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긋지긋한 지금(Now) ― 좋든 싫든
나는 계속해서 '지금(Now)' 이라는 말을 고집한다. 그 고집은 문체를 위한 것도, 신심(信心)을 드러내기 위한 것도 아니며, '지금'을 어떤 특별한 형이상학적 실체라고 믿기 때문도 아니다. 오히려 도망갈 곳이 없는 유일한 장소가 바로 지금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고요', '침묵', '공(空)', '공허', '무(無)', '일체(Everything-ness)' 같은 거창한 말로 가리키려 하는 모든 것은, 그것이 단순한 시적 장식이 아니라면, 결국 언제나 이 즉각성(immediacy) 을 향하고 있다.
그것은 삶의 뒤편에 숨어 있는 무엇도 아니고, 현상 아래 감춰진 더 깊은 의미도 아니며, 물러나 쉴 수 있는 어떤 배경도 아니다.
그것은 해석이 시작되기 이전에 언제나 이미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을 보기 어렵다는 데 있지 않다. 문제는 그것이 너무나 명백하고, 너무나 친밀하며, 너무 가까워서 이색적인 대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리고 마음은 대상으로 만들 수 없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데는 영 재주가 없으니.
지금은 언제나 지금이다.
상징적으로도 아니고, 영적으로도 아니며, "가장 깊은 의미에서"도 아니다. 문자 그대로 지금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바로 지금.
지금 의심하는 바로 지금.
지금 어제를 떠올리는 바로 지금.
지금 내일을 상상하는 바로 지금.
지금 동의하는 바로 지금.
지금 저항하는 바로 지금.
무엇이 나타나든―생각이든, 감각이든, 감정이든, 이미지든, 통찰이든―모두 지금 나타난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치 여러 개의 '지금'이 있는 것처럼 말한다. 지금이 시간선 timeline 위를 미끄러지는 한 점인 것처럼,
어제에도 자기만의 지금이 있었고 내일에는 또 다른 지금이 있을 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이야기 전체는 무너진다.
어제는 지금 나타나는 하나의 생각이다.
내일도 지금 나타나는 하나의 생각이다.
지속(duration)도 지금 나타나는 생각이다.
심지어 시간이 흐른다는 느낌조차도, 현재의 감각과 현재의 이야기(narrative)가 결합한 것이다.
마음은 즉각성 속에 순서를 투사한 뒤, 자신이 그렇게 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그 투사를 현실이라고 착각한다.
그렇다면 '지금'은 몇 개인가?
하나인가?
그러나 "하나"라고 말하는 순간조차 이미 오해가 시작된다.
'하나'라는 말은 하나의 단위, 하나의 경계, 셀 수 있는 어떤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물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흐름(flow)'이라고 불러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흐름 역시 여기에서 저기로의 이동을 암시하지만, 그런 이동은 실제 경험 속에서는 결코 발견되지 않는다.
발견되는 것은 단 하나.
끊김 없이 이어지는 나타남(appearance) 이다.
이음새(seam)는 상상된 것이다.
이음새는 개념이다.
이음새는 마음이 발 딛고 설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그러자 마음은 그것의 위치를 찾으려 한다.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몸 안인가?
눈 뒤인가?
알아차림 속인가?
공간 속인가?
그러나 지금에는 주소가 없다.
'여기(Here)' 역시 주소가 없다.
'여기'를 위치시키려는 모든 시도는, '여기'를 하나의 개념, 좌표, 지도 위의 점으로 바꾸어버린다.
그런데도 '여기'는 부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공간 자체를 포함한 모든 것은 언제나 오직 여기에서만 경험되기 때문이다.
'지금'과 '여기'는 우연히 만나는 두 가지가 아니다.
그것들은 동일한, 위치시킬 수 없는 사실을 가리키는 두 개의 불완전한 단어일 뿐이다.
둘을 합쳐보면 하나의 농담이 드러난다.
Now + Here = Nowhere 지금 + 여기 = 어디에도 없는, 아무데도 아닌 곳
이것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다.
직접적인 지시이다.
만약 지금이 여기와 분리될 수 없고,
여기가 위치될 수 없다면,
지금 역시 위치될 수 없다.
위치가 없다는 것은
밖에서 바라보는 관점도 없고,
사건 밖에 서 있는 관찰자도 없으며,
자아가 안전하게 숨어 있을 비밀스러운 발판도 없다는 뜻이다.
바로 여기에서 마음은 공황을 일으킨다.
그래서 곧바로 새로운 발판을 다시 만든다.
대개는 영성(spirituality) 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나는 지금을 지켜보는 증인이다."
"나는 현존으로 쉰다."
"나는 공성 안에 머문다."
이 말들은 모두 슬며시 하나의 대명사를 끼워 넣는다.
'나(I)'라는 권리 주장자를 세우고, 하나의 입장을 설치한다.
끊김 없던 전체는
관찰자와 관찰대상,
안과 밖,
전과 후로 갈라진다.
여기서 태어나는 것은 생물학적 탄생이 아니라, 아는 자(the knower)의 탄생이다.
삶 앞에 서서 클립보드를 들고 모든 것을 기록하는 누군가가 생겨난다.
그래서 많은 영적 언어는 세련되어 보이지만 어딘가 미묘하게 거짓처럼 느껴진다.
초월을 말하면서도,
분리를 그대로 보존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을 붓다는 냉혹할 정도의 명료함으로 잘라냈다.
연기(緣起)는 우주에 관한 형이상학적 이론이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하는 자아'라는 감각이 매 순간 어떻게 조립되는지를 해부하는 메스였다.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
이 다섯 가운데 어느 것도 독립된 실체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함께 작동하면서
태어나는 누군가,
시간 속에 존재하는 누군가,
삶을 약간 떨어진 자리에서 바라보는 누군가라는 강력한 환상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 조립은 과거에도 미래에도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지금 일어난다.
"내가 있다."
라는 감각도 지금 일어난다.
"이 일이 나에게 일어나고 있다."
라는 감각도 지금 일어난다.
괴로움도 지금 조립된다.
해탈이라는 말이 실제 의미를 가진다면,
그 역시 다른 곳에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마음은 피난처를 찾는다.
그래서 나가르주나는 마지막 남은 안전지대마저 해체했다.
이제(二諦)는 두 개의 세계가 아니다.
세속제는
이름,
시계,
지도,
약속,
언어,
숫자,
즉 일상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유용성의 세계이다.
이를 부정하는 것은 지혜가 아니라 혼란이다.
승의제는 현실에 대한 더 우월한 설명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은 반드시 어떤 설명 안에 들어맞아야 한다는 요구 자체가 무너지는 것이다.
그 붕괴는 철학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발 디딜 자리를 찾다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일어난다.
중도는 양극단의 절충이 아니라,
극단이라는 것이 애초에 사유가 즉각성을 굳혀 하나의 입장으로 만들 때만 생긴다는 사실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나가르주나는 공(空)마저도 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공마저 또 하나의 형이상학적 우상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선불교는 철학이 새로운 피난처가 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반케이 요타쿠(盤珪永琢반규영탁, 일본선사) 가 말한 '불생(不生, Unborn)'은 어떤 미묘한 교리도, 영원한 실체도 아니었다.
불생이란 우주적 의미에서 영원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만들어지지 않은 것(unmanufactured) 이라는 뜻이다.
노력으로 생산되지 않고,
생각으로 구성되지 않으며,
어떤 자아의 소유도 아닌 것.
만들어지지 않은 것은
나중에도,
다른 장소에서도,
축적을 통해서도
발견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이야기하기 이전의 지금,
"이 일이 나에게 일어난다."라고 말하기 이전의 지금으로서만 있다.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지금'으로 되돌아온다.
더 화려한 표현으로 넘어가기를 거부한다.
'지금'이 사라지면,
고요는 하나의 체험이 되고,
침묵은 하나의 기분이 되며,
공은 하나의 철학이 되고,
무는 허무주의가 되며,
일체는 시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지금'과 함께라면,
이 모든 것은 원래 가리키고 있던 하나의 사실로 되돌아간다.
곧,
대명사가 없고,
자아가 없으며,
말 이전에 이미 작동하고 있는 살아 있는 존재의 기능 그 자체.
'지금'은 위안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핑계를 제거한다.
깨달음을 미룰 수는 있다.
이해를 미룰 수도 있다.
실현을 미룰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을 미룰 수는 없다.
미루는 행위도 지금 일어난다.
반론도 지금 일어난다.
"이제 알겠다."
라는 선언도 지금 일어난다.
그리고 그것 역시 위치 없는 곳에서 떠오른 또 하나의 생각임이 즉시 드러난다.
현대물리학은 여기서 매우 조심스럽게만 사용할 수 있다.
양자 얽힘이 신비주의적 합일이나 우주의식 같은 것을 증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기껏해야 하나의 은유로서,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분리된 개체들이 이미 주어진 시공간 안을 움직인다'
는 그림이 생각만큼 견고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상기시켜 줄 뿐이다.
그러나 이 글은 물리학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마음은 이미 우리 눈앞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 속의 나'라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안정시키고,
끊김 없는 전체가 드러나려 할 때마다 균열을 메우며,
즉각성이 요구자를 위한 발판을 남겨두지 않으려 하면,
곧바로 새로운 발판을 다시 세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과학도,
철학도, 선불교의 수사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오직 정직함이다.
'지금'의 경계를 찾아보라.
단어가 아니라 사실 자체를.
어디서 시작하는가?
어디서 끝나는가?
"이 순간이 끝나고 다음 순간이 시작된다."
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경험이 아니라 마음의 모형을 설명하는 것이다.
실제로 발견되는 것은
소리,
감각,
생각,
기억,
기대가
중심도 없고,
주인도 없이,
끊김 없이 나타나는 것뿐이다.
이음새는 생각이다.
주인도 생각이다.
그리고 생각 자체도
그저 여기에서,
지금, 아무 곳도 아닌 곳(nowhere) 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그렇다면 '지금'이란 무엇인가? So what is Now?
'그것(it)' 없이. Without an it.
이것은 재치 있는 말장난이 아니다. Not as a clever punchline
즉각성을 붙잡을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려는 마음을 거부하는 것이다.
but as a refusal to let the mind turn immediacy into an object it can grasp.
지금이 하나의 사물,
장(field),
배경,
현존,
의식
이 되는 순간,
관찰자는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바로 그 재탄생이,
이 글 전체가 벗어나고자 했던 바로 그것이다.
끊김 없는 不生 seamless unborn은
도달해야 할 상태도 아니고,
소유해야 할 진리도 아니며,
방어해야 할 통찰도 아니다.
그것은
어딘가에 서서 '내가 안다'고 주장하려는 필요가 마침내 완전히 소진되었을 때 남아 있는 것이다.
너무도 자명하다.
빠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바로 여기, 지금,
위치시킬 수 없고, unlocatable
즉각적이며, immediate
주인 없는 그것이, unowned
우리가 해석을 놓고 논쟁하는 동안에도
정면에서 우리를 마주 보고 있을 뿐이다.
합장(合掌),
R.
— 길 가장자리에서 남긴 메모들 (Notes from the Edge of the P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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