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eRUxE9E5Do
추후에 가볼 코스입니다.
제10회:〔무등산중머리재(광주)〕
1.일시:2020.11.12.목.10:05~15:30(5:35)
2.코스:집-지도버스터미널(지도읍)-광주종합버스터미널(광주)-무등산국립공원입구(증심사)-증심교-당산나무-중머리재-서인봉-새인봉갈림길-약사사-무등산국립공원입구(증심사)-광주종합버스터미널(광주)-지도버스터미널(지도읍)-귀가
光州를 빛고을로 부른다.
찬란한 햇빛으로 표현되는 번영의 고장이요 남쪽 나라의 웅장한 번진(藩鎭)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藩鎭은 나라를 보위(保衛)하는 군대의 주둔지[軍鎭]라는 뜻이다.
광주를 그만큼 중요한 곳으로 여기고 있다.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고 아끼는 ART의 도시 ‘예향(藝鄕) 빛고을’광주라 한다.
광주는 아팠던 손가락 같은 곳. 다 아물었지만 가끔은 다시 밴드를 붙여 주고 싶은 그런 곳. 대한민국 어디에 이런 마음이 드는 도시가 또 있을까라고 칭송한다.
광주 TV방송국들에서 지방소식을 보게 되는데 남도의 정겨운 풍경과 사람 사는 모습들을 알게 되는 기회를 가진다.
가끔 심심치 않게 5.18민주화 운동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접하게 되는데.
그런 광주가 한편으로는 두렵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5.18사태가 언제적 이야기 인데 아직까지...
아직까지 아물지 않은 光州의 限이 남아있다.
怨恨의 感情이 쉬이 사라질 일이고 쉬이 치유될까 하는 생각이 든다.
광주의 무등산을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올라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출발해서 귀가까지 시간을 계획하기가 쉽지 않다.
지도읍 07:05분 첫 버스-광주종합버스터미널에 하차-시내버스 9번으로 무등산 입구 증심사까지-산행후 터미널에서 4:45분막차.
산행을 마치고 4:45분 마지막차를 타야한다.
버스터미널에는 온통 빨간색의 버스들로 가득차 있는데 모두가 금호버스회사 차다.
다른 회사의 차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으니 독과점 상태다.
처음 대하는 기분이 묘하다.
터미널 외부는 비좁아 보이지만 내부 시설은 단아해 보인다.
터미널 광장에 축제무대가 설치되어 있고 젊은이들이 안내를 하고 있다.
9번 버스노선에 광주일고앞 정류장도 만나고 옛 도청 건물이 5.18사태 당시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버스 안내양 목소리도 선명하게 5.18민주화 운동 옛 도청 앞이라는 멘트를 보낸다. 그런 말이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지도읍에서 2시간 20분 걸려서 광주터니널에 도착하고 9번 시내버스로 25분걸려서 무등산 입구에 도착하고 산행은 10시05분에 시작한다.
증심사에서 오르는 코스는 다양하고 시내에서 접근도 쉬워서 많이 이용하고 있다고...
평일인데도 증심사 버스정류장에 등산객들로 분빈다.
증심사 상가거리도 화려하다.
등산화 세척장이라는 곳도 인상적이다.
증심사 입구 두 갈래 길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당산나무 나오고 중머리재까지는 가파른 오름 길이다.
샛노랗고 새 빨간 단풍이 절정이다.
능선에 오르니 450년 수령의 당산느티나무가 자라고 있는 광장이 있다.
가히 무등산 명물이다.
오랜 세월에도 나무는 건강하다.
가지마다 많은 잎들은 노랗게 물들어 있으며 4.8m나무둘레도 오랜 세월의 흔적하나 없다.
당산나무 광장이 무등산을 찾는 이들에게 좋은 휴식처가 되고 있다.
또 다시 단풍길 따라 땀 흘리며 한 참을 오르다 보니 능선이 나타난다.
사방이 트인 넓은 광장이 반갑다.
평일잉데도 많은 사람들이 양지바른 곳에서 따뜻한 햇살 받으며 오찬을 즐기고 있다.
주로 아주머니들이고 젊은이들은 벤치에서 햇살을 피하고...
무등산은 등급을 메 길 수 없이 좋은 산이라고...
전체적인 산세는 산줄기와 골짜기가 뚜렷하지 않고 마치 커다란 둔덕과 같은 홑산이다.
이 말 한마디가 무등산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중머리재 올라와서 실감한다.
넓은 잔디가 좋고 사방을 볼 수 있는 위치라서 좋다.
북쪽으로 산 정상쯤에 왼쪽 서석대와 오른쪽 송신소를 볼 수 있다.
줌을 확대하여 표지석에서 주상절리와 송신소를 사진에 담는다.
오늘 오찬은 단팥빵.베지밀검은콩두유.호박고구마.계란.꽂감.자유시간이다.
500ml물도 다 마시고...
중머리재에서 서인봉까지는 하산은 능선길로 무등산의 완곡하고 부드러운 산세를 본다.
약사사 절에서 버스정류장까지 1km남았으니 다 왔다는 안도감이 든다.
오늘 산행은 중머리재까지 3km이며 약사사 하산 길은 3.4km다.
6.4km를 5시간 35분으로 산행을 마친다.
당산나무와 중머리재가 사랑받은 무등산으로 기억에 남아있을 것이고...
오늘 대중교통 이용으로 광주의 겉모습 조금이나마 볼 수 있었다.
광주까지 교통체증으로 2시간20분이 걸렸으나 갈 때는 1시간30분이 걸린다.
다음에는 철쭉군락지로 광주시내 조망이 좋다는 코스가 있다고...
‘수만리들국화마을-백마능선-낙타봉-장불재-입석대-서석대-백마능선-수만리들국화마을’을 탐사해 보리다.
오늘 남도의 정겨운 인사다.
안녕하실랑가.워메~~디져불구만.(=아주 좋구만)
-무등산-
무등산은 전체적인 산세는 산줄기와 골짜기가 뚜렷하지 않고 마치 커다란 둔덕과 같은 홑산이다. 무등산의 특징은 너덜지대인데 천왕봉 남쪽의 지공너덜과 증심사 동쪽의 덕산너덜은 다른 산에서는 볼 수 없는 경관이다. 무등산은 완만한 산세로 대부분이 흙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천태만상의 암석들이 정상인 천왕봉을 중심으로 널려 있어 그 웅장함으로 인하여 도민의 신앙대상이 되어온 신산으로 알려 졌다. 특히 서석대, 입석대, 규봉의 암석미는 대단하다.
무등산의 삼대 절경인 입석대, 서석대, 광석대를 일컬어 무등산 삼대석경이라 부르기도 한다. 봄의 철쭉, 여름의 산목련, 가을의 단풍과 겨울의 설경등 변화가 많은 자연경관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1972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2013년 3월 4일 국립공원 제21호로 지정되었다. 무등산국립공원은 전체면적 75.425㎢로 광주광역시(북구, 동구)와 전라남도(담양·화순군)에 위치하고 있다.
무등산에는 증심사, 원효사, 약사암, 규봉암 등의 사찰과 산의 북쪽 기슭인 충효동에 환벽당과 식영정, 소쇄원 누정 등의 유적이 있다.
인기명산 41위의 무등산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무등산은 사계절 산행지이다. 10-11월의 억새와 단풍 테마산행으로 많이 찾고, 이른 봄 봄맞이 산행지로 인기 있다.
-5·18민주화운동 배경-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등장한 군사정권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의 사망과 함께 붕괴된다. 이를 틈타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의 집권이 가시화되었다. 민중운동 및 반(反)군부 세력들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신군부의 집권으로 인해 더욱 후퇴하고 억압될 것을 우려하여 이를 저지하기 위해 민주화운동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활동들은 1980년 5월 초에 절정에 이르러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집회와 시위가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광주에서는 5월 초부터 전남대와 조선대 학생들의 주도로 시국성토대회가 연일 개최되었다. 학생들은 5월 14일부터 광주 도심으로 진출하였고, 시민들과 대규모 가두 정치집회를 개최하는 등 다양한 형태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민족민주화성회’로 불리던 이러한 집회와 시위는 5월 16일까지 계속되었다.
시위가 확산되어 가자 신군부는 5월 14일부터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집회와 시위를 진압할 계획을 현실화하였고, 17일 오후 7시에 공수부대 투입명령을 내렸다. 신군부는 5월 17일 밤 11시 40분에 ‘비상계엄이 18일 자정을 기해 전국으로 확대되었음’을 발표하는 한편, 전국에서 대학생과 재야인사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광주에서도 5월 18일 자정이 다 된 무렵부터 십수 명이 광주 505보안대로 연행되었다. 그리고 제7공수여단은 전남대와 조선대에 계엄군으로 배치되어 학교에 있던 학생 112명을 연행하였으며, 언론사와 방송국, 비롯하여 광주 시내 주요 기관에 제31사단 군인이 투입되었다.
5월 16일에 개최된 집회를 해산하면서 약속한 대로 학생들은 18일 오전에 전남대 정문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전남대에 주둔한 계엄군은 학생들의 해산을 종용하였고, 이 과정에서 첫 충돌이 발생하였다. 계엄군의 진압을 피해 도심으로 진출한 학생들은 시민들에게 계엄 확대와 계엄군이 자행한 만행을 알렸다. 제7공수여단에 이어 추가로 파병된 제11공수여단은 시위대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에게도 진압봉을 휘둘렀고, 무차별 연행하였다. 이에 시민과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계엄군에 맞섰고, 도심은 전쟁터로 변해갔다. 제3공수여단이 추가 투입되는 등 계엄군은 계속 늘어났고 발포까지 이루어져 사상자가 급증하였다. 시위대는 계엄군의 만행을 널리 알리고, 무력에 맞서기 위해 전남 지역으로 진출하여 무기를 획득하였다. 이 과정에서 5·18민주화운동은 광주뿐만 아니라 전남 일원으로 확대되었다. 무기를 획득한 시민들은 이른바 ‘시민군’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5월 21일 시민군은 계엄군을 후퇴시킴으로써 27일까지 ‘민중자치’가 실현되었다. 이 기간 동안 시민군은 광주의 치안과 행정 업무를 담당했으며, 다수가 도청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
계엄군이 철수한 광주는 5·18수습대책위원회에서 시민학생민주투쟁위원회로 명칭을 변경해가면서 죽음으로 확보한 성과를 지속시키고자 했다. 이들은 5월 26일까지 매일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를 개최하여 민주주의의 사수를 위한 광범위한 동의를 구하였다. 또한 ‘투사회보’를 비롯하여 다수의 홍보물이 발간되어 대안언론의 기능을 했다. 시민들은 시민군과 시위대에게 음식물과 생활용품을 기꺼이 제공하였다. 계엄군과 신군부의 지시를 받던 행정권력이 기능을 상실한 기간은 ‘시민들이 각자의 생명과 동료 시위대 그리고 광주시민들의 생명과 완전히 동일시했던 절대공동체가 형성되었던 시기’였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은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충정작전을 개시하여 전남도청을 다시 점령함으로써 종결되었다. 2001년 12월 18일을 기준으로 확인된 피해자는 사망 218명, 행방불명자 363명, 상이자 5,088명, 기타 1,520명으로 총 7,200여명에 이른다. 비록 5·18민주화운동은 비극적으로 종결되었으나,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명예회복, 보상, 기념사업을 쟁점으로 한 ‘5월운동’을 통해 계속되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광주민주화운동관련자보상등에관한법률’이 제정(1990년 8월 6일)되어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보상 및 기념사업이 이루어졌고, ‘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이 제정(1995년 12월 19일)되어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을 비롯하여 가해자 다수에 대한 법적 처벌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현재에도 5·18민주화운동의 청산작업에서 발생한 오류와 미흡한 점들을 바로잡기 위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활동이 계속되고 있다. 5·18민주화운동은 2000년대 들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한국의 과거사 청산작업’을 위한 선례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또한 5·18민주화운동은 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국가에서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단체 및 사람들의 활발한 교류의 구심이 되어 다른 나라의 민주화에 기여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5·18민주화운동기념일 [五一八民主化運動記念日] (한국세시풍속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