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강원도 - 미수 허목과 척주동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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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1.10. 01:30조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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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수 허목과 척주동해비
오십천을 따라간 동해 바닷가의 삼척항이 내려다보이는 육향산 언덕에 숙종 때의 학자 미수 허목이 써서 세운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가 있다. 허목이 삼척부사로 재임할 당시 심한 폭풍이 일어 바닷물이 삼척을 덮치면서 난리가 났는데, 그가 동해를 예찬하는 노래를 지어 비를 세우자 물난리가 가라앉았다. 그 뒤로는 아무리 거센 풍랑이 와도 그 비를 넘지 않았다고 한다.
척주동해비
숙종 때의 학자 허목이 삼척부사로 재임할 당시 물난리를 잠재우기 위해 동해를 예찬하는 노래를 지어 비를 세웠다.
선조 28년(1595)에 태어난 허목은 정인웅에게서 처음 글을 배웠고, 거창현감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가 정구를 스승으로 모시고 글을 배웠다. 그림과 글씨, 문장에 능했으며, 특히 전서(篆書)에 뛰어나 동방의 일인자라고 불렸다. 효종이 세상을 떠난 후 계모인 조 대비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남인과 서인의 의견이 대립하였다.
서인 계열인 송시열 등은 효종이 맏아들이 아니므로 1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했고, 남인 계열인 허목 등은 효종이 왕위를 이었으니 맏아들로 여겨 3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했다. 이 논쟁의 이면에는 왕위 계승 원칙인 종법(宗法)의 이해 차이에서 비롯된 서인과 남인 간의 이념 논쟁에다, 둘째 아들로서 왕위를 계승한 효종의 자격에 대한 시비가 깔려 있었다. 논쟁의 결과, 서인의 주장대로 조 대비는 1년 동안 상복을 입었고 임금은 허목을 삼척부사로 좌천하였다. 허목은 그곳에서 향약을 만들어 교화에 힘썼다.
1675년 효종의 아내이자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가 죽자 또다시 문제가 일어났다. 이때도 조 대비가 살아 있어서 서인들은 9월복으로 결정하였다. 이에 남인들은 지난번의 경우와 맞지 않는다고 들고 일어났고, 현종이 이 주장을 받아들여 남인의 주장대로 1년복으로 결정하였다. 이 일이 있은 뒤 삼척부사로 좌천되었던 허목은 다시 조정에 나와 대사헌과 이조판서를 역임하였고, 송시열은 유배의 몸이 되었다. 이것이 제2차 예송 논쟁이다.
남인이 권력을 쥐자 또다시 분열이 일어났다. 송시열의 처벌을 놓고 강경론과 온건론으로 나뉘었고, 당시 임금이었던 숙종은 남인들이 너무 설친다고 생각하여 견제하였다. 다시 조정은 서인의 손에 들어가 송시열은 귀양살이에서 풀려났다. 허목은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있었으므로 제거의 대상에서 벗어나 있었다. 송시열이 등장하자 남인의 처벌 문제를 놓고 강경파와 온건파의 감정이 대립하여 서인은 노론(송시열이 영수)과 소론으로 갈라졌다. 남인과 노론은 이후 허목과 송시열이 죽고 난 뒤에도 서로 상종하지 않고 사사건건 적대 관계를 이루었다. 그 뒤의 임금인 영조나 정조가 탕평책 등으로 당파 간의 화해를 도모했지만 그 화해는 결코 쉽지 않았다. 너무나 성격이 강한 두 사람의 견해 차이로 일어난 오랜 정치 싸움의 결과였는데, 그 싸움은 오늘날의 정치에도 그대로 이어지는 듯하다.
새천년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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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수 허목과 척주동해비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8 : 강원도, 2012. 10. 5., 신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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