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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왜구토벌의 전략과 전술 : 사근내역전투와 황산전투를 중심으로 中 ─ 이상훈, 군사연구 134호 |
지원군으로 도착한 다음날 아침 바로 출발하여 동쪽으로 이동한 이성계는 높이 477미터의 여원치(女院峙) 고개를 넘어 운봉(雲峰)에 이르렀고, 운봉 분지를 지나 황산 서북쪽에 도달하여 정산봉(鼎山峰)에 올라 적진을 살폈다. 이 시점에서 이성계와 일본군의 거리는 수십 리 정도의 거리였다.
"적군은 반드시 이 길로 나와서 우리의 후면(後面)을 습격할 것이니, 내가 마땅히 빨리 가야 되겠다."
적진을 살피고 계획을 세운 이성계는 그렇게 말하며 정산봉 오른쪽의 작은 길로는 자신이 부대를 이끌고 나아가고, 대신 나머지 부대는 평탄한 길로 나아가게 했다. "후면을 공격할 것이다." 는 이성계의 언급을 보았을때, 이는 고려군이 평탄한 길로 나아갔을때 왜구가 퇴로를 차단하고 배후를 공격하려고 하는 점을 예측하고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정산봉은 황산의 한 줄기로 황산 동북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성계가 나아간 정산봉 오른쪽의 길은 고려군을 기준으로 볼 때 황산의 동쪽 자락에서 동북으로 난 길로 추정되며, 평탄한 길은 정산봉 오른쪽의 동무와 서무로 이어지는 길로 추정된다.
동무와 서무 방향으로 나아간 고려군의 여타 병력은 조금 전진을 하다가 강력한 적군의 기세를 보고는 무리하지 않고 우선 물러났다. 그 무렵, 왜구들은 반대편의 길을 통해 재빠른 기병 등을 동원해 고려군의 뒤를 잡으려고 움직였다. 그러나 이는 이성계의 예측대로였기 때문에, 왜구의 기병들은 고려군의 뒤를 치지 못하고 그 길로 오고 있던 이성계와 교전 할 수 밖에 없었다. 고려군의 병력이 둘로 나뉘었는데 이성계가 자신의 친병을 다른 장수에게 맡길리가 없으니 이 당시 왜구 기병과 교전했던 고려군은 이성계의 친병 위주로 생각된다. 이성계가
여진족 사이에 영향력이 막대하였다는것은 잘 알려져 있고, 실제로 여진 기병을 동원했던 사례도 확인이 되는 만큼 이 싸움은
여진 기병 VS 왜구 기병 이라는 희한한 상황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이 싸움에서 이성계는 자신이 직접
활을 잡고 대우전(大羽箭)과 유엽전(柳葉箭) 수십 발을 쏘아대며 왜구를 죽였다. 이렇게 벌어진 난전은 3차례를 이어졌는데, 나중에 이르러서는 진흙탕에서 교전을 벌였다. 좁은 오솔길에는 크게 교전을 벌일만한 뻘판은 없으므로, 이 싸움은 3번을 싸우면서 이성계가 적을 점점 평탄지로 유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앞서 평탄한 길로 나서다가 회군한 고려군이 합세하여 같이 싸울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되니 고려군의 뒤를 치려던 왜구를 오히려 고려군이 협공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렇게 뻘판에서 난전을 벌이며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싸우다가 어느정도 적을 물리치고 뻘에서 나와보니, 대부분의 사상자는 왜구들이었고 고려군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앞서 평탄한 길로 가던 고려군이 회군하던 무렵에 해가 기울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이때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기 힘들었다는 것을 보면 이 싸움은 저녁에까지 치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 등에서는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모두 소탕해버렸다." 는 식으로 되어 있는데 여러 정황을 보면 이는 실제하고는 좀 다르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후에 이성계가 하늘의 해를 가리켰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미 진 해를 가리킬 순 없으니 전투가 이틀에 걸쳐 벌어진 것은 확실하다.
관련 기록에서는 특별히 날짜의 변경을 가리키는 기록은 없으니 저 해에 대한 기록을 보면 날짜 변화를 알 수 있다. 첫째날에 벌어진 싸움에서 고려군은 왜구의 기병을 되려 역습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이렇게 되자 왜구는 험준한 위치를 살려 굳게 버티고만 있으면서 싸우려고 하질 않았다. 이후의 기록을 보면 왜구는 고려군보다 높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으니 참 공격하기 뭐한 상황이었다.
당시 왜구를 이끌던 대장은
아기발도(阿其拔都)라는 자였다. 아기발도는 나이는 그리 많지 않았으나 굉장히 용맹해서 여타 왜구들이 두목으로 모시며 데려온 것. 아기발도는 이성계의 포진을 보자 "저 작자가 보통 놈이 아니니 주의해야 하겠다." 고 말했다. 이성계가 거느리고 있던 친병들은 보통 전투력이 아니었을테니 여타 고려군과 다른 면모가 보였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러자 이성계는 일단 요해지에 군대를 배치한 후, 적을 끌어내기 위해 휘하의 이대중(李大中) 및 10여명을 시켜 싸움을 걸었다. 그렇지만 이후 기록에서 적이 계속 위에서 내려치는 포지션에 있는것으로 봐서는 별 소득이 없었던 모양.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성계는 직접 적을 보며 군대를 동원해 아래서부터 쳐올리게 했지만, 왜구들도 자신들이 현재의 지리적 이점을 잃어버리면 꼼짝없이 죽는것을 알고 있었을테니, 도저히 쉽지가 않았다. 왜구도 죽을 힘을 다해(死力) 버티며 위에서 공격을 퍼부어대니 고려군도 당해날 방법이 없었던것. 이렇게 되자 고려군은 교전에서 패배를 당하고 다시 내려와야 했다. 이성계는 그 모습을 보고 여타 장수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말고삐를 단단히 잡고 말을 넘어지지 못하게 하라."
이런 말까지 할 정도면 꽤나 지리적 여건이 불리했던 모양. 조금 시간을 두고 지켜 본 이성계는 다시 한번 공격을 시도했다. 나팔을 불어 군대를 정돈시킨 이성계는 다시 한번 적진과 부딫혔다. 고려군은 마치 개미가 절벽에 붙어 가듯 어렵게 어렵게 공격을 했는데, 이성계 역시 직접 나섰다.
그런데 한참 그렇게 험지에서 난전이 벌어지던 중에, 왜구의 장수 한명이 창을 들고 이성계에게 다가가고 있자
이지란(李之蘭)은 깜짝 놀라 이성계에게 소리쳤다.
"영공(令公) 뒤를 보시오! 영공 뒤를 보시오!"
그러나 한참 난전 중인 이성계는 전장의 소음 때문에 이 소리를 미처 듣지 못했다. 그러자 이지란은
직접 활을 쏘아 그 장수를 죽였다. 자신이 죽을 뻔한 위기도 알지 못했을 정도니 당시의 이성계는 정말 정신없는 상황이었다. 타고 있던 말이 적의 표적이 되어 쓰러지자 이성계는 급하게 다른 말을 탔으나,
바꿘 탄 말도 또 화살에 맞아 쓰러져 또다시 말을 거푸 바꿔야 할 정도였다. 그런 상황이니 이성계 본인도 적의 공격에 노출되어 적의 화살에
왼쪽 다리를 맞고 만다. 관련 전투 기록에서 본인의 무용 + 창업자 버프로 절대무적으로 나오는 이성계가 적에게 당하는 몇 안되는 기록 중 하나.
하지만 이성계는 억지로 화살을 뽑아내고 참고 일부러 더 열심히 싸워서, 여타 병사들은 이성계가 부상당한 줄을 몰라 사기에는 문제가 없었다.
여하간 그야말로 난전이었다. 그런 난전 중에 섞여들어가 죽어라 싸우다보니 이성계도 적에게 포위되곤 했지만, 그럴때마다 주변의 기병들과 힘을 합쳐 돌격을 해서 충격력을 사용해 포위에서 돌파하곤 했다. 게다가 워낙 괴물같이 싸워 적을 죽여대자 적도 주춤해서 이성계에게 잘 달려들지를 못했다. 그렇게 힘들게 싸우면서 조금 여유가 생기자 이성계는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하늘의 해를 가리키며 맹세하고 주위에게 소리쳤다.
"겁나는 사람은 물러가라! 나는 적에게 죽을 것이다!"(怯者退 我且死賊)
장수가 저러는데 옆에서 "예, 저는 겁나니 도망가겠습니다."(……) 할 사람은 없을테니, 같이 싸우는 고려군도 힘을 내면서 싸웠다고 한다. 그런데 고려군이 이성계의 분투로 힘을 낼떄, 왜구의 기세도 보통은 아니었다. 이성계처럼 적의 대장 아기발도가 여기저기서 날뛰며 흰 말을 타고 돌격하자 기병의 충격력에 여타 고려군은 계속 당했고, 이게 반복되다보니 고려군은 아기발도가 보이기만 해도 물러나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 아기발도가 하도 잘 싸우자 이성계는 그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감탄해서 이지란에게 사로 잡을 수 없겠느냐는 말을 했다. 사실 이성계는 일전에도 적이었던
처명(處明) 등을 항복시켜 부하로 만든 경험이 있어서 그런 목적에서 물어본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전투도 워낙 치열한 난전이었고 기마에 탄 아기발도가 마음대로 휩쓸고 있는 지경이라 그런 짓을 할 틈이 없었다. 이지란은 "그러려면 사람이 많이 상할 겁니다." 라면서 어렵겠다는 말을 했고, 이성계는 아기발도를 어떻게 할 생각을 포기하고 없애려고 했다.
하지만 말에 타서 마음껏 날뛰고 있는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에 아기발도는 중갑옷을 차려 입고 있어서 활을 쏘아 맞추기 어려웠다. 그러자 이성계는 이지란에게
"내가 저 녀석 투구 꼭지를 쏠 테니까, 니가 마무리 해라." 라고 말하고
그대로 아기발도의 투구꼭지를 쏘아 맞췄다. 투구 끈이 끊어진 아기발도가 다시 투구를 고쳐 쓰려고 할때 이성계는 화살을 쏘며 적을 방해하면서 주의를 끌었고 노리고 있던 이지란은 화살을 쏘아
저격에 성공, 아기발도를 죽여 버렸다.
무협지 같은 일이 벌어지자 왜구의 사기도 크게 꺾였다. 난전은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었지만 전투의 분위기는 완전히 넘어가버렸고, 이성계가 직접 휘저어대자 대장을 잃은 적은 변변한 반항도 해보지 못하고 정예군을 속절없이 잃었으며, 여기까지 이르자 전세는 결정나서 왜구는 아비규환이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고려군은 적이 붕괴하는 통에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며 완전히 사기가 올라 진격, 또 진격했다. 사면에서 공격했다는 언급이 있는것으로 보아 대다수 왜구들은 도주에 실패하고 포위되어 살육 당한 듯.
마침내 고려군은 왜구를 완전히 포위 - 섬멸하였다. 백여명도 못 되는 병력만이 간신히 지리산으로 도망쳤을 뿐이다. 이성계는 그 남은 왜구에 대해서는 "어차피 적의 정예군은 다 섬멸했다." 며 추격하진 않았다. 워낙 대살육이 벌어진 통에 냇물이 모두 붉어 6, 7일 동안이나 빛깔이 변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물을 마실 수가 없어서 모두 그릇에 담아 맑기를 기다려 한참 만에야 물을 마시게 되었다. 말을 1천 6백여필을 얻고 무기(武器)를 얻은 것은 헤아릴 수도 없었다.
첫댓글 왜구가 저정도였군요
왜구가 한지역으로 집결한것이 오히려 고려군으로선 토벌을 용이하게 했던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기병의 규모를 보니 단순히 해적때는 아닌듯! 실제 일본 본토에서 건너온 정규부대로 보는 시각도 있죠.
당연하죠.. 어찌 저 규묘가 왜구가 될수있는지.. 정규부대임.
@하히해 근데 전투력하고 규묘만보면.. 이게 왜구라고 할수가 있는지 모르겠네요...너무 많아
삭제된 댓글 입니다.
쿠데타랑 전쟁능력 및 무공은 별개죠 ㅠㅠ
무공=>정변의 명분 이건좀 아닌것 같네요.
@多爾袞 22
무공세우면 나라 차지할수 있다면 이순신은 나라 세번 세워야겠네요
1367년부터 1369년11월 전까지는 왜구 침입이 없는데, 그때 고려에서 사신을 보내고 막부휘하에 있던 쇼니씨를 단속했기 때문에 그랬다는 견해가 있더군요
-14세기의 동아시아 국제정세와 왜구- 이영 근데 이 논문에서는 다시 침입이 시작되는 이유가 침입이 있기전에 대마도 소우씨세력이 정치적입장을 남조로 바뀌는 것을 근거로 북조는 고려사신 거짓말에서 쫄아서(있지도 않는 원나라 정동행성 명의로 사신을 보내서 북조가 쫄았고 그때문에 왜구를 단속하려고 했다고 주장)왜구를 단속하려고 했는데 그것에 반발해서 대마도 소우씨세력이 남조로 입장을 바꾸었고 그 이후 왜구 침입이 재개 된다는;;
근데 왜 저 다큐에서는 백마가아니라 흑마를 탄 그림을 썼지?????? ㄲㄲ
저건 왜구가 아니라 정규군임..왜구라면 도적이라고 생각하는데 규묘를 보면 군대임
저 정도 규모면 정규군인데요;;;; 왜구 따위가 아니라 그냥 정규군입니다;;
충짜 돌림 왕들이 주색만 탐하진 않았는데 -_-ㄱ 충렬, 충선왕은 업적이 꽤 있습니다.
글쎄요;; 충선/충렬왕은 자기들이 서로 고려국왕하겠다고 원에 알랑거리던 국왕들인지라..........
그건 아비와 자식간의 정치적 싸움에서 일어난 이권 다툼입니다. 그런 정치적인 점을 접어두고 따져보면 생각보다 한 게 많아요. 특히 충선왕은 왕위에 올랐을 때 다양한 정치기구를 신설해서 보다 혁신적으로 개혁을 단행하긴 했는데 너무 급진적이라 충렬왕 세력에게 밀려서 폐위됩니다. 하지만 원나라에서 황제를 옹립하는 데 공을 세우면서 정치적 입지가 강성해져서 다시 고려국 왕위에 오르죠. 그러나 원나라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서 그런지 원나라 땅이 그리웠나 봅니다. 고려국엔 얼마 머물러 있지 않고 전지로 국정을 해서 점점 개혁정책이 신통치 않게 되었죠. 공민왕의 정책도 충선왕의 정책에서 영향을 꽤 받았습니다.
@춘자 다만 충선왕이 남긴 큰 문제점은 자기 자신이 심양왕과 고려왕이라는 두 개의 왕위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따로따로 나누어 줘서 후에 충숙왕의 개혁정책에 제동을 걸고 나아가 고려의 정치를 혼란스럽게 만든 점이죠. ㅉ 부마국의 왕의 한계와 정치적 투쟁으로 얼룩져서 결과적으론 그닥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왕은 아닙니다.
충선왕이 고려왕과 심양왕을 분리하여 상속시킨 것은 원나라 내부정세와도 연계가 됩니다. "한 제후왕이 두개의 왕작을 가진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문제가 되었었고, 그 문제를 제기한 자들은 고려출신의 부원배들이었어요...-_-;
@★海東天子☆ 아하? 그랬군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고지대에서 기병 충격력을 이용해 저지대의 적진 붕괴후 한타 싸먹기로 섬멸한줄 알았더니 역으로 고지대에 자리잡은 정예병을 정면공격, 적장 저격후 포위섬멸... 지린다 지려 ㄷㄷㄷ
여진기병과 왜구기병이라.. 기병전력은 고려쪽이 더 쌜거같은데..
이성계가 전투력은 확실히 -_-);;;
저건...왜구침략을 넘어서 유린이네요 뭔...전국팔도를 유랑한거도아니구;; 참심각햇군요 저당시..성계할아버님이 대단하시네요 근데자꾸 머릿속 떠오르는건 고 김무생.. 할아버지가;
함흥본궁이 아니라 '준원전'에 봉안되었던 어진일 겁니다...^^; 준원전의 어진은 본래 신하의 복색으로 그려졌던 것을, 후대에 왕의 복색으로 바꾸어 모사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어요. 만약 전자의 것이 그대로 남아있었다면 더욱 볼만했을 겁니다...ㅎㅎ;;
시골무사 이성계 읽어보니 퉁두란의 여진 기병들 포스 쩔던데.
미소녀ㄴ 전사 아기발도 =ㅁ=
어렸을땐 아기발도의 아기가 우리말인 아기같다는 뜻이었다고만 들었는데 나중에 발도는 용사를 뜻하는 바투라는 몽골말이라는 것을 알았죠. 저정도면 남조의 이름난 장수였을 텐데 일본이름은 뭐였을지가 궁금하네요
알려진 바가 없죠..ㅋ 아마 신분은 굉장히 높았을 거라는데 한 표 겁니다.
어디서 본 바로는 고려 원정 오고싶지 않았는데 밑의 신하들의 간곡한 청에 못이겨 참전했다고....
어느 섬에 살았는데, 참전에 부정적이었다가 주위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하들이 항상 아기발도 앞에서는 무릎으로 기어다녔다고 하니, 상당히 높은 신분으로 추정됩니다.
위키에 쓰신게 신불해님이었나.. 위기에서 참 재미있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