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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9:1-3 다윗의 시 : 칼빈
다윗은 먼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획득하게 해 주셨던 과거의 승리를 열거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들이 문제삼았던 모든 일에 행복한 결과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높은 어조로 격찬합니다.
그렇게 한 뒤에 여기서는 다시 새로운 원수들과 위험이 발생하는 것을 봅니다.
이제 다윗은 하나님께 과거에 베푸신 구원으로 자신을 보호해 주실 것을 탄원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자기 원수들의 교만을 전복시켜 주실 것을 간절히 요청합니다.
1. 본 편 주제는 "다윗의 시, 영장으로 뭇랍벤(혹은 알뭇 라벤)에 맞춘 노래" 입니다.
이 명칭은 여러 가지로 설명됩니다.
혹자는 '라벤이 죽게 되자' 로 번역하여 그가 다윗의 원수들의 주요 대장들 중에 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봅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 말이 허구적인 이름이었던 것으로 생각하며 본 시편에서 언급되고 있는 인물을 골리앗으로 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러한 애매한 문제에 대하여 그것을 본 시편의 가락에 맞추어 부른 당시 잘 알려진 노래의 처음 부분으로 보는 것이 더 가능한 것 같습니다.
다윗이 여기서 어떤 승리를 송축하고 있는가하는 문제에 관해 주석가들간의 갑론을 박하는 것은 불필요하며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먼저 본 시편 문맥에서 이것을 하나님께 대한 다윗의 감사 노래로만 보는 자들의 견해는 잘못된 것으로 판명됩니다.
물론 대부분이 하나님에 대한 찬송으로 이루어진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전체를 하나의 기도로 생각해야 옳습니다.
다윗의 일상적인 방법에 따라서 어느 정도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자신이 원수들의 횡포와 능력으로부터 구원받았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자기의 많은 구원을 묶어서 포함시키려 하는 이 감사 기도에 하나의 승리만이 국한되었다고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2. 1절은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 입니다.
1) 본문 1절 초에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1) 다윗이 본 시편을 이런 방법으로 시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현재 재난에 처해있는 자신에게 돕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도록 하려는 뜻에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중단 없이 자기 백성에게 좋은 뜻을 계속 베푸십니다.
시편 9 편
그러므로 지금까지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선하심을 통해서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롭고 은혜롭게 해주실 것이라는 점을 확신하고 소망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지금까지 받아 누린 여러 가지 은혜에 감사 드리는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베풀어 주신 자비를 기억함으로써 앞으로도 도와 주시고 복을 받을 것이라는 점을 다짐합니다.
이로써 다윗은 기도의 문을 열고 있습니다.
(2) "전심" 혹은 "온 마음"이란 두 마음과 반대되는 정직하고 진실한 마음을 뜻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마음에 없는 찬양을 늘어놓는 흉측한 위선자들과 자신을 구별합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자신이 한 일 가운데 칭찬 받을 만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적으로 하나님의 순수한 은혜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점을 시인합니다.
(3) 무론 신앙이 없는 사람들까지도 그들이 무슨 기억할 만한 승리를 거둘 때에는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마땅한 찬양을 박탈하게 된 것을 수치로 여기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것처럼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도움에 대한 긍정적인 대꾸를 한 마디 할 때면 그들은 마치 하나님께 조금도 도움 받은 것이 없는 것처럼 떠들어 대고 자신들의 용맹 때문에 승리한 것처럼 속단해 버립니다.
자신들의 공적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성취되었다는 그들의 고백이 순전히 조롱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하고 얼마 안되어 자신들의 잔꾀나 재주, 만용, 자만심을 갖고 제사를 드리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4) 건방진 왕을 두고 하박국 선지자가 질책한 내용은 모든 사람들이 갖는 공통적인 야망을 책망하고 있다는 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합1:16). 그렇습니다.
전쟁터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는 옛날 유명한 장군들은 그들의 이름으로 신들에게 공개적으로 엄숙한 감사를 선포하기를 원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거짓된 신에게 영예를 돌릴 생각은 없었고 다만 핑계삼아 그들의 이름을 악용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세력을 인정받도록 한다는 뜻에서 허풍떠는 기회로 삼았을 뿐입니다.
(5) 그러므로 다윗이 사악하게 하나님과 자신들에게 돌아갈 칭송을 구별하면서 하나님께 돌리는 척하는 대부분의 찬양을 자신들의 몫으로 사취하는 이 세상의 자식들과 자신이 다르다는 점을 확증하는 것은 잘한 일입니다.
다윗은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유한한 인간이 하나님께로 돌아갈 영광의 극히 적은 일부분이라도 감히 그것을 사취하려 든다면 그것은 온 마음을 다 바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못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이 자기 영광을 제아무리 적은 범위에서일망정 도적질하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하십니다. 그러므로 자기 고무에 빠져서 실컷 하나님의 영광을 흐리게 하는 자들의 신성 모독 역시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시편 9 편
2) 본문 1절 하반에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윗은 여기서 자기가 이 시편에서 한 가지 구원이나 승리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증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서 이루어 놓으신 모든 기적을 전반적으로 제시하면서 묵상의 소재로 삼습니다.
'기사' 라는 단어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은혜에 대해서 적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을 밝고 뛰어나게 드러내 보여준 보다더 현저하고 기념할 만한 구원 사건들에 적용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우리가 받은 모든 복의 주인공으로 승인하길 바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은사 가운데 몇 가지만 우리 마음 가운데 명백한 표적을 새겨놓으셔서 잠들어버렸거나 죽어 있을 우리 감각을 더 효과적으로 일깨워주십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사용한 언어는 그가 하나님의 보호를 받되 일반적인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점에 대한 긍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인 방법으로 또 일반적인 방법을 능가하는 방향으로 하나님의 손길을 내뻗어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3. 본문 2절은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신실한 자들이 추구하는 행복은 자기 자신을 의지하거나 어리석고 육적인 뻔뻔스러움에 이끌려 도취되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만 기뻐함으로써 진지하게, 위선이 없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호의에 완전한 행복이 있기에 오직 거기서만 자신들의 기쁨을 추구하고 다른 곳은 돌아보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면서 인간들이 자기 자신들 안에서 찾는 기쁨과 하나님 안에서 찾는 기쁨의 성격이 얼마나 크게 다른가 하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쓸데없는 기쁨으로 사로잡을지도 모를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이 단념하고 있다는 점을 더욱 더 강력하게 표현하는 뜻에서 '기뻐한다'는 단어를 덧붙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 안에서 완전하고 흘러 넘치는 기쁨을 찾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다른 곳에서는 어떠한 기쁨도 전혀 찾을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이 그가 과거에 체험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여러 증거를 스스로에게 제시하는 것은 자신이 더욱더 기민하게 자기 마음을 하나님께 열고 그분 앞에 자기 기도를 바치려는 뜻에서라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편 9 편
하나님 자신이 기쁨의 위대한 근원이시요, 또 기뻐해야 할 대상이시라는 점을 확증함으로써 자기 기도를 시작하는 자는 사전에 더없이 강력한 확신으로 무장을 갖추고 기도를 들어 주시는 분에게 자기 간청을 아뢰는 셈입니다.
4. 본문 3절은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의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입니다.
1) 다윗은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라는 말을 통해서 왜 자신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 있는가를 설명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빈번한 승리가 자기 능력이나 부하들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에 의해 성취되었다는 점을 인정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본 구절의 첫 부분에서 다윗은 자기 원수들이 어떻게 좌절당하고 패주하게 되었는가 를 역사적으로 나열합니다.
다음은 이 전쟁이 인간 능력이나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싸우셨으며 전쟁터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상대로 버티어 주셨기 때문이라는 점을 덧붙여 말씀합니다.
이것은 신앙에 입각한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2) 이어서 다윗은 '그들이 주를 보고 넘어지며 패주하나이다' 라는 말씀을 합니다.
다윗이 자기 원수들이 등을 돌려대는 것을 보자마자 마음의 눈을 하나님께 향함으로써 자신에게 온 승리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밀하고 신비한 도우심에서 왔다는 점을 파악한 것은 현명한 일입니다. 사실상 하나님은 소박한 사람들은 지혜의 영으로 지도하고 교활한 자들에게는 광기를 부과하심으로 당황하게 하십니다.
또 하나님은 약한 자들에게는 용기를 불어넣어 주시고 가장 담대한 자들이라도 그들에게는 공포로 무서워 후들후들 떨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자들에게는 그들의 힘을 회복시켜 주시고 강한 자들은 연약하게 만드십니다.
또 하나님은 마음이 허약한 자들은 자기 능력으로 부축해 주시고 용장들의 손에서는 칼을 낚아채십니다. 결국은 자기 뜻에 따라서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분은 바로 살아 계신 하나님, 곧 그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원수들이 전복되는 것을 볼 때 육체의 눈으로 보기는 하지만 맹인이나 다름없는 악인들처럼 감각의 눈에 비치는 것에만 우리 시야를 국한시킬 것이 아니라 우리 원수들이 등을 돌려댈 때 그들이 여호와의 임재를 보고 패주한다는 점을 당장 머리에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넘어지다' 와 '패주하다' 가 히브리어에서는 미래로 되어 있지만 칼빈이 여기서 현재로 번역한 것은 다윗이 그가 과거에 자신에게 나타났던 하나님의 선하심을 새롭게 자신에게 떠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태가 현재 우리 신앙 생활입니다.
시편 9 편
시9:4-8 주께서
1) 다윗은 원수의 나라들이 주의 심판으로 패한 사실에 감사하며 기뻐합니다(1-6).
다윗은 원수들의 패망 자체를 즐거워함보다 공의로우시고 위대하신 주를 즐거워합니다 2절에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 한다 하였고,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라" 고도 하였고,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라"고도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신 심판을 행하시므로 큰 나라들의 세력이라도 문제없이 파멸시키시는 높으신 하나님이신 사실을 체험하였습니다.
이런 뜻에서 다윗은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다"했고 "열방을 택하셨다"고 했습니다.
2)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열국 심판을 본 다윗은 하나님께서 장차 세계를 공의로 심판하실 것을 내다봅니다(7,8).
이 부분에 "세계를 심판" 하신다는 말씀과 "만민에게 판단을 행하시리라" 란 말씀은 모두 세상 끝 날의 대심판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신자는 하나님의 과거행위를 보고 하나님이 나타내실 미래행위를 내다봅니다.
1. 본문 4-5절은 "(4)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 판하셨나이다
(5) 열방을 책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저희 이름을 영영히 도말하셨나이다" 입니다.
1) 시편 기자는 4절에서 더 나아가 자신이 원수들에게 고통을 당하고 있기에 하나님께서 손을 뻗치사 자신에게 도움을 베푸셨다는 점을 밝히 선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조력을 받고자 한다면 마땅히 그의 깃발아래서 싸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을 '의의 재판관' 또는 '의로운 재판관'으로 부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이 일반적이요 한결같은 행동 원칙에 따라 우리에게 행동하신 것은 선한 명분을 옹호하는 일이 그의 통상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주는 의로운 재판관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라고 번역하는 편을 택하는 이유는 표현 양식을 볼 때 후자가 더 강조적이기 때문입니다.
이 내용은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재판관으로 신분을 취하시고 재판관 임무를 수행하려고 자기 심판자리에 오르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다윗은 법과 정의가 자기 편에 있다는 사실을 자랑삼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 권리와 대의명분의 옹호자였다는 점을 선언합니다.
시편 9 편
2) 다음 5절에 이어지는 "악인을 멸하시며" 라는 내용 역시 동일한 주제에 속합니다.
다윗은 자기 원수들이 전복되는 것을 보고서 그들의 파멸 자체만을 생각하고 그것으로 기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그들의 불의를 들어서 저주하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받아 마땅한 처벌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여기 '민족들(열방)'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불경건한 자들의 숫자가 적었던 것이 아니라 큰 군대, 곧 사방에서 자신에게 반기를 든 모든 무리였다는 점을 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종 가운데 한 사람에게 베푸는 호의 때문에 모든 민족들까지 아끼지 않으셨다는 이 점에서 그의 선하심은 더 그 빛을 발합니다.
"저희 이름을 영영히 도말하셨나이다" 라는 말씀은 그들이 파멸되어 일어날 소망이 없게 되었으며 영원한 수치를 당하고 말았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의인들에 대한 기념은 영원히 칭송이 될 것이라는 말씀(잠10:7) 이 아니었던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악인들의 이름을 그들과 함께 묻어버리고 마는가 하는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2. 본문 6-7절은 "(6) 원수가 끊어져 영영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7) 여호와께서 영영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예비하셨도다" 입니다.
1) 먼저 6절은 "원수가 끊어져 영영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인데 이 6절은 다양하게 설명됩니다.
혹자는 히브리 문자 (헤)를 의문사로 보면서 이것을 의문문으로 여겨 곧 다윗이 자기 원수들에게 말을 건네면서 모든 것을 파멸하기로 결심한 그들인 만큼 그들의 황폐화 작업을 완성했는가 하고 묻는 것으로 읽습니다.
그 이유는 (타맘)이라는 단어에는 '완성하다'는 의미도 있고 '무슨 일을 마무리짓다'는 의미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이런 의미로 택한다면 다윗은 해학과 조소의 언어로 자기 원수들의 어리석은 자만을 질책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 구절을 의문사가 없는 것으로 읽으면서 다윗이 이 세 구절(6,7,8절)에서 두 가지 상태를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봅니다.
그 첫째는 6절에서 다윗의 원수들이 자기를 야만적인 횡포로 박해하면서 줄곧 잔인하게 그들의 단호한 오만을 계속 지탱하고 있어서 다윗 왕국이 전멸될 때까지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것이 수그러들지 않을 것처럼 소개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시편 9 편
둘째는 7, 8절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포학한 시도를 진압하기 위해서 그들 정면에 위치한 하나님의 심판대 위에 앉아 계신 것으로 묘사합니다.
만약에 이런 의미를 택한다면 우리가 '그리고' 로 번역한 7절의 맨 처음 단어는 '그러나' 로 번역되어야 옳을 것입니다.
곧 '오 원수여 그대는 살육과 성읍들의 파괴만을 일삼아 왔도다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지상에서 혼란한 상태에 있는 일들을 바로잡으려고 하늘에 있는 자신의 보좌에 재판관으로 앉아 계시다는 점을 보여주셨다' 는 내용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악한 자들이 자기주변을 완전히 파멸시키려고 굳게 결심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파멸이 끝장나게 하셨기에 다윗이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고 있다고 봅니다
혹자는, 이것을 더 제한하여 하나님께서 자기 의로운 심판으로 그들이 다윗에게 계획했던 재난과 파멸을 자신들 머리 위로 떨어지게 하셨기에 악인들의 파멸이 완성된 것으로 봅니다.
어떤 사람들에 따르면 6절에서는 다윗이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자기 백성의 비참한 황폐 현상을 허용하셨다고 여깁니다.
그 결과 악한 자들이 제지를 받지 않고 자기들 멋대로 모든 것을 파멸시켜 버렸다는 점을 들어 하소연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7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인간사를 주도하신다는 위로를 덧붙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먼저 원수들이 자신들의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일 때 그들의 힘이 얼마나 가공할 정도로 무서운 것이었는가 하는 점이 먼저 냉소적으로 묘사되고 다음으로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그들의 진행을 갑작스럽게 끝내버리고 마는 하나님의 심판이 그것과 대조되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의 견해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그런 결과를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은 우리가 알기로 불경건한 자들이 비록 공개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그의 권위와 지배를 박탈하려고 덤벼들지 않겠지만 마치 착고에 얽매인 사람처럼 대담하게 모든 악의 극을 향해서 줄달음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앞장에서 이와 아주 유사한 표현을 대한 바 있습니다(7:13).
2) 7절은 "여호와께서 영영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예비하셨도다"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의 원수들이 가지는 능력과 그들의 진행을 파괴함에 있어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일 사이의 이와 같은 대조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베푸시는 도움의 경이적인 면을 아주 잘 묘사해 줍니다. 불경건한 자들은 해악을 끼치는 일에서 만물의 궁극적 파멸을 빼놓고는 결코 끝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완전한 멸망이 임박한 것처럼 보였으나 일들이 혼란 상태에 있을 때 하나님은 제때에 자기 백성을 돕기 위해서 자기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시편 9 편
그러므로 우리가 어디로 눈을 돌리든 우리 눈에 들어오는 것이 파멸뿐이라도 그때마다 우리는 하늘 보좌를 향해 우리의 눈을 들어 하나님께서는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우리 일이 더 이상 소망이 없을 정도로 곤경에 처하게 될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우리를 공격하는 모든 유혹을 막아내는데 사용할 유일한 방패는 곧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심판주로 앉아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아보지 않는 것처럼 보이며 우리가 당하고 있는 재앙에 대해서 즉각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로서는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를 깨닫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여호와께서 영영히 앉으심이여"라는 시편 기자의 말에는 인간들의 횡포가 제아무리 난동을 부리고 그들의 분노가 무제한으로 쏟아진다 하더라도 그들은 결코 하나님을 그분의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이 표현에는 하나님이 심판주의 직무와 권위를 포기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본 구절의 둘째 구절인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예비하셨도다" 라는 말씀에서 더욱더 명백하게 표현됩니다.
이 표현을 통해서 다윗은 주는 자기 위엄과 영광을 현격하게 위대한 것으로 드러낼 뿐 아니라 세상을 의로 다스릴 목적으로 통치하고 계시다는 점을 밝히 선언합니다.
3. 본문 8절은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단을 행하시리로다" 입니다.
다윗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능력이 정지된 상태에 있지 않다고 선언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저 하늘에서 자기 쾌락만을 즐기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은 친히 자기 권위를 보존하고 세상을 의와 공평으로 다스리는 가운데 행사하는 항구적인 작용능력이라는 점을 증거 해 온 것처럼 말씀합니다.
이 구절에서는 이런 가르침의 용도를 덧붙여 말씀합니다.
그 용도란, 하나님의 능력은 하늘에 봉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돕는데서 스스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이 주제의 진정한 가르침은 에피쿠루스처럼 하나님이 완전히 쾌락과 안이에 몰두하셔서 인류에게는 도무지 관심을 갖지 않는 분으로 상상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9 편
오히려 하나님을 능력과 공평의 보좌 위로 모셔놓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비록 불의하게 압박 당하고 있는 자들을 당장에는 돕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그들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지 않는 때가 한 순간도 없으시다는 점을 전적으로 확신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는 사건을 눈치채지 않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우리가 가장 확고하게 내려야 하는 결론은 하나님은 직무를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택하여 부르신 백성의 인내를 단련코자 하신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인내와 평정한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려야 옳습니다.
'그는' 이라는 지시 대명사에는 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다윗은 누구도 하나님에게서 세상의 재판관 직무를 박탈할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들에게 자기 심판을 확대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재판관이 될 것이라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다윗은 이 심판을 '의로운' 것으로 선언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부당하고 잔혹하게 괴롭힘을 받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것에 대한 확신 있는 기대 속에서 하나님께 조력을 청하도록 우리를 유도하려는 뜻에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민족들을 의로 심판하는 분이신 만큼 불의와 압박이 항상 처벌을 받지 않고 이 세상에서 그냥 지나치는 것을 허용치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무죄한 자들에 대한 자신의 조력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시편 9 편
시9:9-12 여호와는
다윗은 앞서 기록된 말씀(7,8)과 같이 하나님께서 심판주이신 사실을 믿었습니다.
따라서 다윗은 하나님은 현세에서 신자들 개개인을 돌보아 주실 것이라 합니다(9,10).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실만한 신자들을 가리켜 "압제를 당하는 자"라 하였고(9절), "주의 이름을 아는 자" 라 하였고 "주를 찾는 자들"이라고도 하였고(10절 하반) "가난한 자들"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이 네 가지 명칭들은 성도의 신분을 바로 지적합니다.
그들은 주님을 위하여 압제나 빈곤을 당할 만큼 이 세상에서 주를 알려고, 또 주를 찾아 뵐려고 주의 말씀과 은혜를 받으려고 심령으로 힘쓰는 자입니다.
이런 처지에 살지 못하는 자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주의 이름을 알지 못하며 또 주님을 찾지 못하여 그 심령을 낮추어서 주의 은혜를 받아 누리지 못합니다.
주님을 위해 환난과 곤고를 당하는 자들만이 주님의 돌보아 주시는 은혜를 체험합니다
1. 본문 9절은 "여호와는 또 압제를 당하는 자의 산성이시요, 환난 때의 산성이시로다" 입니다.
1) 다윗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침묵을 지키시는 동안 악한 자들의 뜻에 내맡겨져 있는 연약한 자들과 또 그들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을 크게 억압하는 유혹에 대한 처방을 제공합니다.
2)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 도움을 지연하고 겉으로 보기에 자기 신실한 자들을 버리는 것은 결국에 가서 더 알맞은 시기에 그들의 곤경과 필요의 크기에 따라서 도움을 베풀기 위함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여기 뒤따라오는 결론은 비록 하나님께서 선하고 무고한 자들이 극한 가난에 처하는 것을 허용하며 그들을 울음과 탄식으로 단련하신다 하더라도 결코 자기 직무 수행을 중단하지 않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등불을 켜시며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심판을 더욱더 뚜렷하게 볼 수 있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 고통을 받고 있을 때 시기적절하게 자기 보호를 개입하실 것이라는 점을 밝힙니다.
시편 9 편
3) "여호와는 또 압제를 당하는 자의 산성이시요, 환난 때의 산성이시로다"는 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가 필요한 시기에 마침내 나타나도록 그 섭리에 시간을 제공하는 것이 우리 본분이라는 점을 배웁니다.
그리고 만약에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보호와 그의 아버지로서의 호의에 대한 체험이 우리가 받아 누릴 수 있는 최대 복이라면 우리는 세상 앞에서 가난하고 비참한 자로 여김받는 것에 초조해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서 멀리 계시지 않으며 자신에게 우리를 도와주실 것을 간청하기까지 우리 고통을 지켜보고 계시다는 이 한가지 사실로 우리 슬픔을 달래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서 신실한 자들이 고통 중에 있을 때 그들을 도와주시는 것을 가리켜서 그가 '적절한 때에' 가까이 계신 것으로 말씀하신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9절 마지막에 나오는 히브리어 (바차라)를 '방어'를 뜻하는 단순한 단어로 보지만 그러나 여기서 그것을 은유적으로 '고통' 이라고 번역함으로써 어떤 사람이 도저히 출구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봉쇄되고 궁하게 된 쓰라린 상황을 드러내게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바차라)의 첫 글자 ' '를 '안에' 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보는 사람들의 견해가 더 타당한 것으로 봅니다. 이것이 이 단어의 일반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언급된 내용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이 곤경에 처해 있을 때 곧 그들이 심한 고통 가운데 있거나 고통에 짓눌려 있을 때 그들에게 도움을 베푸는 것은 그때가 바로 도움이 가장 절실하고 유익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2. 본문 10절은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 하심이니이다" 입니다.
1) 시편 기자는 주께서 의로운 자들을 구출하실 때 거기서 오는 결과는 그들 자신과 나머지 모든 의인들이 주님의 은혜 안에서 더욱 더 큰 확신을 얻는 것이라는 점을 가르쳐 줍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인간과 인간사에 대해서 관심을 베푸시고 계시다는 점을 전적으로 확신하지 않을 경우 우리는 필연적으로 끊임없는 불안으로 번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대하지 않으려고 자기 눈을 감아버립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 혜택을 신실한 자들에게만 국한시킵니다.
물론 경건이 없는 곳에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의식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다윗이 신실한 자들에게 '하나님 지식'이 있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지식에서 신앙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시편 9 편
반면 인간들의 무지와 우매를 통해서는 신앙이 말살되어 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단순히 하나님 자신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용어에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에는 하나님의 본질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불가해하듯이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하시는 범위에서 하나님의 특성을 뜻합니다.
2) 다윗은 다음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근거가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 에 있다는 점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두 가지 방법으로 찾아집니다.
하나는 호소와 기도의 방법이요, 다른 하나는 거룩하고 정직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방법으로 있습니다.
이 양자는 항상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경건한 자들의 안전의 기초가 되는 하나님의 보호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해하기로는 하나님을 찾는 것은 위험과 고통 가운데서 도움과 구원을 청하기 위해 하나님께 우리 자신들을 맡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3. 본문 11절은 "너희는 시온에 거하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입니다.
다윗은 개별적으로 자기 문제로만 감사 드리는 것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윗은 신실한 자들이 자기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권합니다.
그것은 서로 격려하는 가운데 신앙적인 단련을 쌓는 것이 그들의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다루는 구출사건은 공적으로 엄숙하게 송축될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다윗이 그 구출 사건을 민족들 가운데서 선포할 것을 명령하는 둘째 구절에 더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그 의미는 온 세상에 그 구출 사건에 대한 소문이 퍼지기 전에는 그것을 제대로 선포했거나 송축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백성 중에 하나님의 행사를 선포한다는 것은 사실상 '소 귀에 경 읽기' 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표현 방법을 통해서 다윗이 주고자 하는 것은 유대 지역만으로는 여호와의 찬양의 무한한 위대성을 간직하기에 너무 비좁았다는 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시온에 거하시는 여호와"라는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을 이방인들의 모든 거짓 신들로부터 구별합니다.
시편 9 편
이 구절에는 아브라함과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과 유대 지역을 제외한 전 세계에서 인간들의 맹목적이며 비뚤어진 환상에 따라 예배되었던 모든 신들에 대한 대조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이 무분별하게 제멋대로 신을 숭상하는 것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분명히 살아 계시며 참되신 유일한 하나님께 속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명령하고있는 경배를 드려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시온을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장소로 선택하신 만큼 다윗이 그곳을 하나님의 특수한 거처로 지정하는 것은 아주 적합한 일입니다.
이것은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이라는 말씀에서 보이듯이(왕상8:27) 하나님을 어느 특정한 장소에 봉쇄하는 것이 합법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뒤에서 볼 수 있듯이(시132:12) 하나님께서 그곳을 영원한 그의 안식처로 만들 것으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기 환상에 따라서 이 장소를 하나님의 자리로 할당한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계시에 의해서 그것이 하나님 자신의 뜻이라는 점을 이해하였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수차 예언한 그대로입니다(신12장).
그런 점에서 본 시편은 다윗이 골리앗에 대한 승리를 거둔 것을 계기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해 줍니다.
언약궤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시온으로 옮겨진 것은 오직 다윗 통치 말기에 있을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여기서 예언의 영에 의해서 언약궤가 시온에 위치할 것을 말하고 있다는 식으로 추측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에게는 억지요 부자연스러운 해석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조상들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려고 시온을 찾을 때 그들이 자신들의 마음의 암시에 따라서 행동한 것이 아니요 그들의 행동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앙에서 연유한 것이요 그 명령에 순종하는 뜻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신앙적인 예배에 대해서 하나님께 인준을 받은 것입니다.
여기서 그들의 본을 미신적인 사람들이 자신들의 환상에 따라서 스스로 고안해 낸 종교적 예식에 대한 논증이나 구실로 악용할 하등의 근거가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더욱이 당시 신실한 자들이 하나님 말씀에 의지하여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이 의식적인 예배에만 참석하는데서 그치고 이 외적인 상징을 통해서 자신들의 마음을 그 이상으로 승화시켜 하나님께 영적인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면 무익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눈에 보인 성소 안에서 자기 임재에 대한 실제 표증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은 자기 백성의 감각과 생각을 지상 물질에 묶어두려는 뜻에서가 아니었습니다.
시편 9 편
그보다도 하나님께서는 이 외적인 상징들이 우리에게 사다리 역할을 하며 신실한 자들이 그것을 통해서 하늘에까지라도 오를 수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례와 신앙의 모든 외적인 의식을 지정하신 제 일가는 의도는 자기 백성의 연약성을 보살피는데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성례와 모든 외적인 의식에 대한 참되고 올바른 용법은 그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늘의 영광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영적으로 찾는데 도움을 베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외 우리 마음을 이 세상 일에 고정시키거나 육신의 허영에 묶어두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는 옛날에 자신을 '시온에 거하는 자' 로 부르심으로써 자기 백성에게 신뢰, 평안 그리고 기쁨에 대한 충분하고 확고한 근거를 주려고 하셨듯이 율법이 시온에서 나왔으며 은혜의 언약이 그 원천에서 우리에게 흘러 넘친 오늘날에 있어서도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정하신 바에 따라서 순수하고 올바른 방법으로 그를 경배하는 신실한 자들이 함께 모여서 엄숙하게 신앙적인 예배를 드릴 때 그곳이 어느 곳이든 그분께서는 은혜롭게 거기에 임재하시며 그들 가운데서 주관하고 계시다는 점을 전적으로 확신해야 합니다.
그런 인식을 가진 자들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간구도 하고 감사함으로 찬송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도 합니다. 이것이 예배의 총체입니다.
4. 본문 12절은 "피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저희를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 입니다.
1) "피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저희를 기억하심이여" 에서 "피"는 복수로 '피들'입니다.
"저희를 거억하심이여" 도 이 단어와 관계된 것으로 보는 것이 아주 적합합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피들을 요구하시며 그 피들을 기억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어에서는 흔히 선행사와 관계사의 순서를 도치하며 그것이 지칭하는 단어 앞에 '그들'을 놓고 있으므로 혹자는 이것을 '가난한 자들'로 설명하여 그가 피를 요구하시면서 그들 곧 그가 조금 뒤에서 언급하는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셨다고 말합니다
관계사를 어떤 방법으로 해석하든 본질적인 문제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견해로서는 전자가 더 자연스러운 해석으로 보입니다.
여기에는 시편 저자가 바로 앞에서 언급한 것이 반복됩니다.
우리가 특별히 생각해야 할 하나님의 능력은 악인들에게 불의하게 박해를 받는 그의 종들에게 하나님이 보이시는 자비에서 명백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시편 9 편
다윗은 하나님의 여러 일 중에서 특별히 기억해야 할 가치로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죽음에서 구출하시는 사건을 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자기 거룩한 섭리 가운데 그들이 인간들의 박해를 받도록 허용하시지만 결국에는 그들에게 가해진 해악을 보복해 주십니다.
다윗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에는 계속적인 행동의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틀림없이 다윗이 앞부분에서 열거했던 예를 통해서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는 무고하게 흘린 피를 요구하시며 자기 백성의 외침을 기억하고 계시다는 점을 인정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2)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들이 원하는 대로 신속하게 상처를 중단시켜 주시거나 맨 처음부터 악인들의 시도를 파괴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 도움을 철회하고 지연하심으로 우리들이 공연히 외친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계속 강조하십니다.
이 같은 사실은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진리입니다.
우리 생각대로 하나님의 도움을 측량한다면 우리 용기는 때때로 우리를 실패시키고 결국에 가서 우리 소망은 산산조각이 나며 절망과 낙담으로 이어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손길을 멀리 펴셔서 우리를 위해 준비한 것으로 빤히 내다보이는 그 고통들을 미리 되돌려 쫑아 버렸으면 하는 생각들을 자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조금도 생각조차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또 무고한 자들의 피가 흘려지는 것도 방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국 우리 피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 하는 점을 실제로 보여주실 것이라는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함으로써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모든 재난을 받은 다음에야 하나님의 도움이 온다는 것은 너무 늦지 않느냐고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개입을 지연하시는 것은 우리가 십자가 밑에서 겸손하게 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 된다는 점을 하나님 자신이 알고 계시기 때문이요 재앙이 부과되기 전에 우리를 돕기보다 오히려 우리가 횡포를 당한 다음에 복수하시는 쪽을 택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를 도울 준비 태세를 갖추지 않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은혜를 보이시는 때가 항상 적당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모든 자녀들이 죽은 다음까지라도 보살펴 주신다는 사실은 우리에 대한 아버지 사랑 뿐 아니라 그들 모두의 몫인 복된 불멸에 대한 뛰어난 증거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에 따라서 우리에게 재앙이 떨어지는 것을 항상 막아주신다면 우리 가운데 현세에 전적으로 집착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시편 9 편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죽음까지 복수해 주신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우리가 죽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살아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없었던 자들을 인간들의 방식대로 단순히 기억이나 해주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생각대로 판단한다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자들을 그 품에 소중하게 품어주시며 보호하고 있다는 점을 실제로 보여주십니다. 이런 이유에서 다윗은 하나님이 피를 요구하실 때 그것을 기억하시는 것으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을 현세에서는 악인들의 칼에서 구출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악한 자들의 살인을 처벌하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3)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 라는 하반절 역시 같은 취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장 구원의 손길을 뻗침으로써 자기 종들의 하소연을 즉시 귀담아 들어 주시지 않는 것으로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주께서 그들을 보살펴 왔다는 점을 반박할 여지없이 입증해 주십니다 여기에 부르짖음이 명백히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자신들의 구원자와 보호자로 체험하려 하는 모든 자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소원과 탄식, 그리고 기도를 하나님께 지향하게 하려는 뜻에서입니다.
시편 9 편
시9:13-16 여호와여
참된 신자를 돌아보시는 하나님을 아는 다윗은 그분에게 다시 부르짖습니다(13, 14).
하나님을 참되이 아는 자로서는 으레 그분 앞에 나가 기도하게 됩니다.
다윗은 불의한 자들, 곧 열방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망한 사실을 회고합니다(15-17).
그들의 당한 심판을 가리켜 "자기가 판 웅덩이에 자기가 빠짐" "그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림" 또는 "그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힘" 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표현들은 하나님의 섭리적 심판의 묘한 방면을 보여줍니다.
그것을 보는 자마다 하나님의 심판 행위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방식의 심판은 하나님을 알게 하는 심판이라는 의미에서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라고 말씀합니다(16절).
1. 본문 13절은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미워하는 자에게 받는 나의 곤고를 보소서" 입니다.
1) 본문 13절 초에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본 시편의 둘째 부분으로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윗이 늘 그러하듯이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베푸신 구원 사건에 대해 감사를 드리면서 이 감사에 자신이 심한 고통을 받을 때 드린 기도의 내용을 여기에 뒤섞고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이러한 예가 시편 곳곳에 나오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모든 상황을 좀더 면밀히 고찰할 때 우리는 다른 견해를 취합니다.
곧 먼저 그가 기도를 시작하는 뜻에서 자신에게 베풀어진 호의를 송축합니다.
다음으로 하나의 기도로 끝맺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견해를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여기서 지나가는 말투로 그가 과거에 위기와 불안 속에서 드린 기도를 삽입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그 당시에 도와주실 것을 간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수차에 걸쳐서 자기 구원자로 체험한 하나님께서 계속 자신에게 동일한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다만 다윗이 여러 번 이미 정복했던 원수들이 다시 용기를 내어 새 군대를 일으키며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시편 9 편
이것은 우리가 종종 보듯이 절망적인 상태로 빠져들어 가는 사람들이 더 격정적으로 자기 원수들에게 돌진하는 경우나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확실한 것은 다윗이 이 기도를 드릴 때 더 큰 공포에 싸여 있었다는 점입니다.
다윗이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이처럼 강력하게 하나님을 자기 고통의 증인으로 간청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겸손하게 하나님의 자비에 자신을 내맡기면서 인내하며 복종하는 마음으로 자신에게 부과된 십자가를 감당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2) 더 나아가서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을 가리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로 부르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겠습니다.
(메로멤)이라는 히브리어는 '들어 올리다' 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적절합니다.
먼저 이 단어를 통해서 시편 기자는 수차에 걸쳐 더없이 큰 위험에서 구출 받은 그였던 만큼 자기 과거 체험으로부터 자기 신앙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그는 사망의 문턱에서라도 자기 구출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일상적인 수단을 통해 자기 종들을 재앙에서 건져내는데 익숙하실 뿐만 아니라 생명에 대한 모든 소망이 절연된 다음에라도 무덤으로부터 그들을 이끌어내는 데에도 익숙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망의 문" 이란 파멸할 우려가 있거나 무덤을 우리에게 열어 보여주는 극한적인 위험을 상징하는 은유적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재 견디고 있는 재난의 무게나 우리가 보듯이 우리 위에 넘실거리고 있는 재난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 신앙을 압도하거나 우리 기도를 가로막는 일이 없도록 하려면 사망의 문에서 자기 백성을 들어올리는 임무가 헛되이 하나님의 일로 돌려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2. 본문 14절은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같은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입니다.
다윗의 의도는 단순합니다.
곧 자신이 모든 집회를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드높이겠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성읍 문전에서 집회를 갖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여기에는 그가 앞에서 방금 언급한 사망의 문에 대한 암시가 담겨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 내용은 '내가 무덤에서 구출 받은 다음에 나의 구출 사건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만천하에 증언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시편 9 편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고 입에서만 나오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시편기자는 하반절에서 그가 이러한 행동에 참여함에 있어서 생기는 내적인 희열을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자 하는 목적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보호받고 있는 것을 즐거워하는 데 있을 뿐이라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백성이나 도시를 의미함에 있어서 '딸' 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다윗은 도시의 가장 주요부분 곧 시온을 지적합니다.
3. 본문 15절은 "열방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그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입니다.
다윗은 이제 거룩한 확신을 갖게 되자 원수들을 상대로 승리를 구가하고 있습니다.
먼저 다윗은 악인들이 자신들의 계략과 올무에 걸리고 말았다는 점을 은유적 표현을 써서 말합니다.
다음으로 다윗은 동일한 내용을 비유 없이 그들이 자신들의 사악에 걸려 들었다는 점을 표현합니다.
다윗은 이것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드러진 증거라는 점을 확언합니다.
다윗은 자기 원수들을 사냥꾼들에게 비유합니다.
여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물론 악인들은 자주 폭력과 분노를 내뿜지만 그들의 간계와 술책에 있어서는 모든 거짓말의 시조인 그들의 원흉인 사단을 언제나 흉내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있는 재주를 다 부려가며 사악을 실천하고 해악을 고안해 냅니다.
그러므로 악인들이 우리의 파멸을 교활하게 책략할 때마다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그물과 올무를 놓는 것이 결코 새로운 일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 대해서 시도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 결말은 그들의 힘에 있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적하시며 그들의 악한 계략을 좌절시키고 그들의 모든 해악을 송두리째 그들 자신의 머리에 퍼붓고 말 것이라는 이 사실에서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시편 9 편
4. 본문 16절은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그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 입니다.
1) 첫 부분에 나오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에서 이것을 보다 더 직역하자면 '알려진 여호와께서 심판을 행하셨도다' 가 됩니다.
이러한 표현 방법은 갑작스러운 것이라서 이 간결함이 그 의미를 모호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두 가지 면에서 설명됩니다.
혹자는 이것을 설명하기를 곧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악인들을 처벌하시는 순간부터 알려지기 시작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2) 그러나 "악인은 그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 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을 그들 자신의 악의에 걸리게 할 때마다 하나님이 재판관의 임무를 수행하시는 것은 명백한 일이 되고 모두에게 알려지게 된다고 보는 다른 견해가 본 문맥과 더 잘 어울립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그들이 꾸며대는 모든 술책을 그들에게 돌려대시는 경우, 다윗은 이 경우에 하나님의 심판이 너무도 역력하기 때문에 이 일어난 사건을 자연의 이치나 운명으로 돌릴 수 없다는 점을 선언합니다.
3)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어느 때를 막론하고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손의 능력을 드러내신다면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의 원수들에게 행사하는 심판을 통해서 더욱더 확증을 받도록 우리 눈을 떠야겠습니다.
'명상'을 뜻하는 '힉가욘'(Higgaion)에 대해서는 다윗의 의도가 경건한 자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심판을 묵상하게 하는데 있었다는 점 외에는 현재로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셀라'라는 단어 역시 동일한 의도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 음악이 가사와 감정에 일치하도록 노래의 장단을 맞추었습니다.
시편 9 편
시9:17-20 악인이
다윗은 하나님의 심판을 전제로 하여(15, 16) 악인은 반드시 망하고 성도는 다시 흥하게 될 날이 있다는 사실을 예언합니다(17-18).
이어 기도하기를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기를 간구 합니다(19, 20).
이 기도를 보면 다윗은 악인의 망령된 행동, 곧 자기의 인생 됨을 잊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월분(越分)한 행동을 제지하시기를 원합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을 높이려는 것이고 사람의 멸망 그 자체를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1. 본문 17절은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이 그리하리로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나오는 동사를 기원법으로 해석하여 마치 이 문장이 저주문인 것처럼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판단으로 볼 때 다윗은 여기서 자신과 모든 경건한 자들에게 장래 문제에 대해서 확증하면서 악인들의 시도가 무엇이든 그것이 그들에게 재앙의 결말을 맺고 말 것이라는 점을 선언합니다.
'돌아가다' 는 단어에는 일의 결말이 그들의 상상과 반대 방향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들이 품은 오만의 극치와 그들이 당할 낭패의 깊이에 대한 대조가 암시됩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결코 없으므로 그들은 자신들을 구름 위에까지 치켜올리며, 그리고 나서는 이사야의 말대로 마치 "사망과 언약을 맺은"(사28:15) 것처럼 더욱더 오만하고 뻔뻔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위험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격분하는 것을 볼 때 선지자는 우리에게 경고하기를 그들은 그들의 광기에 이끌려 줄달음치며 결국에는 자신들과 거리가 먼 것으로 상상했던 무덤으로 떨어지고 만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족하신다면 혼란 상태에 있던 일들의 질서를 바로잡는데 있어서 사용하시는 갑작스럽고 예기치 못한 변화가 묘사됩니다.
그러므로 악인들이 도무지 두려워하지 않는 가운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아다니는 것을 보더라도 그들에게 준비되어 있는 무덤을 신앙의 눈을 통해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시편 9 편
그리고 하나님의 손길이 비록 우리 눈에는 안 보이지만 아주 가까이 있어서 그들이 하늘까지 닿겠다는 심산으로 달려가는 그들의 길을 뒤바꿔 놓으시며 순식간에 그들이 지옥에 떨어지게 만들 것이라는 점을 확신해야 합니다.
(쉬올라) 라는 히브리어는 확실하지 않지만 우리는 그것을 '음부' 로 번역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무덤'으로 번역하는 자들을 트집잡지 않지만 선지자의 말에는 일반적인 죽음 이상의 것이 담겨 있다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악인들만을 상대로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그들과 신실한 자들이 동일하게 당하는 것을 두고 이야기한 셈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여기서 영원한 파멸을 명백한 말로 언급하지 않고 '그들이 무덤으로 향할 것이다' 라는 말만 합니다.
그렇지만 이 '무덤' 이라는 표현을 써서 다윗은 모든 악인들이 패망할 것이요 그들이 온갖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해서 스스로 치켜세우고 의를 짓밟으며 무고한 자들을 탄압하던 그 주제넘음이 그들을 파멸과 지옥으로 이끌어들일 것이라는 점을 암시합니다.
물론 신실한 자들도 무덤에 내려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나올 소망이 없이 아주 무서울 정도로 맹렬하게 무덤으로 내던져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는 달리 그들은 무덤에 갇히는 순간에도 소망으로 이미 하늘에 거하는 것입니다.
2. 본문 18절은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보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가 영영히 실망치 아니하리로다" 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련한 자들과 압박 받는 자들을 영원히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은 앞 문장에 대한 확증입니다.
이 표현은 그들이 일시적으로 버림받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다는 뜻이 포함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도우심을 약속하신 것은 우리 고통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가 십자가 밑에서 오랫동안 견딘 다음 마침내 우리에게 도움을 베푸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다윗은 '소망' 또는 '기대' 라고 분명히 말함으로써 우리에게 기도할 것을 격려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고통을 눈여겨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우리 기도를 수단으로 해서 자신을 깨우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청원을 들으실 때, 마치 그제야 우리를 염두에 두기 시작하신 것처럼 자기 강력한 손을 펴사 우리에게 도움을 베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것이 즉시 이뤄지지 않는 것은 비록 우리 기대가 즉각적으로 충족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좋은 소망 안에서 인내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시편 9 편
3. 본문 19절은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열방으로 주의 목전에 심판을 받게 하소서" 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일어나시기를 간청합니다.
이 표현은 엄격히 말해서 하나님께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과 외형적인 모습과 관련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눈앞에 마치 심판대에 앉아 계신 것처럼 나타나는 경우 외에는 하나님을 자기 백성의 구원자로 깨닫지 못하는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기 백성에게 가해진 상처를 보복할 것을 권유하려는 생각과 이유가 덧붙여지고 있는데 곧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라는 표현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일어나시는 날이면 불경건한 자들의 모든 횡포는 당장 엎드러지고 수그러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악인들이 그처럼 뻔뻔스럽게 우쭐대며 그처럼 권세있게 악을 끼치는 것은 하나님이 잠잠히 계시며 그들의 고삐를 느슨하게 풀어놓으시기 때문이 아니면 그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심판에 대한 어떤 징표를 보여주시기 시작하는 날이면 하나님께서는 즉각적으로 그들의 교만한 소동에 제동을 거시며 하나님의 회초리 하나로 그들의 힘과 능력을 박살내고 마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도를 통해서 우리 원수들이 그들이 행할 일에 제아무리 오만스럽게 허풍을 떤다 하더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수중에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허용하는 이상의 것을 조금도 할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그가 원할 때면 언제나 그들의 모든 노력을 헛되고 무력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시편 저자는 그들을 '인생' 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본문의 단어는 (에노쉬)로 이것은 비참, 또는 가련함을 뜻하는 어근에서 파생한 것인데 이것은 그가 그들을 유한한 인간, 또는 허약한 인간으로 부른 것과 같습니다.
더 나아가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 "열방을 주의 목전에 심판을 받게"하도록 간청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런저런 수단을 통해서 그들로 하여금 억지로 자기 심판대 앞에 나오게 하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불신자들이란 억지로 하나님의 존전에 질질 끌려오기 전에는 할 수 있는 한 하나님에게 등을 돌려대려 하며 그렇게 해서 자기들 마음으로부터 재판관 되시는 그분에 대한 생각을 모두 추방해 버리려 하기 마련입니다.
시편 9 편
4. 본문 20절은 "여호와여 저희로 두렵게 하시며 열방으로 자기는 인생뿐인 줄 알게 하소서" 입니다.
1) 칠십인역에서는 (모라)를 '가르친다' 는 뜻으로 종종 쓰이는 (야라) 에 따라서 '법 제정자' 로 번역합니다.
그러나 문맥의 의도는 우리가 그것을 공포나 두려움으로 이해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모든 건전한 주석자들의 견해입니다.
이제 다윗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공포가 무엇인가를 살펴봅시다.
하나님께서는 흔히 자기 선택받은 자들까지도 두려움의 방법으로 순종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택한 자들에 대한 가혹성을 완화하시며 동시에 그들의 돌 같은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시고 그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그리고 침착하게 자신에게 순종하게 해주심으로 하나님이 그들을 공포로 강요한다는 표현은 적합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버림받은 자들에 대해서는 다른 방법을 취하십니다.
그들의 고집은 굽혀지지 않으며 차라리 그것을 휘어버리는 것보다는 꺾어버리는 것이 더 쉬우므로 하나님은 강제로 그들의 절망적인 고집을 굴복시키십니다.
물론 이것은 그들이 새롭게 된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이 뜻하건 그렇지 않건 자신들의 나약성이 강요에 의해 스스로 고백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이를 갈고 격분으로 끓어오르며 심지어 잔인성은 야수를 능가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에 대한 공포가 그들에게 덮치는 날이면 그들은 제풀에 쓰러지며 자기들의 무게에 짓눌리게 되고 맙니다.
혹자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열방들을 다윗의 멍에 아래 데려오셔서 그들을 그의 정부의 속국으로 삼아 주실 것을 바라는 기도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맞지 않는 억지 해석입니다.
'두려움' 이라는 단어에는 강압이 아니고서는 결코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들의 반역을 마치 큰 망치로 두들기듯 두들겨주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모든 재앙의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2) 다음으로 모든 민족들이 고백해야 할 내용 곧 자신들이 유한한 인간이라는 점을 시인해야 한다는 내용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언뜻 하찮은 문제로 보이지만 여기에 담겨있는 교리는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스스로 감히 손가락 하나라도 움직이려 하는가?
하지만 불경건한 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을 못하게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지나치게 대담하고 건방집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상상력의 결과입니다.
그들이 만약 자신들의 상태에 무지하지 않다면 극으로 달려가지 않을 것입니다.
시편 9 편
하나님께서 민족들을 공포로 후려치셔서 그들로 하여금 "자기는 인생 뿐인줄 알게 하소서"라고 다윗이 구할 때 악한 자들이 하나님의 매와 징계를 맞고 나서 참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겸손을 바치게 되리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언급하는 지식이란 그들 자신의 연약성에 대한 체험입니다.
다윗이 한 말을 바꾸면 '여호와여 그들이 저를 상대로 막무가내로 덤비는 것은 그들 자신에 대한 무지입니다.
그러므로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힘이 그들의 얼빠진 억측과 같지 않다는 점을 실제로 체험하게 하시고 그들이 헛된 소망에 낙담한 후 어이없이 나가넘어지며 수치스러워 낯이 뜨겁게 하소서' 입니다.
종종 자신들의 나약성을 확신하고 있으면서도 새롭게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것을 얻게되는 때에는 자신들의 악한 오만이 세상 앞에서 폭로되고 조소와 비웃음의 대상이 됩니다.
그들이 자신의 힘을 믿었던 그 자만이 얼만 황당무계한 것이었는가 하는 점이 드러나게 되는 때입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들로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다른 방식으로 혜택을 입어야 마땅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나약성을 자각하고 겸손하여져서 기꺼이 모든 헛된 자만과 주제넘은 생각을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이 단순히 인생에 지나지 않는다고 명심하는 경우가 될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겸손은 자기 자신을 아는 데에 있다는 어거스틴의 말은 아주 적절하고 현명한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만이란 모든 인간의 특성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차별 없이 모든 인간들을 두렵게 하셔서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겸손을 배우게 하십니다.
한편으로는 악인들로 하여금 비록 그들이 끊임없이 인간의 상태 이상의 수준으로 자신들을 치켜 세우려 하지만, 수치스럽게 그리고 당황하게 하여 뒤로 물러나게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