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사랑 & 산사람> 서울 도봉산
조선시대 상인이나 여행객들의 숙소였던 원(院). 원은 보통 30리 간격으로 세워졌다. 인마(人馬)의 보행 속도와 맞추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원칙에서 비켜선 곳이 있으니 바로 도봉산이다. 양주, 의정부 쪽 동쪽 사면엔 원이 5리(里)마다 들어서 있다. 무수원(無愁院), 다락원(多樂院), 장수원(長水院)···. 이름마저 로맨틱한 상호들은 공무(公務)와는 무관해 보인다. 무엇일까. 이 밀집의 비밀은? 교통의 요충지였다는 점만으로는 풀리지 않는 의문. 아마도 요산요수(樂山樂水)의 인간 본성이 이런 기형(?)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한북정맥 끝자락, 3개 지자체 경계=백두대간 분수령에서 산맥을 일으켜 강원도 금화, 경기도 포천을 달려온 한북정맥은 양주에서 기맥(起脈)하여 불암산과 수락산을 일구고 서쪽으로는 도봉산과 북한산을 밀어 올렸다.
도봉산은 이웃하고 있는 북한산과는 하나의 지맥으로 연결되며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대동여지도에 보면 도봉산은 북한산과 더불어 삼각산의 한 부분으로 인식 되었다.
면적은 24㎢. 봉우리 정상 부근을 기준으로 서울시 도봉구, 경기도 의정부시, 양주시 세 지자체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여수 영취산에서 화신(花信)을 띄운 진달래가 북상을 서두를 즈음 취재팀은 도봉산으로 향했다. 원도봉탐방센터로 가는 길, 망월사역에서는 등산객 물결이 쉴 새 없이 쏟아진다.
수도권으로 등산을 와본 사람이라면 사통팔달로 펼쳐진 도시철도망에 주눅 들어본 경험이 한번 쯤 있을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수도권의 명산들이 모두 도시철도로 통한다는 점이다. ‘불수도북’에서 ‘강남 7산’까지 모두 도시철도로 연결된다. 철도 입지에 교통, 상권, 학군 외 등산코스까지 별도로 고려했다는 증거다.
오늘 일정은 원도봉유원지-망월사-포대능선을 타고 자운봉, 신선대로 오른 후 다락원능선으로 내려오는 코스로 잡았다. 청명, 한식을 지난 산길, 아직 계곡물은 차고 신록의 채도도 옅다. 막 잠에서 깨어난 나무들은 연둣빛 순을 피워 올린다. 황량한 산길에 봄의 전령 생강나무와 진달래만 화려한 컬러를 펼친다.
◆‘망월사 결사’통해 선불교 크게 진흥=망월사로 오르는 원도봉계곡은 상춘객들로 북적인다. 천년고찰 망월사 까지는 급경사의 연속이다.
한 시간쯤 올랐을까. 아름드리 전나무 한그루 뒤로 고운 단청을 입은 망월사가 일행을 맞는다. 낙가보전(洛迦寶殿)의 역동적인 추녀선 뒤로 도봉산의 바위들이 멋진 배치를 이루었다.
천봉선사 탑비 옆에 있는 천중선원(天中禪院)은 경내에서 가장 풍광이 빼어난 곳. 일제 강점기 용성 스님은 ‘망월사 결사’를 통해 당시 몰락했던 선불교의 전통을 이곳에서 일으켰다. 그 뒤를 이어 만공, 한암, 춘성 스님 등 당대의 선승들이 선맥(禪脈)을 이어갔다.
다시 일행은 망월사 뒷길을 오른다. 15분 후 사패산으로 빠지는 능선과 만나고 왼쪽으로 내려서면 포대능선이 이어진다. 포대능선은 도봉산의 주봉인 자운봉에서 북쪽으로 뻗은 능선. 능선 중간에 대공포 진지인 포대(砲隊)가 있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제 산은 본격적으로 암봉을 펼쳐 놓는다. 산 아래서 막연히 올려 보았던 암릉들은 이제 속살을 펼쳐 놓으며 산객들의 눈길을 잡아끈다. 도봉산의 명물 오봉(五峰)도 멀리서 정겹다. 우이령 너머 북한산 백운대도 박무 속에서 모습을 들어낸다. 포대능선은 오르내림이 긴박하다. 산길 내내 철계단과 로프가 이어진다. 가파른 외줄을 타느라 숨이 턱턱 막혀 오지만 이런 험한 비윗길을 포신(砲身)을 들고 올랐을 포병들을 생각하며 위안을 삼는다.
아직 곳곳에 벙커, 토치카가 그대로 남아있다. 정상 부근 토치카에서는 등산객들이 한가로이 휴식을 즐긴다. 격세지감이다. 진지가 시민 품으로 돌아오면서 냉전시대 유물들은 이제 등산객들의 사사로운 공간이 돼버렸다. 술자리로 은밀한 데이트 장소로.
포대능선 끝자락에 선다. 희미하던 북한산 백운대 윤곽이 한층 또렷해졌다. 바로 눈앞에 도봉산의 세 명물 자운봉, 만장봉, 선인봉이 병풍처럼 둘러섰다. 자운(慈雲)은 불가에서 상서로운 기운을 뜻하고, 만장(萬丈)은 수천길 깎아지른 절벽이니 과연 선인(仙人)들의 영역이라 하겠다. 서울 사람들이 도봉산을 소금강으로 부르며 아끼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벼랑서 롤러코스터 타는 듯 짜릿한 Y계곡 스릴=식사 후 Y계곡으로 향한다. 협곡 사이에서 롤러코스터를 타듯 요동치는 계곡은 도봉산이 준비한 선물이다. 입구엔 벌써 스릴을 즐기려는 산객들이 긴 줄을 이루었다. 쇠 난간을 잡고 더듬더듬 내려간다. 로프에 의지해 겨우 바닥에 닿는다 싶으면 칼날 같은 절벽이 어느 새 눈앞을 막아선다. 바위틈에 기대 잠시 숨을 고른다.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요란하다. 난간에 매달려 겁에 질려있는 여성들도 있다. 아마 이들에겐 오늘 이 코스가 ‘세상에서 가장 긴 200m’로 기억될 것이다. 어쩌랴. 비경은 도전하는 자에게만 허락되는 보상인걸.
수직으로 난 바위를 네발로 겨우 올라 마침내 정상 난간을 잡았다. 기쁨도 잠시 다시 올라야할 신선대가 눈앞에 아찔하게 서있다. 계곡 탈출을 향한 엑소더스 행렬을 뒤로하고 일행은 다시 신선대로 향한다. 신선대는 도봉산에서 일반인이 오를 수 있는 최고봉이다. 줄을 서고 한참을 기다린 끝에 겨우 발 한 칸을 정상에 딛는다. 장엄한 ‘불수사도북’ 능선이 멀리서 산너울로 일렁인다. 방 빼달라는 뒷줄의 아우성에 밀려 내리막길로 들어선다.
하산 길은 다락원능선으로 잡는다. 조선 시대 이곳은 길손들의 휴식처 원(院)이 있던 자리. 다락원능선 이름도 여기서 유래됐다. 원도봉유원지 입구에 엄홍길 대장의 생가 터 가 있다. 엄 대장은 식당을 하던 부모님과 이곳에서 37년을 살았다. 유년시절 소년 엄홍길은 도봉산을 오르내리며 산악인의 꿈을 키웠다. 중학교 시절 바로 입구에 있는 두꺼비바위에서 오버행어(over hanger)를 해냈을 정도로 발군의 실력을 자랑했다고 한다.
다시 다락원 터를 더듬어 본다. 여기 대로변 어디 쯤 옛 아전들의 휴식처가 있었으리라. 의정부-양주는 옛날 경기와 서울을 이어주는 교통로. 들머리인 원도봉유원지도 장수원이 있던 자리다. 다락(多樂), 무수(無愁), 장수(長水). 이름도 다분히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이 이름들은 관청의 사무나 상무(商務)와는 영 거리가 멀어 보인다. 처음부터 휴양과 오락을 염두에 두고 세워 졌음에 틀림없다. 요즘으로 치면 연수원이나 리조트쯤 되려나.
◆교통=경부고속도를 타고 판교에서 서울외곽순환도로 갈아탄다. 의정부IC에서 내려 망월사역 원도봉매표소 쪽으로 진행한다. 지하철을 이용할 땐 1호선을 타고 망월사역에서 하차.
◆맛집=▷연담정(031-873-2586)=의정부시 호원1동, 한정식. ▷오리야(031-873-7773)=의정부 호원동, 닭·오리고기. ▷원도봉감자탕(031-873-7830), 신흥대학 근처, 감자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