총입니다. 이는 하늘나라가 당신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불쌍한 우리를 위하여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이요, 하느님의 자비임을 드러냅니다.
<둘째>로는, 품삯을 줄 때에 맨 나중에 불려 온 자부터 줍니다. 상식적으로는 이른 아침부터 온 품꾼에게 먼저 주는 것이 타당할 것이지만, 굳이 순서를 바꾸어 역순으로 품삯을 주는 것은, 오후 늦게서야 일터로 부름 받게 된 이들에 대한 주인의 깊은 배려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이 없는 까닭에, 하느님의 자비에 내맡길 수밖에 없는 “꼴찌”들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가장 필요한 자에게 우선적으로 흘러들 수밖에 없는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인 선택을 말해줍니다. 곧 가장 불쌍한 자에게, 가장 먼저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냅니다.
<셋째>로는, 모두에게 똑같이 고루 품삯이 주어집니다. 포도원 주인은 일한 만큼의 형평에 맞게 정당하게 노동의 대가를 셈쳐주지 않았습니다. 일한 시간이나 일의 실적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도 않고, 무조건 똑같은 품삯을 고르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먼저 온 자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가 아니라, 계약을 맺은 정당한 대가가 지불되었으며, 단지 뒤에 온 이들에게는 자비가 베풀어졌을 뿐입니다.
이렇게 정당함에 자비를 더하여 쳐주는 포도원 주인의 권한행사와 너그러운 처사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자비를 말해줍니다. 그러니 이는 하늘나라가 인간이 일한 대가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주권적인 사랑이요, 자비임을 밝혀줍니다.
결국, ‘꼴찌가 첫째가 되는 이 비유’는 이 지상에서의 꼴찌들에게 대한 보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를 드러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치 포도원 주인이 애초부터 은혜를 베풀기 위해 품꾼들을 포도원으로 불러들였듯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 교회로 불러들이십니다. 여기에는 먼저 온 자와 나중 온 자가 따로 없으며, 모두가 큰 자비를 입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가멸은 처지를 슬밉다 하지 않으시고, 비천한 신세를 자비로 돌보시는 무한하신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영광과 찬미를 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앞세우는 데는 “첫째”가 되고, 자기를 내세우는 데는 “꼴찌”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마태 20,4)
주님!
당신은 무능하여 맨 나중에 올 수밖에 없었던
꼴찌들부터 품삯을 주십니다.
애시 당초 일을 부리기 위해 불러들인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 불러들이신 까닭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부르심은 이미 은총입니다.
은총은 계산이 아니라 자비셨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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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8.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선택적이면서도 전체적이며, 단계적이면서도 보편적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선택하신 것은 그들만이 구원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었고, 그들 모두가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하게 변화된 다음, 거룩함의 매력으로 다른 민족들에게 빛을 밝혀서 결국 온 인류가 하느님께로 나아오게 하시려던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선택적이었기에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히브리들을 해방시켜서 당신 백성으로 선택하신 것이었으며, 또한 그 계획이 전체적이어야 했기에 왕이나 귀족들을 인정하지 않고 당신의 뜻을 전할 심부름꿈만 세우고서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하느님의 뜻을 알아 듣고 그대로 실천하도록 하시려고 하느님께서 몸소 이스라엘의 목자 역을 자처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흘러간 이스라엘의 역사는 선택적이며 전체적인 이 하느님 구원 계획을 알아 듣지 못했고, 이방 민족들처럼 왕을 내세우고자 했습니다. 이는 하느님을 목자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고, 다른 이방 민족들처럼 우상을 숭배하며 살아가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요탐이 들려준 이야기는 바로 이 대목을 풍자한 이야기였습니다.
왕은 상비군을 만들어 백성 중에 남자들을 전쟁터로 끌고 갈 것이었고, 여자들을 궁궐로 데려갈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상비군을 유지하고 궁궐을 유지하느라 무거운 세금을 백성들로부터 거두어갈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 안에서는 아무도 억압당하지 않아야 했고, 그 누구도 착취당하지 않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목자로서 와서 보시니, 하느님 백성으로 선택된 이스라엘의 상황과 처지는 참담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그래서 포도밭의 비유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일을 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일자리는 안정되어야 하며, 또 일해서 얻은 품삯은 공평해야 했습니다. 누구나 자기 가족을 부양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두고, “경제는 인간에게 봉사해야 한다.”고 사목헌장에 천명하였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이 최근에는 인간에게 봉사해야 하는 경제 질서를 구현하기 위해 기본 소득, 기본 대출, 기본 주택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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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8.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조명언 마태오 신부님.
고등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을 만나 대화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제게 “신부님, 아저씨 같아요.”라는 것입니다. 솔직히 이 말을 듣고서 순간적으로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판단이 되지 않더군요. 제가 스스로 잘 꾸미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제가 하는 말투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저씨 같다’라고 말이 그렇게 기분 좋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 말을 듣고서는 기분이 좋아야 합니다. 할아버지로 본 것은 아니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아저씨로 봐야 합니다. 50대 중반을 향하는 저는 생물학적으로 분명히 아저씨입니다. 이 학생은 신부니까 다른 아저씨처럼 고리타분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별 차이가 없으니 이런 말을 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한 말에 기분 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당연한 말에 기분 나빠할 필요가 없고, 이 말에 나를 변화시켜야겠다는 마음이 들면 그렇게 노력하면 그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향한 주님의 모습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역시 당연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리고 나를 변화시키는 노력을 하면 그만입니다.
포도원 일꾼의 비유 말씀입니다. 하루 중 서로 다른 시간에 불린 일꾼들이 똑같은 품삯을 받는다는 비유이지요. 이에 대한 많은 교부들은 서로 다른 시대에 태어나 의롭게 산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루’는 역사 전체를 뜻하며, 아담의 죄 이후 예수님께서는 그 ‘하루’의 저마다 다른 때 의로운 사람들에게 그들의 행실에 대한 보상을 약속하시며 그들을 훌륭한 일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공정하게 성령의 은총을 주심으로써 모든 성도들이 하느님과 완전하게 하나 되게 하시고 그들의 영혼에 하늘 나라의 인장을 찍으시며 그들을 생명과 불멸로 인도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때를 채우지도 않았는데 하느님 나라에 들게 하시니 하느님의 정의가 잘못되었다고 투덜대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관대함을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편견에 빠져서 자신이 불공평한 대접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실제로 하느님의 선하심은 엄청납니다(자신이 오후 다섯 시에 불림을 받은 일꾼이라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똑같은 은총을 받았습니다. 공평하지 않으십니까?).
결국 우리를 향한 주님의 모습에 대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단지 우리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라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 원칙에 맞춰서 자신을 변화시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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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풀어주기를 기뻐하면서 죽음을 근심하는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다. 남이 네게 구할 때, 네가 줄 수 있다면 주고, 줄 수 없다면 그 까닭을 알려 주어라. 그렇게 하면 주지 않더라도 그 사람이 성내지 않을 것이다. 교활한 꾀를 피워 거절해서는 안 된다(성 예로니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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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사는 것을 배운다.
만약 아이가 나무람 속에서 자라면 비난을 배운다
만약 아이가 적개심 속에서 자라면 싸우는 것을 배운다
만약 아이가 비웃음 속에서 자라면 부끄러움을 배운다
만약 아이가 수치 속에서 자라면 죄의식을 배운다
만약 아이가 관대 속에서 자라면 신뢰를 배운다
만약 아이가 격려 속에서 자라면 고마움을 배운다
만약 아이가 공평함 속에서 자라면 정의를 배운다
만약 아이가 보호 속에서 자라면 믿음을 배운다
만약 아이가 인정 속에서 자라면 자기 자신을 좋아하는 것을 배운다
만약 아이가 받아들임과 우정 속에서 자라면 세상에서 사랑을 배운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보게 된, 도로시 론 론트의 글입니다. 우리 아이가 잘 성장하기를 바라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어떤 환경을 어른이 만들어 줘야 할까요? 그리고 이를 위해 지금 내가 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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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8.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매일 아침 일어나면서 어떤 느낌이신지요? 예전에 신학교에서는 아침에 일어나면 함께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Laudate Dominum!(주님을 찬미합니다.) Deo Gratias!(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도 아침에 일어나면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합니다. 물론 몸이 아프거나, 피곤하거나, 과음을 한 날에는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4시면 일어납니다. 며칠 전에는 3시 45분에 눈이 떠졌습니다. 4시까지는 15분이 남았습니다. 15분이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신학교에서 15분이면 묵주기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매일 저녁 7시 15분에 묵주기도를 시작하였고, 7시 30분이면 성당으로 들어가서 저녁기도를 함께 하였습니다. 요즘은 묵주기도 하는데 30분 정도 걸립니다. 15분이면 주일미사 강론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10분 정도 하지만 15분이면 충분한 것 같습니다. 예전에 선배 신부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짧은 강론은 마음을 움직이지만, 긴 강론은 몸을 움직이게 합니다.” 잘 준비된 강론은 15분이면 깊은 감동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라는 프로가 있습니다. 세바시는 프로그램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여러분은 15분이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계십니까? 복잡한 도심, 한 번 놓친 버스를 다시 기다리느라 15분을 보낼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출출한 늦은 밤에 라면을 하나 끓여먹는 시간으로 보낼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때는 15분은 빈둥거리며 잡지를 뒤적이는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 여러분이 가장 소중하고 보람 있게 15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합니다.
바로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15분 그냥 흘려보낼 수 있는 시간입니다. 짧은 시간일지라도 그 시간에 무엇을 담느냐가 중요합니다. 불평과 불만을 채우는 시간이라면, 남을 험담하고 비난하는 시간이라면, 욕심과 욕망을 채우는 시간이라면 15년이 아니라 150년이 있어도 하느님께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15분이면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 하느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 가는 것은 시간이 길이가 아닙니다. 하느님께 가는 것은 시간의 의미입니다.
15분이면 지하철역에서 시를 한편 읽을 수 있는 시간으로도 충분합니다. 간발의 차이로 지하철이 떠났을 때입니다. 스크린 도어에 제게 감동을 주는 시가 있었습니다. 제목은 ‘늦었다고 원망하지 마라.’였습니다. ‘늦었다고 원망하지 말라. 그래야 하늘을 보고, 뺨을 스치는 바람을 느끼고, 춤추는 꽃을 볼 수 있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는다.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 짧은 시였지만 지하철을 놓친 것이 오히려 감사했습니다. 그 뒤로 시간을 내서 스크린 도어에 있던 시를 읽곤 했습니다.
지하철은 곧 다시 오지만 시를 다시 만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때 제게 감동을 주었던 시가 더 있었습니다. ‘꽃잎과 낙엽, 녹차, 가고 오지 않는 사람’입니다. 15분이면 부모님에게 문자를 보낼 수 있습니다. 15분이면 사랑하는 가족에게 안부 전화를 할 수 있습니다. 15분이면 성무일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오늘 입당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보소서, 저희 방패이신 하느님. 그리스도의 얼굴을 굽어보소서. 당신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사옵니다.” 시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마치 한 토막 밤과도 비슷하나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을 이야기하십니다. 하느님의 시간은 자비와 연민의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시간은 절대평가입니다. 인간의 시간은 성과와 능력의 시간입니다. 인간의 시간은 상대평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머물 곳이 많습니다. 그러니 힘들고 수고하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오십시오. 나의 멍에는 편하고, 나의 짐은 가볍습니다.” 오늘 하루 시간의 길이를 생각하기 보다는 시간의 의미를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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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8.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배움과 깨달음의 여정
- 날로 확장되는 자비의 지평 -
특히 제 좋아하는 순수한 우리말 단어는 배움, 깨달음, 배움터, 쉼터, 샘터등입니다. 이 밖에도 순수한 정감이 넘치는 순수한 우리말들도 무수합니다. 아주 예전 마산트파피스트 수도원을 찾았을 때 수도원 정문에 걸려있던 ‘주님을 섬기기 위한 배움터’란 말마디 문패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평생 주님을 섬기는 법을 배우는 배움터가 베네딕도회 수도공동체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갈망과 배움에 대한 사랑을 지닌 이들이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입니다. 배움에 대한 사랑은 이미 호학好學이라 하여 공자님도 강조한 바 있습니다. 평생 배움의 여정중에 있는 죽어야 졸업인 평생 배움터의 학교에서 공부하는 평생학인이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평생전사에 주님의 평생학인인 영예로운 신분의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입니다. 그래서 수도자의 유행을 타지 않는 검정 수도복은 평생전투복이자 평생학생복이기도 합니다. 비단 베네딕도회 수도자들뿐 아니라 주님을 믿는 모든 형제자매들 역시 주님의 평생전사요 평생학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제 고대 수도승 삶에 있어서 영적 수행의 네 필수적 요소가 새삼스럽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살기를 배우기(Learning to Live)’, ‘대화를 배우기(Learning to Dialogue), ’죽음을 배우기(Learning to Die)’, ‘읽는 법을 배우기(Learning how to Read)’ 였습니다. 어찌 넷 뿐이겠는지요! 사랑, 기도, 순종, 청빈, 정결, 침묵, 경청, 겸손, 섬김등 배워야 할 덕목은 끝이 없습니다. 선선한 가을은 기도의 계절이자 독서의 계절이라 합니다. 하느님이 한층 가까이 느끼는 계절입니다. 마침 어제 써놓은 ‘간원懇願’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하느님 아버지 보고 싶으면
눈들어 높고 넓고 깊은 하늘을 바라본다
하느님 어머니 그리우면
수도원 자연 숲 품속을 거닌다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을 쉼쉬며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나
날로 하느님을 닮았으면 좋겠다”-
마지막 한가지 간절한 바램은 주님의 배움터, 쉼터, 샘터인 산같은 정주의 수도원에서 살아 있는 그날까지 매일 ‘미사’를 드리고, ‘강론’을 쓰고, 걸었으면 하는 셋뿐입니다. 배움과 깨달음은 함께 갑니다. 깨달음의 지혜로 전환되지 않는 축적된 배움이라면 쓰레기 짐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니 배움의 여정은 그대로 깨달음의 여정이 됩니다. 깨달음의 은총입니다. 성령의 은총있어 배움은 깨달음으로 전환됩니다. 무지의 마음 병에 대한 근본치유도 이런 배움과 깨달음의 여정에 항구하는 것 하나뿐입니다. 깨달음을 통해 날로 주님을 닮아가며 날로 자유로워지고 자비로워지고 지혜로워지고 겸손해지고 온유해지는 멋지고 아름다운 참 사람의 실현입니다. 날로 확장되는 자비의 지평안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가 서로 만납니다.
그대로 “배움과 깨달음의 여정-날로 확장되는 자비의 지평-”은 오늘 강론 제목이기도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공부하는 마음으로 배우는 마음으로 오늘 말씀에 접근합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말씀은 그대로 하느님 생각과 말씀의 반영입니다. 예수님은 요즘 회자되고 있는 기본소득제의 원조임을 깨닫게 됩니다. 복음의 선한 포도밭 주인의 하늘 나라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꿈꾸는 하늘 나라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제1독서 판관기의 요탐의 우화도 대선을 앞두고 후보자들을 검증하는 데 깊은 깨우침을 줍니다.
복음의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가 참 현실성을 띠며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대로 예수님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하느님 자비의 지평이, 시야가 참 넓고 깊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가 서로 만납니다. 세상인들의 상식과 공정, 정의의 잣대가 아닌 하느님 고유의 자비의 잣대입니다. 우리의 발상의 전환을, 자비의 지평을, 시야를 확장할 것을 요구합니다.
내가 아닌 하느님 자비의 지평에 맞춰야 함을 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산술적 공평의 분배정의가 아닙니다. 사람마다 눈 높이에 맞춘, 각자 삶의 처지에 맞은 하느님의 자비가 그 잣대가 됩니다. 하느님 앞에는 일체의 기득권이 없습니다. 아무리 오래 잘 믿었다 하여 구원이 아니고 아무리 짧게 믿었다 하여 구원의 실격도 아닙니다. 아침 일찍부터 포도밭에서 일했던 전자의 일꾼들은 일찍부터 유대교 신자였다가 개종한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뜻하며 후자는 늦게 이교에서 개종한 신참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은 바로 이러합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마디가 이를 요약합니다. “이처럼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 두렵고 떨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평생 배우는 자세로 살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닮은 착한 목자, 자비로운 목자입니다. 앞서의 해석과 더불어 이런 차원에서 오늘 복음을 읽어야 합니다. 밥은 하늘입니다. 누구나 천부인권을 타고난 사람들입니다. 누구나 공평히 하늘인 밥을 나눠야 합니다. 아침 일찍부터 나온 일꾼들은 행운아들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일자리를 찾다가 오후 늦게 서야 일이 끝날 무렵에 비로소 일자리를 찾았던 이들에게도 필시 딸린 식솔食率도 있을 것입니다. 이들도 먹고 살아야 할 한 데나리온이 필요합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는 일한 양이 아니라 각자의 곤궁한 처지가 분별의 잣대였던 것입니다. 상식과 공정의 잣대가 아닌 각자의 처지에 맞는 무상無償의 사랑, 자비의 잣대, 은총의 잣대입니다. 그리하여 누구나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니 그대로 오늘날 회자되는 기본소득제 정신과 똑같습니다. 이 정도까지 우리도 하느님을 닮아 그분의 자비의 지평까지, 시야까지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자비를, 은총을 인간 상식의 잣대로 재는 인정머리 없는 맨 먼저 왔던 자들의 항의에 대한 자비로운 목자로 상징되는 하느님의 반응이 신선한 충격입니다. 이 또한 옹졸하고 편협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착한 목자 주님을 닮아 한없이 자비로우라는 가르침입니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요?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정곡을 찌르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제넘게 하느님 무한한 자비의 은총을 인간 상식의 잣대로 재지 말라는 것입니다. 감히 하느님의 권리에 월권越權하지 말고, 형제들과 비교하지 말고 네 분수에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니가 뭔데? 너나 잘 해!” 말마디가 그대로 해당되는 장면입니다. 이런 착한 목자와는 대조적인 것이 제1독서 요탐의 우화에 나오는 악한 목자로 상징되는 아비멜렉 임금입니다. 참으로 지도자 한 번 선택 잘못하면 국민들 피해가 얼마나 큰 지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미 우리가 수차례 겪었지 않습니까!
“스켐의 지주들이여, 내 말을 들으시오. 그래야 하느님께서도 그대들의 말을 들어 주실 것이오.”
요탐의 호소와 더불어 이어지는 우화입니다. 그대로 대선의 후보들중 누구를 선택할지 선택을 앞둔 우리들의 분별의 지혜를 촉구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우선적으로 확인할 바 살아 온 일관적 행적입니다. 사람은 고쳐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 변하기 어려운게 사람입니다. 배신자는 또 배신합니다. 일관적인 삶이 중요합니다. 보통 회개로는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변질인 듯 하나 실은 본질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니 사이비 언론보도에, 가짜 뉴스에 현혹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결국은 산대로 삽니다. 그러니 누가 착한 목자같은 대통령이 될지 과거의 행적을 정말 잘 봐야 합니다. 벼락 공부해서 되는 대통령이, 누구나 할 수 있는 대통령이 아닙니다. 정말 자기를 모르는 이들이 대통령 한다고 야단들이며 이에 부화뇌동하는 생각없는 무리들도 많습니다. 나라의 명운이 달린 것이니 결코 감정으로 대통령 택할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당에서는 검증을 위한 대선토론회가 한창입니다. 국민의 올바른 선택을 위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요탐의 우화중 자기 분수를 알았던 올리브 나무, 무화과 나무, 포도나무는 겸손히 사양합니다만 악한 목자 아비멜렉으로 상징되는 가시나무만이 임금되기를 선선히 받아들입니다. 어리석은 무지의 스켐의 지주들이 자초한 자업자득의 결과입니다. 후회해도 너무 늦습니다. 아프카니스탄의 비극도 적절한 교훈입니다. 대통령이란 자가 네 트럭분의 현금을 비행기에 가득 담고 불쌍한 백성들을 놔두고 외국으로 탈출했다 하지 않습니까! 어리석은 백성들의 자업자득입니다. 임금으로 뽑힌 아비멜렉을 상징하는 가시나무의 반응입니다.
“너희가 진실로 나에게 기름을 부어 나를 너희의 임금으로 세우려 한다면 와서 내 그늘 아래에 몸을 피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가시나무에서 불이 터져 나가 레바논의 향백 나무들을 삼켜 버리리라.”
스켐의 지주들이 자초한 포악한 임금 아비멜렉입니다. 이후 아비멜렉 임금도 불행한 최후의 죽음을 맞이하지만 스켐 사람들의 폐해 역시 상상을 초월합니다. 참으로 배움과 깨달음의 여정을 통해 하느님을 닮아 우리의 자비의 지평, 정의의 지평도 날로 확장되고 무엇보다 참 좋은 분별력의 지혜를 지녔으면 좋겠습니다. 인사人事는 만사萬事임과 동시에 망사亡事도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닮아 좋은 분별력의 지혜를 지닌 자비로운 목자의 영성으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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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8.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임금이 어떤 존재인지 물으십니다.
"그 무렵 스켐의 모든 지주와 벳 밀로의 온 주민이 모여 ... 아비멜렉을 임금으로 세웠다."(판관 9,6)
어제 제1독서에서 만난 기드온은 판관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며 마흔 해를 평온히 다스립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임금이 되어 달라고 했지만 "여러분을 다스릴 분은 주님이십니다."(판관 8,23) 하며 백성 위에 군림하는 임금이 아닌, 봉사하는 판관의 자리를 지켰지요.
하지만 그 역시 나약한 인간으로 자기 집안에 올가미가 될 죄를 짓게 되니(판관 8,27 참조) 일흔 명의 아들들 사이에 살육이 일어나고 맙니다. 기드온의 아내 중 스켐 출신 소실이 낳은 아비멜렉이 권력욕에 사로잡혀, 스켐 지역 지주들을 등에 업고 건달들과 함께 자기 형제들을 모조리 살해한 것입니다. 막내 요탐만 숨어 있다가 목숨을 건져서, 오늘 제1독서 대목에 나오는 '임금의 비유'로 스켐의 지주들의 양심을 일깨우려 합니다.
"다른 나무들 위로 가서 흔들거리란 말인가?"(판관 9,9.11.13)
올리브 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등 인간에게 이로운 열매를 내는 나무들은 한결같이 임금 되기를 거부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정체성과 가치를 잘 알고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며 그것으로 세상을 풍요롭게 하려 하지요. 그들에게 임금이란 고작 타인 위에서 거들먹거리며 무게중심(줏대) 없이 흔들거리는 존재일 뿐입니다. 이 비유는 하느님께서 다스리는 신정에서 사람이 임금으로 등극하는 왕정으로 넘어가는 이스라엘에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와서 내 그늘 아래에 몸을 피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이 가시나무에서 불이 터져 나가, 레바논의 향백나무들을 삼켜 버리리라."(판관 9,15)
그런데 가시나무의 반응은 상당히 다릅니다. 언급된 나무들 중 가장 그늘이 빈약하고 쓸모도 적은 식물이면서 당장 허세와 위협으로 으름장부터 놓습니다. 고문 도구나 땔감 외에는 별 쓸모가 없던 가시나무가 기다렸다는 듯 제 존재감을 과시하는데, 그 첫 마디가 파괴와 죽음의 겁박입니다. 인간 역사 내내 곳곳에서 출현한 불의하고 무자비한 임금들의 행태가 고스란히 들어 있이지요.
복음은 선한 포도밭 주인의 이야기입니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마태 20,14)
포도밭 주인은 이른 아침,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세 시, 오후 다섯 시 이렇게 다섯 차례나 장터에 일꾼을 구하러 나섭니다. 그리고 삯을 치를 때, 하루종일 고생한 일꾼이나, 짧은 시간 일한 일꾼이나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주지요. 사실 이 값은 일꾼들과 처음부터 합의한 금액입니다.
그런데 먼저 와서 일한 일꾼들이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들은 주인과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를 했음에도, 짧게 일한 이들이 그 금액을 받는 걸 보자 자기들은 응당 더 받으려니 기대했다가 결국 김이 새고 말지요.
하늘 나라의 임금님은 이 선한 포도밭 주인처럼 모두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어하는 분십니다. 그분은 받는 만큼 주려고, 눈에 불을 켜고 계산하는 분이 아니라 아낌없이, 목숨까지 내어주는 분이십니다. 오히려 줄을 세우고 자격을 정해 순위를 매기고 더 탐하는 이는 받는 쪽이지요. 그리고 하느님이 제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 싶으면 불편해서 못 견딥니다. 세상이 정한 질서에 하늘 나라가 맞춰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이런 태도는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늘 임금님께, 군림하고 지배하고 줄 세우는 인간 임금의 모습을 강요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질서에서 벗어나면 시기와 질투로 자기와 타인을 해치기까지 하지요.
그런데 시기와 질투는 겉으로는 혜택을 받는 이에게 불쾌감을 쏟아내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하느님의 선하심이 못마땅해서 그분께 대적하는 것이니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선하고 공정하시며 의로우신 하느님을 믿지 않을 뿐더러 그분을 반하는 처사이기 때문이지요.
"주님, 임금이 당신 힘으로 기뻐하나이다."(화답송)
인간의 임금은 사실 이런 모습이어야 합니다. 온 세상과 하늘 나라의 주인께서 이루시는 업적의 지상 협력자로 충실히 일하면서, 그분께서 이루시는 업적에 경탄하고 감사하며 기뻐하라고 뽑혔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백성에게 군림하고 다스리려 하면 세상이 몸살을 앓지만, 인간이 하느님과 함께 백성에게 봉사하고 섬기면 하늘 나라는 성큼 다가옵니다. 지도자는 모두가 행복하길 바라시는 하늘 임금의 마음을 헤아려 백성에게 봉사하고 섬기는 종들의 종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지요.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은 당신을 바라는 이들에게 약속한 상급을 반드시 주시는 의로운 분이시며, 자격과 가치를 따져 홀대하거나 외면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하늘 임금님께서 이처럼 자비롭고 관대하며 선한 분이시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 주인과 함께하기에 우리는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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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8.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20,16)
오늘 복음은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로 하느님의 나라를 설명하십니다.
선한 포도밭 주인이 일꾼들에게 자비를 베풉니다.
그것도 모두에게 같은 자비, 합의된 자비, 약속된 자비를 베풉니다.
그런데 다른 일꾼보다 좀 더 땀 흘리고 수고한 일꾼 하나가 주인이 베푸는 자비에 못마땅해 합니다.
주인이 그에게 말합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마태20,15)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꼴찌가 첫째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20,16)라는 말씀으로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를 끝맺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는,
오늘 깨어 있는 사람, 곧 오늘 첫째가 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이요 선물이라는 말씀입니다.
세례를 더 먼저 받았다고 해서 구원에 더 가깝게 있지 않고, 내가 성직자나 수도자라고 해서 구원에 더 가깝게 있지 않고, 오늘 깨어 있는 사람, 지금 첫째가 되는 사람에게 구원은 가깝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라가야 할 하느님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더욱 더 중요한 것은 그 앎이 지금 여기에서 '살아있는 앎'이 되어야 합니다.
그 앎이 지금 여기에서 살아있지 않으면 꼴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오늘 나의 모습이 첫째였는지에 대한 성찰을 해야 합니다.
만약 첫째였다면,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나를 이끌어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림으로써 그 첫째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만약 꼴찌였다면, 그 부족함을 하느님 자비에 내어 맡김으로써 또한 그 꼴찌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 하고,
오늘 내게 오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오늘도 첫째가 되려고 애쓰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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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8.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의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는 한 시간 일한 일꾼과 똑같은 품삯을 받게 된 맨 먼저 온 일꾼들이 자비한 포도밭 주인에게 투덜거리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하늘 나라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포도밭 주인은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시며, 품삯은 하느님을 믿고 따른 신앙생활에 대한 하느님의 선물인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런데 투덜거리는 일꾼들처럼 우리도 하느님께 불평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 저는 당신 마음에 드는 신앙인이 되고자 평생을 얼마나 조심하며 살았는데, 죽기 바로 전에 세례 받았다고 똑같이 천국에 간다니 말이 됩니까?”
그런데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선물로 받게 되는 ‘영원한 생명은 관계의 문제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는 생명이신 하느님과 맺는 관계를 통해 살아 있는 이가 될 뿐 아니라, 죽음도 빼앗을 수 없는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베네딕토 16세, 『나자렛 예수 2』, 114면 참조). 따라서 죽기 바로 전에 하느님의 이름만 알고 죽은 사람이 하느님과 맺은 친교의 깊이와, 한평생 하느님 안에서 울고 웃으며 그분과 함께 살아온 사람이 하느님과 맺은 친교의 깊이는 너무나 다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과의 친교로 이루어진, 그분을 알고 그분을 닮고자 내어 주는 삶을 통하여 맛보게 되는 행복의 크기와, 마침내 이 세상을 마치고 하느님 앞에 나서서 그분과의 일치로 얻게 되는 영원한 행복의 깊이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지만, 우리가 받아들이는 선물의 크기와 깊이는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한 시간의 양이 아니라, 하느님과 얼마나 깊은 인격적 관계를 맺었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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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8.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포도밭의 일꾼들
오늘 복음의 밭 임자는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구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섰다. 주인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사람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낸다. 이른 아침 여섯 시에, 아홉 시에, 열두 시에, 세시에 그리고 다섯 시에 자기가 만난 사람들을 포도밭으로 보냈다. 포도밭은 하느님의 계명들이고, 이곳에서는 온갖 덕이 포도나무 가지처럼 늘어져 있다. 즉 친절, 순결, 온유, 인내, 고결함 등이다.
교부들은 이 비유를 설명하면서, “하루”를 구원의 역사로 해석하고 이른 아침에 아담과 에녹의 시대에 살던 이들을 부르셨고, 아홉 시에는 노아와 그와 함께 있던 이들을 부르셨고, 열두 시에는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오후 세 시에는 모세와 다윗을 부르셨으며, 오후 다섯 시에는 다른 민족들을 부르신 것이라고 한다. 그들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6절) 라고 묻는다.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한다. 그들은 모두 포도원에 가서 일하였다.
저녁에, 즉 시대의 끝자락에 밭 임자는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품삯을 내주라고 한다. 맨 나중에 온 사람들은 고생은 하지 않고 주인의 후한 덕으로 가장 먼저 보수를 받는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영광을 받은 것이다. 맨 먼저 온 사람들은 나중에 온 사람들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 그래서 나중에 온 사람들이 받는 품삯을 보고 자기들은 더 받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주인은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고 있다. 그들은 불평한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12절) 이렇게 말함으로써 다른 이들이 받은 축복을 기분 나빠했다. 그것은 시기와 질투였다. 이제 밭 임자는 그 사람의 시샘을 꾸짖는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15절) 하였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지 될 것이다.”(16절) 언제 부르심을 받았든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잘 사는 것이 중요하다. 마지막 한 시간을 열심히 일하여 하루의 품삯을 받은 이들처럼 우리의 삶도 지금 최선을 다하는 삶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해 주신 품삯을 모두 받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항상 깨어있는 자세를 말한다.
이것은 품값이라기보다 은총이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우리가 일한 대가, 보수, 노임이 아니라, 그분의 선하심과 은총으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다. 우리가 불림을 받은 후의 삶을 충실히 하여 그 선물을 받도록 하자. 주님께서는 좋은 것으로 우리를 채워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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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8.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마태 20, 15)
가장 비참했던
그 때를
기억해본다.
하느님의
도움과 위로가
간절했던
그 때를
떠올려본다.
그럴만한
사연과
사정이 있는
우리들
아픔이다.
아픈
모든 이들에게
후하게
구원의 문을
열어젖히시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지나치는
모든 시간이
은총이고
선물이었다.
후하신
하느님께서
만들어놓으신
아름다운
세상이다.
하느님께서는
어느 누구 하나도
버리지 않으신다.
인간은
가혹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끝내
후하시다.
연민의 길을
걸어가신다.
조건과
무조건 사이에
하느님과
우리가 있다.
우리에게 삶을
가르쳐주시는
주님이시다.
삶에
가장 중요한
순간은
주님을 만나는
순간이다.
우리를
찾기 위해
직접 길을
나서시는
주님의 조건없는
사랑이시다.
우리가
찾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갈 곳 없는
우리를 먼저
찾아오셨다.
욕심과 시기를
내려놓고
감사와 찬미를
배워야 할
우리들 삶이다.
허망한 삶이
아니라
보시니
참 좋은
하느님의
은총이다.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하느님의
자비이다.
하느님께서는
거두어들이시고
우리는
내려놓아야 한다.
한순간도
은총 아닌 것이
없었다.
한없이 주시는
하느님 앞에
시기와 원망을
내려놓는다.
가장 좋은
하느님의 때를
가로막아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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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8.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절대적이고 유일한 것이어서, 사람에 따라 다를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만 한다면,
누구나 ‘똑같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구원’의 경우, 만일에 사람에 따라 ‘구원’에 어떤 차이가 있다면,
그 차이에서 차별이 생기고, 그러면 그것은 구원이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영원한 생명’의 경우, 만일에 사람에 따라 ‘생명’에 어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이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삼위일체 안에서는 ‘생명’에 어떤 차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영원’이라는 시간 자체도 절대적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보다 ‘더 긴 영원’이나, ‘더 짧은 영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더 긴 영원, 더 짧은 영원’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입니다.
내용이나 질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깊은 영원’이나, ‘더 얕은 영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하느님과 맺는 관계, 일치, 친교, 행복으로
표현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과 맺는 관계나 일치나 친교, 또 그 나라에서 누리는
행복도 역시 절대적이고 유일한 것이어서, 사람에 따라 다를 수가 없습니다.
외적으로도 그렇고 내적으로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과 맺는 ‘친교의 깊이’에 차이가 있을 수 없고,
그 나라에서 누리는 ‘행복의 깊이’에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다고, 또는 있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런 생각은 ‘교만’에서 비롯된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는,
그런 교만하고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마태 20,9-15)”
‘맨 먼저 온 이들’의 불만을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맨 나중에 와서 한 시간만 일한 자들에게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은 품삯을 주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이 말은 “일을 적게 한 자들에게는 품삯도 적게 주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자기들이 받은 품삯에 대해서가 아니라,
‘맨 나중에 온 이들’이 받은 품삯에 대한 불만입니다.)
2)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에게 맨 나중에 와서 한 시간만
일한 자들과 똑같은 품삯을 주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앞의 말과 비슷하지만, 이 말은 “일을 많이 한 우리에게는
품삯을 더 많이 주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맨 나중에 온 이들’이 받은 품삯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기들이 받은 품삯에 대한 불만입니다.)
3) “품삯을 많이 주든지 적게 주든지 간에, 일을 많이 한 사람에게나
일을 적게 한 사람에게나 똑같은 품삯을 주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이 말은 ‘불공평함’을 비난하는 말입니다.
어떻든 ‘맨 먼저 온 이들’의 불만은 이 세 가지가 모두 합해져 있는 불만입니다.)
이 비유에서, 밭 임자는 하느님이고, 포도밭에서 하는 일은 신앙생활이고,
품삯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신앙생활을 언제 시작했든지, 얼마나 오래 했든지 간에 ‘모든 사람’이
‘똑같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1) 여기서 ‘맨 먼저 온 이들’을 이스라엘인들로,
‘나중에 온 이들’을 이방인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은 자기들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민족이고, 자기들이
긴 세월 동안 하느님을 믿었다는 것을 내세우면서 나중에 하느님을 믿게 된
이방인들보다 더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선민사상과 특권의식을 버리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2) ‘맨 먼저 온 이들’을 남들보다 먼저 신앙생활을 시작해서, 남들보다 더 오래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로, ‘나중에 온 이들’을 신앙생활을 늦게 시작해서 신앙생활
기간이 짧은 사람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활동 초기에 사도로 뽑은 사람들과 부활 승천 후에 사도로 뽑으신
바오로 사도를 예로 들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일에서,
열두 사도와 바오로 사도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하느님과 맺은 ‘친교의 깊이’와 ‘일치의 깊이’, 또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는
‘행복의 깊이’에서, 열두 사도와 바오로 사도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차이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유아 세례를 받고 평생 신앙생활을 한 사람과 죽기 직전에 회개하고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 사이에서도 그런 차이가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3) ‘맨 먼저 온 이들’을 우리가 신앙의 모범으로 공경하는 성인 성녀들로,
‘나중에 온 이들’을 평범한 보통 사람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진짜 성인 성녀들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불만을 품지도 않고,
하느님께 항의하지도 않겠지만...)
지상에서는 신앙과 신앙생활의 깊이에서 성인 성녀들과 보통 사람들 사이에
차이가 있지만, 그것은 개인의 차이일 뿐이고,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차이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은 전부 다 성인 성녀입니다.
그리고 ‘지금’ 누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는
사람이 함부로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4) 신앙생활은 노동이 아니라 은총이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품삯이 아니라 은총의 완성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은총을 받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5) 하느님 나라에서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누린다는 것만 생각하면서, “그러면 사는 동안에는 마음대로 막 살다가 죽기
직전에 회개하면 되겠다.”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말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이고, 임종 시점을 자기가 정하겠다는 어리석은 말입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실행한다면, 그런 회개는 진정성 없는 회개이고,
회개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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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8.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모두가 행복을 찾는 하느님의 포도밭
오늘 복음 말씀은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입니다. 포도밭은 노동자들이 생계유지를 위한 일터입니다. 포도밭 주인은 이른 아침 집을 나서 하루 품삯을 주기로 하고 필요한 일꾼을 데려와 일을 시킵니다(20,1-2). 그는 그 뒤로도 네 차례나 장터로 나가, 일터를 찾지 못한 이들에게 ‘정당한 삯’을 주기로 하고 자기 포도밭으로 데려와 일하도록 해줍니다(20,3-7).
저녁때가 되자 주인은 일꾼들을 불러 종일 일한 사람이나 몇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 할 것 없이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을 줍니다. 그러자 이른 아침부터 와서 뙤약볕 아래 종일 땀을 흘린 첫 번째 일꾼들이 투덜거립니다. 의당 더 받으리라 생각했었기 때문이지요. 포도밭 주인이 그들에게 말합니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20,14-15)
사회정의의 관점에서 본다면, 자신이 일한 만큼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해 불평하는 그를 나무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경제논리와 노동법과 근로기준법에 비춰 보더라도 이런 처우는 결코 수용될 수 없는 부당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신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이 비유는 세상이 아닌 하늘 나라를 말한 것이며, 세리나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기를 즐기시던 당신을 비난하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 대한 답변입니다. 다시 말해 이 비유의 초점은 사회정의가 아니라 하늘 나라의 ‘마음의 정의’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도 공덕을 쌓고 더 많은 보상을 바라지 말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을 자비롭게 대해야 마땅함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세상적 사회정의에 입각한 분배정의가 아니라,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하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지요. 포도밭은 이 세상의 회사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이 숨쉬는 자비의 땅, 정의와 생명의 나라입니다.
기업은 최대의 이윤을 창출하려고 사람을 고용합니다. 따라서 기업주와 고용인 사이에는 경제논리가 작용할 수밖에 없지요. 자본과 힘이 관계를 지배하고 결정하는 ‘갑을 관계’가 형성됩니다. 그러나 포도밭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는 모두를 살리시고 모두가 영원한 생명 안에 머물 수 있도록 포도밭을 일구실 뿐입니다. 따라서 포도밭 주인과 일꾼의 관계는 자비와 생명의 관계입니다. 그 관계의 중심에 돈과 힘이 아닌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느님 나라의 사회경제적 비전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포도밭 주인이신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온 가족이 하느님의 선과 생명 안에 머물 수 있도록 하루 중 무려 다섯 번이나 나가 일꾼들을 데려오시지 않습니까! 품삯인 한 데나리온은 세상 그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영혼 구원을 위한 선물이지요.
오늘도 단순한 경제논리와 이해타산을 따지는 사회정의를 넘어, 모두의 기본적인 필요가 충족되는 하느님의 일터를 찾아 나서야겠습니다. 하느님의 포도밭인 우리 삶의 터에서 사회적 약자들과 하층민들도 지배와 착취 대신 사랑의 나눔과 섬김이라는 ‘정당한 품삯’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내놓아야겠지요. 상호연대하여 공동의 선과 친교를 실현함으로써 ‘자비와 생명의 포도밭’을 가꾸는 오늘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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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8.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2019년 8월 21일 )
판관들은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백성을 위해서 적들과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판관기 저자는 판관과 다른 모습의 사람을 그리고 있습니다.
바로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에 대한 것입니다.
‘아비멜렉’이라는 이름자체가 정치적입니다. 바로 ‘나의 아버지는 왕’이다 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에 아직 왕제도가 세워지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을 지파나 한 지역을 중심으로 판관들이 다스리던 시절에 판관으로서 입으로는 왕을 거절하면서도 실제로는 왕 행세를 하려던 인물이 바로 기드온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아들’이듯 그의 아들이 왕 행세를 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는 판관도 아니었고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것도 아닌 인간의 탐욕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권력의 욕심에 오프라에 가서 자신의 일흔 형제들을 한 바위 위에서 살해합니다.
험악한 분위기에서 스켐의 모든 지주와 벳 밀로의 온 주민이 모여 아비멜렉을 왕으로 추대합니다.
이 소식을 듣고 요탐은 그리짐 산꼭대기에 가서 스켐 지주들이 들으라고 큰 소리로 외칩니다.
나무들이 자기들을 다스릴 왕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섭니다.
그들이 처음으로 만난 나무가 올리브나무입니다. 그 나무에게 그들이 왕이 되어줄 것을 청합니다.
올리브나무는 풍성한 기름을 내는 일을 그만 두고 왕이 될 마음이 없다고 밝힙니다.
이번에는 무화과나무에게 왕이 되어달라고 청합니다. 무화과 나무는 달콤한 열매를 맺는 것을 그만 두고 왕이 될 수 없다고 거절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포도나무에게 왕이 되어 줄 것을 청합니다. 신들과 사람들을 흥겹게 해주는 일을 포기하고 왕이 되는 것을 거절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가시나무에게 다가가 왕이 되어 줄 것을 청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말합니다.
‘너희가 진실로 나에게 기름을 부어
나를 너희 임금으로 세우려 한다면
와서 내 그늘 아래에 몸을 피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이 가시나무에서 불이 터져 나가
레바논의 향백나무들을 삼켜 버리리라.’”(판관 9,15)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구원에 대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포도밭 주인이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나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합니다.
아홉시, 열두시, 오후 세시, 오후 다섯 시에 나가 일꾼들을 포도밭으로 나가 일하게 합니다.
저녁 때가 되자 오후 다섯 시에 일한 사람들부터 셈을 시작하는데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오후 세시, 정오, 아홉시, 이른 아침 순으로 셈을 하였는데, 관리인이 다 한 데나리온 씩을 주었습니다.
아침부터 나와 일하던 사람은 은근히 일을 더 많이 했으니까 더 주려니하는 기대를 가졌다가 똑 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자 투덜거렸습니다.
그러자 포도밭 주인이 그에게 말합니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마태 20,13-14)
여기서 우리도 다 이해하지 못하는 셈을 주인이 하셨을까요?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일꾼들은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일찍 불림을 받은 유대인들을 염두에 두신 것입니다.
일찍 불림을 받았다고 구원에 더 큰 자리를 받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은 유대인들이 따지듯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에게 있음을 설명해주시는 것입니다.
가시나무가 나무들을 통치한다는 것에는 정치에 대한 부정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치는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나무에 가시가 있어 다른 나무들을 상하게 하듯 정치하는 사람들에게는 칼이 쥐어 있어서 자칫 잘못하면 아비멜렉처럼 동족을 죽이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몇몇 사람의 정치인들에 의해서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무고한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정치는 핵과 같아서 잘 쓰면 좋지만 잘못되면 큰 화를 입듯 권력이 욕심으로 변하면 백성들에게도 해를 끼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위정자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들이 국민을 위하고 나라를 위하는 봉사자가 되기를 바라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초대받은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에 달려 있으니 우리는 늘 겸손하게 살며 주님의 초대에 늘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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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8.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누군가가 주님으로부터 관대한 사랑을 받았다면 함께 기뻐해주고 축하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포도밭 일꾼’ 비유에 대한 교부들의 해석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이른 아침에 불린 일꾼들은 아담과 에녹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아홉 시에 불린 일꾼들은 노아와 셈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열두 시에 불려간 일꾼들은 할례의 법이 세워진 아브라함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오후 세시에 불려간 사람들은 모세와 다윗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오후 다섯 시에 불려간 사람들은 이민족 사람들이었습니다.
저같이 게으름뱅이며 늑장부리기의 대가에게는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이든 이방인이든, 빨리 온 사람이든 늦게 온 사람이든 상관하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한 데나리온, 곧 성령의 은총을 선물하심으로써, 우리 모두가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되게 하십니다. 우리 각자의 영혼에 하느님의 인장을 찍으시며 불멸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맨 먼저 포도밭에 와서 하루 온종일 일한 사람들의 불평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 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마태오 복음 20장 12절)
이 사람들의 투덜거림에서 또 다른 한 얼굴이 떠오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등장하는 첫째 아들의 얼굴이지요.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루카 복음 15장 29~30절)
이 대목에서 우리는 주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철저하게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은총의 햇빛과 단비를 선물로 주시는 크신 하느님이십니다. 아무리 죽을죄를 저지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끝끝내 회개하기를 인내롭게 기다리십니다.
주님께서 내게 베푸신 크신 은총과 축복에 깊이 감사하고 찬미 드리면 그만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받은 더 큰 은총과 축복을 보고 시기질투하거나 배 아파하지 말아야하겠습니다. 누군가가 주님으로부터 관대한 사랑을 받았다면 함께 기뻐해주고 축하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 역시 맨 먼저 포도밭에 온 사람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큽니다. 맨 먼저 온 사람들은 어쩌면, 하느님으로부터 가장 먼저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저 감지덕지하면서 겸손하게 살았어야 했는데, 먼저 불림 받았다는 것에 대한 우월감, 자만심으로 가득했고, 그 결과 주님으로부터 큰 질타를 받은 것입니다.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마태오 복음 20장 14~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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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8.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을 전하는 일이 유일하게 가치 있는 일이고 행복일 수 있다면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에서 누가 첫째가 되고 누가 꼴찌가 되는지를 설명합니다. 하늘 나라에서 첫째가 되는 사람은 이 지상에서 맡겨진 일을 즐겁게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일이란 육체적으로는 고된 노동입니다. 오늘 비유 말씀에 따르면 오후 5시에 와서 6시까지 한 시간 일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주님이 맡겨주신 일이 하나도 힘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데 일거리가 없어서 아침부터 5시까지 걱정만 하며 서성였던 그 시간이 고통이었습니다.
반면 꼴찌가 되는 사람들은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죽도록 고생한 이들입니다. 그만큼 일을 고되게 했다는 뜻입니다. 사실은 마음은 편했으니 몸은 좀 힘들어도 자신을 써 준 포도밭 주인에게 감사했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늘 나라에서 첫째가 되는 사람은 ‘마음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고, 꼴찌가 되는 사람은 ‘육체의 행복’을 추구한 사람입니다. 일꾼인데도 노는 게 더 행복해 보인 사람들이라면 하늘 나라에서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몸은 좀 힘들지만, 마음이 편한 것을 원합니까, 아니면 마음은 좀 불편해도 몸이 편한 것을 원합니까? 몸도 마음도 다 편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두 의자에 동시에 앉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만 택해야 합니다.
내가 어디에 집중하느냐가 하느님 나라의 위치를 결정합니다. 육체를 괴롭힐수록 성령께서 마음의 평화를 증가시켜 주십니다. 반면 육체를 편하게 두면 마음의 평화를 잃습니다.
리오넬 메시가 파리 생제르맹으로 이적했습니다. 이적하자마자 그의 새 유니폼이 하루에 800억 원어치 팔렸다고 합니다. 많은 나이에도 아직도 건재한 그는 최대한 오래 운동장에서 뛰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리오넬 메시보다 바르샤 1군에 더 빠르게 데뷔했고 메시보다 더 뛰어나리라 예측되었던 선수가 있습니다. 스페인 출신 보얀 크르키치입니다.
메시가 17세에 데뷔해 17세 10개월 만에 첫 골을 넣었다면 보얀은 메시의 기록을 더 단축합니다. 그가 첫 골을 넣은 것은 17세 53일이었습니다. 17세 때 31경기에 출전에 10골을 넣은 것은 17세에 대뷔한 라울 곤잘레스의 9골을 경신한 신기록이었습니다.
문제는 정신력이었습니다. 메시보다 기록 면에서 앞섰던 그는 부담을 이겨낼 수 없었습니다. 매 경기가 메시를 넘지 못할까 봐 두려웠습니다. 경기는 어느 정도 즐겨야 하는데, 그는 불안함에 발작 증세까지 일으켰고 승승장구하던 그의 행복에 브레이크가 걸렸습니다. 그 이후 그는 그저 평범한 선수로 여기저기를 전전하는 중입니다.
도대체 ‘적어도 메시’라고 불리는 재능을 가지고 그는 왜 성공하지 못했을까요? 메시는 부담을 이겨냈고, 그는 이겨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메시는 골을 넣을 때마다 항상 성호를 긋고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이 말은 자기 영광이 아닌 주님 영광을 위해 뛴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메시를 넘어서야 한다는 부담을 가진 보얀은 자기 영광을 위해 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영광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결국, 자기 영광은 이기심이기 때문에 마음에서 갈등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포도밭은 축구 경기장 같습니다. 일하는 사람은 두 부류입니다. 자기를 고용해 준 주인에게 감사하는 사람과 돈을 벌기 위해서만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은 일하는 게 고됩니다. 그러나 아무도 써주지 않는 자신을 써 준 주인에게 고마운 사람들은 온종일 일해도 한 시간밖에 일한 것 같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늘 나라에서 살게 될 위치를 결정합니다.
독일의 고백 교회를 창설했던 ‘마틴 니묄러’(1892∼1984)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이분은 히틀러의 나치 정권하에서 목사들로 구성된 긴급동맹을 결성했습니다. 그리고 조직적으로 히틀러의 나치 정권이 교회 일에 간섭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또 나치가 무고한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것도 항거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비밀경찰인 게슈타포에 의해서 체포당했습니다. 8년 동안 감옥 속에서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러다 1945년 세계 제2차 대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연합군에 의해서 가까스로 구출을 받았습니다.
이때 밤에 잠을 자면서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만 꾼 것이 아니고, 똑같은 꿈을 무려 일곱 번이나 반복해서 꾸었습니다. 꿈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니묄러 목사가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줄을 서서 자기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니묄러 목사도 끼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뒤에서 나지막하면서도 울부짖는 듯한 목소리로 탄식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복음을 전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서 니묄러 목사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어디에선가 귀에 익은 듯한 음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즘 세상에 복음을 전해 받지 못해서 믿지 못했다는 것이 이해가 잘 안 되었습니다. 목사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궁금해서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다름 아닌 아돌프 히틀러였습니다.
그는 아찔했습니다. 목사는 사실 지금까지 히틀러를 엄청나게 미워했습니다. 조직적으로 항거했습니다. 심지어 히틀러를 암살하려고까지 계획을 세웠습니다. 똑같은 꿈을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 꾸던 날 하느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니묄러야! 너는 목사로서 히틀러를 미워하고 손가락질하기만 했지, 한 번이라도 그를 위해서 기도하며 또 그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생각했었느냐? 너는 어찌 그도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너의 형제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느냐? 왜 사랑으로 그에게 복음을 전해 주려고 생각하지 못했느냐?”
니묄러 목사는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렇다. 전쟁의 책임은 히틀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목사로서 그를 위해 진심 어린 기도를 해 주지 못하고 그에게 복음을 전해 주지 못한 나에게 더 큰 책임이 있구나!”
그렇게 해서 니묄러 목사는 참회하는 심정으로 『전쟁 책임 고백서』라는 책을 써서 “전쟁의 책임은 히틀러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목사인 나에게 있다!”라고 말함으로써 독일은 물론이요, 전 세계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는 목사로 있으면서 내 생각이 옳음을 입증하기 위해 히틀러에 저항했을 뿐 진정 하느님을 위해 히틀러에게 무엇을 해야 했는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지막 심판 때, 평생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편한 자리를 택하며 복음을 전하는 일을 힘겨워했는가, 아니면 차라리 복음을 전하는 것이 다른 모든 삶보다 더 가치가 있어 참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는가로 심판받게 됩니다.
포도밭 밖에서 놀고 있는 것보다 비록 힘은 들지만, 복음전파의 일을 하는 것이 더 행복하다 여길 때 하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복음을 전하는 일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그래서 온종일 복음을 전하고도 복음을 전하기 위한 시간이 항상 부족해야 합니다. 그 일터로 불러주신 분께 충분히 감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항상 감사하기 위해서는 나를 위한 일이 아닌 주인에게 보답하기 위한 일이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높이 올라갑니다. 이것이 어디에서건 나를 죽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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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8.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이승화 시몬 신부님.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두 가지 종류의 일이 있습니다.당연하게 여겨지기에 해야 할 일과노력에 따른 보상을 받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은주로 내 삶의 행복, 가치의 성취와 관련됩니다.누군가가 알아주지 않아도 나를 위해 해야 하며보상이 없어도 했다는 사실만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노력에 따른 보상은주로 다른 이와 공동체와 관련이 됩니다.누군가가 해야 하지만아무도 그것을 하기 싫어한다면,그 노력에 대한 보상은 분명히 주어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생활은 어떤 종류일까요?보상을 바란다면 세상과 사람들을 위한 것이고당연히 해야 한다면 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그렇기에 우리 마음을 잘 살펴야 합니다.
하느님을 바라보고 시작한 신앙생활도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순간 보상과 대가를 바라게 됩니다.삶의 의미를 찾아가며 가치를 발견하는 삶참된 행복을 누리는 삶을 스스로 멀리하는 꼴입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은먼저 시작하였다고 자랑하지 말고나중에 시작하였다고 차별받지 말아야 합니다.오히려 먼저 시작한 이들은 교만하지 않도록 주의하고나중에 시작한 이는 더 많이 배우고 익히며 살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나는노력에 대한 보상에 의문을 던질지더 많은 이가 하느님 안에 함께 할 수 있음에 기뻐할지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길 바랍니다.우리 신앙은 보상이 아닌 당연히 나아가야 하는 길임을 기억하며오늘 하루도 주님을 바라보며 걸어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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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8.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제1독서(판관9,6~15)
"스켐의 지주들이여, 내 말을 들으시오. 그래야 하느님께서도 그대들의 말을 들어 주실 것이오." (7ㄷ)
판관기는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점령하고 분배한 다음부터 사무엘의 영도아래 왕정이 들어서기 까지의 역사를 다룬다.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약속의 땅을 점령하고,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를 야훼 신앙안에서 단결시킨 여호수아의 시대는 가고 혼돈의 시대가 돌아왔다.
여호수아기의 저자는 땅과 율법의 관계를 보증에서 경고로 발전시킨다.
즉 약속의 땅을 차지하기 전에는 율법에 대한 순종이 땅의 소유를 보증하지만, 그 땅에 정착하면서부터는 율법에 대한 불순종이 땅의 상실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한다.
판관기는 이 경고가 구체적 현실로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하느님께 충성을 다하지 못하면, 그분이 선물로 주신 땅을 차지하고도 그곳에서 번영을 누릴 수 없다.
오히려 그 땅에서 무질서와 혼돈을 겪을 뿐이며, 약속의 땅이 문제의 땅으로 돌변할 것이다. 이 혼돈의 상황 앞에서 사람들은 왕정의 도래를 고대한다. 그러나 왕정이 들어서면 과연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스라엘을 안정과 번영으로 인도하는 것은 이상적 훌륭한 제도가 아니라 참 임금이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충성이다.
오늘 독서에서 요탐은 아비멜렉이 임금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우화를 통해 왕정제도가 쓸데없음을 전하며 격렬하게 비판하는 내용이 나온다.
참 임금이신 하느님을 버리고 눈에 보이는 임금을 찾는 그들을 우화를 통해 비판하는 것이다.
스켐의 지주들에게 아비멜렉을 임금으로 세운 것은 마치 나무들 중에서 올리브나무도, 무화과나무도, 포도나무도 아닌 가시나무를 세운 것과 같다.
그것은 올리브나 무화과나 포도나무는 열매가 있는데 반해 가시나무는 아무 열매도 결실도 없는 나무이기에 그것을 추구하는 것은 헛된 것이라는 것이다.
더군다나 가시나무 그늘 아래 사람이 몸을 피할 수 있는가?
가시나무에 무슨 그늘이 있으며, 가시나무 그늘 아래 어떻게 몸을 피할 수 있는가?
쓸데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모세, 여호수아를 거쳐 왕정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서 이스라엘이 계약의 하느님, 참 임금이신 하느님을 섬기는 것을 거부하고, 인간이 만든 제도를 따르고자 하는 그들에게 부당성을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우리의 마음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사람과 사람이 만든 제도와 형식과 틀 말고 온전히 만유 위에 하느님만을 향하고 있는가?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마태20,1-16)
1 “하늘나라는 자기 포도밭(천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 하느님 나라는 하늘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일꾼, 곧 당신께 영광을 드리는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다.
(이사43,7) 7 ‘나의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창조한 이들, 내가 빚어 만든 이들을 모두 데려오너라.’
2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 하늘나라의 품삯은 한 데나리온, 즉 하늘의 생명 그 하나를 받는, 그 하나를 깨달으라는 오늘의 말씀이신 것이고 그 하나를 받는, 깨달은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다.
3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4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그들이 갔다.
= 정당한 삯, 참 진리는 하나인 것이다.
5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6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7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그 부족한 사람을 뽑아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로우심
(마태11,25)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 드립니다.
8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9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 하느님은 한 데나라온 곧 하늘의 생명 그 하나를 주시는 분, 포도밭 일꾼은 포도나무의 열매를 맺는 일을 하는 것으로, 하느님은 노동을 시키시려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한 데나리온, 그 하나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 부르신 것이다.
포도나무의 가지로 포도 열매를 맺도록, 곧 예수 그리스도의 가지로 하늘의 생명, 그 열매 하나를 맺으라는 것.
외아들- 독생자(모노게네스- 하나를 갖은 이)
(요한15,5)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 일꾼이 자신(세상)의 뜻을 버리고 포도나무의 가지로 붙혀지는 그 일을 하라고 부르신 것이다. 그것이 신앙생활의 본분이다.
일꾼(자신)들의 육의 행실, 그 가치는 구원의 열매가 아니라는 것. 사람의 의로움은 개짐(쓰레기. 오물, 똥)일 뿐이기 때문이다(이사64,5참조)
10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11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12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 하느님의 뜻, 계명을 모르니 자신의 뜻인 세상의 방법으로 따진다. 성경 말씀을 그렇게 인간의 계명 지혜로 보기에 하늘의 생명 그 하나를 많은 이들이 못 받는다 하신 것이다. 그리고 많은 일꾼들이 그 세상의 가치를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목자들은 구해낼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말씀이다.
(에제34,4-6) 4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 5 그들은 목자가 없어서 흩어져야 했다. 흩어진 채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다. 6 산마다, 높은 언덕마다 내 양 떼가 길을 잃고 헤매었다. 내 양 떼가 온 세상에 흩어졌는데, 찾아보는 자도 없고 찾아오는 자도 없다.
= 온갖 질병 곧 죄의식으로 시달리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덮으심에 계명, 그 말씀으로 용서를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규정과 교리, 세상의 법으로 가르쳐 병들게 했다고 하시는 것, 그래서 진정한 참 목자가 없다는 말씀이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으로 넘겨져 세상 사람과 구병이 없다는 것이다. 목자는 신자들을 그 세상의 죄와의 법을 진리로 가르쳐 구원과 관련없는 삶으로 세상과 하나로 그릇된, 헛된 신앙을 살게 했다는 것이다.(요한 16,8참조)
구원은, 하늘의 생명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 그 의로움을 진리로 믿어 얻는 것이지 인간의 행실, 의로움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13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 하느님은 하늘의 생명 그 하나만을 약속 하셨지, 땅의 생명(재물, 일)은 약속하지 않으셨다(마태6,7~ 루가12,14참조)
14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15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 많은 이들이 하느님의 후하심, 곧 십자가의 대속으로 거저 얻은 용서, 의로움, 그 은총을 믿지 못한다. 그래서 후하신 용서를 받지 못한다. 그러니 그 예수님의 의로움이 아닌 사람(세상)의 의로움을 위한 신앙을 살고 있는 것이다.
16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 보이는 많은 일을 한 그 사람이 첫째 같지만~그 일은 구원에는 꼴찌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시는 것이다.
참조~(이사45,24-25) 24 말하리라. “주님께만 의로움과 권능이 있다. 그분께 격분하는 자들은 모두 그분 앞에 와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리라. 25 이스라엘의 모든 후손들은 주님 안에서 승리와 영예를 얻으리라.”
그러니~(마태6,33)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1베드2,24-25) 24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하늘, 예수)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 25 여러분이 전에는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었지만, 이제는 여러분 영혼의 목자이시며 보호자이신 그분께 돌아왔습니다. 아멘.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복음 (마태20,1-16)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요?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15)
한글 새 성경은 '나에게 합당하지'에 해당하는 '엑세스틴 모이'(eksestin moi; It is lawful for me)의 번역을 생략했는데, 포도밭 임자의 행동의 합법성을 강조하는 뜻이 있으므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내게 합당하지 않느냐?" (Is it not lawful for me to do what I will~?) 라는 뜻이 된다.
원문대로 하면, 자신의 소유를 자신의 뜻대로 사용하는 것은 합당한 행위였다는 의미가 들어있는 것이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당신의 마음대로 하신다 하여도 그것은 절대 잘못된 것이 아니며, 더군다나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은 절대 공의로우며 인간에게도 유익이 되는 선(善)한 것이기에, 인간이 왈가왈부할 성질이 못된다는 것이다.
'내가 후하다고 해서'에 해당하는 '호티 에고 아가토스 에이미'(hoti ego agathos eimi; because I am generous; because I am good)에서 '에고'(ego; I)라는 일인칭 대명사가 독립적으로 사용되었다.
'에이미'(eimi; am)란 동사에 주어가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에고'(ego)란 단어를 사용한 것은 후하고 관대하며 선한 자가 바로 포도밭 임자(주인)이란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아가토스'(agathos)는 '윤리적으로 선하다'는 뜻도 있지만, '상대방에 대하여 너그럽다'는 의미도 지닌다.
말하자면, 놀고 있는 자를 고용하여 넉넉한 품삯을 준 포도밭 임자 자신의 행동을 가리킨다.
한편, '후하다고'를 의미하는 '아가토스'(agathos)와 대응되는 단어로서 '시기하는'으로 번역된 '포네로스'(poneros; envious; evil)는 '비열한', '무가치한'이란 뜻도 가지고 있다.
즉 의인인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관대한 은혜를 베푼 것을 도덕적으로 비열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는 뜻이다.
비록 늦게 포도밭에 왔지만 동료가 후한 대접을 받은 것에 대하여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마땅한데, 이것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꾸짖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란 자신의 우월감을 타인과 비교하여 드러내기를 좋아할 뿐, 하느님의 입장에서 내려지는 크나큰 사랑을 볼 줄 모르는 경향이 많다.
이러한 아담과 하와의 본성적 요소가 만드는 세속적인 가치관과 기준은 항상 하느님의 뜻과는 상반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거룩한 안목으로 볼 때, 모든 인간들은 하느님의 자비심을 얻어 입어야 하는 죄인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느님의 자비심을 무시한 채 모든 것을 세속적이고 본성적인 가치관으로 바라보며, 자기 우월감을 확인하는 데서 만족감을 얻는 어리석음에 빠진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본문은 바로 세속적이고 본성적인 가치관으로 감히 하느님의 주도권에 대해 판단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확실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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