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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베가스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 중 하나가 바로 더운 날씨와 더불어 낮은 교육 환경, 그리고 의료 서비스의 부재를 꼽는다.
날씨야 내가 극복할 수 있으니 그렇다 치고, 애들 키울 일 없으니 교육은 잘 모르겠고, 우리 나이 대에 가장 큰 위험 요소는 바로 병원이었다.
혹시 암이라도 걸리면 어쩌지? 큰 수술이 필요한 상황이 닥치면? 미국 병원비 후덜덜 한 건 익히 아는 사실이고, 일단 사람은 살리고 본다니 그냥 버텨??
베가스에서 만난 유일한 남자 사람 친구가 하나 있다. 내가 원인 모를(?) 질환으로 이 덩치에 픽픽 쓰러질 때, 응급실이던 입원실이던 뺑뺑이 돌며 각종 검사에 시달릴 때, 심지어 일주일 간 침대 밖을 못 나오던 상황에서도 한 덩치하는 나를 들처 업고 화장실을 데려다 준 친구, 한국 사람은 국물 좋아한다며 브로콜리와 샐러리, 맞다 샐러리….를 잔뜩 넣은 갈비탕을 끓여주던 고마운 친구, 제 시간에 약 먹는 걸 제일 못하던 나에게 알약과 물을 들이밀고 제발 먹으라며 협박 아닌 협박을 해대던 친구, 그 친구가 이번에 심각한 척추 수술을 하게 되었다.
제법 큰 덩치에 떡 벌어진 어깨, 빛나는 백발, 누구에게나 나이스한, 심지어 모든 여자들에게 다~~ 친절한 성격을 가진 그 미국인 친구는 메디케어 휴메나 보험을 가지고 척추 전문의를 찾아 다니기 시작했다. 오래된 허리 디스크로 뒤에서 보면 옆으로 기우뚱한 모습에 살짝 절뚝이며 걷는 생활이 일상화 되던 즈음, 허리에서 시작된 다리 통증이 더이상 참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수술을 결심한 것이다.
만 65세 이상이면 자격이 주어지는 메디케어의 특성 상 척추 전문의를 물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 역시 백방으로 도왔지만 의료 지식과 언어의 한계에 부딪치기 일쑤였다. 그의 담당 주치의인 젊은 미국인 여의사 조차 근처 LA나 애리조나 병원으로 갈 것을 권했다. 심지어 애리조나의 유명 척추 병원으로 리퍼를 해주기까지 했다. 라스베가스에는 척추 전문의가 없다면서 말이다.
결혼한 적도 없고 여자친구도 없고 아이도 없고 모든 식구들은 다 타주에 있는 그 친구는 다른 도시로 가서 수술하라는 주치의의 말을 듣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렇다면 내가 일주일 휴가 내고 따라가서 간병을 해줘? 운전은? 나는 호텔을 잡나? 한국처럼 병원에서 같이 못 지낸다던데?? 그 돈은 다 어쩔거야?? 모든 여자들에게 다 친절하니 그 중에 하나 고르라고 으름장을 놓아볼까?????
소주잔을 맞대고 마주 앉아 깊은 상념에 빠졌다.
(병원 안에 들어서면 다양한 정형외과 전문의들의 사진이 걸려있다. 밑 줄 왼쪽에서 세번 째를 확대해 보면,)
(오늘 소개 할 척추 전문의 사진이 똭!!!)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서 반가운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드디어 메디케어가 커버되는 병원을 찾은 것. 게다가 척추 수술 전문의가 바로 한!국!인!이란다. 이름하여 Dr. Daniel Lee!!
순간 적임자를 찾은 그의 기쁨에 앞서 나의 이기심이 먼저 발동했다. 우와~~ 이게 웬 떡이냐?? 훌륭한 칼럼 소재 발견! 삐뽀삐뽀!! 내 심장에 콩닥콩닥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만약 이 어렵고 대단한 수술이 성공한다면 드디어 베가스에도 훌룽한 의사가 있다고 명함을 내밀 수 있지 않을까? 애리조나 행을 권유하던 그 파란 눈의 여의사에게 보란듯이 선입견을 깨뜨릴 수 있는 증거가 생기지 않을까? 심지어 한국인! 더 정확히는 미국에서 태어난 Korean American!!
아 참, 나 평소 한국인 티 안내려고, 대한민국이고 나발이고 일부러 모른척, 외면하며 살지 않았던가? 카지노 딜러로 일하면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어디에서 왔냐고 물으면 그냥 전에 살던 도시 말하지 않았던가? 한국인이라고 말 잘 안 함. 한국인 포함 아시안들은 매너가 안 좋아 좀 창피함. 그 와중에 한국 차, 삼성폰 씀, 일본 차 절대 안 탐. 모순과 아이러니의 극치임.
어쨌거나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의도치 않게, 본의 아니게 애국심이 샘솟는다. 사실이다. 좀 오버해서 국뽕이 차오른다. 평소에는 무시하다 나 필요할 때 되니까 갑자기 애국자인척?? 한국인 척추 전문의가 반가워 죽겠다. 너무 유치한가? 너무 이기적이고 세속적인가? 스스로 문득문득 한심한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진료실에서 만난 적추 전문의 다니엘 리는 피곤에 지친 얼굴에 비해 눈동자는 빛났고 목소리는 힘이 넘쳤다)
나 따라갈래.
수술 전 주치의 면담에 주책맞게 따라갔다. Desert Orthopaedic Center라는 대형 정형외과 전문 병원의 SW 로케이션이었다. 보호자라는 명목보다 그 의사가 너무너무 궁금했다. 만나고 싶었다. 뇌수술, 심장수술에 이어 어렵기로 소문난 척추수술 전문의를 만날 일이 살면서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홀랑 버선발로 따라 나섰다. 핑계 김에 칼럼도 써야 했고 말이다.
진료실 안으로 들어오는 그의 첫인상은 강렬했다. 우선 잘생겼다.(????) 진짜다. 사진이 실물을 못 담는다. 실제로 보면 겁나 잘생겼음. 동글동글 곰돌이같이 귀여운 얼굴에 부스스한 머리, 카리스마 뿜뿜. 괜스레 어깨가 으쓱해진다. 뒤로 주욱 늘어선 미국인 부하(?) 의사들과 스텝들 가운데 앉아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자랑스러움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얼마나 힘들게 공부했을까, 감히 상상도 못하겠어서 울컥하기까지 하다. 짧은 진료시간이었지만 강하고 똑 부러지는 설명은 영어로 대화가 진행 돼 어려운 의학 용어를 100% 다 이해는 못해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믿음이 갔고 신뢰감이 넘쳤다. 잘생긴 얼굴도 한 몫 한 듯하다.
아, 이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생명줄이 되겠구나, 이 의사가 한 사람에게 새로운 인생을 선물하겠구나, 더 이상 칼날로 베이는 듯한 통증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겠구나, 이제는 걸을 때 다리를 절뚝이지 않아도 되겠구나, 아무도 모르던 혼자만의 날카로운 고통과 찢어지는 아픔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겠구나… 참 좋겠다. 더 이상 아프지 않고 행복할 수 있겠구나….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내게도 덩달아 강한 자신감이 전해졌다.
(병원 내부에는 화사한 하트가 환자들을 위로한다)
2024년 10월 30일 수요일 아침 8시. 우리는 스트립 근처에 위치한 수술할 병원인 Valley Hospital Medical Center에 도착했다. 옆에 따라 온 주제에 왜 나는 가슴이 콩닥거리고 눈물이 나는지, 내가 뭐라고 왜 왜 긴장되고 덜덜 떨리고 무섭고 두려운지, 그렁그렁한 눈으로 억지로 실없는 농담을 건네며 한껏 움츠러든 어께로 연신 괜찮을거라는 말만 전할 뿐이다.
정확한 수술 명은 Fusion Spine Lumbar Posterior, 들어도 모르겠는 이 말을 해석하자면 후방 요추&척추 융합술이란다. 구글 번역기를 돌려보니 척추 후방 L3-S1 요추 감압술 및 경추와 요추체간 유합술과 골반뼈 이식술을 이용한 계측 유합술???…..이란다. 어쨌거나 척추와 꼬리뼈에 나사를 박아 디스크를 치료한다는 말이겠지. 뭐, 오케이...
수술 전 대기실에는 보호자가 함께 있는게 허용된다. 수없이 많은 바늘들이 손등과 팔목에 꽂히고 호흡과 맥박, 혈압, 심전도, 체온 등 기본적인 검사가 분주하다. 서류작업도 방대하다. 간호사들, 의료 보조원, 재활의학과 의사, 마취과 의사, 수술실 부하(?) 의사들까지 분주하게 이런 저런 설명이 한창이다. 캡틴인 다니엘 리 의사는 만날 수 없었다. 역시 대빵은 달라도 다름.
낮 12시가 되자 수술실로 향한다. 뭐라고 달리 위로할 방법이 없어 그냥 꼬옥 안아줬다. ‘혹시 내가 죽으면 내 집 니가 가져라.’ 억지로 웃으며 농담 하는 친구의 말에 왈칵 눈물이 났다. ‘안 죽어도 니 집은 내가 가질게 걱정 마슈. 죽고 사는 문제 아니니까 수술 끝나고 계속 싸우자!’ 참았던 한줄기 눈물을 툭 떨어뜨리며 대답했다.
사실 그 친구는 5년 전 목 디스크 수술을 받은 직후 일주일간 혼수 상태에 있다가 3개월 간 병원 신세를 지며 생사를 오가는 경험을 한 적 있기에 터무니없는 걱정만은 아니었다. 수술 시간은 3-4시간 소요된다 하여 집으로 돌아와 대기 모드에 돌입했다.
(수술 후 찍은 엑스레이-세로로 긴 철제를 따라 촘촘히 박힌 의료용 나사못)
이래저래 걱정스러운 마음에 오후 4시부터 병원 로비에 앉았는데 5시가 훌쩍 넘긴 시간에도 수술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척추뼈의 제일 아랫 부분인 요추 S1과 그 위 5번, 4번, 3번 척추에 디스크가 생겨 신경을 누르니 그 병변을 제거해 신경 압박을 감소시키는 수술이다. 정상피부와 근육, 뼈, 인대를 절개하고 병변에 접근해 원인을 제거한 후 의료용 철제로 척추를 지탱하고 나사못을 박아 척추뼈를 고정하고 유압하는 수술이다.
글로 써도 어려운 말이지만 쉽게 말해 더이상 신경이 손상되지 않게 척추 뼈를 잘라 그 안에 병변을 제거하고 나사못을 박아 고정시킨다는 말이다.
간단히 써도 무슨 말인지 잘 몰랐다가 사진 한 장에 뜨억 하며 모든 게 이해가 됐다.
OMG!!! 신생아 예방 접종 맞는 것 조차 무서워 못 쳐다보던 겁쟁이 쫄보인 내 입장에선 너무도 겁나고 공포스러워 할 말을 잃었다. 악 소리가 절로 났다.
그런데 왜 안 끝나지? 서 너 시간이면 된다더니 지금 6시가 넘었는데?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잘못되면 어쩌지? 난 진짜 가족도 아닌데 누구한테 연락해야 하지? 아, 그 친구 여동생 전화번호가 있구나. 근데 캘리포니아 산다는데?? 응급 상황이 생기면 뭐부터 해야하지???
병원 행정 직원들은 모두 퇴근하고 아무도 남아있지 않은 텅 빈 병원 로비 수술실 입구 앞에서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나는 우왕좌왕 갈피를 잃었다. 머리 속이 하얘졌다.
순간 따르릉, 다니엘 리 의사에게 직접 걸려 온 한 통의 전화!
수술 잘 끝났습니다. 많이 어렵고 타이트한 수술이었어요.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잘 끝났습니다. 잘 버텨냈어요. 회복실로 이동 중입니다.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의사의 지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고스란히 전해진다.
허허. 순간 다리 힘이 탁 풀리면서 안도의 한숨에 눈물이 더해져 혼자 생 쑈를 했다. 혼자 북치고 장구치는 모노 드라마 한 편은 족히 찍고도 남았다. 보는 사람 아무도 없었지만 조금 창피해 현타가 옴.
(수술실에서 막 입원실로 도착한 모습, 의료진들의 분주한 모습이 인상 깊다)
(수술 바로 다음날, 의자에 의젓하게 앉은 모습, 실로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수술실에서 회복실을 거쳐 저녁 7시가 넘은 시간, 입원실로 옮겨졌다. 의료진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가까이 보니 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며 나즈막한 소리로 아프다고 말한다. 허리가 너무 아파 누울 수 없다며 의자에 앉겠다고 떼쓴다. 내가 더 긴장해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라하자 능숙한 간호사가 나를 달랜다. 걱정말라고, 긴장하지 말라고, 내일 깨어나면 아무 기억도 못 할 거라고 말이다. 진짜였다. 무의식 중에 쉴 새없이 고통을 호소했다. 당연하지, 말 그대로 뼈를 깎는 고통인데… 그 모습이 더더 안쓰러웠다.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내가 더더더 안타까웠다. 그렇게 기억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첫날 밤이 지났다.
그리고 정확히 다음날 10월 31일 오전 8시,
그 친구는 침대에서 내려와 의자에 앉았다.
진통제에 의해, 덜 풀린 마취약에 의해 완전히 의식이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내가 어제 수술 끝나자마자 의자에 앉겠다고 했어?’ 하며 웃는다. 맨 처음 눈 떴을 때 제일 처음 내가 보였다며 또 웃는다. 퉁퉁 부은 얼굴로 베시시 웃는 모습이 그래도 살았구나 하는 긴장감을 내려놓기에 충분했다. 고마웠다. 멀쩡해서. 너무 멀쩡해서 말이다.
그리고 또 정확히 낮 1시, 피지컬 테라피스트와 함께 병원 복도를 걸었다. 나는 그 상황이 그저 신기하고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 척추 수술 했잖아, 쌍꺼풀 수술도 아니고 뼈를 자르고 거기에 쇠를 박았잖아, 그런 대수술을 받아 놓고 24시간도 채 되지 않아 걷는다고???????
제 아무리 한국과 미국 병원 시스템이 다르다 해도, 예를 들어 한국에서 아이를 낳으면 며칠씩 입원하며 몸조리 하는데 미국은 하루만 지나면 샤워하고 애 싸 짊어지고 퇴원한다는 소리는 많이 들어 봤어도 이건 참 해도해도 너무한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회복이 빨랐다. 가족 단톡방에서 실시간으로 정보를 교환하던 친구의 미국인 식구들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늘 평온을 유지하며 아무렇지 않은 사람은 수시로 입원실을 들락거리던 병원 의료 관계자들 뿐이었다.
(벌써 걷는 환자, 나로서는 상상조차 힘든 낯선 풍경이다)
(손 흔들어 봐! 내 부탁을 잘 들어주는 착한 친구)
그리고 또또 정확히 3일 후, 그 친구는 집으로 퇴원했다. 빠른 회복을 위해 악착같이 독한 진통제를 참아내며 최소한의 용량만 사용해 버틴 결과였다. 입원해 있는 동안 쉴 새 없이 걷고 또 걸었다. 수술 다음 날만 화장실 도움을 받았을 뿐, 이틀 째부터는 혼자 해결했다. 수술 후 응가 처리 문제도 살짝 걱정하긴 했지만 소변줄을 꽂았기에, 응가는 퇴원 직전 혼자 처리할 수 있었기에 모든 걸 힘겹게 스스로 해결했다.
이틀 뒤 샤워할 때 간호사와 함께 조금 도와 준 것 외엔 별 다른 어려움이 없을 정도니 말 다했다. (이 부분도 솔직히 이해할 수 없었다. 대수술 후 달랑 이틀이 지났을 뿐인데 꼭 샤워를 해야 하나? 안하면 죽나? 그런 솔직한 심정 뿐이었다.) 독한 놈이구나, 진작에 알고는 있었지만 극한 상황에서 직접 보니 더 대단했다. 나같으면 최소 일주일 간 침대 밖 나올 상상 조차 안함. 왜 나와? 아파 죽겠는데? 그 죽겠는 고통을 버티더라. 잔인한 신음소리를 내며 버티는 그를 보고 고통을 참아내는 악랄한(?) 인간의 한계를 직접 체험했다. Amazing하다는 말 외엔 다른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수술 후 처음 나온 병원 식사, 꽁꽁 얼은 아이스 티에 요거트, 우유, 사과주스, 미음같은 오트밀.......)
당연히 큰 도시 혹은 병원이 특화된 도시에는 더 많은, 더더 훌륭한 병원들이 즐비하다.
특히 애리조나에는 지인 중 한 명이 유방암으로 시작해 간, 폐까지 전이된 4기 환자에서 완치까지는 아니더라도 일상 생활에 전혀 지장 없을 정도로 회복된 케이스도 직접 봤다.
LA는 또 어떤가?
한국말 유창한 한인 의사부터 대형 한국 병원 지점들까지 즐비하지 않은가.
다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바로 휘황찬란하게 나열된 각양각색의 병원 리스트보다
딱 내게 필요한 한 곳의 병원 선택이 어렵고 힘들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베가스? 병원?? 에이~ NO NO NO~~
라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선입견부터 내세우는 고정관념을 조금이나마 깨뜨리고 싶었다. 이 한 건의 사례로 라스베가스 의료 수준 빵빵해요~ 를 말하려는 건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지역 곳곳에 빼곡히 세워지고 있는 수 많은 병원과 의료시설에 대한 투자가
지금도 현재 진행 중이라는 걸 알리고 싶을 뿐이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훌륭한 개개인의 의사들이
본인들 밤 잠 줄여가며
누군가의 생명을 위해, 누군가의 더 나은 삶을 위해
고군분투하며 존재한다는 사실을, 현실을 말이다.
그 중심에 척추 전문의 Daniel Lee라는 젊은 한국인 의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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