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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추수감사절 특강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말씀/시23:1-6
요절/시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그중에서도 하나님이 더욱 기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 모든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사람입니다. 영국의 훌륭한 설교가였던 찰스 스펄전 목사는 말했습니다. “촛불 주신 은혜를 감사하면 전깃불 주시고, 전깃불 주신 은혜를 감사하면 별빛 주시고, 별빛 은혜를 감사하면 달빛 주시고, 달빛 은혜를 감사하면 햇빛 주시고, 햇빛 주신 은혜를 감사하면 영원한 어둠이 없는 하나님의 빛으로 비추어 주신다.” 이처럼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면 감사의 마음이 자꾸 자라납니다. 이런 사람은 감사가 넘치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이 시간 다윗의 시인 시편 23편을 살펴볼 것입니다. 말씀을 보면서 다윗이 경험하고 고백한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그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고 감사로 예배드리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면, 다윗은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시 말하면 이런 것입니다. “이제까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살아왔는데 이제야 내가 깨달은 것이 있어. 그것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 ‘나는 그분의 양’이라는 거야.” 다윗은 하나님을 목자로 비유합니다. 이것은 유목 생활하면서 목축을 주된 일로 삼고 있는 이스라엘에서는 자연스러운 표현입니다.
다윗은 소년 시절, 집안의 양을 돌보는 목자 생활을 했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목자와 양의 관계를 잘 알았습니다. 그는 양의 생명이 목자에게 달려 있음을 잘 알았습니다. 누가 목자인가에 따라 양들의 행불행이 좌우됨을 알았습니다. 다윗은 양을 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배웠습니다. 그는 양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밤에도 졸음과 싸우며 양 떼를 지켰습니다. 사나운 맹수들이 양을 물고 가면 끝까지 쫓아가 머리통을 치고 입을 찢어 새끼를 건져냈습니다. 맹수가 자신을 헤치고자 하면 맹수의 수염과 턱을 움켜잡고 그것을 쳐 죽였습니다(삼상17:34,35). 그는 목숨을 걸고 양들을 돌보는 목자였습니다.
또 다윗은 양들을 돌보면서 양들의 속성을 알게 되었고, 이를 통해 양과 같은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많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양들은 시력도 약하고 다리도 짧고 연약해서 목자의 돌봄이 절실히 필요한 동물입니다. 다윗은 자신도 양처럼 목자 되신 하나님의 돌보심이 절실히 필요한 존재임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그의 인생에 아무런 역경과 고난이 없어 이런 고백을 한 것입니까? 물론 다윗은 뛰어난 용사요, 시인이며, 악기도 잘 다루는 등 하나님이 주신 재능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리더십이 있어 젊어서부터 많은 동료들이 그를 따랐고 사회적 지위로 말하면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왕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성경은 그의 외모에 대해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삼상16:12)”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용맹스럽고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자였습니다. 오늘날로 따지면 다윗의 스펙은 정말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그도 인생의 음지가 있었습니다. 집안의 막내로 태어나 별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주로 부모님과 형들의 잔심부름을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 적장을 물리침으로 하루아침에 전국구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최고 권력자 사울의 시기를 받아 13년간이나 떠돌이 수배자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친한 친구 요나단이 있었지만 공교롭게도 그는 원수의 아들이었습니다. 자신의 충신이었던 장수의 아내와 불륜을 행하고 그녀와의 결혼을 강행하는 과정에서 충신을 맹렬한 전쟁터에 고의로 내보내 죽이는 등 간음과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이로 인한 죄의식은 오래도록 다윗을 괴롭혔습니다. 오랜 고난 끝에 최고의 자리, 왕에 올랐으나 사랑하는 아들들을 먼저 보내는 슬픔을 여러 차례 겪었습니다. 또 사랑하는 아들이 자신을 헤치고자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 아들은 진압 과정에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다윗의 인생에는 태양처럼 찬란히 빛나는 영광의 순간도 있었지만 이처럼 그에 못지않은 고난과 역경, 고통과 괴로움의 시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인생의 목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인하여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가 왕이고, 재능이 많고, 그의 인생이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아마 그는 인생의 고난 가운데 함께 하시며 자신을 건져내시고 높이 올려주신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아~!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시구나!’ 하는 믿음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양이라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먹여주시지 않으면 스스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사울에게 쫓겨 다닌 광야 세월 13년 동안을 통해 연약하고 힘없는 자신을 돌봐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깨달았습니다. 때마다 자기를 지켜주시고 구원해주시며 먹을 것, 입을 것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다윗을 돌보시고 도우시는 목자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면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목자로 따르는 다윗의 행복이 구체적으로 어떠합니까? 1b절을 보십시오.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런 고백을 진심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는 목자이신 하나님이 그의 삶의 모든 필요를 다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목자는 그렇게 해서 양들이 만족하며 살게 합니다. 하나님은 목자가 되셔서 당신의 양 같은 자녀들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며 채워주십니다. 하나님은 미물인 공중의 새도, 한낱 들풀에 불과한 백합화도 다 먹이시고 화려하게 입히시는데 어찌 당신의 자녀에게 무엇인들 부족하게 하시겠습니까? 양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 그것이 목자의 기쁨입니다. 다윗의 삶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는 광야 생활을 지날 때도 하나님을 붙들고 살았습니다. 다윗은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원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하시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부족함, 즉 결핍은 없어서 불편한 것입니다. 그 결핍의 자리가 하나님으로 가득 채워지면 우리는 부족함을 느끼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이 도우시고 채우시니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기 계신 우리 각 사람의 목자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축복의 때에도 고난의 때에도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결국 우리의 길을 선한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환경과 자신의 처지에 따라 이리저리 휩쓸리지만, 우리의 목자이신 하나님은 선하시며 그분의 신실하심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구든 이 하나님을 목자로 영접한 사람은 그 삶에 부족함이 없게 됩니다. 사람이 큰 재물을 모아도, 아니면 남이 범접할 수 없는 뛰어난 스펙을 쌓아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그 삶 어디엔가 비어있는 듯합니다. 아니, 하나님을 알더라도 깊고 인격적인 만남이 없으면 하나님이 아무리 채워주셔도 만족함이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은 바 되어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신뢰가 있을 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세상의 잣대와 우리의 이기적인 욕망으로 재단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고린도후서 3장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들을 내가 잘 나서 그렇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만족하기 쉬운데 사실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필요와 만족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어떤 목사님이 주일 말씀을 준비하고 있을 때 사무실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내일 주보에 말씀 제목을 적어야 하는데 제목이 뭔가요?” 그러자 목사님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사무실에서 되물어왔습니다. “그게 전부에요?” 그러자 목사님은 “그것으로 충분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주일날 주보를 보니 제목이 이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것으로 충분해.” 여러분,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 부족해 보이십니까? 우리의 상황과 처지를 아시는 분,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 우리의 필요를 얼마든지 공급해 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분, 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고 귀한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이 사람의 형상으로 이 땅에 와 고통 가운데 있는 우리 인생들을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릴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당신의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다 아시고 합당하게 채워주시는 하나님, 꼭 필요하고 더 좋은 것을 주시려고 잠시 연단도 하시지만, 그 연단 후에 더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우리는 목자이신 하나님 한 분으로 충분하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시므로 내 인생에 부족함이 없다고, 하나님으로 충분하다고 고백하는 사람, 이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게 하십니까? 2절을 보십시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목자는 새벽녘에 양 떼를 인도하여 이동시킨 후, 푸른 풀밭에서 풀을 뜯게 합니다. 그러면 양 떼는 쉴 줄 모르고 정신없이 풀을 뜯어 먹습니다. 그러다 10시경이 되어 중동의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면 양들은 매우 피곤해지고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 이때 목자는 양들에게 바로 물을 먹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목자는 양 떼를 인도하여 시원하고 그늘진 풀밭으로 인도하여 쉬게 합니다. 그러면 양들은 거기에 누워 되새김질하며 먹은 것을 자연스럽게 소화시킵니다. 양들은 배가 부르지 않거나 안심되지 않으면 잘 눕지 않습니다. 양들을 쉬게 하기 위해서는 두려움과 긴장과 괴로움과 배고픔에서 벗어나 자유함과 만족감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양들은 자체방어 수단이 없기 때문에 위험에 처하는 기미만 보여도 달아나는 무력하고 겁 많은 연약한 짐승입니다. 양들은 목자가 자기와 함께 있어 줄 때 안심하고 평화를 느끼게 되고 그때 비로소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또 양들이 두려워하는 이유는 외부로부터 사나운 짐승의 공격을 받기 때문만이 아니라 내부에 양들 간에 형성되는 긴장과 적대의식, 경쟁의식도 그 원인이 됩니다. 동물사회에는 뚜렷한 위계질서가 있다고 합니다. 닭장 안에서는 ‘쪼는 순위’에 따라 위계질서가 정해지고, 소들의 집단에서는 ‘뿔로 받는 순위’로 정해지며, 양들 가운데서는 ‘머리를 부딪치는 순위’로 정해진다고 합니다. 양들은 서로 간에 경쟁으로 인해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긴장하게 되면 안정을 취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목자가 그들 가운데 있게 되면 이러한 경쟁을 하지 않게 되고 안식과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셔서 늘 나와 함께 하시고 내 곁에 가까이 계신다는 사실을 의식할 때 두려움과 공포가 사라지고 참된 안식과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목자가 양들이 두려워하는 외적 내적 원인들을 제거할 때 양들은 푸른 초장에 누워 자유롭게 풀을 뜯으며 쉼을 누리게 됩니다.
또 목자는 양들을 쉴만한 물가로 인도합니다. 여기, ‘쉴만한 물가’는 ‘물가에 있는 쉼터’를 말합니다. 이곳은 고요하고 평화로워 양들이 마른 목을 축이고 새 힘을 얻을 수 있는 장소입니다. 양은 본래 겁이 많고 수영을 못하기 때문에 흐르는 물을 무서워하여 잘 접근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목자는 양들을 잔잔한 물가로 인도해야 합니다. 잔잔한 시냇물이 없을 때는 목자가 흐르는 물을 돌로 막아 잔잔하게 하고 난 뒤, 양들이 아무 두려움 없이 물을 마시도록 해줍니다. 또 맑고 깨끗한 물을 어디서 얻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목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목자는 물 마시기 가장 적합한 곳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파악해 놔야 합니다.
목자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우리 몸이 물을 필요로 하듯 우리 영혼도 물을 필요로 합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목마른 영혼들을 초청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7:37,38).” 예수님 자체가 쉴만하고 잔잔하고 맑으며 오염되지 않은 영생수가 되십니다. 이 물은 마시는 자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됩니다(요4:14). 영생수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우리 영혼은 목마르지 않으며 참된 만족과 참된 쉼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풀과 같은 말씀을 먹이시고 성령의 생수를 부어주셔서 평강 가운데 살아가게 도우십니다. 교회는 둥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들이 둥지를 틀고 새끼들과 함께 안식과 평안을 누리는 것처럼 우리 또한 교회라는 둥지에서 목자이신 하나님과 함께 평안과 안식을 누립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아멘!”
그러면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우리 영혼이 얻는 기쁨이 어떠합니까?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3).”
사람의 영혼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이런저런 힘든 일, 슬픈 일, 고통스러운 일, 외로움, 고독, 두려움, 인생의 불확실성으로 인한 막연한 불안감 등으로 인해 그 힘을 상실합니다. 특별히 인간은 죄를 범할 때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 떨며 다가올 죽음으로 인해 사지에 맥이 빠져버립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탈진하기 쉽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 인간은 다양한 활동들을 합니다. 그래도 인생의 불확실성이 주는 두려움, 불안감이 담력 체험이나 번지점프, 심리치료 등으로 온전히 해결함 받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죽어가는 사람을 심폐소생술(CPR)로 회복시키듯 하나님은 탈진한 우리 영혼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 회복은 전인적인 회복입니다. 또 내가 제대로 못할 때도 많고 죄악된 길로 갈 때도 많습니다. 연약하고 부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 허물이 있더라도 자르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우리를 돌보아주십니다.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연약하고 죄인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살게 되었다는 것! 이는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이 마냥 좋고 평안하지만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어려운 일을 많이 당합니다. 때로는 망할 것 같은 두려움에 빠지기도 합니다. 원수들이 사방을 에워싼 듯한 골짜기 길을 가야 할 때 얼마나 두렵습니까?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면서 숱하게 이런 사망의 골짜기를 걸어야 했습니다. 그의 주변에는 사울뿐만 아니라 배반자, 밀고자, 이방의 원수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때마다 목자이신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주님은 그를 지켜주시고 원수의 손에서 구원해주셨습니다. 주님은 목자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그를 이끄셨습니다. 잘못된 길로 가면 지팡이로 방향을 잡아주고, 죄의 수렁에 빠지면 건져주고, 맹수나 해로운 것이 다가오면 주의 막대기로 쫓아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난날 그가 누린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따라 이제 앞으로 어떤 죽음의 위협이 닥쳐온다 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그의 믿음이 되었습니다.
이런 그는 지금 어떤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하나님은 그를 원수로 둘러싸인 두려움의 골짜기에서 지켜주고 구원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승리를 주시고 크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원수가 아직 두 눈 시퍼렇게 있는 때에 다윗 앞에 아주 큰 잔칫상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를 위해 garden party를 벌여주시고 천하에 맛있는 음식을 뷔페로 차려 마음껏 먹고 배부르게 하셨습니다. 이 잔치에는 아무런 혼란도 소동도 두려움도 없습니다. 원수는 다만 눈만 휘둥그레 뜨고 바라볼 뿐입니다. 이 하나님은 모든 상황과 형편을 뒤바꾸어 주시는 역전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그를 특별한 손님으로 맞이해 주십니다. Welcome! 하면서 환대해 주십니다. 따뜻하게 손잡아 주시고 안아주십니다. 이제 다윗은 더 이상 사망의 골짜기를 오가며 쫓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다윗은 외칩니다. “주님, 내 잔이 넘치나이다.” 감사와 만족감의 표현입니다. 차고 넘치는 주님의 은혜와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다윗이 누리는 복이 바로 우리의 복입니다. 다윗의 목자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다윗이 목자이신 하나님 앞에 양이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의 양입니다. 목자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죄의 수렁에서 지팡이로 건져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연약함과 죄악을 감당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하시는 선한 목자가 되셨습니다. 우리를 특별히 택하시고 생명구원역사에 동역자로 삼아주셨습니다. 우리와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리라 약속해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특별히 택해주신 존재요, 임마누엘 해주시는 존재요, welcome하면서 환대해 주시는 존재입니다. 주위 동역자들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welcome하시면서 환대해 주시는 분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 그 무엇보다도 귀하고 보배로운 존재로 여기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만난 다윗의 확신이 무엇입니까? 6절을 읽겠습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여기, ‘따르리니’라는 말은 사냥개가 쫓듯 끈질기게 쫓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이 집요하게 나를 쫓아옵니다. 하나님은 선하심과 사랑을 가지고 나를 추격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다윗은 이 하나님이 평생에 함께하실 것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과 실수 속에서도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십니다(롬8:28).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감당하시고 사랑과 긍휼로 돌보아주십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와 평생 함께해주실 것을 압니다. 그래서 다윗은 말합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다윗은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집에 살고 싶어 합니까? 화려하고 편안한 집이 좋을 것입니다. 물론 다윗도 화려하고 편안한 왕궁에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방점은 건물 집에 있지 않았습니다. 어떤 집에 살든 하나님과 함께라면 다윗은 마냥 좋습니다. 다윗은 평생에 걸쳐 하나님께 대한 예배자로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는 목자이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든 것이 충분하고 대만족입니다. 그는 장군으로 승리의 기쁨도 누려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동경하고 좋아하는 멋진 훈남이기도 했습니다. 왕이 되어 최고의 통치자가 되어보기도 했습니다. 주변의 많은 나라에서는 다윗에게 조공을 바쳤습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다윗에게 있어 최고의 삶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입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세상 부귀, 명예와 영광 그 어떤 것보다도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더욱 사모합니다. 영원토록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섬기는 삶이 그에게는 최고입니다.
여러분! 나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지키시고 돌보시고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고 환대하시는 분이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기 쉽지만, 주님은 선하심과 사랑으로 우리를 추격해오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으로 인해 만족하는 삶을 살 수 있고, 평강의 인생길을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길에 베푸신 은혜와 복을 세어보면서 “주님, 나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와 복이 차고 넘치나이다” 고백하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평생에 있어 하나님께 늘 감사하며 섬기는 예배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