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를 열며
우리에게 조금 낯선 조선의 카펫 모담毛毯을 소개합니다.
모양은 실과 면실을 엮어서 짠 조선의 카펫입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탑등毾㲪, 구유氍毹, 계담罽毯, 모담毛毯 등 다양한 종류의 모직물을 만들었습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채담彩毯, 화담畵毯 등을 깔거나 장막으로 사용했습니다.
현재 조선시대의 모담과 관련된 실물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모담’이란 단어가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최근 일본 교토의 기온마쓰리에서 사용된 모담이 국내에 소개되면서 전통 카펫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이에 따라 국내 기관에서 소장한 모양 연구도 활기를 띄게 되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조선의 모담을 비롯하여 관련 사진과 그림, 일본으로 수출된 모담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꾸몄습니다. 특히 국립대구박물관이 새로 구입한 모담을 처음 공개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모담毛毯이 우리에게 조금은 친숙한 느낌으로 다가오길 기대합니다.
실로 짠 그림 - 모담 -
모담의 무늬와 풍부한 색감은 우리만의 우아함과 해학을 담고 있습니다.
구슬을 가지고 노는 사자는 용맹스럽기보다는 귀엽고 해학적인 모습입니다.
날아오르는 학 은 우아하면서도 역동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이외에도 박쥐와 구름 꽃과 식물, 보배, 화분에 담긴 꽃 등은 당시 도자나 금속공예품, 민화에도 많이 활용되는 한국적인 소재입니다. 무늬를 만드는 과정에는 몇 가지 흥미로운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학이나 나비 같은 입체적인 형태를 평면인 천으로 옮기면서 선과 색을 과감하게 생각하는 방법입니다. 원근법을 생략한 구도와 한 곳으로 단순화한 시점은 마치 오늘날의 추상화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두 번째는 색실로 구획을 나누어 천을 짠 후 그 위에 먹이나 안료로 세부 형태를 그려 넣는 방법입니다. 모담은 실로 짜는 방법과 붓으로 그리는 방법을 함께 사용했기 때문에 풍부한 표현이 돋보입니다.
전시내용
‘모담’은 털실과 면실을 엮어서 짠 조선의 카펫입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탑등毾㲪, 구유氍毹, 계담罽毯, 모전毛氈 등 다양한 종류의 모직 카펫을 만들어 왔습니다. 하지만 현재 조선시대의 모담毛毯은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모담毛毯’이란 단어가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최근에 일본 교토의 기온마쓰리[祇園祭]에서 사용된 모담이 국내에 소개되면서 전통 카펫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가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는 그림과 사진을 통해 조선시대 모담의 특징과 역사적 흐름을 살펴보고, 모담 무늬의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감상 할 수 있도록 기획되었습니다.
전시는 1부 〈한국의 전통카펫, 길잡이〉 , 2부 〈모담, 조선의 카펫〉, 3부 영상존 〈새와 꽃, 방안으로 들어오다〉로 구성하였습니다.
1부에서는 모담의 명칭과 개념을 이해할 수 있도록 옛 문헌에 나타난 기록과 제작기법, 재료와 관련된 일반적인 정보를 다룹니다. 2부에서는 17~18세기의 초상화에 표현된 모담에서부터 20세기 초 서양에서 수입된 양탄자까지 그 흐름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특히 18~19세기에 일본에 전래된 조선의 모담, 조선철이 집중적으로 소개됩니다.
‘조선철(朝鮮綴)’은 일본에서 조선의 모담을 부르는 명칭입니다. 조선철은 17세기 무렵 조선통신사를 통해서 전래된 것으로 추측되며, 교토[京都] 기온마쓰리[祇園祭]의 수레인 야마보코에 장식되었습니다. 이번 전시에는 최근 구입한 국립대구박물관의 조선철 11점이 처음 공개될 예정입니다. 마지막 3부에서는 모담에 나타난 다양한 무늬들을 주제로 한 영상을 선보입니다. 모담의 무늬는 한국적인 소재이면서도 간결한 선과 색감, 면의 분할과 비례감 등이 현대의 디자인 감각과도 통합니다.
이번 전시는 무료로 관람할 수 있으며, 국내에서는 접하기 힘든 조선의 카펫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만드는 방법
카펫은 태피스트리Tapesty와 컷파일 Cut Pile의 두 가지 기법으로 만듭니다. 첫 번째 태피스트리 기법은 날실(세로실)에 면실, 씨실(가로실)에 털실을 사용하여 평직으로 짜는 방법입니다. 무늬가 있을 경우 무늬가 시작되는 부 분에서 실의 색을 바꿔서 직조합니다. 두 번째 파일은 씨실로 매듭을 만든 후 매듭의 가운데나 특정 위치를 잘라내는 기법입니다. 이 방법을 사용하면 카펫의 표면이 털가죽처럼 표현됩니다.
재료
모담은 날실(세로실)에 면실, 씨실(가로실)에 털실을 사용하여 만듭니다. 현재까지 분석된 연구결과에 의하면 씨실에는 염소와 산양의 털을 사용했습니다. 동물의 털은 다른 굵기와 질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동물의 몸을 덮고 있는 바깥쪽 털은 굵고 단단하며, 안쪽 털은 가늘고 부드럽습니다. 일반적으로 안쪽의 털만을 모아서 실을 만듭니다. 이번에 전시된 모양은 거친 털과 가는 털의 두 가지 형태를 모두 사용하여 만들었습니다. 이는 생산지의 특성상 털을 구하기 힘든 곳이거나 지역적 특징 이 반영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공간과 카펫
주거환경과 벗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유럽 벽난로를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벽난로는 열기가 위로 퍼져 올라가기 때문에 바닥은 상대적으로 차갑습니다.
따뜻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바닥에 카벳 같은 깔개를 두고 바닥보다는 의자에 앉는 입식 생활이 더 유리합니다.
반면 온돌은 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열로 인해 따뜻한 공기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습니다. 온돌 구조에서는 두꺼운 모직물이나 장막을 두를 필요성이 줄어들고, 좌식생활이 적당합니다.
조선에서 집안 전체에 온돌이 널리 보급된 시기는 17세기 이후로 의외로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많은 연구자들은 온돌의 보급이 주거환경과 취사도구 등 조선의 생활문화를 획기적으로 바꾼 것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운동이 보급되기 전에는 평상이나 낮은 의자 장막 등이 일반적인 생활 모습이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온돌의 설치가 보편화되면서 조선에서는 모담의 사용이 줄어든 게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조선의 카펫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기록에는 혼인 때 사라능단紗羅綾緞과 계담罽毯 사용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계와 담이 일상에서 많이 사용된 것으로 생각 됩니다. 숙종 39년(1713) 초상화를 제작하고 봉안하는 논의 과정에 채담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 모담이 다양하게 사용되었지만, 일반인들은 쉽게 사용할 수 없는 귀한 물품이었습니다.
조선 초기 모양의 실물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17세기 관복 차림의 초상화에서 살짝 엿볼 수 있습니다.
18세기에는 모담이 거의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해 화문석이 나타납니다. 사라졌던 모담은 1880년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초상화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20세기 초에 유럽에서 수입된 양탄자가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요?
7세기 조선의 학자 조경趙儆(1586-1669)의 초상화이다. 호랑이 흉배가 있는 단령을 입고 있으며, 바닥에는 모담으로 추정되는 깔개를 깔았다. 조선의 모담을 볼 수 있는 중요한 회화이다.
조선 초기 모양의 실물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17세기 관복 차림의 초상화에서 살짝 엿볼 수 있습니다.
18세기에는 모담이 거의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해 화문석이 나타납니다. 사라졌던 모담은 1880년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초상화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모담에서 양탄자까지
繡幕深深畵毯重 龍爐鳳炭發春紅
(서거정徐居正 ‘동문선東文選 권20’ 고려 시인 진온陳溫이 사계절을 노래한 시의 일부)
색색의 모담을 깔고
둘레에 수놓은 장막을 두릅니다.
화로에는 숯불이 봄꽃처럼
붉게 피어오릅니다.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 초기까지 학자로 활동했던 서거정(1420-1488)은 그가 쓴 “동문선”에서당시 겨울철 실내 모습을 종종 묘사하곤 했습니다. 이 장면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온돌 한옥의 모습과는 달랐습니다. 실내가 온돌로 되어있다면 바닥에 두꺼운 모담을 깔 필요가 없고 따뜻한 공기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때문에 장막도 필요 없습니다. 온돌 한옥에는 창호지를 바른 문과 기름종이를 바른 바닥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초상화를 보면 바닥 깔개가 조금씩 달라집니다. 깔개의 재질과 두께가 달라졌다면 주거 환경의 변화와 관련지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당시의 시기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점들이 있습니다. 역사 연구자들에 의하면 전면 온돌이 일반화된 것은 17세기 이후로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17세기 인조대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궐 안과 밖의 증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인조실록 1년(1623) 3월24일. 2년 3월 5일 등)
<온돌 중심의 주거환경 변화와 국가에 의한 규제(성종 3년(1472). 중종36년(1541). 현종 1년(1660)> 등으로 인하여 모담의 대중화가 쉽지 않았음을 감작할 수 있습니다.
이 모담은 다섯 마리의 학을 중심으로 주변에 복숭아. 국화. 매화. 등을 배치했다. 꽃들은 화분에 담겨있는 '분재' 형태로 호족虎足이 달린 화려한 탁자 위에 올려져 있다. 이 분재 도안은 조선 후기에 유행한 것으로 당시 회화나 청화백자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나타난다.
구획을 나누어 색을 다르게 하여 천을 짠 후, 그 위에 붓으로 그려서 표현했다. 산과 누각, 꽃과 나무들이 어우러진 충경을 배경으로 사자들이 공을 가지고 장난스럽게 놀고 있다. 공은 '수구繡球'라고 하는 깅상 문양의 한 종류이다. 두 마리의 사자가 수구를 가지고 놀면 털뭉치가 생기고 그 안에서 어린 사자가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가 있다.
나비. 박쥐 무늬 모담은 날실(세로실)에 면실. 씨실(세로실)에 털실을 넣어 짰다. 또, 씨실에서 매듭을 지은 후 가운데 부분을 잘아내는 컷파일 기법을 사용했다. 색상별로 실의 길이가 다르므로 표면에 요철이 생기게 된다. 따라서 보는 각도에 따라 입체적으로 보이는 효가 있다.
보배무늬는 일상에서 볼 수 있는 기물 중에 행운을 주는 상징물을 간단한 무늬로 도안화한 것이다. 이를 팔보문八寶紋이라고 한다. 이 모담에는 부채, 서책, 파초, 여의 등이 보인다.
위 아래의 줄무늬와 학 부분은 실로 짜고, 꽃과 새, 식물들은 붓으로 그려 표현했다. 조선 후기에는 화초를 키우며, 자연을 감상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모담을 비롯하여 접시나 화병등을 실내를 장식할 수있는 공예품에 식물을 주제로 한 무늬를 자주 그렸다.
이 모담은 염색한 실로 천을 짠 후 그 위에 붓으로 무늬를 그렸다. 공을 밟고 있는 사자를 중심으로 아홉 마리의 사자와 꽃, 나비 등이 주변에 있다. 끝단에는 卍자문과 보배무늬를 연속으로 구성했다.
일본으로 건너간 모담, 조선철朝鮮綴
일본에서는 조선의 모담을 조선철朝鮮綴라고 부릅니다.
조선철朝鮮綴은 교토 기온마쓰리에 사용되는 수레인 야마보코를 장식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기온마쓰리는 매년 7월에 열리는 큰 축제로 66개의 수레를 만들어 행차를 합니다.
수레는 조선을 비롯하여 국·유럽·인도 등 여러 지역에서 가져온 직물로 장식을 합니다. 오늘날 일본에는 조선의 모담으로 밝혀진 상당수의 유물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조선의 모양은 17세기에 조선통신사를 통해 일본에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제작되어 어떤 경로로 전해졌는지는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습니다. 에도시대 (1600-1868)에 일본과의 교류를 회복한 후 본격적으로 직물의 수출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때 일본에 보내는 물품 중에 모담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