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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 절 白夷의 발전과 변화
1. 白夷의 기원
白夷는 白民이라고도 하는데, 先秦 시대 동북지구의 일개 古민족이다. [佟冬等은] 白夷의 출자는 貊族이라고 하였다.: “(遼河로부터) 더 동쪽으로 貊人인 白夷部가 있었다. 白民이라고도 일컬어졌는데 白은 또한 貊이다. ‘肅愼國在白民北’이라 했으니, 白夷部는 당연히 長白山[백두산]이남의 압록강 유역에 있어야한다. 周代, 白夷의 공물은 등에 두 뿔이 돋아있는 기이한 짐승인 乘黃이었다.” 이 논술은 사실에 가까운 축에 끼인다.
白夷는 그들만의 족원사(族源史)가 있다. 갑골 卜辭에 나오는 “白人”이 이 민족의 선조이며, 《古本竹書紀年》과 《後漢書•東夷傳》에 나오는 “九夷”중의 “白夷”와 같은 민족이다. 대략 商 말기에 白夷중의 일부는 모족(母族)에서 벗어나 동북으로 옮겨가 동북 古민족의 하나가 되었다.
《山海經•海外西經》의 “白民之國”에 대해 郭璞의 注는 “言其人體洞白”이라고 했다.《淮南子•墬形訓》高誘의 注에서는 “白民”에 대해 말하기를 “白民白身, 民被髮, 髮亦白.”라고 하였다. 이것들은 모두 白夷가 흰색(白色)을 숭상하였기때문에 나온것인데, 흰색 옷이 연고(緣故)가 되어 이를 헤아려 白夷라는 족명(族名)을 얻게 되었다.
2. 白夷와 “成周之會”
周는 商을 멸하고 나서, 곧 경내에 있는 각 소수민족 및 그 方國을 달래는 한편 위세을 보여 겁주기 위해 “成周之會”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동북지구의 白夷는 이 다민족 대집회에 참가하지 않았으며, “成周之會”에 참가한것은 중국에 있는 다른 白夷 일족이었다. 이것은 반드시 똑똑하게 분별해야한다.
《逸周書•王會篇》에 “白民乘黃, 乘黃者, 似騏, 其背有兩角.” 孔晁 注: “白民, 亦東南夷.” 라고 하여, 동남지구에 있는 白夷의 일족이 집회에 참여했음을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다. 또한 《淮南子•墬形訓》에 “凡海外三十六國, 自西北至西南方, 有修股民•天民•肅愼民•白民.” 라고 하였고, 《山海經•海外西經》에는 “肅愼之國, 在白民北; 白民之國, 在龍魚北, 白身被髮, 有乘黃, 其狀如狐, 其背上有角.”라고 하였다. 이러한 기재는 상고시대의 白夷의 후예는 중국 동북에도 있었을 뿐 아니라 중국 서방 및 서남방에도 존재하였고 심지어 肅愼族과도 닿아 있었음을 재차 증명해준다. 이는 그들이 많은 곳으로 옮겨간것과 잇닿아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문헌기재에 누락되어 있지 않다.
또한 《逸周書•王會篇》에 “白州比閭……” 라고 적혀있고 孔晁 注: “白州, 東南蠻, 與白民接也.”라고 하였다. 白州族의 땅은 오늘날의 安徽 懷遠으로 비정되는바, 그곳에 “接也”하고 있는 白民이 “成周之會”에 참가한 白夷임을 알 수 있다. 이 白夷는 반드시 懷遠에 이웃한 지역에 있어야만 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당시 동북지구의 白夷는 “成周之會”의 참가와 아무 관련이 없으며, 周 천자에게 가서 “뿔이 둘 달린 기이한 동물”을 바치는 것도 불가능하다.
3. 白夷가 있던 곳
동북지구의 白夷가 있던 곳은 長白山[백두산] 이남의 압록강설 외에도, 뒷날의 夫餘國 경내에 있었다는 주장(孫進己, 馮永謙)도 있다.
《漢書•地理志》에 의하면 西漢의 右北平郡이 속한 현 중에 白狼縣이 있는데, 이 현의 이름은 그 지역에 있는 白狼水 및 白狼山에서 유래한것이다. 顔師古 注에 “有白狼山, 故以名縣” 라고 했다. 白狼山은 또한 白鹿山이라고도 일컫는데 王綿厚의 고증에 의하면 白狼山은 바로 지금의 요녕성 객좌현(喀左縣) 서남의 대양산(大陽山)이고 白狼水는 지금의 대릉하(大凌河)이다 (1982).
대릉하 유역의 대양산 일대가 당연히 白夷의 거주지이다. 옛 명칭인 白狼水 및 白狼山의 “白”은 바로 白夷의 족칭(族稱)에서 그대로 따온것이다. “狼”은 “萊”자의 음전(音轉)일 수는 있으나 그 지역에 정말로 흰 이리(白狼), 흰 사슴(白鹿) 등 여러 동물이 있던것은 아니다. 이 지역에 白夷와 萊夷가 들어와 살았기 때문에 그 山•水를 합쳐서 일컫기를 “白萊”라고 하였으며, 그 뜻은 白萊族이 사는 땅이다. 뒷날에 와서 “白萊”는 또한 “白狼”, “白鹿” 등등으로 와전되었다. 또한, 왕망(王莽)이 白狼縣의 이름을 “伏狄”으로 개칭한적이 있었는데, 이 이름의 뜻은 “征服夷狄”이므로 東夷계가 예전에 이 지역에서 살았음이 거듭 증명된다. 白夷은 이렇게 穢貊계 여러 민족중에서 가장 서쪽에 치우쳐 살던 일족이었다.
4. 白夷의 발전
동북의 白夷에 대한 사적 기재 중, 《山海經•大荒東經》의 한 단락은 긍정할 만하다. 이 경문에서 말하길 “有白民之國, 帝俊生帝鴻, 帝鴻生白民, 白民銷姓, 黍食, 使四鳥: 虎, 豹, 熊, 羆.”라고 하였다. 여기서 “黍食, 使四鳥: 虎, 豹, 熊, 羆.”은 같은《大荒東經》에 나오는 蔿(穢)族의 “黍食, 使四鳥: 虎, 豹, 熊, 羆.” 과 같은 말인데 郭璞 注에 “言此國中惟有黍穀也”라고 하였다. 이 당시 白夷는 대략 穢族과 거의 비슷한 농삿일을 주로 하였으며, 동시에 수렵 등도 아울러 행하여 농삿일을 보충하였음을 알 수 있다.
秦•漢때, 白夷 민족은 이미 소멸되었다. “白民은 夫餘와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三國志•夫餘傳》에 적혀있기를 ‘在國衣尙白, 白布大衣褲衿褥褲’.….. 白民이 夫餘의 선조라고 할 수 있다면, 白民이란 명칭은 夫餘의 선조가 흰옷을 입은것에서 유래할 것이다.(孫進己, 馮永謙)”를 근거로, 白夷의 절대 다수는 夫餘族속에 녹아들어갔다.
제 10 절 夫餘族의 발전과 변화
1. 夫餘의 족칭 및 족원
“夫餘族은 夫餘國을 세웠는데, 우리나라 동북지구에서 가장 빨리 문명시대로 들어간 古민족의 하나이다. 동북민족사뿐아니라 중화민족 문명사에도 비교적 무거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李德山 1991). 이처럼 중요한 古민족인바, 그들의 족칭(族稱)과 족원(族源) 문제는 줄곧 외국 연구자가 중시하였다.
“夫餘”란 이름이 가장 먼저 보이는 곳은《史記•貨殖列傳》의 한 글귀인데, 燕을 설명하면서 “北鄰烏桓, <夫餘>.”라고 나타난다.《史記》전으로는《逸周書•王會篇》중의《伊尹朝獻商書》에 “臣請正東, <符婁>, 仇州, 伊慮, 漚深, 九夷, 十蠻, 越漚, 鬋髮文身, 請令以魚皮之鞞”란 기재가 있다. 이 때문에 符婁를 夫餘로 여기는 설이 있다. 이런 류의 설법은 유력한 증거가 결여되어 이 설을 따르는 학자는 많지 않다.
《爾雅•釋地》의 “九夷”에 대한, 唐나라때 李巡의 注, 宋나라 때 邢昺의 疏는 일관되게 “九夷”의 제5종 夷를 “鳧臾”라고 칭하였다.《字匯補》에서 말하길 “鳧臾, 東方國名, 卽夫餘也.”라고 했다. 夫餘는 鳧臾라고도 전사(轉寫)되었음을 알 수 있다.
梁章鉅의《三國志旁證•東夷傳》에 또한 夫餘를 “扶餘”라고 쓰고 있다. 무릇 夫餘, 鳧臾, 扶餘 등은 모두 同音轉寫이다.
夫餘族은 두 민족의 족명을 합쳐 칭한것으로 그 뜻은 “番餘”이라고 생각된다 (李德山). 夫餘란 단어가 내포한 뜻을 이해하니 그 족원도 역시 이해된다. 番과 餘는 둘다 東夷이고, 그러한 夫餘는 당연히 東夷에 속한다.
番族은 본디 魯西南 지역에 살았는데 餘族도 마찬가지다. 徐旭生은 “徐國은 周 초에 지금의 산동 曲阜縣 부근에 있어야만 한다. 이후 남방 수백 리 밖으로 옮겨갔다.” 라고 말하였다 (1985). 顧頡剛은 고증하여 말하기를: 徐族의 옛 터전은 지금의 魯西南지구 “蘭山•郯城 일대”이다라고 하였다 (1990). 두 민족 모두 東夷이고 거주지 또한 서로 이웃하였던 바, 이러한 선결조건이 있었기에 그들은 동북지구로 옮겨간 후 하나의 민족으로 쉽게 합쳐졌다.
2. 夫餘族의 발흥
夫餘族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일어났다.: 지금의 동북지구로 들어간 뒤, 새로운 민족을 형성하고, 곧 민족정권을 세웠다.
夫餘의 전신(前身)인 番과 徐 두 민족의 일부가 동북으로 들어간 시기는 대략 商말周초이다. 周가 商을 멸하자, 番과 徐 두 민족은 殷商의 겨레붙이 민족이었기에 일찍이 연합하여 周에 반란을 일으켰었다. 이에 관한 그들의 활동 및 그 결과에 대해서는, 앞서 제8절 發族편에서 番族의 일부인 蒲姑를 다루면서 이미 논술한바 있다.
徐族의 周에 대한 제1차 반란은 蒲姑, 淮夷, 奄族, 炎族, 邾族등과 연합한 것이었다. 실패하여 진압당한 뒤, 徐族은 “移民” 이라는 처벌을 받았다. 周에 대한 제2차 반란은 周 穆王때 일어났다.《後漢書•東夷傳》에 “後<徐夷>僭號, 乃率<九夷>以伐宗<周>, 西至河上, <穆王>畏其方熾, 乃分東方諸侯, 命<徐><偃王>主之.” 라고 적혀있다. 제1차 반란때의 徐夷는 참가자였었다. 제2차 반란때는 일변하여 리더가 되었으며 직접 周 왕조의 통치를 위협하였다. 그리하여 穆王을 몰아부쳐 徐夷에 대해 혜택을 베풀고 달래는 조치를 취하게끔 만들었다. 반발 활동은 그치게 되었다.
대략 이 시기에 番과 徐 두 민족은 나라 도로 세우기(復國)를 바라지 않았으며, 또한 거듭되는 周 왕조의 진압을 받아 마침내 각각의 일부 민족이 동북지구로 옮겨갔다. 그 동안 각자 따로따로 무리지어 살았었으나, 결국에는 새로운 민족 즉 夫餘를 형성하였다.
이 새민족이 형성된 시기를 [孫進己는] BC 119 〜 BC 108년으로, 漢이 匈奴의 동쪽땅을 깨부수고 漢이 穢貊 및 古朝鮮땅에 4郡을 설치하기 전이어야 한다고 여겼다. 이 시기는 [吳文銜이] 다음과 같이 지적한 것에서 보듯이 지나치게 늦다. “夫餘의 건국 시기를 뚜렷하게 밝힌 역사 기록은 없다. 그러나 東•西漢 시대의 夫餘 정권이 이미 상당히 강대하게 나타나는 점과 또한 일찍이 경제 및 문화의 수준도 몹시 높았던 점을 비추어보아 당시 동북 여러 민족중에서 선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단언하건대 그 건국시기는 마땅히 秦•漢시기보다 빨라야하며, 전국시대일 가능성이 있다.” 이 한 도막의 논고는, 비록 夫餘의 건국시기를 설명하고는 있지만 민족 형성시기는 반드시 건국 전이어야 하며, 따라서 그들의 형성 시기의 확정에 대한 참고로써 가치가 있을 뿐이다. 전국시대에 건국되었다면 민족형성은 전국시대 전이어야한다.
현재, 길림 대안(大安)의 漢書2기 문화와 백금보(白金寶)문화의 조원(肇源) 망해둔(望海屯) 유형을 夫餘의 조기 문화 유적으로 여기는 것이 비교적 일치된 견해이다 (李殿福 1985; 佟柱臣 1991). 漢書2기 문화와 백금보 문화 망해둔 유형의 시기는 전국 〜 西漢 시기에 상당한다. 이로써 夫餘의 민족 형성시기가 전국시대 전이었음을 증명하는데 한걸음 나아간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전국시대전 춘추시대이다.
夫餘의 건국은 橐離族의 왕자인 東明과 관계가 있다.《魏略》에 적혀있기를:
“昔北方有<橐離>之國者, 其王者侍婢有身, 王欲殺之, 婢云:「有氣如雞子來下我, 故有身.」後生子, 王捐之於溷中, 豬以喙噓之, 徙至馬閑, 馬以氣噓之, 不死. 王疑以爲天子也, 乃令其母收畜之, 名曰<東明>, 常令牧馬. <東明>善射, 王恐奪其國也, 欲殺之. <東明>走, 南至<施掩水>, 以弓擊水, 魚鼈浮爲橋, <東明>得度, 魚鼈乃解散, 追兵不得渡. <東明>因都王<夫餘>之地.”
또한《後漢書•東夷傳•夫餘》에 적혀있기를:
“初, 北夷<索離國>王出行, 其侍兒於後姙身, 王還, 欲殺之. 侍兒曰:「前見天上有氣, 大如雞子, 來降我, 因以有身.」王囚之, 後遂生男. 王令置於豕牢, 豕以口氣噓之, 不死. 復徙於馬蘭, 馬亦如之. 王以爲神, 乃聽母收養, 名曰<東明>. <東明>長而善射, 王忌其猛, 復欲殺之. <東明>奔走, 南至<掩[湹, 里→虎]水>, 以弓擊水, 魚鼈皆聚浮水上, <東明>乘之得度, 因至<夫餘>而王之焉.”
이러한 기재로부터 橐離國王의 시비(侍婢)의 사생아인 東明이 夫餘가 가기전에는 夫餘가 건국되지 않았었음을 알 수 있다. 東明은 달아나 夫餘에 도착한 뒤 夫餘國을 세웠으므로 東明은 夫餘國의 제1대 국왕이 된다. 앞에서 이미 기술하였듯이 夫餘의 건국시기가 전국시대때라면, 東明이 달아나 夫餘에 다다른 시기도 이 때가 된다. 橐離國의 東明은 일변하여 夫餘의 국왕이 되었다.
東明이 夫餘를 건국하는것과 동시에 夫餘의 인구가 늘기 시작하였다. 그들과 같은 민족인 發族 및 白夷 등의 역량을 흡수하게 되면서 夫餘는 穢族의 땅을 차지하기 시작하였다. 漢초에 이르러 夫餘는 이미 대부분의 穢族의 땅을 점유하였다. 끊임없이 夫餘의 압박을 받았기때문에 薉君인 南閭는 28만口를 이끌고 중앙왕조에 내속하였다.; 남아있는 穢人은 비록 여전히 자기의 영지에 있었으나 이전과 비교하면 몹시 적은 일부분이었을 뿐만아니라 활동공간도 이미 예전 만큼 크지 못하였을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사적에 다음과 같이들 적혀있는 것이다.: “其印文言「濊王之印」, 國有故城名濊城, 蓋本濊貊之地, 而夫餘王其中, 自謂「亡人」, 抑有以也.” (《三國志•夫餘》). 또한 “地方二千里, 本濊地也.”(《後漢書•夫餘》)
夫餘는 穢族의 땅을 점령하게 되면서 穢族의 인구를 거두어들여 일변하여 동북의 강족이 되었다. 이리하여 우리나라의 역사무대에 정식으로 오르게 되었다
3. 夫餘의 거주지 및 왕성
《三國志》전의 여러 역사 기록은 夫餘國의 지리적 위치에 관한 것이 모두 비교적 간략하며 확실한 방위를 말하지 않는다. 다만《漢書•地理志》와 같이 遼東 여러 지역을 “北隣烏桓•夫餘” 혹은 “北隙烏丸•夫餘”라고 적혀있을 따름이다. 《三國志》부터 夫餘의 위치가 구체적으로 기재되기 시작한다. 그《魏書•東夷傳•夫餘》에서는 “<夫餘>在長城之北, 去<玄菟>千里, 南與<高句麗>, 東與<挹婁>, 西與<鮮卑>接, 北有<弱水>, 方可二千里.” “多山陵, 廣澤, 於東夷之域最平敞.”라고 하였다. 《後漢書•東夷傳•夫餘》의 기재는 《三國志》와 전부 똑같다.
이것을 근거로 필자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추정한다.: 夫餘의 서쪽 경계는 지금의 길림성의 洮兒河와 呼林河 하류 유역 지역이다.; 동녁으로 挹婁와 접경을 이루는 곳은 오늘날의 장광재령(張廣才嶺) 일대이다.; 그 북녁으로는 弱水가 있다(弱水가 현대의 어떤 물줄기인지는 학계의 견해가 일치하지 않고 있다. 옛 弱水는 지금의 흑룡강이라는 주장(白鳥庫吉; 張博泉 1981), 제1송화강이라는 설(池内宏 1951; 馮家昇), 또 지금의 동편 송화강과 흑룡강 하류 유역 즉 동편 송화강이 합류한 뒤의 일단이라는 설(李健才1982)등이 있다. 종합하면, 어떤 설이던간에 그 북녁 경계는 흑룡강성의 중남부 지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 남녁은 지금의 길림성 휘발하(輝發河) 일대와 高句麗에 접한 땅이어야만 한다. 이 지역은 정확히 지금의 송요(松遼)평원의 북부가 되는데 그 나라의 땅에 대한 사적의 기재인 “於東夷之域最平敞”과 “本濊地也”와 맞아떨어진다.
夫餘의 왕성은 줄곧 외국 학계에서 비교적 논쟁이 많은 문제이다. 《資治通鑑•晉紀》東晉 穆帝 永和 2년 (BC 346) 정월조 기사에 “初, “<夫餘>居于<鹿山>, 爲<百濟>所侵, 部落衰散, 西徙近<燕>.”라고 적혀있다. 여기서 “爲<百濟>所侵”란 한 글귀의 “百濟”는 당연히 “勿吉”의 오기(誤記)라고 제기한 학자가 있다. 또한 高句麗의 오기라는 설이 있으며, 잘못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정리해서 짐작해보건대, 당시 百濟는 멀리 떨어진 조선반도의 남부에 있었으니 高句麗를 넘어 대규모로 夫餘를 치는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百濟”는 당연히 高句麗의 오기여야 할것이다. 위 기사를 근거로, 夫餘는 일찍이 서방으로 먼저 옮겨갔음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그 왕성 또한 필연적으로 따라 옮겨가게 되고 이것에 의해 [왕성을] 전기와 후기로 나눈다.
일본학자 이케우치 히로시(池内宏)는 夫餘의 전기 왕성은 지금의 흑룡강성의 아성(阿城)이고 후기 왕성은 지금의 길림성의 농안(農安)이라고 여겼다 (1951; 馮家昇). 김육불(金毓黻)은 전기왕성은 농안에 있고 후기왕성은 지금의 요녕성 창도현(昌圖縣)에서 북으로 40 리되는 사면성(四面城)이라고 하였다. 이건재(李健才)는 夫餘의 전기왕성은 지금의 길림시 용담산(龍潭山)•동단산(東團山) 일대이고 후기왕성은 농안에 있다고 하였다 (1982). 손진기(孫進己)•풍영겸(馮永謙)은 그 전기의 정치활동의 중심은 지금의 요녕성 서풍(西豐)과 길림성 요원(遼源)지역인데, 東漢때 지금의 농안 및 길림시 지역까지 도달하기 시작하였다고 하였다. 이러한 설들은 문헌기재 혹은 고고학적 발굴 자료를 근거로 한것이다.
이들 견해를 종합해 보면, 농안은 일찍이 夫餘의 정치중심이고 夫餘의 왕성이다함은 비교적 공인된 사실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수백년 동안 농안은 夫餘族의 주요 왕성이었다함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확실하다. [나머지] 다른 한 왕성은, 보다 직접적인 증거가 제시되지 않는한 새로 탈바꿈되지 못하며 일시적인 공인도 받기 힘들다. 다만 어디가 되던간에 그 제 2 왕성의 존속기간 및 성시(城市)의 규모는 농안의 그것을 크게 능가하지 못한다.
4. 夫餘國의 사회경제
夫餘가 건국된 후 그 사회경제는 비교적 빠르게 발전하였다. 사적에서 夫餘에 대하여 말하길:
“於東夷之域, 最爲平敞, 土宜五穀. 出名馬•赤玉•貂豽, 大珠如酸棗.”, “其民土著, 有宮室•倉庫”, “在國衣尙白, 白布大袂, 袍•袴, 履革鞜. 出國則尙繒繡錦罽, 大人加狐狸•狖白•黑貂之裘, 以金銀飾帽.” (《後漢書•夫餘》,《三國志•夫餘》).
이 기사를 근거로, 당시 동북지구 夫餘族의 물질문명은 엄청나게 발달했으며 사람들의 의식주 및 교통, 치장하기 여러 방면 모두에 걸쳐 매우 높은 경지에 달했음을 알 수 있다. 동북 평원문명의 邦으로써 손색이 없다.
사회생산에 있어서, 부여족은 농업에 주로 종사하였으며, 동시에 많은 생산활동을 병행하였다. 목축업과 수렵업은 물론 수공업도 발달하였는데, 특히 방직업과 금은 제조업은 당시에 명성이 높았다. 이것들은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충분히 증명된다.
漢書2기 문화 유지(遺址)의 출토물 중에서 생활용구로는 주로 솥(鬲), 호(壺), 관(罐), 바리(鉢), 완(碗), 잔(杯), 그릇받침(支座)과 소량의 舟形器가 있다. 또 백금보문화 망해둔(望海屯) 유지에서는 호(壺), 완(碗), 독(瓮), 세발솥(鼎), 솥(鬲), 두(豆), 그릇받침(支座), 바리(鉢) 등이 나왔다. 이렇게 출토된 생활용품은 사적에서 말하는 “食飮用俎豆”와 아귀가 들어맞는다.
생산공구로는, 漢書 2기 문화와 망해둔 유적에서 여러 모양의 [질그릇 조각을 갈아서 만든] 가락바퀴(陶紡輪)가 골고루 출토하였다. 그 소맷자락(袂), 겉옷(袍), 바지(袴) 및 견직물, 자수, 면직물, 모직물은(繒繡錦罽) 이러한 가락바퀴 등이 있었기에 가능한것이다. 漢書 2기 문화에는 홈이 x자처럼 패여있는 달걀모양의 큰 어망추가 발견되었고 또 망해둔 유적에도 어망추가 출토하여 夫餘 사람들의 그물잡이 기술이 출중함을 말해주었다. 철기도 이미 출현하였다. 漢書 유지와 망해둔 유지 모두에서 자루 구멍이 있는 철끌이 발견되었고, 농안의 田家坨子 유지에서는 자루 구멍이 있는 철괭이가 출토하였는데, “비록 출토량이 몹시 적긴하지만, 그것들은 사회생산력이 이미 뛰어나게 발전하였음을 상징한다 (李殿福 1995)”.
망해둔 유지에서 20개 이상의 도제(陶製) 거푸집이 발견되었다. 社爾伯特旗 官地무덤에서 동팔찌와 동단추(銅泡)가 발견되었고, 大安 東山頭무덤에서는 칼등이 칼날쪽으로 굽은 청동칼(弧背蠻刃靑銅刀), 동제 버클(銅扣), 동팔찌 등등이 발견되었다. 이것들은 “수공업이 완전하게 출현하였음을 표명하는것이다 (佟柱臣)”. 이들 동제 출토물은 대개 몹시 정교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졌으며, 예술 수준이 무척 높다. 망해둔 유지에서는 여전히 옥반지와 말씹조개칼(蚌刀)이 출토된다. 大安 東山頭3호무덤에서는, 한 여성 인골의 목 부위에서 통채로 광택이 나도록 갈은 타원형의 반투명 옥벽(玉璧)이 하나 발견되었다. 사적에서 夫餘에는 “赤玉”이 난다고 하였고 또 “今<夫餘>庫有玉璧•珪瓚, 數代之物, 傳爲世寶, 耆老言先代之所賜也” 라고 하였다 (《三國志•夫餘》). 이 말은 출토물과 깔끔하게 들어맞으며, 夫餘사람들의 옥기 제조기술을 확실하고 꼼꼼하게 설명한것이다.
망해둔 유지에는 또한 소, 말, 돼지 등의 가축뼈가 출토하였으며 아울러 노루, 사슴, 이리, 황양(黃羊) 등의 야생동물의 뼈가 출토하였다. 이것은 부여의 농업이 몹시 발달하였으며 아울러 가축도 기르고 수렵에도 종사하였음을 드러낸것이다. 특히 망해둔 무덤중에서 출토한 골제(骨製) 갑옷미늘의 조각은 무장한 병사의 군장(軍裝)이 되는데, 집집마다 개갑(鎧甲)과 병기(兵器)가 있었음을 말해주며, 또한 계급사회에 들어갔음을 상징한다. 漢代에는 통일적 다민족 국가가 더욱 더 흔들림없이 다져졌으며, 봉건경제는 더욱 더 번영하였기 때문에, 이에 따라 夫餘 등 각민족의 발전이 촉진되었다. 이것은 원리 원칙에 크게 부합한다.
5. 풍부하고 다채로운 민족문화
夫餘族의 문화는 풍부하고 다채로와서 일찍부터 중국 동북 古민족중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문헌기재를 따르면 夫餘族은 난생신화적 풍속을 숭배하였다. 《論衡•吉驗篇》,《後漢書•東夷傳》,《三國志•魏書•東夷傳》注引《魏略》및《搜神記》에는 모두 夫餘族의 제1대 국왕은 그 어미가 “달걀같은 기운을 느껴서(感氣如鷄子)”임신하였기때문에 아비없이 태어났다고 적고있다. 선조가 알에서 나왔다는 이런 종류의 난생신화적 풍속을, 많은 민족학 학자와 민속학 학자들은 원시사회때의 새(鳥) 토템 숭배가 반영되는것으로 여긴다. 어떤 학자는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지적하여 말하였다. “새 토템은 고대 東夷族의 주요 토템형식으로 매우 광활한 지역을 뒤덮고 있다. 요동반도에서 남해(南海)에 이르기까지 새 토템은 중국 전 해안지역의 주요 토템 형식이다.”; “나는 이것을 살펴 판단하건데 중국의 새 토템 문화는 고대 東夷族과 百越•百濮 민족이 창조한것이다 (王小盾 1989)”. 夫餘族에 난생신화가 널리 퍼진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그들의 선조에 대한 난생신화 전설은 중국 고대 동방 난생신화 전설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였다.
夫餘의 매장풍속은《三國志•魏書•東夷傳•夫餘》에 아래와 같이 적혀있다.
“其死, 夏月皆用冰, 殺人徇葬, 多者百數. 厚葬, 有槨無棺.” 注引《魏略》: “其俗停喪五月, 以久爲榮, 其祭亡者, 有生有熟, 喪主不欲速而他人彊之”, “常諍引以爲節.”
夫餘의 매장 풍속은, 후하게 묻어주며 상(喪)을 치루는 기간이 매우 길고 또한 노예주인 귀족이 죽으면 노예를 순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夫餘는 이른바 “來世”를 중시하였던 것이다. 또한《後漢書•東夷傳•夫餘》에 아래와 같은 기사가 있다.
“其王葬用玉匣, <漢>朝常豫以玉匣付<玄菟郡>, 王死則迎取以葬焉.”
여기서 “玉匣”는 누구나 다 알만큼 유명한 金縷玉衣[옥조각을 엮어 만든 옷(수의)]인데, 중국에서는 현재까지 모두 2점이 출토되어 있다 (1983). 夫餘의 옛땅에서는 아직까지 玉匣가 출토되지는 않고 있지만 사적에는 적혀있다. 이것을 볼때 夫餘國王이 죽으면 그 장례는 매우 화려하였고, 또한 이것은 일종의 국력이 비교적 큼을 반영하는것이다.
夫餘사람들의 건축에 관하여 《後漢書•東夷傳•夫餘》에 “以圓柵爲城, 有宮室, 倉庫, 牢獄.”, 또《三國志•魏書•東夷傳•夫餘》에 “有宮室•倉庫•牢獄”, “作城柵皆員(圓), 有似牢獄.” 라고 적혀있다. 건축기술도 역시 독특하다.
夫餘사람들의 옷차림새도 독특하다.
《三國志•魏書•東夷傳•夫餘》: “在國衣尙白, 白布大袂•袍•袴, 履革鞜.”
《魏略》: “其居喪, 男女皆純白, 婦人著布面衣, 去環佩, 大體與中國相彷彿也.”
《太平寰宇記•東夷傳•夫餘》: “男女皆純白.”
夫餘族은 흰색을 숭상하는 전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전에 夫餘族에 융합된 白夷도 흰색을 숭상하는 전통이 있었다.
《三國志•魏書•東夷傳•夫餘》: “以殷正月祭天, 大會連日, 飮食歌舞, 名曰<迎鼓>. 是時斷刑獄, 解囚徒. 有軍事, 亦祭天, 以蹄占其吉凶.” 《後漢書•東夷傳•夫餘》는 “正月”이 “臘月”로 적혀있는것 말고는 나머지는 모두《三國志》의 기사와 같다. 이를 통해 夫餘의 역법(歷法)은 殷商과 같은것을 알 수 있는데, 呂思勉이 또한 “옛날 貊族에게는 두 가지 [역]법이 있었는데 夫餘는 殷과 같고, 句麗 및 穢는 秦과 같다.”라고 지적하였다. 夫餘族은 새해을 맞이하는 예식을 영고(迎鼓)라고 일컬었다. 그것을 치룰때는 “飮食歌舞” 을 몇일간 하였다하니, [영고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군사행동을 하기에 앞서 하늘에 제사(祭天)하고 “[소]발굽으로 길흉을 점친(以蹄占其吉凶)”것도 독특하다.
《三國志•魏書•東夷傳•夫餘》: “其人麤大, 性彊勇謹厚, 不寇鈔. ……行道晝夜無老幼皆歌, 通日聲不絶.”
《後漢書•東夷傳•夫餘》: “其人麤大彊勇而謹厚, 不爲寇鈔. 食飮用俎豆, 會同拜爵洗爵, 揖讓升降. 行人無晝夜, 好歌吟, 音聲不絶.”
이 기사를 보면, 夫餘사람은 신체가 크고 튼튼하며, 예의바르고 점잖으며, 다투지않고 양보하길 좋아하며, 노래부르기를 즐기고, 낙관적이라고 중화에 소문이 퍼졌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선조인 東夷의 기풍이 남아있다고 이해되며 가히 古朝鮮과 그 아름다움을 격렬하게 겨룰만하다.
총괄하면, 각양각색의 夫餘민족의 문화는 중화민족의 전통문화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였다.
6. 고로(古老)한 왕국의 소멸과 인구 동향
남북조 시대, 勿吉族이 일어나고, 고로(古老)하지만 부유한 夫餘왕국은 약탈의 대상이 되었다. 주변에 있는 강족(强族)에 의한 약탈과 잠식하에 중앙왕조의 비호마저 잃어버린 夫餘는 이미 멸망의 언저리에 놓여 있었다.
北魏 獻文帝 皇興 4년 (470), 高句麗의 好太王이 夫餘를 친정(親征)하여 “凡征破城六十四, 村一千四百” (《好太王碑銘》) 하였다.
北魏 孝文帝 太和 17년 (494), 勿吉族이 夫餘를 크게 침공하였다. 이때의 夫餘는 이미 저항할 힘이 없었다. 夫餘王은 식솔 등을 이끌고 高句麗에 항복하였다 (《三國史記•文咨明王》).
춘추•전국•秦•漢•魏•晉•남북조 등의 역대왕조에 걸쳐 존속하며 나라를 세운지 이미 700 여년이 된 夫餘族 및 夫餘정권은 이로부터 정식으로 중국의 역사무대에서 물러난다.
夫餘의 인구는 역사기록에 따르면 대략 8만호 안팎이다 (《三國志•文咨明王》). 평균잡아 한 호(戶)를 5명으로 하여 헤아리면 그 총인구는 40만인을 넘는다. 夫餘國이 망한 뒤에 이 40만인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흘러갔다.
< 1> 鮮卑 慕容氏가 끌고갔다. 慕容廆•慕容皝 부자는 두차례에 걸쳐 夫餘를 공격하였는데, 합쳐서 夫餘사람을 6만인 넘게 끌고갔다. 이것이 대규모로 끌려간것이다. 소규모로 끌려간것은 또한 사적에 보인다. 예를 들어 《晉書•四夷傳•夫餘》에 아래와 같이 적혀있다.
“爾後, (夫餘)每爲<廆>掠其種人賣於<中國>. 帝愍之. 又發詔以官物贖還, 下司•冀二州, 禁市<夫餘>之口.”
이것은 慕容廆가 처음 [夫餘사람을] 대규모로 잡아갔을 때 이후의 일이다. 여러차례 소규모로 잡아갔는데 당연히 끌려간 夫餘사람은 1만 이상이다. 많던 적던 모두 합쳐 慕容氏에게 끌려간 夫餘사람은 7만인 이상이어야만 하는데, 이것은 어림잡아 夫餘國 총인구의 1/6을 조금 넘게 점유한다. 이렇게 끌려간 夫餘사람 일부는 漢族 대호(大戶)에게 팔려가 노예가 되었고, 다른 일부는 慕容氏에게 붙었는데, 결국에는 몽땅 漢族속에 녹아들어갔다.
< 2> 高句麗族속으로 들어갔다. 연구에 의하면, 夫餘사람 중에 高句麗에 들어간 자는 다음에 열거하는 다섯가지 유형이 있다. 1) 朱蒙이 夫餘에서 나와 高句麗로 갈때 그를 따라간 사람들. 2) BC 22년, 高句麗의 大武神王이 夫餘를 공격하여 그 王인 帶素를 죽였을때, 高句麗에 항복한 帶素의 아우와 1만여명. 3) 帶素의 다른 아우가 자립하여 王이 되어 葛思水 자락에 도읍하였는데, AD 68년에 또한 高句麗에 항복하였다. 4) AD 410년, 高句麗의 好太王이 夫餘를 정벌하고 또한 夫餘사람을 高句麗에 끌고갔다. 5) 勿吉이 夫餘를 공격하자 夫餘王이 처자 등을 데리고 高句麗에 항복하였다. “이상을 모두 헤아리면, 高句麗에 잇달아서 들어간 夫餘사람은 수만인 혹은 그 이상이다 (孫進己).”
<3> 夫餘國이 망한뒤에 일부 족민이 북녁으로 옮겨가 豆莫婁國에 보태졌다.
< 4> 靺鞨族속에 녹아들어갔다. 靺鞨중의 일부와 함께 공동으로 粟末靺鞨을 꾸렸다.
夫餘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족명(族名)을 姓으로 삼았다. 나라가 기울어 질 무렵, 어떤 夫餘사람들은 [중국]북방 정치무대에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였다. [前秦과 東晉간의] 비수(淝水)의 싸움 후에 慕容垂가 병사를 일으켜 “<垂>以<洛陽>四面受敵, 欲取<鄴>而據之, 乃引兵而東. 故扶餘王<餘蔚>爲滎陽太守, 及<昌黎><鮮卑><衛駒>各帥其衆降<垂>.” 하였으며, [慕容]垂은 燕王을 일컫고 나서 “<餘蔚>爲征東將軍, 統府左司馬, 封扶餘王” 하였다 (《資治通鑑•晉紀》). 같은 시기, 慕容農이 사람을 모아 병사를 일으킬때 호응한 자중에 “東夷<餘和>”가 있었다 (《위의 책》). 太元 10년 (385), 燕의 建節將軍인 餘巖가 반란을 일으켜 薊城을 공략하고 “掠千餘戶而去, 遂據<令支>.” 하였다 (《위의 책》). 이 餘巖은 “徐巖”이라고도 하는데 (《晉書•慕容垂載紀》등), “餘和, 餘巖 모두 夫餘의 유족(遺族)이다 (陣連慶 1994)”. 이밖에 《氏族略》引《前燕錄》에 餘元이 있고;《姓氏急就篇》引《姓苑》에 晉에 餘和가 있다고 적혀있으며; 《十六國春秋•後燕錄》에 光祿大夫 餘崇과 散騎常侍 餘超가 적혀있다.; 또《十六國春秋•南燕錄》에 壽光 餘熾, 尙平原公主가 적혀있다. 무릇, 餘元, 餘和, 餘崇, 餘超, 餘熾 등은 모두 夫餘사람이다. 이는 餘씨가 당시에 이미 중국 북방의 저명한 姓의 하나가 되었음을 드러낸것이다.
제 10 절 高句麗의 발전과 변화
1. 高句麗族이란 족칭이 품은 뜻
高句麗族은 중국의 고대 동북지구의 중요한 민족 및 민족정권인데, 역사가 길고 문화발전과 국력이 강성한것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그들의 족칭은 흔히 쓰이는 “高句麗”, “高麗” 외에도 “高句驪”, “句驪”, “高驪” 등으로도 쓰였다. 이것들이 머금은 뜻에 대한 외국 연구자의 이해는 대부분 일치하지 않는다. 모두 헤아려 10여종의 풀이가 있다.
사실상, 중국 고대민족의 족칭의 뜻풀이는 결코 사적에 적힌 문자의 틀에 박혀 확정되지는 않는다. 일찍이 옛 사람들이 지적한바있다.: “夷狄之名, 古書不必皆同. (《史記•五帝本紀》索引).” 현대 학자 또한 지적하여 말하였다.: “사가(史家)가 華夏族 주위에 있는 기타 각 민족의 명칭을 기록할때, 때때로 성음(聲音)이 서로 같거나 비슷한 문자를 써서 표기하였지 그 민족의 실제 뜻(意義)를 추구하지는 않았다. (奚柳芳 1982).” 高句麗란 족칭이 머금은 뜻은 아래와 같아야 할것이다.
高句麗라는 말중에 있는 “高句”는 중음연면사(重音連綿詞)이다. “高”는 “句”와 같고, “句” 또한 “高”와 같다. 두 글자 모두 같은 말을 적은 것이며 또한 한 글자만 적어도 말뜻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않는다. 高句麗가 흔히 “高麗” 혹은 “句麗”라고 쓰인것이 이것을 확증한다.
高句麗의 “麗”는 “萊”의 전음(轉音)이다. “萊”의 音은 先秦때는 정확히 오늘날의 “麗”의 音처럼 읽었다. 고대의 “麗”는, [字母(聲母)는] 來母에 속하고 [韻母는] 歌部에 딸렸으며, 또한 “支” 音도 있어서 漢人은 “麗”을 支部로 읽었다. 따라서 “麗”는 “萊”에서 유래한것이며 그 전음이 된다.
이로써 高句麗란 명칭은 “高萊”의 전음이 되며, 앞에서 이미 논술했던 肅愼, 古朝鮮, 明夷, 高夷 등등의 명칭도 마찬가지로 모두 상고시대 漢語言文化에 속한다. 이 족칭은 명확하게 高句麗 민족의 특징을 개괄한다. 즉, 그들은 東夷族 계열중 高夷와 萊夷에 의해 공동으로 조성되었다.
중국의 고대에는, 현재의 山東•江浙지구를 중심으로 북녁으로는 동북•조선반도, 남녁으로는 兩廣•雲南, 越南 등의 지역에 걸쳐 “高”, “句”, “姑”, “個”, “過”, “歌”, “蓋”, “介”, “且”, “居” 등, 音이 같거나 비슷한 글자가 지명 혹은 족명으로 쓰였다. 게다가 상당한 수의 명칭이 지금까지 이어져 쓰이고 있다. 지금 열거하면 얼추 다음과 같다.: 漢이 高句麗縣을 설치했었고, 또한 高句麗族이 있다.; 高句麗國에 句荼部가 있었다.; 遼河의 옛이름은 句麗河이며, 圖門江은 또한 高麗江이라고도 불렸다.; 西遼河의 지류에 敎來河가 있고, 조선반도 북부고원의 옛이름은 蓋馬고원이다. 역대왕조가 잇달아 蓋馬, 蓋牟, 蓋州 등 요녕 여러지역에 각급 행정 치소를 두었다.; 지금의 沈陽•鐵嶺지구에 漢이 高顯, 居就 등의 현을 설치하고 요동군에 집어넣었다. 또 요서군에 慮縣이 있었는데 高顯에 현치소를 두었다. 등등. 이러한 예들은 모두 그 속에 “高”, “句”, “敎”, “蓋”, “且”, “居” 등의 여러 글자가 있는데, 실제로는 한 音이 다르게 전사(轉寫)된 글자들이다.
秦•漢 및 그 이전에, 齊魯 및 江浙지구에는 高平, 高苑, 高魚, 高密, 高郵, 高凉, 句章, 句容, 句餘, 句無, 句注, 句盧, 句澨, 句繹, 句瀆, 姑宋, 姑蔑, 姑態夷, 姑蘇, 姑幕, 姑復, 介根 등등이 있다. 廣西에는 個漾, 個榜, 個陋, 個宕이, 雲南에는 個舊, 個馬가, 越南에는 個奔, 個多, 個內, 個下, 個螺, 個那, 個蔗 등등이 있다. 종합해서 말하면 “이들 지명에는 비슷한 곳이 있다. 첫째, ‘앞글자’는 비록 표기는 달리되어있지만, 옛소리(古音)을 따르면 서로 일치하거나 가깝다 둘째, 모두 齊頭式에 속한다 (周振鶴, 游汝傑 1986).”
이와같은 지명의 출현은 응당 연원이 동일한 민족이라는것과 같다. 더욱이 대조하여 비교하면 상술한 지명은 齊魯 및 江浙지구에서 가장 빨리 나타났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면, 句繹은 춘추시대 邾婁族이 다스리던 지역; 句瀆은 춘추시대 宋國의 땅; 高魚는 춘추시대 魯의 땅; 介根은 介族이 살던 땅; 지금의 無錫 및 蘇州•常熱 일대인 句吳에서 나라를 세우고 이 근방에서 민족을 형성하여 살았다. “齊魯 및 江浙지구는 본디 東夷族 계열의 기원지이며 대본영이다. 특히 齊魯지구가 그러한데 “산동 전부가 통채로 夷의 구역이다 (王獻唐).” 이상의 분석에서, 이런 류의 이름을 족명 및 지명으로 사용한 민족은 중국의 古민족이고, 그들은 중국 동부 산동지구에서 기원하며 東夷族 계열에 속함을 알 수 있다
2. 高句麗와 夫餘의 관계 고찰
《魏書•高句麗列傳》,《北史•高句麗傳》,《隋書•東夷傳•高句麗》,《太平寰宇記•東夷•高句麗國》,《三國遺史•古記》등에 高句麗는 夫餘에서 나왔다고 적혀있다.《魏書•高句麗列傳》에는 “高句麗者, 出於夫餘.”라고 적혀있다.《北史•高句麗傳》는 “高句麗, 其先出夫餘.”라고 하였다. 이런 기재는 많은 외국 연구자에게 영향을 끼쳐 그들로 하여금 高句麗와 夫餘은 동족관계라고 여기게끔 하였다.
우리들은 이미 夫餘族은 東夷의 番와 餘(余) 두 민족에 의하여 조성되었으며, 高句麗族은 東夷의 高夷와 萊夷에 의해 조성되었음을 알았다. 따라서 두 민족은 동족관계가 아님이 또박또박하고 쉽게 보인다. 그러면 왜 사서에는 高句麗의 출자가 夫餘라고 적혀있는가?
1) 高句麗란 나라를 처음 세운 朱蒙의 출자는 夫餘가 확실하다. 《魏書•高句麗列傳》: “<朱蒙>至<紇升骨城>, 遂居焉, 號曰<高句麗>, 因以爲氏焉.” 기타 사적에도 이런 식으로 적혀있다. 따라서 이 기사는 사실이 아니라고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왕족의 출자가 夫餘이니 모든 민족의 출자도 夫餘라고 [뭇 사서는] 말한것이다. 완전히 편향된 개념에 의한 이런 류의 기재는 고대 사적(史籍)에 드물지 않게 보인다.
2) 高句麗族중의 高夷 (介族이라고도 칭함)는 夫餘族중의 餘(余)族 (徐族이라고도 칭함)과는 본디 하나의 민족이다. “余族과 高夷는 혈연관계가 서로 같으며, 본디 하나의 민족에서 분화되었다. 그러나 성립구성의 방식과 꼴은 같지 않기때문에 두개의 비슷한 족칭을 써 [구별]하였다. 余族과 高夷가 동북으로 옮겨간뒤에, 余族은 番族과 융합되고 [高句麗國에] 앞서 夫餘정권을 세웠다. 高夷는 萊族과 결합되고 나중에 高句麗國을 세웠다. 따라서 사가(史家)는 高句麗의 출자는 夫餘라고 말한것이다. 실제로 高句麗중의 오로지 高夷만이 정말로 夫餘族과 일정한 혈연관계가 있다. 高句麗의 제1대왕인 朱蒙이 夫餘로부터 남녁으로 달아나 高句麗왕국을 세우고나서 “高”를 씨(氏)로 삼았다는 역사기록이, 朱蒙은 夫餘族중의 余族의 후예임을 증명한다. 이것이야말로 응당 사가가 高句麗의 출자를 夫餘라고 말하게 된 가장 주요한 원인이다.
이외에,《後漢書•東夷傳•高句麗》: “<東夷>相傳以爲<夫餘>別種.”,《三國志•魏書•東夷傳•高句麗》: “<東夷>舊語以爲<夫餘>別種.” 에 나오는 “別種”이란 말이 근거가 된다. “別種”이란 同源異支란 말일것이다 (李德山 1992). 高句麗族과 夫餘族은 모두 뿌리는 東夷에서 나왔으며, 同源異支의 관계이니 당연히 高句麗를 夫餘의 “別種”라고 부를만하다. 이 기사는 거시적인 관계를 두고 한말이다.
종합하면, 사적에 적혀있는 高句麗와 夫餘의 종족 관계는 대체로 이상과 같이 풀이할 수 있겠다.
어떤 사적중에는 무릇 高句麗를 적을 때 곧잘 “貊”으로 연칭(連稱)되고 있음을 지적해 두어야하겠다. 예를들어 《漢書•王莽傳》에 “<莽>發<高句驪>兵, 當伐<胡>, 不欲行, 郡强迫之, 皆亡出塞, 因犯法爲寇. <嚴尤>奏言: ‘<貉>人犯法,不從<騶>起’.” 라고 적혀있다. 여기서 嚴尤가 말한 “貉人”은 高句麗族을 가르키고 있음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밖에 《後漢書•東夷傳•高句麗》에 “句麗, 一名貊.” 라고 했다. 이때문에 많은 연구자가 高句麗와 貊을 동족이라고 믿고 있으며 아울러 高句麗族은 응당 貊族에서 나왔다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성립 불가능한 관점이니 거두어야한다.
“貊”이 족칭으로 쓰일때는, 특별한 민족을 가리키는 것과 통칭(通稱)으로 쓰이는 것으로 나누어진다. 통칭으로 쓰일때는 그 뜻이 “夷”와 같다. 東夷族 계열에는 많은 지족(支族)이 있는데 모두 가르켜 “貊”이라고 부를 수 있다. 예를 들어 “夷貊”. “蠻貊”, “穢貉” 등등이 있다. 高句麗란 이름이 “貉”으로 연칭되는 경우가 많은 까닭은 다음과 같다. “高句麗가 貉으로 연칭되는 경우가 많은 까닭은 그들이 애초에 산동의 夷貉 구역에서 살았기때문이다. 나중에 동북으로 옮겨가 살았지만 貉이란 이름은 그대로 사용되었으며 그 효력은 없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貉이란 이름으로 통하게 되었고, 貉은 오로지 高句麗를 가리키는 호칭이 되었다. (李德山 1992)”. “貉”이 통칭으로 활용된것은 西•東漢 시기에 특히 심하였다. 두 漢이후에야 사적안에 高句麗가 “貊”라고 호칭되는것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더군다나, 대대로 전해진 것을 高句麗族이 스스로 찬사(撰寫)한 문헌(《好太王碑》및《冉牟塚題銘》등 )안에는 스스로를 “貊”이라고 한다든지, 스스로 출자가 穢 혹은 貊族이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류의 기재는 高句麗族의 뿌리를 貊으로 여기지 않았거니와 그것을 뒷받침할 수도 없다. 도리어 高句麗族의 뿌리가 東夷族 계열임을 더욱 뒷받침한다.
3. 5部의 구성
朱蒙이 高句麗國을 세우기전, 문헌기재에 근거하면 高句麗族은 5부(五部)로 이루어져 있었다.
《三國志•魏書•東夷傳•高句麗》: “本有五族, 有涓奴部, 絶奴部, 順奴部, 灌奴部, 桂婁部.”
《後漢書•東夷傳•高句驪》: “凡有五族, 有消奴部, 絶奴部, 順奴部, 灌奴部, 桂婁部.”
《三國志》•《後漢書》보다, 먼저 쓰여진《魏略》에는 “順奴部”를 “須奴部”로 쓰고있고 뒤늦게 쓰여진《梁書•東夷傳•高驪》에는 “順奴部”를 “愼奴部”로 쓰고있다. “順”, “須”, “愼(慎)”의 고대 소리값이 비슷하고 글꼴도 비슷하여 서로 통용될 수 있다. “涓奴部”는《後漢書》의 “消奴部”를 제외한 나머지 사서에는 모두《三國志》와 똑같이 쓰여있다. “涓”, “消”의 글꼴이 비슷하니 “消”는 마땅히 “涓”자를 잘못 적은것이다.
5부의 유래(由來)을 캐낸다함은 사실상 高句麗族의 유래를 캐내는 것이다. 이에 대해, 외국학자는 몇몇 유익한 저술을 남겼으며 이와 인식을 같이하는 연구를 하였다. 일본의 이마니시 류(今西龍)와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의 이 방면에 대한 논저는 널리 알려져있다. 중국학자 손진기(孫進己) 및 애생무(艾生武)도 다음과 같이 고증하였다: 桂婁部는 남녁으로 내려온 夫餘人과 토착세력이 결합하여 성립되었다. 涓奴部는 沸流部가 바뀐것이다. 絶奴部는 椽那部라고도 불리는데 北夫餘人을 안치한것에서 유래한다. 灌那部 또한 貫那部라고도 불리는데 蓋馬•句荼를 개편해서 성립되었다. 順奴部는 荇人을 개편해서 성립되었다 (孫進己, 艾生武 1982).
“涓”, “灌”, “桂”의 고대 자모(字母)을 보건대 응당 “介” 혹은 “高”의 전음(轉音)이다. 그리고 “奴”의 고음(古音) 또한 “萊”와 통한다. 그러므로 涓奴部 및 灌奴部의 실체는 高夷와 萊夷으로 조성된 부락이다. 다만 거주지가 달랐기 때문에 “涓奴”, “灌奴”로 [구분해서] 불렀다. 桂婁의 “婁”는 邾婁族을 짧게 줄여 부른 말이다. 따라서 桂婁部는 高夷와 邾婁族 일부에 의하여 조성되었다. 順奴部의 “順”은 肅愼族을 짧게 줄여 부른 말이다. 따라서 順奴部는 肅愼의 일부와 萊夷의 일부로 조성된것에서 유래한다. 絶奴部의 “絶”의 자모는 月部에 속하므로 絶奴部는 틀림없이 椽那部이다. 絶奴部는 대대로 王과 혼인을 맺는 高句麗國의 후족(后族)으로 기타 4부보다 지위가 높았다. 《三國史記》에 실린 다음 기사를 비추어보아 絶奴部는 주로 夫餘人과 萊族으로 조성되었다. 高句麗 大武神王 5년 (AD 22년), “<扶餘>王從弟, ……與萬餘人來投. 王封爲王, 安置<椽那部>, 以其背有絡文, 賜姓<絡>氏.”.
高句麗의 5부중의 2부가 高夷와 萊夷으로 조성되었다. 또한 1부는 高夷와 邾婁族, 1부는 肅愼族과 萊族, 1부는 夫餘族과 萊族에 의해 각각 조성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高句麗族은 高夷와 萊夷의 합성이라는 결론을 더욱 뒷받침한다. 이밖에도 高句麗族을 일으킨 민족내에는 상당한 수의 邾婁人, 肅愼人 그리고 夫餘人도 있었음을 뒷받침한다.
4. 왕국의 수립
秦•漢때, 高句麗는 이미 하나의 민족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자기 민족정권을 세우지 못하였다. “高句麗族은 漢 武帝가 朝鮮을 멸망시키기 전부터 이미 존재하였으나 나라가 세워지지는 않았다. 그들은 단지 衛滿朝鮮 경내의 일개 부족일뿐이었다 (楊保隆 1987).”
《漢書•地理志》에 따르면 玄菟郡은 아래로 3현을 관할하였는데 그 치소가 高句麗縣이었다. 또《後漢書•東夷傳•高句驪》에는 “<武帝>滅<朝鮮>, 以<高句驪>爲縣, 使屬<玄菟>.”라고 적혀있다. 이 “高句麗縣”은 高句麗族이 그곳에 살고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漢書•地理志》[高句麗縣에 대한] 注에 “<遼山>, <遼水>所出, 西南至<遼隊>, 入<大遼水>. 又有<南蘇水>, 西北經塞外.”라고 하였다. “遼水는 大遼水로 들어간다고 하였는데, 이 遼水는 마땅히 小遼水가 되며 지금의 渾河이다. 高句麗縣은 지금의 渾河 발원지의 분수령에 있어야한다. 즉 이곳이 注가 지칭한 遼山 부근이다. 또한 南蘇水가 있는데 서북쪽으로 흐르고 새외(塞外)를 거쳐간다고 하였다. 이 南蘇水는 지금의 蘇子河이어야 한다. 즉, 高句麗縣은 당연히 지금의 渾河와 蘇子河 사이에 있었다 (孫進己, 馮永謙).”. 최근에 요녕성 新賓縣 永陵鎭 서남의 蘇子河 남쪽 물가에서 두개의 漢代 고성(古城)이 발견되었다. 학자들은 그 중 하나를 玄菟郡 치소인 高句麗縣이라고 생각한다. 초기의 高句麗族은 이 구역내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이 지역에 있던 기타 민족에 비교하여 高句麗族의 역량은 대체로 약소하였다. 이 당시 이미 국가가 세워졌다는 [정겸(丁謙)의] 주장과 같지는 않다.
대략 西漢 중반 초엽 무렵부터 高句麗族은 이 지역으로부터 동쪽으로 이동하여 점차 지금의 渾江 유역의 환인현(桓仁縣) 경내에 정착하였다. 西漢 후기, 朱蒙은 夫餘궁정에서의 정치싸움에 실패하여 떠밀려 고토(故土)을 뜨게 되었다.
“<朱蒙>乃與<烏引>•<烏違>等二人, 棄<夫餘>, 東南走. 中道遇一大水, 欲濟無梁, <夫餘>人追之甚急. <朱蒙>告水曰:「我是日子, <河伯>外孫, 今日逃走, 追兵垂及, 如何得濟?」於是魚鼈竝浮, 爲之成橋, <朱蒙>得渡, 魚鼈乃解, 追騎不得渡. <朱蒙>遂至<普述水>, 遇見三人, 其一人著麻衣, 一人著納衣, 一人著水藻衣, 與<朱蒙>至<紇升骨城>, 遂居焉, 號曰<高句麗>, 因以爲氏焉.” (《魏書•高句麗列傳》)
일설에는 朱蒙이 卒本川(지금의 환인현 五女山城)에 이르러 “觀其土壤肥美, 山河險固, 遂欲都焉. 而未遑作宮室, 但結廬於<沸流水>(지금의 渾江)上居之, 國號<高句麗>, 因以<高>爲氏.” 라고 한다 (《三國史記》).
朱蒙은 남녁으로 달아나 卒本川에 다다른 뒤, 그 땅에 있던 高句麗族을 다스려 高句麗國을 세웠다. “夫餘族은 西漢 시대에 이미 국가조직 발전 단계에 있었기때문에, 따라서 夫餘族의 귀족인 朱蒙 등이 그 곳에 다다른 뒤에 당연히 일개 원시적인 평민백성으로 있으려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烏引 등과 획책하여 일어나 王을 일컬었다. 그 땅의 동종(同種) 원주민의 지지를 얻게되어 원래의 부족이름인 “高句麗”를 그대로 좇아 나라이름을 지었다. 응당 이것이 朱蒙이 高句麗를 나라이름으로 쓴 유래이다 (楊保隆 1987).”
만약 卒本川의 “원주민”이 高句麗族이 아니라면, 朱蒙이 高句麗를 나라이름으로 삼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이는 마치 太伯과 仲雍이 吳로 달아났을때, 吳族의 땅에 들어간뒤 그들이 “自號<句吳>, <荊蠻>義之, 從而歸之千餘家 (《史記•吳太伯世家》)”라고 한 예와 같다. 만약 그렇게 하지않았다면 太伯과 仲雍 등은 그 땅의 “원주민”의 지지를 얻지못하였을 것이다. 朱蒙과 그 땅에 있던 “원주민”인 高句麗의 관계도 이러한 예와 유사하다. 때문에 朱蒙이 高句麗를 일컫자 同種인 高句麗族은 “義之”하고 “歸之”하였다.
이런 식으로 高句麗는 중국 동북지구의 일개 古민족이 되었으며 朱蒙의 영도아래 중국 고대 동북지구의 지방민족 정권인 高句麗왕국을 세웠다. 시기는 漢 元帝 建昭 2년, 즉 BC 37년이 된다.
“紇升骨城”이라고 일컬어지는 高句麗의 초기 왕성은 바로 지금의 요녕성 환인현 경내에 있는 오녀산성(五女山城)이다. 이곳이 高句麗의 첫번째 왕성이다. 朱蒙이 죽자 그 아들인 瑠璃王이 즉위하고, 漢 平帝 元始 3년 (AD 3년)에 國內城(지금의 길림성 集安市古城)으로 서울을 옮기는 한편 尉那岩城(丸都城)을 쌓아 國內城의 위성(衛城)으로 삼았다. 이것이 그 두번째 왕성이다. 漢 獻帝 建安 14년 (209년), 高句麗 山上王때 재차 서울을 丸都城(지금의 길림성 集安市城 북녁 5리에 있는 山城子)으로 옮겼다. 이곳이 세번째 왕성이다. 내리 東晉말까지 줄곧 丸都城이 서울이었다.
5. 건국초기의 주변부족 병합
高句麗왕국은 건국 초기에 그 주변의 각 민족 혹은 부족에 대한 대규로 병합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첫번째로 그들에게 병합된 것은 沸流部였다. 沸流部의 “沸”는 고대에는 [성모(聲母)를] 중순성(重脣聲)으로 읽었는데 “番”와 쌍성(雙聲)이다[=성모(聲母)가 같다]. 그리고 고대의 “流”는 “萊”가 된다. 따라서 沸流는 番萊가 되고, 番族과 萊族가 합쳐 이루어진 부족에서 유래한다. 이 부족은 병합된뒤에 5부 중의 涓奴部속으로 안치되었다.
沃沮와 北沃沮. 이들은 1개 민족의 두 부족인데 사는 곳이 다르기 때문에, 따라서 이러한 이름으로 [구분하여] 불렀다. 이 두 부족은 정복된 뒤에 어떤 고구려 5부에도 편입되지 않았다. 족민(族民)은 [따로] 끼리끼리 모여 살았으며 어느 정도 독립성이 있었다.
朱那部. “朱”는 바로 邾婁이고, “那”는 “萊”가 전음되어 나온것이다. 따라서 朱那部는 邾婁族과 萊族이 합쳐 이룬 부족에서 유래한다. 이 부족은 정복된 뒤에 灌奴部 혹은 桂婁部속에 안치되었을 것이다.
葛思部. 《三國史記•高句麗本紀》에 근거하면 葛思部의 출자는 北夫餘이다. 남녂으로 옮겨 내려온 夫餘人으로 조성된것에서 유래한다. 이들은 정복된 후 당연히 매우 빨리 高句麗 민족속으로 녹아들어갔다.
梁貊族. 정복당한 뒤, 西晉 이후에 高句麗族과 융합되었다.
蓋馬族. 蓋馬族의 역사는 매우 이른 시기에 시작한다. 적어도 漢 武帝가 玄菟郡을 설치할 때는, 그 족명에서 蓋馬縣이 설치되었는데 高句麗縣 및 上殷臺縣과 합쳐 부르기를 “玄菟3縣”이라고 하였다. 蓋馬族의 발전역사는 高句麗族과 상당히 비슷하지 싶다. “蓋”는 “高”이고, “馬”는 “牟”와 쌍성(雙聲)이니 “牟”의 전음 계통이다. “牟”는 東夷의 牟族인데, 원래 산동에 살았으며 후에 일부가 동북으로 들어왔다. 따라서 蓋馬는 高牟이며 高夷와 牟族이 합쳐 이루어진 계통이다. 정복당한 뒤, 5부중의 灌奴部속에 안치되었다
句荼部. 句荼部의 역사 또한 매우 오래되었다.《三國史記•高句麗本紀》에 근거하면 句荼部는 蓋馬族이 정복되자 부족을 들어 항복하였다. “句”는 “高”이고, “荼”는《路史•國名紀》에 “荼, [屠+阝]也” 라고 하였다. 古[屠+阝]族은 바로 邾族인데, 邾族은 邾婁族의 속칭이다. 따라서 句荼部는 高夷와 邾婁族이 합쳐 이루어졌다. 항복한 후 灌奴部속에 안치되었다.
荇人部. 荇人部는 정복당한 뒤 順奴部 속에 안치되었을 것이다.
藻那部. 藻那의 “藻”은 “邾”의 전음 계통에 해당하며, 그리고 “那”는 “奴”이니 “萊”가 된다. 藻那部는 邾婁族과 萊夷族이 합쳐 이루어진 것이다. 이 부족은 정복당한 뒤 어떻게 안치되었는지 분명하지 않은데 혹 高句麗族속으로 매우 빠르게 녹아들어가지 않았을까 한다.
이밖에도 眞番 및 그 땅에 살던 漢族, 또한 肅愼, 夫餘 등의 민족도 高句麗 왕국에 정복당하였다. 건국 후의 高句麗는 그 민족구성이 몹시 복잡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고찰을 통하여, 당시 高句麗의 주변지역에는 이와 같이 많은 東夷 부족이 살고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아울러 극소수의 일족만이 홀로 외롭게 있었으며, 대부분은 둘 또는 그 이상의 종족끼리 서로 합성된 것도 알 수 있다. 이들 중 몇몇 일족은 高句麗 왕국에 정복되거나 점령된 민족 혹은 부족이다. 사실상 절대 대부분이 서로 족원(族源)이 같으며, 종합해 볼때 일종의 몹시 밀접한 친연관계가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모조리 중국 고대 東夷族 계통이다.’
끊임없는 약탈과 병합을 거쳐, [중국] 삼국시대에는 高句麗國의 호수(戶數)가 이미 3만에 달했다 (《三國志》). 1개 호를 5인으로 셈한다면 그 총인구는 이미 15만을 넘어섰다.
6. 高句麗 경제의 발전
高句麗 민족은 농업을 근본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민족이다. 건국 초기에는 그 사는 땅이 “多大山深谷, 人隨而爲居. 少田業, 力作不足以自資, 故其俗節於飮食, 而好修宮室.” (《後漢書•東夷傳•高句麗》) 했다. 당시에는 수수(高梁), 조(粟), 미(米), 콩(大豆) 등의 밭작물만 지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이 때문에 이런 몇몇 밭작물의 생산량은 적었고, 따라서 “아무리 애써 농사를 지어도 먹을거리를 채우기에는 넉넉하지 못하여(雖力佃作, 不足以實口腹)”, 양성한 먹을거리를 아껴야했는데, 이것이 양식을 절약하는 풍속으로 되었다. 뒷날, 그들이 낙랑(樂浪) 및 요동군(遼東郡)을 점령한 뒤에는 상황이 크게 변모하여 농업생산과 수공업 제작이 점차 번영하게 되었다.
대량의 漢人이 高句麗에 유입되었기 때문에 중원의 생산기술 또한 그들을 따라서 같이 들어왔다. 특히 요동 및 낙랑 봉건지구는 高句麗 경제생활을 발돋음케 하여 高句麗의 농업 생산기술의 수준을 중원 내지(內地)에 꽤 근접하게끔 하였다. 이미 발견되어 있는 高句麗 유적에서 철쟁기(鐵犁), 철낫(鐵鎌) 등의 농기구가 상당한 수량으로 골고루 출토되어있다. 철농기구가 사용되었는데, 철제(鐵制) 보습, 쟁기의 보급으로 곡(穀), 보리(麥), 조(粟), 벼(稻) 등의 작물이 재배되어 高句麗의 농업을 매우 크게 발전시켰다.
농업생산외에도, 억척스럽게 일했던 高句麗 사람들은 또한 어업, 수렵, 목축업 등도 병행하여 농업생산을 보충하였다. 高句麗 중•전기의 高句麗 벽화에는 수렵을 소재로 것을 쉽게 볼 수 있는데, 그것에 그려진 사냥 대상물은 사슴, 노루, 호랑이, 멧돼지, 산토끼 등등이 있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高句麗는 여러차례 중앙왕조에 “土毛”를 바쳤는데, 이것은 아마도 어떤 야생동물의 모피(毛皮)일 것이다. 高句麗 유적에서 많은 도제(陶制) 어망추와 석제(石制) 어망추가 나왔다. 몇몇 돌무지무덤(積石墓)에서 또한 상당한 수량의 철제 낚시바늘이 발견되어 高句麗의 그물잡이 또한 발달하였음을 말해준다. 高句麗의 목축업은 매우 유명하다. 특히, 산을 쉽게 오른다는 과하마(果下馬)는 과일나무 아래를 말을 탄채 지나갈 수 있는 일종의 작은 말인데, 역대 중앙왕조에 바치는 진귀한 물품이었다.
수공업은 온갖 종류가 다 갖추어졌다. 품종이 매우 많고 공예 수준이 몹시 높았다. 현재 출토된 농기구로는 쟁기, 보습, 낫, 삽, 가래, 써레 따위가; 생활용구로는 쇠냄비(鐵鍋), 화로(火盆), 손칼(小刀), 쇠거울(鐵鏡), 쇠못(鐵釘) 따위가; 목공용 도구로는 자귀(錛), 끌, 톱, 도끼 따위가; 어로 및 수렵용 도구로는 낚시바늘(魚鉤), 쇠화살촉(鐵鏃) 따위가; 전쟁용 도구로는 칼(刀), 창(槍), 투겁창(矛), 개갑(鎧甲), 투구, 말안장 따위가 있다. 철제품은 이미 사회 생활속에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금•은•동 기구와 장식용구는 정교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졌는데, 그 고분에서 출토한 봉황형 장식을 얹은 금관은 高句麗 금은제품의 조예 깊은 예술수준이 구체적으로 드러난것이다. 일상생활중에서는 동기(銅器)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는데, 동완(銅碗), 동분(銅盆), 동합(銅盒), 동경(銅鏡) 및 각종 동제(銅制) 장식 등을 들 수 있다. 문헌기재와 완전히 들어맞는다.
방직 및 제혁업도 高句麗 수공업 생산의 주요 부문이다. 일반적인 베짜기 및 가죽다루기 뿐 아니라 화려하고 귀중한 능라주단(綾羅綢緞) 및 채색 피혁도 생산할 수 있었다. 당시 高句麗는, 모두 모이는 성대한 명절에는 일반 백성은 “모두 수놓은 비단옷을 입고(服皆錦繡)”, 아울러 거기에 “금은으로 스스로를 꾸몄다(金銀以自飾)”. 그리고 노예주인 상류계급은 “자색 비단으로 만든 쓰개를 쓰는데 금은으로 꾸몄다. 소매가 큰 저고리, 가랑이가 넓은 바지, 흰 가죽띠, 노란 가죽신을 입었다(冠用紫羅, 飾以金銀. 服大袖衫, 大口袴, 素皮帶, 黃革屨).”
도자(陶瓷)와 벽돌(塼)•기와(瓦)는 이미 중원 내지의 가마굽기(燒制)기술이 흡수되어 있었다. 질그릇(陶器)에는 돌림판 이용하기(輪制) 기술이 채용되어 모든 종류가 구비되었는데, 무릇 독(瓮), 항아리(缸), 기단(壇), 동이(盆), 완(碗), 쟁반(碟), 병(甁), 호(壺), 냄비(鍋), 시루(甑) 따위를 모두 갖추고 있다. 각종 암키와, 와당(瓦當), 수키와가 고구려 유적에서 골고루 출토되었다. 와당에 꾸며진 문양은 연꽃무늬(蓮花紋)가 많은데, 연꽃잎은 많은 것은 10여개에 달하고 적은 것은 4, 5개이다. 어떤 와당에는 명문(銘文)이 있는데, 연꽃무늬 둘레에 제작한 년월, 장인의 성명 등이 새겨져 있다. 또한 낱자로 길상어(吉祥語)가 새겨져있는데 모두 한자(漢字)가 사용되었다. 또한 인동초무늬(忍冬紋), 寬面紋, 동물무늬(獸面紋) 와당이 있다. 와당에 장식된 문양의 조형 및 풍격은 중원의 같은 종류의 제품을 모방하여 생산한 것임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7. 풍부하고 다채로운 풍습
高句麗는 역사가 몹시 오랜 민족이다. 문헌기재와 고고학적 발굴자료를 비추어보아 高句麗 민족의 풍습은 매우 다양하다.
남자의 머리 모양. 고고학적 자료를 근거로, 高句麗 남자의 머리 모양은 대체로 두 종류로 나눌 수 있겠다. 한 종류는 정수리에 커다란 홑상투(單髮式)를 하나 트는 것이다. 이 유형이 비교적 보편적이며, 상투는 높은 것과 낮은 것으로 나누어진다. 홑상투는 비교적 낮은 것이 일반적인데, 이런 유형은 안악2호분, 약수리 무덤벽화의 문지기, 씨름무덤(각저총)의 씨름꾼(力士), 집안의 5회묘의 4호•5호무덤의 천정벽화와 신선 등의 그림에서 볼 수 있다. 홑상투가 높은 유형은 집안현 5회묘의 4호•5호무덤의 벽화 인물중에서 볼 수 있다.
다른 한 종류는 곁상투(雙髮式)이다. 집안의 5회묘의 5호무덤의 문지기, 씨름꾼 그림에서 보인다. 그밖에 통구 17호묘중의 위사(衛士) 및 약수리의 시자(侍者) 모습의 그림에 나타난 머리모양도 응당 겹상투이다.
홑상투는 물론 곁상투에도 머리털을 묶어 모양을 만드는 법이 있다. 머리털을 정수리에 묶어 만두같은 모양을 만든다. 정수리와 상투 사이에 머리털을 포(布) 혹은 면(棉) 등의 방직물로 묶고는, 감아묶인 곳에서 삐져나온 머리털을 묶지 않은 부분 위로 올라가게 높이 치켜세운다. 이런 류의 머리모양은 이전에 東夷族 계통 민족 사이에 광범위하게 유행하였다. 사료에서 말하는 “魋結”, “魋頭”, “科頭” 또는 “魋頭髻” 가 그것이다. 漢나라 초, 위만(衛滿)이 “聚黨千餘人, 魋結, 蠻夷服, 而東走出塞” 하며 古朝鮮으로 갈 때의 머리모양이 바로 이와같은 머리형식이다.
高句麗의 귀족은 모두 쓰개(冠)을 썼다. 쓰개의 꼴은 비슷하고, [중국] 내지의 무변대관(武弁大冠)과 닮았다.《舊唐書•高麗》에 따르면, 高句麗 왕실 귀족이 머리에 쓴 쓰개의 꼴은 “唯王五綵, 以白羅爲冠, 白皮小帶, 其冠及帶, 咸以金飾. 官之貴者, 則靑羅爲冠. 次以緋羅, 揷二鳥羽及金銀爲飾." 하다. 그 왕의 쓰개는 백색이고, 대신은 청색이며, 그 아래로는 적색(緋色)과 자색임을 알 수 있다. 쓰개는 비단(羅)으로 만든 것이 많았고, 면(棉)으로 만든 것은 적었다.
高句麗族의 차림새는,
《翰苑》所引 梁 元帝《職貢圖》: “高麗婦人衣白, 而男子衣纈錦, 飾以金銀. 貴者冠幘, 而以侯金銀爲鹿耳, 加之幘之; 賤者冠折風, 穿耳以金環. 上衣白衫, 下白長袴, 腰有銀帶, 左佩礪而右佩五子刀.”
《高麗記》: “其人亦造錦, 紫地纈丈者爲上, 次有五色錦. 又有造白壘布, 靑布而尤佳, 又造障曰, 華言‘接籬’, 其毛卽<靺鞨>猪髮也.”
고고학적 발굴자료에 비추어보아, 高句麗 남자의 가장 기본적인 옷차림은 짧은 저고리(短襦)이고, 그 다음은 바지(褲)이다. 저고리(襦)와 바지(褲) 외에, 신분이 있는 자 혹은 왕실귀족일수록 겉옷도 둘렀는데 바로 두루마기(袍)와 오[襖: 도포의 일종으로 안을 받친 저고리]이다. 그 저고리(襦)는 일반적으로 긴 것과 짧은 것으로 나누어 지는데 왼쪽 여밈이 많다. 여자의 옷차림도 또한 저고리(襦)와 바지(褲)가 주된 것인데, 이외에 각종 치마(裙) 및 겉옷이 있다. 이 겉옷은 주로 적삼(衫)과 두루마기(袍)이다. 또 그 저고리(襦)는 모두 왼쪽 여밈인데, 후기에서만 오른쪽 여밈으로 된 것이 어쩌다가 보인다.
高句麗의 혼인 풍속은,
《後漢書•高句麗》: 其昏(婚)姻皆就婦家, 生子長大, 然後將還.
《三國志•高句麗》: 其俗作婚姻, 言語已定, 女家作小屋於大屋後, 名壻屋. 壻暮至女家戶外, 自名跪拜, 乞得就女宿, 如是者再三, 女父母乃聽使就小屋中宿, 傍頓錢帛, 至生子已長大, 乃將婦歸家.
《隋書•句麗》: 婦人淫奔, 俗多遊女. 有婚嫁者, 取男女相悅, 然卽爲之, 男家送猪酒而已, 無財聘之禮; 或有受財者, 人共恥之.
이러한 기재는 高句麗族의 비교적 자유로운 남녀간의 혼인을 묘사한 것이다. 남녀 쌍방이 각종 형식의 접촉을 거친 후에, [타인의] 의견을 구하지 않고 단지 구두 약속으로만 평생을 함께 할것을 정했다. 그리고 어떠한 예물도 필요하지 않았다. 또한 아울러, 날씨가 따스하고 맑을 때마다, 봄, 여름, 가을을 막론하고, 온 나라 읍락에서는 저물어 밤이 되면 남녀가 무리지어 모여서 떠들썩하게 노래하며 놀아났는데, 신분이 귀하건 천하건 [그 노는 꼴이] 차이가 없었다. 이런 종류의 풍속은 청년 남녀에게 서로를 접근하고 이해하는 조건를 마련해 주었다. 이밖에 高句麗의 혼인은 비록 1부1처제이지만, 충분히 안정되고 견고하지는 아니하였다.
高句麗族은 먹을거리를 아끼고 궁실 손질하기를 좋아하였다. 사료에 말하기를 高句麗는:
《後漢書•高句麗》: “少田業, 力作不足以自資, 故其俗節於飮食, 而好修宮室.”
《三國志•高句麗》: “隨山谷以爲居, 食澗水. 無良田, 雖力佃作, 不足以實口腹, 其俗節食, 好治宮室.”
양식을 절약하고 음식을 아끼는 습속은 좋은 경작지(良田)가 없어서 많은 양식을 생산할 수 없기때문에 생겼다. “好修宮室”은 각종 노예주에 해당하는 것이지, 수많은 노예와 평민에게는 여전히 밥먹는 것이 문제로 궁실 수리를 좋아할 리가 없다. 《舊唐書•高麗》를 살피면 평민과 노예의 주택은 “其所居必依山谷, 皆以茅草葺舍, 唯佛寺•神廟及王宮•官府乃用瓦. 其俗貧窶者多, 冬月皆作長坑, 下燃熅火以取暖.” 하였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여 이 기사는 사실임이 완전히 증명되어 있다.
高句麗 사람들은, 《後漢書•高句麗》: “性凶急, 有氣力, 習戰鬬, 好寇鈔.”
《三國志•高句麗》: “其人性凶急, 喜寇鈔.”
《太平寰宇記•高句麗國》: “其人性凶急, 好戰.” 라고 했다.
“性凶急”이란 강하고 세차다는 말일것이다. “習戰鬬, 好寇鈔” 와 “好戰”는 사실이다. 역대 高句麗 국왕은 모두 확장정책을 신봉하였으며 호전적(窮兵黷武)이었다.
高句麗 사람들은《北史•高句麗》에 “性多詭伏, 言辭鄙穢, 不簡親疏. 父子同川而浴, 共室而寢.” 라고 한다.
“詭伏”이란 간사하여 숨키고 드러내지 않는다는 말이다. “性多詭伏, 言辭鄙穢” 또한 사실보다 과장된 말이다.
高句麗 사람들은, 《後漢書•高句麗》: “皆絜淨自憙, 暮夜輒男女羣聚爲倡樂.”
《三國志•高句麗》: “其民喜歌舞, 國中邑落, 暮夜男女羣聚, 相就歌戲.”
《隋書•高麗》: “樂有五絃•琴•箏•篳篥•橫吹•簫•鼓之屬, 吹蘆以和曲. 每年初, 聚戲於<浿水>之上, 王乘腰輿, 列羽儀以觀之. 事畢, 王以衣服入水, 分左右爲二部, 以水石相濺擲, 諠呼馳逐, 再三而止.” 하였다.
국왕으로부터 아래로 평민 및 노예에 이르기까지 모두 춤추고 노래하기를 즐기고 좋아하였음을 알 수 있다. 《隋書•音樂志》에 근거하여, 高句麗의 가곡(歌曲)에는《芝栖》이 있고, 무곡(舞曲)에는《歌芝栖》가 있다. 그리고, 악기로는 앞의 기사에 나오는 오현(五絃), 금(琴), 쟁(箏) 등을 포함하여 적어도 21종이 넘게 있었다 (《新•舊唐書》). 高句麗의 무곡은 역사에서 말하길 “高麗伎” 또는 “高麗樂” 이라고 한다 (《新•舊唐書》). 隋•唐 시대에 고려무악(高麗舞樂)은 궁중 음악으로 들어가서, 당시에 저명했던 “七部樂”•“九部樂(伎)” 혹은 “十部伎”의 하나가 되었다. 그 풍부하고 깊이있는 무곡은 중원 각 왕조에 의해 높이 받들어졌다. 高句麗의 노래, 춤, 음악 등은 중국 음악역사상에 일정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高句麗 사람들은 “好蹲踞. 食用俎豆.” 라는데, 이것은 모두 東夷系 전체의 풍속이다. ‘好蹲踞’는, 밥 먹을때나 이야기를 나눌때 혹은 모임 등등에서 땅바닦에 ‘무릅앉아’ 자세를 좋아한다는 말이다. 高句麗 사람들은,
《三國志•高句麗》: “跪拜申一腳, 與夫餘異, 行步皆走.”
《北史•高句麗》: “以趨走爲敬. 拜則曳一脚, 立多反拱, 行必插手.” 한다.
출토한 高句麗 벽화에 근거하여 高句麗 사람들의 예의에는 또한 무릅꿇기(跪)와 읍하기(作揖) 등도 있다. “趨走”란 바로 보폭을 작게하고 빨리 걷는 걸음(小碎步)이다. [이러한] “나아가기(前行)”는 응당 여자들이 하는 예의다. [두손 모우기인] ‘拱手’와 ‘插手’는 남녀가 공통으로 쓰는 예의이다. ‘읍하기’과 ‘무릅을 꿇는 큰절(跪拜)’은 남자들이 많이 하는 예의다. 高句麗 사람들은 일상생활중에 비교적 자기의 행동거지를 주의하였는데, 이것도 그들의 선조인 東夷人의 유풍(遺風)이다.
高句麗 사람들의 종교와 신앙은,
《後漢書•高句麗》: 好祠鬼神•社稷•零星. 以十月祭天大會, 名曰「東盟」. 其國東有大穴, 號‘禭神’, 亦以十月迎而祭之.
《北史•高句麗》: 敬鬼神, 多淫祠. 有神廟二所: 一曰‘夫餘神’, 刻木作婦人像; 一曰‘高登神’, 云是其始祖‘夫餘神’之子. 竝置官司, 遣人守護, 蓋<河伯>女•<朱蒙>云. 라고 실려있다.
高句麗 민족의 원시 종교사상은 대단히 깊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일찍부터 조상 숭배 의식이 맹렬하였다고 생각된다. 이외에 高句麗의 통치자는 또한 시종일관 유교를 높이 받들고 제창하였다. 후기에 들어 도교와 불교도 전래되었다. 이 때문에 高句麗 사람들은 줄곧 숭배하였던 자연물(천신(天神)의 우상) 및 숭배하는 시조신 외에도, 유•불•선 3종교 모두 종교신앙에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高句麗의 역법(歷法)과 절령(節令, 절기)은, 사료에서 말하길,
“以十月祭天大會, 名曰「東盟」. 其國東有大穴, 號禭神, 亦以十月迎而祭之.” 라고 하였다.
高句麗의 역법은 秦朝의 것과 서로 같음을 알 수 있는데, 1년을 10개월로 나누는 역법이다. 따라서 高句麗의 ‘以十月祭天大會’는 연말에 행하는 거국적인 경축행사로 묶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것이다. 高句麗는 또한 “常以三月三日會獵樂浪之丘, 獲猪•鹿, 祭天及山川. (《三國史記•雜志•祭祀》)” 하였다. 3월 3일은 마땅히 고구려의 절령의 하나에 해당하며, 봄이 찾아온 것을 경축하는 일과 닮았으며 관련이 있다.
高句麗族의 언어와 문자는, 사료에 기재된 것이 많지 않은데다, 자세하지 않다.
《三國志•高句麗》에 “言語諸事, 多與<夫餘>同.” 라고 하였다. 이 기사를 근거로 高句麗는 몽고어족에 속한다고 하는 학자가 있다. [그러나] 高句麗族은 東夷에 속한다고 생각되므로 그 언어는 응당 東夷語族에 속해야할 것이다. 아울러 상고 漢언어 체계의 일지(一支)가 되어야할 것인데, 이것은 高句麗國이 통용하였던 漢文상에서 또한 진일보한 증명을 할 수 있다. 발견된 高句麗 유적에서는 문자가 흔히 출토되는데 모두 한자(漢字)이다. 잘 알려진 《好太王碑》,《冉牟塚題銘》,《中原郡高句麗碑》등등에서 보듯이 眞, 草, 隸, 篆 각종 서체가 골고루 발견되었다. 기타 명문, 명문 기와와 각종 와당 등등도 또한 이와 같다. 高句麗의 역대 국왕으로부터 고위 통치자와 승려 등의 한문 사용 수준은 높았으며 숙달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유리왕(瑠璃王)이 총애하던 왕비이자 漢나라 여인인 치희(雉姬)를 그리며 지은 시(詩)가 있다.: “翩翩黃鳥, 雌雄相依, 念我之獨, 誰其與歸?”.
또한 말기때 사람인 법정사(法定師)가 지은《詠孤石》를 들 수 있다.:
“逈石直生空, 平湖四望通, 巖根恒灑浪, 樹杪鎭搖風, 偃流還漬影, 侵霞更上紅, 獨拔群峰外, 孤秀白雲中.”
이 시는 평측(平仄, 역자주: 음운의 높낮이) 운율의 정수가 깊이 채용된것으로, 중원 내지의 잘나가는 唐나라 시인과 서로 아름다움을 겨룰만 한다. 따라서 明나라 때 풍유눌(馮惟訥)이 엮은《古詩記》에 실렸던 것이다. 상술한 내용은 高句麗族은 응당 자기의 문자가 없었으며, 한자(漢字)가 그들의 통용문자였음을 증명한다.
高句麗族의 건축과 회화의 기술은 비교적 저명하다.
각종 사료에 그들은 “궁실 손질하기를 좋아한다(好治宮室)”고 적혀있다. 그리고 현재까지 보존되어있는 高句麗의 古건축은 주로 성곽, 궁전, 사원, 고묘(古墓) 및 집터 등이다. 성곽은 산성이 많은데 이것이 高句麗族 성곽의 가장 주요한 특징이다. 산성은, 각급 노예주가 통치계급으로써 거주하였으며, 규모가 대단히 크고, 대다수가 산허리의 자연 지세를 끼고 만들어졌으며, 산허리 위 혹은 산봉우리의 중요지대에 성벽을 쌓아 험한 자연지세를 충분히 활용하였다. 성벽은 인공으로 임의로 어떻게 꾸미지 않고, 가파른 산봉우리 자체를 그대로 담장으로 활용한 것이 매우 많다. 예를 들어, 나통산성(羅通山城)의 동벽과 서벽, 흑구산성(黑溝山城)의 대부분의 성벽, 홀승골성(紇升骨城)의 서벽 등이 그러하다. 산허리가 움푹 패인 곳 혹은 산봉우리 협곡 사이에 위치하며, 돌를 짤라 층층히 쌓아올렸으며, 움푹 패인 곳 혹은 산골짜기•입구가 터진 곳에는 더욱 높이 쌓은 튼튼한 석벽이 있고, 4면의 성벽이 완만한 성지(城地) 혹은 산봉우리를 감싸고 있고, 자연이 만든 비교적 높은 3면과 상대적으로 낮은 1면이 있어 키(簸箕) 모양을 한 산성이 있다. 예를 들어 집안의 환도산성(丸都山城), 패왕조산성(覇王朝山城), 조선의 대성산성(大聖山城)이 모두 이런 류의 형식에 속한다. 또한 두 개의 산성이 잇달아 있어 함께 자매성을 이루고 있는 것이 있다. 또 홀승골성처럼 4면의 성벽이 드넓은 평지의 산마루를 안고 있는 것도 있다. 또 4면의 성벽이 한 산곡분지를 두르고 있는 것으로 길림성의 용담산성(龍潭山城), 요녕성 신빈의 흑구산성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몹시 풍부했던 중국 고대 건축예술과 건축내용에 포함되며, 옛사람들의 총명한 지혜를 시원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高句麗의 궁전인 조선 평양의 안학궁(安鶴宮)터에서 50 여개의 궁실(幢房室)이 발견되었는데, 3.1만 평방미터를 넘는 궁성내에 분포한다. 웅장한 기세, 균형잡힌 규모, 있어야할 것은 모두 갖춘 각종 궁실은 중원 내지의 동일한 건축과 몹시 유사하다.
高句麗族의 묘제는 연구에 의하면, 석분(石墳)과 토분(土墳)으로 크게 나뉜다.
석분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나타나고, 토분은 상대적으로 시기가 늦고 후기 묘제의 주류이다. 석분은 또 일반적으로 5종의 형식으로 나눌 수 있다.: 적석묘(積石墓), 방단적석묘(方壇積石墓), 방단계제적석묘(方壇階梯積石墓), 방단계제석실묘(方壇階梯石室墓), 방석실묘(方石室墓). 토분은 또한 일반적으로 4종의 형식으로 나눌 수 있다.: 방단봉토석실묘(方壇封土石室墓), 방단부제봉토석실묘(方壇附梯封土石室墓), 토석혼봉석실묘(土石混封石室墓), 봉토석실묘(封土石室墓). 모두 합쳐 9종이 된다. 현재 보존이 비교적 양호한 것으로, 석분은 집안시의 호태왕묘와 장군묘가 있고, 토분은 집안 및 평양 등지에도 많이 발견되었는데 묘실 내벽에 각종 그림이 그려진 벽화가 있다. 高句麗 고묘(古墓)의 형식은, 중국 江浙[역자주: 江蘇와 浙江] 여러 지역에서 발견된 토돈석실묘(土墩石室墓)와 서남지구에서 광범위하게 유행한 이족(彛族) 취락지구의 향천분(向天墳) 등과 유사하다.
高句麗族의 벽화는 지금의 길림성 집안과 조선 평양에서 많이 발견되었는데, 두 지역 모두 발굴된 고분벽화가 대부분이다. 벽화의 형식은 앞뒤 시간에 따라 전개되고, 주제와 내용은 광범위하다. 전체적으로 보면, 주로 인물생활풍속화, 사신화, 풍속과 사신의 결합 등등으로, 당시 사회 생활의 여러 측면을 재현하고 있다. 예를 들어 노예주들의 일상생활, 잔치 및 가무, 줄지어 가는 행차, 사냥, 공성략지(攻城掠地), 임금을 뵙거나 예빙하기, 무용과 씨름, 잡기 및 여러가지 놀이, 무사와 문지기, 신에 대한 제사나 예불(禮佛), 궁전과 묘당, 기물과 그 진열, 옷차림새, 일월성진(日月星辰), 기이한 짐승 및 진귀한 동물, 청룡백호, 현무주작 등등 거의 고구려 사회생활의 각 방면이 모두 벽화중에 그려져있다.
高句麗 벽화예술은 중국 내지의 그것과 비슷한 부분이 많다.
사신총 벽화에는 남주작, 북현무, 동청룡, 서백호가 있는데 이것은 중원 내지의 4방 별자리(宿) 이름을 표시하는 4象 및 4神과 완전히 같다. 오회묘 벽화에 있는 사람머리에 뱀몸뚱이를 한 남녀는 중원 내지의 고대사에 나오는 복희와 여와와 거의 완전하게 같다. 벽화는 일반적으로 배치가 몹시 깔끔하고 가지런해서 순서가 분명하고, 변화가 매우 많다. 비록 1500 여년을 거치면서 풍우(風雨)에 깍이고 부식되었지만 오늘날에도 화면의 보존상태는 양호하며 의연하게 색채는 선명하다. 고구려 화가의 붓끝에 펼쳐진 벽화의 화면은 살아움직이는 것처럼 생생하다. 무위(武威)를 드러낸 귀족 주인공, 천하를 쩌렁쩌렁 떨치는 무인(武人), 온화하고 순종적인 노복(奴僕), 각양각색으로 나타나는 기예를 펼치는 여인, 다양한 옷차림의 숙녀, 용을 타고 바람을 가르며, 유유로이 선계의 기예를 즐겁게 펼치는 선인(仙人)이 있다. 또한 사신도에는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드러낸 청룡, 힘차게 뛰어오르는 백호, 날개를 힘차게 펄럭이는 주작, 뒤엉켜 싸우는 현무 등이 있다. 회화수법을 보면 윤곽선, 색채, 명암, 산점투시(散點透視) 등이 비교적 알맞게 운용되었다. 이들 벽화는 고구려 민족의 사회생활, 풍속 등등의 방면의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이다. 동시에 옛사람들이 후세에 물려준 결코 흔치않은 보석같은 예술이다. 중국 및 그 동방의 회화예술사를 통틀어 몹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高句麗의 장례풍속은,
《三國志•高句麗》: 男女已嫁娶, 便稍作送終之衣. 厚葬, 金銀財幣, 盡於送死, 積石爲封, 列種松柏.
《北史•高麗》: 死者, 殯在屋內, 經三年, 擇吉日而葬. 라고 나온다.
高句麗 사람들은 [중국] 내지와 마찬가지로 이른바 “내세(來世)”를 몹시 중시하여, 남녀는 짝을 만나 일가를 이루면 곧 사후에 쓸 용품을 마련하고 모우기 시작하였다. ‘死者, 殯在屋內’에서 말하는 방(屋)은 세상 사람들이 거주하는 방이 아닐것이며, 들판에 임시로 수축한 무덤이어야 할것이다. 여기에 널(棺)을 놓아두는데 중원 내지의 厝[역자주: 얕게 묻었다가 나중에 다시 묻는것]와 비슷하다. 3년이 차기를 기다려 “천하에 상(喪)을 널리 알리는(天下之通喪)” 날을 채운뒤에야 다시 길일(吉日)을 골라 거듭해서 묻는다. 高句麗 민족의 “후장(厚葬)” 기풍은 몹시 보편적이었음을 문헌기재와 고고학적 발굴 모두가 입증한다.
8. 高句麗族의 인구 및 동향
高句麗國이 멸망했을 때, 여러 사료에는 그 호(戶)를 69만으로 판단하고 있다. 만약 1개 호를 평균잡아 5인으로 셈한다면 인구는 대략 340만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손진기(孫進己)의 지적이 올바를 것이다. 그와같은 인구는 高句麗 민족만 말한것이 아니며 高句麗가 잡아오거나 병합한 수많은 기타 민족(漢族, 沃沮族, 肅愼族, 夫餘族, 鮮卑族, 百濟族, 新羅族, 穢族 등등)을 포함한 것으로 “그러하니, 高句麗 민족의 인구는 69만호 보다 훨씬 적다 (孫進己).” 실제 정황을 근거로 추정하건데, 대략 [69만호의] 반수 안팎으로, 즉 약 35만호, 120만인 안팎이다.
이 35만호 120여만인은 다음과 같이 흘러갔다.:
《三國史記•高句麗本紀•寶臧王紀》: 總章二年 (669) 二月, 王之庶子<安勝>率‘四千戶’投<新羅>. 夏四月, <高宗>移‘三萬八千三百戶’於<江淮>之<山南>•<京西>諸州空曠之地.
여기서《新唐書•東夷傳•高麗》에는 “3만” 으로,《舊唐書•高宗本紀》에는 “2만8천2백 호”라고 적혀있다. 이들은 고구려가 멸망한 후 행선지로 떠난 그 유민을, 사료중에서 유일하게 구체적인 숫자에 의해 기술된 것이다. 新羅에 투신했다는 “4천호”는 당연히 高句麗族 골간의 핵심부로써, 이 2만여인은 나중에 新羅 및 百濟와 융합되고, 발전하여 현재의 朝鮮민족이 되었다. 중국 내지로 이주당하게 된 호수(戶數)에 대한 위 세 사료의 기록은 서로 조금 차이가 난다. 《新唐書》의 기록이 올바른 숫자이다.《舊唐書》의 “二萬”은 아마도 “三萬”을 잘못 적은 것이며, 따라서 응당《三國史記》의 기록이 정확하다. 이 20만인에 가까운 “3만8천2백 호” 는 高句麗族의 핵심부이다. 그들은 이후 발전하여 漢族의 일부분이 되었다.
《新唐書•東夷傳•高麗》: “儀鳳二年 (677), 授<藏>遼東都督, 封朝鮮郡王. <藏>與<靺鞨>謀反, 未及發, 召還放<邛州>, 廝其人于<河南>•<隴右>, 弱窶者留<安東>.”
이 기사는 唐왕조가 두번째로 高句麗 국왕을 대표로 하는 대부분의 인구를 중국 내지로 이주시키려 한것이다. 구체적인 숫자는 적혀있지는 않다. 그러나, 단지 “弱窶者”만 安東 지역에 남게 하였다는 기재를 보아 이주된 사람의 수는 첫번째 이주때 보다 훨씬 많았으며, 거의 모든 高句麗族이 이주되었다. 이런 일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발전하여 漢族의 일부분이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작은 일부가 남아있었는데 대략 “弱窶者” 같은 사람들이다.
《新唐書•東夷傳•高麗》: 自是<高麗>舊戶在<安東>者漸寡少, 分投<突厥>及<靺鞨>等.
《通典•邊防典•東夷》: 其後, 餘衆不能自保, 散投<新羅>•<靺鞨>舊國, 土盡入於<靺鞨>.
그들은 突厥, 靺鞨 그리고 新羅에 투신한 것을 알 수 있다. 突厥에 들어간 이들은 또한 발전하여 漢族이 되었고, 靺鞨에 들어간 이는 또한 발전하여 滿族이 되었다. 이로써 총괄하여 보면, 高句麗族의 절대 대부분은 모두 중화민족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고구려=고이족 설이 요즘 내세우는 중국의 고구려 족원의 대표설입니다. 이것을 주장하는 이유는 고구려를 중국사로 편입하기 위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글과 전 글에서 보듯 중국의 설은 별다른 근거는 없습니다.
부여와 고구려를 같은 족원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무서운 목적성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김용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