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만 광년을 풋사과의 속도로
아삭, 창문을 여는 한 그루 사과나무 기척
四方이 없어 부푸는 둥근 것들은 동쪽부터 빨갛게 물들어간다
과수원 중천으로 핑그르르
누군가 붉은 전구를 돌려 끄고 있다
당분간은 철조망의 계절
어두워진 빨강, 눈 밖에 난 검은 여름이
여름 내내 흔들리다 간 곳에
흔들린 맛들이 떨어져 있다
집 한 채를 허무는 공사가 한창이고
유독 허공의 맛을 즐기는 것들의 입맛에는 어지러운 인 이 박혀 있다
죽은 옹이는 사과의 말을 듣는 귀
지난가을 찢어진 가지가 있고 그건 방향의 편애
북향에도 쓸모없는 편애가 한창이다
비스듬한 접목의 자리
망종 무렵이 기울어져 있어 씨 뿌리는 철
서로 모르는 계절이 어슬렁거리는 과수원
바람을 가득 가두어놓고 있는 철조망
사과는 지금 황경 75도
윗목이 따뜻해졌는지 기울어진 사과나무들
이 밤, 철모르는 그믐달은
풋사과처럼 삼만 광년을 달릴지도 모른다.♧
2012년 중앙신인문학상 수상작- 당선소감
사과 속에서 한 철을 살았다. 병실 침대에 누워 무의식과 의식을 오가던 계절이 있었다. 문득 사과를 한 입 베어물었고, 그때 단단히 잠겼던 동쪽의 문이 열리는 것 같았다. 동쪽을 편애한다. 동쪽 바람 길에 핀 꽃을 흠모하고, 동쪽으로 가는 새떼들을 경외하고, 무작정 동쪽 바다를 그리워하며 떠나고는 했던 내 시의 여정을 사랑한다.
세상이 만화라면 늘 주인공 주변을 흘깃 쳐다보며 정지해 있는 존재 없는 행인이었다. 그러나 펼쳐지는 몇 칸에 행인은 존재하고, 넘어가는 낱장들에도 행인은 존재해 있었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행인의 눈으로 시를 써 왔다. 그냥, 바라만 보고 있었지만 사실이라는 말 주머니 밖에서 들리는 진실을 읽으려고 노력했다. 때로 주인공이 아닌, 부딪치는 또 다른 행인의 이야기가 가까이 다가왔다. 통증으로 인해 가슴 너울지는 날들을 견뎌야만 했다. 무릎 꿇고 엎드려 겸손해지는 법을 배웠다. 두려웠던 방향의 기후들과 담담히 마주할 수 있었다. 습관처럼 혼자 서 있던 모퉁이 그늘이 고맙다. 축복이었다.
친구들과 둘러앉아 요란하게 수다를 떨어야겠다. 동부학원 선생님들과 함께 웃어야겠다. 백운사 법륜 스님께 감사 드린다. . 두 명의 언니가 있어서 행복하다. 가족을 위한 만찬을 준비해야지.
손바닥이 가장 못생긴 햇볕이 내어 준 가장 맛있는 사과를 먹는 중이다. 따뜻하다. 여전히 물고기자리의 얼룩을 지우며 밤하늘에서 내려다보고 계실 ‘나의 엄마’께 이 소식을 전하는 중이다.☆
♬ - 목련화,엄정행
- 250524作 황매산
첫댓글
수고하신 아름다운 작품에
노래 좋구요
강추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