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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8일 연중 제27주일(군인주일)
제1독서 : 이사 5,1-7
제2독서 : 필리 4,6-9
복 음 : 마태 21,33-43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33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34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35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36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37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38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39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40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마크 배터슨(Mark Batterson)이 쓴 ‘올 인(All In)’이라는 책에는
선교사 밀른(A.W.Milne)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남태평양 뉴헤브리디스 제도의 원주민들이 사는 곳으로 선교를 떠났습니다.
사실 이곳은 원주민들이 앞서 파견했던 선교사 모두를 살해했던 곳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를 떠난 것입니다.
그에게는 주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혀 개의치 않고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오히려 자신은 이미 죽었다면서 자기 관을 싸 들고 갔다고 합니다.
결과는 35년 동안 원주민에게 살해당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과 함께 잘 살았습니다.
35년의 삶을 마치고 주님 곁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의 죽음 후, 원주민들은 그를 마을 한가운데에 묻고 다음과 같은 비문을 남겼습니다.
‘그가 왔을 때 빛이 없었다. 그가 떠났을 때 어둠이 없었다.’
세상의 빛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그리고 나 자신은 세상에 주님의 빛을 비추고 있느냐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사랑의 대상인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지 못한다면, 또 미워하고 판단하고 단죄하는 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면 빛이 아닌 어둠을 더 넓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선교사 밀른(A.W.Milne)의 35년 삶을 평가한 원주민들의 평가를 보며,
나의 삶을 모두 마치고 나서는 하느님께서 어떤 평가를 하실까를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나의 삶이 후회되지 않는 삶이 되도록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못된 포도밭 소작인들의 비유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맡겼지만, 소출을 주인에게 주지 않습니다.
소출을 받으러 온 종을 매질하고 또 죽이기까지 합니다.
더 많은 종을 보내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자기 아들을 보냅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없으면 상속 재산을 차지할 수 있다면서 죽여 버립니다.
이렇게 위험한 곳에 아들을 보내는 부모가 있을까요?
그리고 부모의 명령이라고 위험한 곳이라도 기꺼이 가는 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포도밭 주인도 또 그의 아들 역시 사랑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은 실제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임금들과 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맡기셨지만,
그들은 하느님의 계획을 거부하고 예언자들을 잡아 죽였지요.
심지어 외아들이신 예수님 역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만듭니다.
결국 소작인인 임금들과 사제들과 원로들을 내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포도밭을 맡기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뜻에 맞게 이 포도밭을 가꾸고 있나요?
혹시 자기 욕심만을 채우려는 생각에 주님의 사랑을 배신하고
못된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아버지의 뜻을 철저하게 따랐던 외아들 예수님처럼,
우리도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 순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인이신 주님께 인정받습니다.
오늘의 명언:
산을 움직이려 하는 이는 작은 돌을 들어내는 일로 시작하느니라(공자).
배은망덕하지 마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주십니다.
넘치도록 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물기를 바라십니다(요한15,9).
그래서 하느님은 미리미리 사랑의 질타를 하십니다.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가운데 주님과 일치를 이루는 기쁨을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1독서를 보면, 포도밭을 가꾸는 주인의 노고와 정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주인은 산등성이에 밭을 일구어 돌을 골라내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한가운데 탑을 만들고 즙을 짜는 포도 확까지 만들어 놓고
포도가 송이송이 맺기를 간절히 소망했습니다(이사5,1-2).
그러나 생각지도 않게 들포도가 열렸습니다(이사5,4).
온갖 정성을 다했건만 결과는 영 딴판이었습니다.
결국 주인은 울타리를 걷어내고 담을 허물어 망그러진 채 내버려 두게 됩니다.
순을 치지도 않고 김도 매지 않고 황폐하게 두어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덮인 채로 두게 됩니다(이사5,5-6).
이사야 예언자는 이 비유 말씀에서 포도밭은 이스라엘을 말하고 있고,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하지만 그렇지 못함을 지적합니다.
“내가 해 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란 말이냐?”(이사5,4).
하느님께서 사랑을 주시는 만큼 사랑을 열매 맺지 않는다면 그 자체가 황폐한 밭이라는 의미입니다.
복음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한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을 훌륭하게 잘 가꾸어 소작인들에게 도지를 주고 멀리 떠났습니다.
그러고는 추수철이 되어 그 도조를 받으려고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이 소작인들이 간이 부었는지 종들을 때리고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마침내 간이 배 밖으로 나왔습니다.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주인의 아들까지도 죽이고
그 포도밭을 통째로 먹어버리려고 했습니다(마태21,33-38). 그야말로 은혜를 원수로 갚았습니다.
그러니 그 주인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 소작인들은 욕심으로 화를 자초하여 죽고, 새로운 소작인이 포도원을 경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종들은 예언자요, 아들은 예수님이십니다.
하느님의 포도밭을 잘 가꾸어 소출을 내야 할 소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구원자로 보내셨으니, 구원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아무리 귀한 은총을 주어도 관리하지 않으면 그 권리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은 하느님의 심판이지만 자업자득입니다.
그러니 구원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지만, 결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주님께서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너에게 한결같이 자애를 베풀었다”고 (예레31,3)말씀하십니다.
또한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5,8). 그리고 마침내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에페2,4).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은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은혜에 대한 감사에 인색합니다.
하느님께서 모두를 다 주셨음에도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21,43).
결국은 걸맞은 삶으로 감사할 줄 모르면 죽음에 이르고,
소출을 내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받은 은혜는 돌판에 새기고, 베푼 것은 모래에 새겨라’ 했습니다.
우리는 거꾸로 사는 것이 아닌지요?
늘 하느님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갚기는 고사하고 스스로의 능력으로 이루었다고 잘난 체하며
하느님을 외면하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4,6-7)하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하면 그리스도의 평화가 선물로 주어집니다.
시편 50,14은 “사람이 하느님께 바칠 제물은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에페5,20).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면 감사할 수 있는 일이 생깁니다. 억지로라도 감사하십시오.
감사하면 감사할수록 감사할 수 있는 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자 하는 사람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행실로써 감사드려야 합니다”(성 필립보네리).
“모든 일이 당신의 생각에 가장 좋은 방향으로 되기를 바라지 말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되기를 바라십시오.
그러면 혼란에서 벗어나 기도 중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교부 실루스).
성경에서 감사를 드린 인물을 몇 명 보면,
아브람은 자기에게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던 자리에 제단을 쌓아 바쳐 감사를 드렸습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하느님께 바치며 기도를 올렸습니다.
“내 마음은 주 하느님 생각으로 울렁거립니다. 하느님의 은덕으로 나는 얼굴을 들게 되었습니다.
이렇듯이 내 가슴에 승리의 기쁨을 주시니 원수들 앞에서 자랑스럽기만 합니다”(공동번역. 1사무2,1).
다윗은 하느님의 궤를 예루살렘에 옮겨 모시고 번제와 친교제를 바친 다음
주 하느님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복을 빌어주고
아삽과 그의 형제들을 시켜 감사를 드리게 하였습니다(역대기 상16,7).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손을 들어 강복하시면서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신 다음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습니다(루카24,51-53).
예수님도 죽었던 라자로를 살리신 후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요한11,41).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감사할 일을 찾으십시오.
내가 숨 쉬고 있는 것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공짜로 숨을 쉬고 있으니 많은 빚을 진 것입니다.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감각도 은총입니다.
생각할 수 있고 말할 수 있으며 행동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은혜로움인지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감사해야 합니다.
이순간 미사를 봉헌하며 주님을 찬미할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잔소리 많은 아내를 보고 남편이 말했답니다.
‘여보, 나 부탁이 있는데 당신 벙어리가 될 수 없겠소?’
그러자 아내가 대답했어요.
‘나도 부탁이 있어요. 당신 귀머거리가 돼 줘요’
벙어리가 되어달라는 남편이 있어서 감사하고, 귀머거리가 되어 달라는 아내가 있어서 감사하고요.
아내나 남편이 계시지 않는 분은 그런저런 부탁 받을 일 없어서 감사하고요.
자식이 말썽 피우지 않고 잘 자라주어 감사하고, 말썽 피우는 자식이라도 있어서 감사하고요.
무자식이 상팔자라 감사하고…
아픔을 느끼게 만든 자식이 있어서 가슴이 찢어졌지만 그래도 나를 철들게 하니 감사하고…
부모님이 계셔서 감사하고……
감사합시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고 결코 배은망덕한 사람은 되지 맙시다.
무엇보다 자비를 베풀어 주시고 하늘나라를 선물로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소작인이 주인이 맡겨 주신 포도원을 잘 돌보지 않으면
주인은 다른 소작인에게 포도원을 맡긴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소작인의 비유를 들으면서 저의 경험이 생각났습니다.
1986년에 저는 군대에 입대했습니다.
자대배치를 받기 위해서 기다리는데 인사담당 장교가 저를 불렀습니다.
제가 신학생인 것을 알았습니다.
인사담당 장교는 자신의 아들도 신학생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저는 군종성당이라는 포도원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부덕함과 잘못으로 저는 3개월 만에
군종성당이라는 포도원에서 쫓겨났던 적이 있습니다.
군종신부님은 1년 뒤에 다른 병사에게 군종성당이라는 포도원을 맡겨 주셨습니다.
제가 부족했기에, 제가 잘못했기에 저는 군종 신부님을 원망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저를 따끔하게 혼내 주었기에 제가 남은 군 생활을 잘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군종신부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선량한 소작인들이 불의한 힘에 의해서,
독재자들에 의해서 포도원에서 쫓겨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는 ‘나봇’의 이야기입니다.
나봇은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포도원을 가꾸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합 왕’은 나봇의 포도원이 좋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돈을 주고 사려고 했지만 나봇은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포도원을 팔 생각이 없었습니다.
아합 왕의 아내 이사벨은 거짓과 선동으로 나봇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포도원을 빼앗아 아합 왕에게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봇의 억울함을 아셨고, 아합 왕과 이사벨에게 벌을 주었습니다.
해병대 수사단장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고 채상병의 사망사고를 조사했고,
경찰에 이첩하는 과정에서 ‘항명’이라는 죄목으로 보직 해임되었습니다.
억울함을 호소한 수사단장은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수사단장은 경찰에 이첩하는 과정에서 부당한 외압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수사단장의 해임을 주도하였던 국방부 장관은 해임되었습니다.
아직 결론이 나지는 않았지만 억울하게 포도원에서 쫓겨나는 사람이 없도록
철저하고도, 명확한 조사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2019년 교구에서는 제게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이라는 포도원을 맡겨 주었습니다.
어느덧 4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직원들과 함께 매주 신문을 발행하는 것이 주된 업무입니다.
미주 지역의 한인 성당을 다니면서 신문홍보를 하는 것은 저의 업무입니다.
무탈하게 신문 발행을 하고 있지만 구독자의 감소는 큰 고민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2년 동안 신문홍보를 다니지 못한 것도 원인입니다.
종이 신문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는 것도 원입니다.
구독자의 감소는 재정적인 어려움을 초래하게 됩니다.
직원들의 근무일 수 조정과 저의 급여 삭감으로 재정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자비를 청하며 좀 더 많은 곳으로 신문홍보를 다니려고 합니다.
후임 신부님에게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이라는 포도원을 잘 넘겨주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브루클린 한인성당’이라는 포도원도 맡겨 주셨습니다.
2020년 8월부터 미사를 하였으니 어느덧 3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제가 도움을 주려고 다녔지만, 오히려 저는 공동체와 함께 지내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포도원에는 때로 원하지 않는 일들이 생기곤 합니다.
분열의 씨가, 두려움의 씨가, 갈등과 걱정의 씨가 들어오곤 합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고 했습니다.
비에 젖지 않고 피는 꽃도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기도 한다면, 우리가 사랑한다면 그 어떤 시련도, 고난도, 아픔도
우리를 하느님과 맺어주신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포도원 소작인의 자세를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끝으로, 형제 여러분,
참된 것과 고귀한 것과 의로운 것과 정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은 무엇이든지,
또 덕이 되는 것과 칭송받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마음에 간직하십시오.
그리고 나에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을 그대로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께서 맡겨 주신 포도원이 있습니다.
우리의 몸, 가족, 이웃이 포도원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포도원을 잘 가꾸면 좋겠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말씀전례는 ‘포도밭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사야가 부르는 사랑의 연가(戀歌)인 제1독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임의 포도밭을 노래한 사랑의 노래를 내가 임에게 불러드리리라”(이사 5,1)
여기서, 포도밭을 공들여 가꾸는 '포도원 지기'는 하느님으로, '포도밭'은 유다 민족으로 비유됩니다.
그런데 포도밭을 사랑하는 포도원 지기의 사랑을 배반하고, 포도밭은 엉뚱하게도 들포도를 맺었습니다.
이에 포도원 지기는 사랑에 상처받고, 무너져 내리는 실망과 쓰라림에 빠졌습니다.
사랑이 배신당한 아픔에 어찌할 바를 몰라 비탄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를 격려합니다.
“아무 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운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필리 4,6)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찾아와
권위에 대해 따져 묻자 들려주신 세 가지 비유 중 ‘두 번째 비유’인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서는 '포도원 주인'의 믿음과 자비가 더욱더 도드라지게 드러납니다.
도조를 받으러 보낸 종들이 몇 번씩이나 무참히 맞고 죽는 배신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아들을 직접 보내주시기까지 믿음과 자비를 베풉니다.
이는 당신의 아들마저도 죽음을 당했지만, 끝까지 포도원을 포기하시지 않으시는
아버지의 무한하신 사랑을 드러냅니다.
곧 아무리 인간의 죄가 크다 하여도 인간의 죄를 뛰어넘는 하느님 계획의 초월성을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약점이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약점을 감추는 것이 문제요,
우리의 실수가 아니라 우리가 실수를 통해서도 배우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또 우리가 잘 모른다는 사실이 아니라, 모르면서도 아는 척하는 것이 문제요,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문제며,
우리가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이 아니라, 자신이 완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요,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완전을 요구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결국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을 밀쳐내고, 그분의 권리를 강탈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열매를 잘 맺은 포도밭이 되라고 하십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먼저 결실을 맺을 모든 준비를 우리에게 다 해 주셨습니다.
제1독서에서 보듯이,
“밭을 일구어 돌을 골라내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어서 한가운데 망대를 쌓고,
즙을 짜는 술틀까지도 마련”(이사 5,2)하여 주셨고,
복음에서 보듯이, “울타리를 둘러치고는 포도즙을 짜는 확을 파고 망대를 세워”(마태 21,33)
모든 준비를 다 해 주셨습니다.
이토록 우리의 죄가 아무리 크다 하여도, 우리의 죄를 뛰어넘는 당신의 큰 사랑이 있습니다.
이 큰 사랑으로 이제 구원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정적으로 보장되었다는
유대인들의 생각은 파기되고,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이 탄생한 것입니다.
이토록 당신께서 하시는 일을 참으로 놀랍습니다.
비유를 마치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태 21,42)
이는 비록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었지만,
오히려 그 죽음을 통해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펼쳐졌다는 역설의 신비를 가르쳐줍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신비요, 바로 인간의 죄를 뛰어넘는 하느님 계획의 초월성입니다.
우리 주 하느님의 크나큰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그 무엇도 그 누구도 결코 우리를 떼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이토록 주님께서 제게 하신 일은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
도망칠수록 저를 더 강한 사랑의 철창으로 꼭 가두시고,
제 안에 꿈틀거리는 반역을 멈추게 하십니다.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오히려 그를 통해 구원의 섭리로 이끄시며,
감춰 둔 사랑의 신비를 드러내십니다.
그러니 이제 도조를 잘 내는 소작인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을 밀쳐내고 그분의 권리를 강탈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탐욕으로 인해 주인의 아들마저도 죽이고 마는 악행과 배은망덕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오로지 그분의 뜻에 따라 좋은 결실을 내고,
그 풍성한 소출을 도조로 바치는 새 백성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태 21,42)
주님!
당신께서 제게 하신 일,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
도망칠수록 더 강한 사랑의 철창으로 꼭 가두시고,
제 안에 꿈틀거리는 반역을 멈추게 하십니다.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오히려 그를 통해 구원의 섭리로 이끄시며,
감춰 둔 사랑의 신비를 보여주십니다.
하오니, 주님!
언제나 제 머리 위에 당신 사랑을 두고, 당신께 속한 이로 살게 하소서! 아멘.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의 포도밭은 하느님께서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로 보살펴 주시는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한다(호세 10,1; 예레 2,21; 5,10; 6,9; 12,10; 에제 15,1-8; 17,3-10).
포도밭이라는 상징적 개념은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 맺어지는 혼인의 상징적 개념도 있다.
이사야서(5,1-7)는 상처받은 하느님의 사랑을 감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의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하느님께 대한 충실성이 표현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불의를 행하여
그 포도밭이 좋은 포도를 내지 못하고 들 포도를 즉 불의를 내고 말았음을 개탄하는 것이다.
이 포도밭 노래의 내용은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에서 거듭 강조하신다.
마태오는 이스라엘을 주님의 포도밭이라는 문학 형식으로 구원의 역사의 어떤 단계를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주인의 가장 사랑이 충만한 극적인 구세사의 마지막 여정은
상속권을 가진 당신 외아들의 파견이다. 아버지께서는 끝까지 구원을 위해 애쓰신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버리렸다.”(39절).
그래서 모든 것이 헛되이 되고 만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예고로, 그 죽음이 도시의 성 밖에서 이루어지리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되었을 때 그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고 질문을 던지심으로써
듣는 사람들이 이 극적인 사건과 연루되게 하신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과는 무관한 사건으로 생각하면서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41절) 대답한다.
이제 이 구원의 역사는 그리스도 자신을 통해,
그리고 불충실한 이스라엘 대신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해서라는 말은
“집 짓는 자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42절) 라는
시편 118,22-23을 인용하시어 하느님의 구원계획 중심에 당신이 계심을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의 계획을 무시하시며, 집 짓는 데에 쓸모없는 돌로서 버려진 그리스도를
당신의 새로운 구원의 건축에 쓰일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신다.
이것으로 그리스도의 죽음뿐 아니라, 부활의 승리를 예고하며
구원의 역사가 십자가를 통해 여정을 계속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구원의 역사는 교회라는 새로운 구원의 공동체를 통하여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43절).
즉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마태 3,8) 능력을 상실한 옛 계약의 백성 대신에
풍성한 열매를 맺을 하느님의 새 백성이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중단될 수 없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또한 교회를 통하여 계속 전진한다.
악한 소작인들은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아들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시고 그 포도원을 되찾으셔서 새 소작인들에게 주신다.
이스라엘 백성의 불충실이 하느님의 위대한 승리로 되고 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본질적 특성은 행동하는 데 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정통교리는 불충실한 이스라엘과 다를 것이 없다.
하느님의 나라는 올바른 실천적 행위 속에 현존한다.
주님 교회의 본체에 대한 믿음은 행동적 증거를 떠나 존재할 수 없다.
교회 공동체 안에 계시 된 구원의 은총은 새로운 생명에 대한 책임을 지고
풍성한 믿음의 결실을 내는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되기를 요구한다.”
(G. Barbaglio, I Vangeli, Assisi 1975, p. 472).
바오로 사도도 이 믿음의 행동적 차원을 강조하고 있다.
즉 신자들은 본성적으로 진실한 것, 올바른 것, 고상한 것들을 실행하라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것을 평가할 수 있는 사고능력을 갖춰야 하며,
이는 기도로부터 얻을 수 있다(필리 4,6-7 참조).
그리스도인의 행동적 신앙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의 구원을 위한 행동적 신앙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형제들과 더불어
인간 공동생활의 삶의 공통적인 가치와 요구를 실현해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항상 기도하면서 이 구원의 사업이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평가할 수 있는 사고능력을 갖춰야 하며, 이는 기도로부터 얻을 수 있다. (필리 4,6-7 참조).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행동적 신앙은
금욕주의 사상이나 순전히 인간주의적 사상이나 순전한 실천주의적 사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의 구원을 위한 행동적 신앙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수많은 형제와 더불어
인간 공동생활의 삶의 공통적인 가치와 요구를 실현해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항상 기도하면서 이 구원의 사업이 계속될 수 있다.
이러한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선수 교체당한 이스라엘 백성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축구 시합을 관전하다 보면 팀의 승리를 위해 탁월한 기량의 선수들도 중요하지만,
감독의 용병술도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감독은 냉철하고 객관적이어야 하고, 사사로운 개인적 감정이 휘말리지 말아야 합니다.
전반전을 뛰고 나서 그 결과에 따라 라커룸을 향하는 감독의 머릿속에는
벌써 여러 가지 생각들이 교차 됩니다.
오늘 컨디션이 좋지 않은 선수, 그래서 최대한 빨리 교체해 줘야 하는 선수는 누구인지?
그 포지션에 누구를 투입하면 좋겠는지, 등등.
그리고는 계획한 대로 가차 없이 교체를 실시해야 합니다.
교체 대상인 선수의 성격이 아주 과격해서,
아무런 죄도 없는 물병을 발로 걷어차거나 욕을 해도 개의치 말아야 합니다.
때로 팀워크 상승을 위한 선수 길들이기 차원에서 일부로 빼버리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낡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옛 백성과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 어떻게 교체되는지를 똑똑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반전에 출전했던 과거의 옛 백성들의 처신은 해도 해도 너무했습니다.
참다 참다 인내심에 한계에 도달한 하느님께서 즉시 선수 교체를 단행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으로부터 좋은 포도밭을 선물로 받았으나, 흥청망청 놀고먹고 마셨으며,
엉뚱한 곳에 신경 쓰느라 포도밭을 황폐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밭은 정직합니다. 주인이 조금도 관심도 가지지 않는데, 풍성한 소출은 절대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인의 아들까지 죽여 버린 포도밭의 소작인들은 이중적인 처벌을 받게 됩니다.
자신들이 임대한 포도밭은 다른 소작인들의 손으로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들을 죽인 결과로 주인으로부터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충실하신 하느님을 향한 반역과 불충실의 역사였습니다.
그 역사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예레미야 예언자 역시 이 부분에 대해 깊은 탄식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너희 조상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내 모든 종들, 곧 예언자들을 날마다 끊임없이 너희에게 보냈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순종하거나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목을 뻣뻣이 세우고 자기네 조상들보다 더 고약하게 굴었다.”(예레 7,25-26)
하느님의 말씀도 무시했던 그들은 메시아로 보내신 당신의 아들 예수님 역시 무시했습니다.
사악한 소작인들이 한 것처럼 아들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죗값을 톡톡히 받을 것입니다.
자신들에게 주어졌던 선물은 이제 새로운 시대 새로운 백성들의 손에 넘어갈 것입니다.
오늘의 비유 말씀은 심판의 말씀인 동시에 희망 가득한 약속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불의한 옛 백성들에게는 심판의 말씀이나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는 새로운 백성들에게는
구원과 기쁨을 주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옛 백성의 실패와 멸망은 새로운 아들이신 예수님을 처형함에서 절정에 도달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계약의 피로 인해 새로운 백성이 출범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인류 구원 계획은 이스라엘의 불충실과 실패로 인해 무산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영광스러운 부활로 인해 새로운 백성이 탄생한 것이고,
그 백성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영광과 구원이 선물로 주어질 것입니다.
주님 자비로 맺는 풍성한 포도 열매
염철호 사도 요한 신부
오늘 제1독서에서 봉독한 이사야 예언서는 하느님을 포도밭 주인으로,
이스라엘을 포도밭으로, 그 백성을 포도밭으로 비유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름진 산등성이에 포도밭을 하나 두고 계신데,
그 밭을 일구고는 포도나무를 심으셨습니다.
그리고 탑을 세우고 포도 확을 만드신 뒤 좋은 포도가 맺기를 바라셨습니다.
하지만 포도나무는 좋은 포도를 맺지 못하고, 들포도를 맺습니다.
그래서 포도밭 주인은 울타리를 걷어치워 뜯어 먹히게 하고,
담을 허물어 짓밟히게 할 것이며, 그 모든 것을 황폐하게 내버려 둘 것이라고 말합니다.(이사 5,1-7)
이 말씀은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사람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분께서는 그들을 정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라셨는데,
이스라엘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울부짖음과 불의함뿐이었습니다.
결국 하느님은 그들의 불행을 선포하십니다.
그들에게 남는 것은 포로로 끌려가는 것 뿐입니다.(이사 5,13)
실제, 이사야의 예언에 따라 이스라엘 집안은 폐망하고 모두 포로로 끌려가 버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와 같은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밭 임자이신 하느님께서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밭을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나십니다.
여기서 소작인들은 유다인들,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유다의 지도자들을 의미합니다.
드디어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임금은 자기 몫으로 소출,
곧 좋은 포도 열매를 받아 오라고 종들을 보냅니다.
여기서 종들은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파견하신 예언자들을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종들을 보자 매질하고 죽이며 괴롭힙니다.
주인이 아무리 많은 종들을 보내어도 그들은 계속해서 주인의 소출을 주려 하기보다,
그들을 때리며 조롱하고 죽입니다.
결국 주인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아들을 보냅니다.
그들이 자신의 아들 정도라면 존중해 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여기서 아들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하지만 소작인들은 주인의 아들을 죽이고,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고자 합니다.
결국, 주인은 소작인들을 처단해 버리시기로 작정하였다는 것이 오늘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이 비유 마지막에 예수님께서는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사람들이 내버린 돌로 놀라운 일을 하셨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소작인들, 곧 아들을 죽인 유다인들에게서 하느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게 될 다른 민족들에게 그 포도밭을 넘기셨다는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머릿돌로 하여 세워진
새로운 민족, 곧 포도밭을 넘겨받은 이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포도밭을 넘겨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그 포도밭을 잘 가꾸어 열매를 맺고자 합니다.
만약 우리가 포도밭을 잘 가꾸고 하느님께 그 소출을 바치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우리도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본래의 가지들을 아까워하지 않으셨으면,
아마 그대도 아까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로마 11,21)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은 하느님께서 유다인도, 우리도
당신의 자비로 다시 열매 맺도록 이끌어 주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옛 이스라엘도 포도밭을 빼앗겼지만
결국 되돌아와서 함께 하느님 나라를 상속받게 될 것입니다.(로마 11,25-32)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아무런 일도 할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에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를 잘 알려줍니다.
“참된 것과 고귀한 것과 의로운 것과 정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은 무엇이든지,
또 덕이 되는 것과 칭송받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마음에 간직하십시오.
그리고 나에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을 그대로 실천하십시오.”
이처럼 우리가 신앙 안에서 배운 바에 따라 살아갈 때
우리 모두는 참된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좋은 포도 열매를 풍성히 맺고,
하느님과 영원히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민동규 다니엘 신부 (갑곶성지 전담)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을 읽을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참으로 미련하다. 어떻게 주인을 거슬러서 아들까지 죽일 생각을 했을까?
어떻게 아들을 죽이면 그 밭이 자신들의 소유가 될 거로 생각했을까?
또 소출을 보내지 않으면 마지막에는 주인이 찾아오리라는 것을 정말 몰랐을까?
미련하다 미련해, 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복음을 읽고 우리가 모두 할 수 있는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아도 소작인들은 바보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바보 같은 일이 가끔은 우리에게 일어납니다.
소작인들이 포도밭은 자신의 것으로 생각했다면,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우리의 삶을 우리의 하루를 우리의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물론 맞습니다. 우리의 것입니다.
포도밭이 소작인에 의해 운영되고 키워지듯 오늘도, 삶도 우리의 것입니다.
그러나 포도밭도 우리의 삶도 모두 주인에게서 받은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주인, 하느님에게서 말입니다.
그것을 알고 살아가느냐, 그렇지 않으냐는 확연한 차이를 보입니다.
소작인들을 보면 잘 알 수 있겠지요. 그러나 소작인들은 어리석습니다.
우리는 소작인들이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서 정작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과연 오늘 하루에 감사하고 있는지, 또 하루를 살면서 하느님께 보낼 소출을 준비했는지 말입니다.
짧은 기도라도, 작은 사랑이라도, 용서와 이해, 봉헌이라도 준비했는지 말입니다.
하느님이 원하는 소출은 돈도, 어떤 결과도 아닙니다.
단지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는 것, 나의 주인으로,
그래서 그분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 사랑하려고, 용서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신이 주는 선물
일본에는 ‘아이누족’이라는 부족이 있다고 합니다.
이 부족은 이렇게 믿는다고 합니다.
신이 동물의 가죽을 쓰고 나타나서 사람에게 고기를 선물한다고 합니다.
즉 사냥의 명수는 사냥 기술이 좋은 사람, 혹은 용맹한 사람이 아니라
신앙심이 두터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신앙심이 두터운 사람의 활과 창에 신이 잡혀준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의 능력으로 자연에서 얻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사람에게 선물을 준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도 이 내용은 충분히 소화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그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다고 우리도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