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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4-17
아담의 원죄의 문제를 해결한 예수 / 한서노회
I. 서 론
모세의 인도함을 따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고 애굽 땅을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이 눈 앞에 보이는 싯딤에 왔을 때 큰 좌절을 맞읍니다. 첫째는 그들을 지금까지 인도한 민족의 지도자
모세가 갑자기 사라진 것입니다. 둘째는 그들 앞에 범람하는 요단강이 놓여 있는 것이였읍니다.
이때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택하여 모세를 대신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라는 사명을 주셨읍니다.
여호수아는 먼저 싯딤에서 정탐군 2 명을 요단강 건너 가나안 땅의 첫성 여리고로 보냈읍니다. 이 2 명의 정탐군은 여리고성에 들어 갔다가, 기생 라합의 집에서 그녀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고, 그 기생 라합을 통하여 지금 여리고성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줄로 알고 있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홍해를 가르시고, 요단 강 동편의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을 들어서 잘 알고 있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인하여 심히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수2:9)알아내고 돌아 왔읍니다.
이 정탐군의 보고를 들은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고자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강가에 왔읍니다.
그러나 요단강은 건너지 못했읍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우기였기 때문에, 장마철이 되어, 요단강이 범람을 하였읍니다. 그래서 도저히 요단 강을 건널 수 없었읍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삼일을 유하였읍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그곳에 머물 수는 없었읍니다. 빨리 요단강을 건너가야 했읍니다. 그러나 앞에는 범람하는 요단강이 가로막고 있었읍니다. 그러므로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불가능했읍니다. 많은 여약한 노인들,
어린이들, 여인들과 가축과 짐을 가지고 요단강을 건너 적진으로 쳐들어 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였읍니다. 왜냐하면 앞에는 여리고성의 적들이 진을 치고 있기 때문이였읍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하는 수 없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앞세우고 나아가기로 했읍 니다. 여호수아는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앞장서고 그 뒤에 2,000 규빗(900 m) 뒤에 이스라엘 백성들보고 따라 가라고 했읍니다.
하나님은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가에 이르자, 그들보고 그 언약궤를 메고 범람하는 요단강속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읍니다.
홍수가 나서 강뚝 넘어로 물이 넘치는데, 그 강물 속으로 걸어서 들어갈 자가 어디에 있겠읍니까 ? 그러나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비록 물이 범람하고 있지만, 무거운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 속으로 발을 들여 놓았읍니다. 요단강속으로 걸어 들어갔읍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제사장들이 요단강 물속에 들어가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 강물에 잠기자, 그 물이 그곳에서 심히 먼 요단강과 얍복강이 만나는 지점인 아담에서 쌓이고 흘러 내리지 않았읍니다. 그리고는 요단강에는 전혀 물이 흘러 내리지 않았읍니다. 그래서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른 땅으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을 갔읍니다.
이 사건속에는 기독교의 놀라운 진리가 담겨 있읍니다. 저는 이시간 이 사건에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진리의 말씀을 살펴 보며 은혜를 나누려고합니다.
II. 본 론
1. 모든 인생의 문제는 아담에서 부터 시작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요단 강이였읍니다. 그 요단강은 장마가 져서 물이 범람을 했읍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도저히 그 강을 건너 갈 수가 없었읍니다. 장마가 져서 물이 강 뚝으로 범람하는데 그 강을 어떻게 건너 갈 수 있겠읍니까 ?
헤엄을 쳐서 건너려고 하다가는 다 실종되고 맙니다. 배를 타고 건너가다가는 배라 뒤집히고, 급류에 떠내려가 다 실종되고 맙니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요단강을 건널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죄를 범한 인간들은 우리로 천국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흐르는 요단강을,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건널 수 없읍니다. 그 강을 건너가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가 있읍니다. 그러나 그 강물이 범람하여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그곳을 건너 갈 수가 없읍니다.
여기서 가나안 땅은 우리가 죽어서 들어가게 되는 천국을 말씀합니다. 가나안 땅은 천국의 모형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에덴동산입니다.
그런데 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요단강을 건너가야 합니다. 요단강을 건너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읍니다. 그래서 우리가 장례식에서 찬송를 부를 때, "몇일 후 몇일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하고 찬
송을 부릅니다.
그런데 이 요단강은 범람하고 있어서, 인간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건널수가 없읍니다.
죽지 않고는 이 요단강을 건널 수 없읍니다. 그래서 이 요단강물은 사해(死海) 즉 죽음의 바다로 흘러들어 갑니다. 이것은 요단강은 죽음의 강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요단강을 건너갈 때, 그 물이 어디에서 쌓여는가 하면, 아담이라는 곳에서 쌓였읍니다.
지금 장마가 져서 물이 강뚝을 범람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 강물을 막을 수 있겠읍니까 ? 그런데고 그 물이 아담에서 쌓여서 흘러내리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영적인 의지가 있읍니다. 여기서 아담에 물이 쌓였다고 하는 것은 인류의 조상 아담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아담 이후에도 요단강과 야복강이 흘러 내립니다. 그런데 아담에서 물이 쌓여서 흘러 내리지 않자, 요단강물이 전혀 흘러내리지 않았다는 것은 이 죽음의 강물은 아담에게서 부터 시작되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모든 불행의 요단강물은 아담에서 부터 시작된다는 말씀입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이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는 선과 악을 알게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어서, 죄를 범해서, 그 아담으로 부터 죄악의 요단강물이 흘러 내려서, 우리가 그 강을 건너 천국에 들어 갈 수 없게 되었읍니다.
아담으로 부터 인류의 불행은 시작됩니다. 아담이 범죄하여 아담으로부터 큰 범람하는 요단강물이 흘러 넘쳐서, 우리 인간은이제 요단강을 건너 하나님이 주신 복된 가나안 땅에 들어 갈 수가 없게 되었읍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든 불행은 아담에게서 부터 시작이 됩니다. 아담의 죄악으로 인하여 모든 인류에게는 원죄의 강물이 흐르고 있읍니다.
이 원죄의 요단강물 때문에 모든 인간들은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요단강을 거너서, 복된 가나안 땅에 들어 갈 수가 없읍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아담으로 부터 원죄가 시작되어서, 우리 인간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 갈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진정으로 행복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롬5:12)에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으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음으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하셨읍니다. 또한 (롬 5:19)에서는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과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하셨읍니다.
사도 바울은 또 (고전15:22)에서는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하셨읍니다.
이렇게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에게는 죄악의 범람하는 요단강이 흐르게 되었읍니다.
인간들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요단강을 건너 천국에 들어 갈 수 없읍니다. 어떻게 범람하는 요단강물을 우리 인간이 스스로 건널 수 있겠읍니까?
이렇게 아담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원죄의 강이 모든 사람에게 흐르고 있읍니다. 이 원죄의 범람하는 요단강 때문에 모든 인간은 불행합니다. 이 원죄의 강 때문에, 아무리 잘 해보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다. 우리는 분명히 잘 하려고 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다. 그것은 우리들 속에 들어 있는 원죄 때문입니다. 원죄의 강물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우리가 생각했던 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읍니다. 이것은 우리의 원죄 때문입니다.
가끔 밤을 먹다가 보면 밤 표면에는 벌레가 들어간 아무런 흔적이 없는데, 밤속에 벌레가 들어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럼 이 벌레는 어떻게 그 밤속에 들어갔을까요? 과학자들이 그 원인을 찾아 냈다.
밤꽃이 필때, 나방이 그꽃에다 알을 까놓는다. 그러면 그 꽃에서 밤 열매가 열리고, 후에 그 밤속에서 나방이 까놓은 알이 부화하여 벌레가 생긴다.
원죄가 그렇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모든 사람들 속에는 이미 죄악의 씨앗이 들어있다.
시간이 가면 이것이 자라서 활동하게 되는데, 이 죄악이 우리의 생각, 말, 행동등을 통하여 나타난다. 이 죄악이 밖에서 들어가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아담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 속에는 아담의 불순종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사단이 모든 인류의 꽃에다 죄악의 알을 까놓았읍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전혀 죄를 배우지 않았는데도, 속에서 부터 죄가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15:11)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 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는 손으로 먹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15:18-20)고 하셨읍니다.
이렇게 사람들 속에는 아담으로 부터 흐르는 원죄의 강물이 흐르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잘 하려고 해도 되지 않읍니다.
아무리 인간의 노력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이 땅에 세우려고 노력을 해 보십시요. 그것이 되나 ? 되지 않읍니다.
사람이 아무리 자기의 삶을 에덴동산의 삶과 같이 복되게 하려고 노력을 해 보십시요. 그것이 되나 ? 되지를 않읍니다. 왜냐하면 속에 원죄의 요단강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도저히 그 강을 건널 수 없읍니다.
그래서 온 인류가 아무리 이 세상을 천국과 같이 만들려고 노력을 해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온 인류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이 인류는 범람하는 요단강물을 건너 에덴동산을 이 땅에 이룩할 수가 없읍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 속에는 사단이 까놓은 원죄의 알이 있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건너 갈 수 없는 원죄의 요단강물이 범람하며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이 이 원죄의 문제를 해결 하셨읍니다.
그럼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요단강을 건너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 갈 수 있었읍니까 ?
그것은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물속으로 들어가 발이 물
가에 잠겼기 때문입니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물속으
로 들어가 그들의 발이 물속에 잠기자, 물이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 읍 변방에 일어나 쌓였읍니다.
그래서 아라바 바다, 염해, 즉 사해(死海)로 흘러가던 물이 온전히 끊어
졌읍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음의 강, 요단강을 무사히 건널
수 있었읍니다.
여기서 언약궤는 무엇을 뜻합니까 ? 그것은 예수님을 뜻합니다.
첫번째 언약궤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을 뜻합
니다. 행위로 의로워 지는 법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이 언약궤 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언약입니다.
새로운 법입니다. 즉 이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게 된다는 의의 법입
니다.(롬3:25-31) 그러므로 언약궤는 예수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예
수님은 은혜의 언약궤입니다.
그럼 언약궤가 범람하는 요단강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
까 ? 그것은 예수님의 세례를 뜻합니다.
이 언약궤가 요단강 물속으로 들어간 것은 예수님의 세례를 뜻합니다.
그래서 (수3:15-16)에 언약궤를 멘 자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는 말씀
이 나오는데, 여기서 "잠기다"는 말씀은 구약에서는 "세례를 받다"라는 뜻
으로 사용되었읍니다.
그러므로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속에 잠겼다는 것은 곧 언약궤
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실 것을 예언하는 사건이
였읍니다.
그래서 그로 부터 약 1,400년이 지난 후에 이 언약궤를 상징하는 예수님
이 오셔서 그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읍니다.
당시 세례는 침례였읍니다. 침례는 사람이 물속에 들어 갔다가 나오는
것이였읍니다.
그러므로 이 세례는 곧 예수님의 죽으심을 뜻합니다. 물속에 들어가는
것은 죽음을 뜻하고, 물에서 나오는 것은 모든 죄가 죽고 새로 부활했다는
부활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죽음과 부활을 뜻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6 장에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고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 아지 못하느냐 ?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6:3-4)고 하셨읍니다.
여호수아 때 언약궤가 요단강 물속에 들어가자, 범람하는 죽음의 강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범람하는 요단강물이 저 멀
리 아담이란 곳에 쌓이고, 더이상 흘러 내리지 않았읍니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죽음의 강 요단강에 들어서자 범
람하던 죽음의 강물이 심히 멀리 사르단에 있는 아담 읍 변방에 일어나 쌓
인 것과 같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자, 인류의 조상 아담으로 부
터 범람하며 흘러 내리던 죽음의 강물이 심히 먼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멈추었읍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온 인류에게 가져다 준
죽음의 요단강물은 그치게 되었읍니다.
예수님이 아담이 저질러 놓은 죽음의 강 요단강물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
읍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은 모든 인간의 불행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죽음의 요
단강물은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읍니다. 더이상 죽음의 바다로 흐르는 강
물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9 장 말씀을 보면, 구약 시대에는 사람들이 죄를 범하면, 그
때마다 제사장들이 희생의 제물을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속죄의
제물을 드렸읍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히
9:26) 하나님께 속죄의 제물을 드리셨기 때문에, 더 이상의 속죄의 제물이
필요없게 되었읍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피로 속죄의 제물을 드리셨기 때
문에(히9:12) 아담으로 부터 흘러 내리던 범람하는 죽음의 요단강물, 우리
로 행복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던 범람하는 요단강물이,
여호수아 때와 같이 흘러내리지 않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십
자가에 피흘려 돌아가심으로 아담으로 부터 흘러 내리던 죽음의 강, 불행의
강, 불가능의 강물은 심히 멀리 아담으로 까지 거슬러 올라가서멈추고 말
았읍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아담으로 부터 시작되던 원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
해 주셨읍니다.
예수님은 아담으로 부터 흘러 내리는 죽음의 강물을 완전하게 막아 주셨
읍니다. 여호수아 때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에 들어서자, 요단
강물이 완전하게 그쳐서 백성들이 요단강 바닥을 맨땅으로 건넜읍니다.
이것은 요단강물이 완전히 막혔다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도 아담으로 부터 죽음의 강물을 완전하게 막아 주셨읍
니다. 즉 예수님은 아담으로 부터 흘러 내리는,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원죄의 요단강물을 완전하게 해결해 주셨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심히 먼 아담으로 부터 흘러 내리
던 우리를 불행하게 하던 범람하는 요단강물이 그치게 된 줄 믿읍니다.
미켈란젤로는 천재였다. 그는 탁월한 조각가요, 디자이너요, 화가요,
건축가였다. 그의 모세상과 다윗상 같은 것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걸
작품들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거의 다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켈란젤로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사실이 하
나 있다. 그것은 이태리의 프로렌스(Florence Italy)에 한 홀이 있는데,
그 속에는 미켈란젤로의 미완성 조각품들로 가득차 있다.
미켈란젤로는 비로 천부적인 조각가였지만, 많은 미완성품들을 남기고
죽었다. 이렇게 사람들이 하는 일에는 미완성품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단 하나의 미완성품도 남기지 않았다. (요19:30)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마지막 죽을 때,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고
말씀하시고 죽으셨다. 예수님은 속죄의 대업을 완전이 다 이루셨다.
이렇게 예수님은 아담에서 부터 흘러 내려서, 우리로 하여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원죄의 강물의 문제를 완전히 해
결해 주셨읍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사단이 뿌려 놓아서, 그 어떤
것으로도 제거할 수 없고, 그래서 때를 따라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부화하
여 나와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 우리를 괴롭게 하던, 원죄
의 뿌리를 우리 주님이 완전하게 해결 해 주셨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온 인류를 불행하게 만들
었던, 죽음의 강물, 요단강물이 인류의 원죄의 시발점이 되는 아담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완전히 막혀 버려서, 더이상 우리가 젖과 꿀이 흐르는 가
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막지 못하게 된 줄 믿읍니다.
3. 믿음과 순종으로 요단강을 건너가라.
그럼 우리는 어떻게 이 요단강을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 우리 주님께서 이미 십자가에 피흘려 돌아가심으
로, 인류의 조상 아담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완전하게 막아 주셔서, 물
한방울 흐르지 않는 이 죽음의 강, 범람하는 불가능의 강을 어떻게 건너야
할까요 ?
여호수아 당시 그들이 어떻게 그 강을 건넌는 가를 보면 그 방법을 알
수가 있읍니다. 여호수아 당시 사람들이 한 대로 우리도 하면 됩니다.
여호수아와 그 당시 사람들은 "믿음과 순종"으로 그 강을 건넜읍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단강을 건너가자고 설득을 해서, 싯
딤에서 요단강가로 백성들을 데리고 왔읍니다.
그런데 당시는 우기라, 장마철이라, 요단강물이 뚝에 범람을 하고 있었
읍니다. 백성들은 여호수아의 설득에 못 이겨 요단강을 건너기로하고 따라
나섰지만, 범람하는 요단강물을 보자 두렵고 떨렸읍니다. 믿음이 약해지
고,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읍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요단강을 건넌 것이
아니라, 그 강가에서 3일을 유하였읍니다. 그리고는 그래지 않아도 범람하는 요단강물을 보고 믿음이 약해지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 강물
을 3일 동안 지켜보게 했읍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여호수아의 그 결정이 참으로 어리석운 것 같읍니
다. 그런 상황이 되면 빨리 요단강을 건너야지, 거기에 3일 동안 머물러
있다는 것은 상황을 악화 시킬 뿐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 범람하는 요단강물을 3일 동안 보고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은 약해지지 않았읍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3일 후에 그 요단강을 건너가자 할 때, 이스라엘 백
성들은 하나님이 능히 그들로 그 요단강을 건너게 하실 것이라고 믿고, 또
한 하나님에게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 범랑하는 강물을 능히 건너
게 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고, 순종하여 그 강을 건넜읍니다.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최악이 상황에서, 오랜동안 있어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는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런 믿음의 소유자만이 요단강
을 건널 수 있읍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믿은 것은 여호수아만이 아닙니다. 온 백성이 다
믿었읍니다. 그랬기 때문에, 요단강을 건너가자 할 때, 아무도 부정적인
말을 하거나, 불순종하는 자들이 없었읍니다. 뒤돌아 가는 자가 없었읍니
다.
이것은 그들이 다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믿었다는 뜻입니다.
이들은 이 믿음을 가지고 순종을 했읍니다. 이 순종이 없었다면 이스
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을 건너지 못했읍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 요단강이 갈라지고 건넌 것이 아니였읍니다. 요단
강물은 최고로 많아서 범람하고 있었읍니다.
그런 강물 속으로 들어가라고 여호수아가 명할 때, 이스라엘 제사장들과
백성들은 순종하고, 그 범람하는 물속으로 발을 들여 놓았읍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할 때, 요단강물은 갈라지고, 그 엄청나
게 흐르던 강물이 완전히 그치고 마른 땅이 드러났읍니다. 순종하는 백
성들은 그 범람하는 요단강을 마른 땅으로 건너갔읍니다.
이렇게 인류의 불행의 강물, 죽음으로 몰아가는 강물은 오직 믿음과 순
종으로만 건너갈 수가 있읍니다. 믿음과 순종이 있어야만 젖과 꿀이 흐
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 갈 수가 있읍니다.
믿음과 순종에는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우리를 행복의 땅으로 들어
가지 못하게 하는 모든 요단강물을 멈춰서게 하는 능력이 있읍니다.
믿음과 순종은 범람하는 요단강물도 맨 땅과 같이 건널 수 있는 능력이
있읍니다.
난장이인 성 요한은 수도원 역사상 가장 훌륭한 인물들의 반열 중 드는
성자였다. 그는 절대로 이유를 묻지않고, 아무런 불평이 없이, 끈질기게
순종하는 인물로 알려진 자이다.
그에게는 매우 변덕스럽고, 까다로운 상관이 있었는데, 그는 난장이인
성 요한에게 터무니 없는 일들을 많이 시켰다. 몹씨도 난장이인 성 요한
을 괴롭혔다. 그러나 성 요한은 그 모든 명령에 철저하게 순종을 했다.
한번은 유리창 밖으로 그의 저녁 식사를 던져버리라고 했다. 요한은
그대로 순종을 했다.
한번은 그 나이 먹은 수도사가 성 요한의 순종하는 것을 시험해보고 싶
었다. 그래서 난장이인 요한에게 그가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거대한 바
위를 그의 문에 굴려다 놓으라고 했다. 그런데 요한은 한마디 말도 없이, 그 일을 시작했다. 그의 어깨를 큰
바위에 갖다가 대고는, 그 일을 할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러자 그 명령을
내린 상관이 요한의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모습을 보고 요한을 다시 불렀다.
요한은 온전히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자였다. 그래서 비록 난장이지만 성
자의 칭호를 받았다.
한번은 같은 수도원에 있는 위에 있는 분이 요한에게 마른 막대기를 주
면서 땅에 심고, 열매가 맺힐 때까지 매일 물을 주라고 했다.
물을 길러 강으로 가야 했으며, 강은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그 강까지 가
는 길은 뜨거운 모래 위에 나 있었다.
그러나 난장이 수도승 요한은 절대적으로, 조금도 불평이 없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3년 동안 순종을 했다.
드디어 그 막대기에서 움이 돋고, 잎이 피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혔
다.
그 명령을 내렸던 수도승은 그 열매를 따가지고는 교회로 갔다. 그리
고는 형제들에게 나눠주면서 "이것은 순종의 열매요. 이것을 먹어 보세요"
하고 말을 했다.
이런 순종이 우리 앞에 가로막고 있는, 불가능의 강, 죽음의 강, 범람하
는 요단강을 건넌 젖과 꿀이 흐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합니다.
이런 순종이 마른 작대기에도 움이 돋고 잎이 피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으로 - 아담으로 부터 흘러 내려서 우리로 젖
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에덴 동산,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하는 - 요단
강을 건너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