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차 이제르론 공방전 파트와 율리안 민츠가 페잔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짧게 등장하는 헨슬로는 자유행성동맹과 외교관계에 있는 페잔에 보내진 외교관이지만 작중에서는 매우 무능한 인물로 나오며 설정에서도 어느 대기업 창업주의 아들인데 워낙 무능해서 쫓겨난 인물이지만 동맹이 부패하면서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논공행상으로 고관 인사가 이루어지고, 이에 따라 외교수완이 떨어지는 재계인이나 선거꾼들이 명사 딱지를 달고 판무관으로 부임하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에 그는 능력은 없지만 아마도 트뤼니히트에게 잘 보여서 그 자리를 얻었을 것이라고 암시할 수 있습니다.
지독하게 무능한 핸슬로가 판무관이라는 고위직에 앉은 것은 그만큼 동맹의 부패를 상징하는 요소지만 현실 기준으로 150년 전 미국에서는 꽤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미국은 1883년 펜들턴법 제정 전까지만 해도 핸슬로식 인사가 매우 당연했는데 이는 후대에 '엽관제'(속어) 미국 스스로는 '교체임용주의'라 불리는 인사방식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엽관제는 한 마디로 집권여당이 자신에게 충성하는 자들에게 한자리씩 던져주는 제도로 오늘날로 치면 대통령이 자기 입맛에 맞는 인사를 장관이나 대법관 등에 임명하는 것이나 국회의원 공천에 비유할 수 있겠지만 엽관제와의 차이점이라면 엽관제 하에서는 말단까지 대통령과 집권여당의 의사대로 자리를 던져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 시초는 미국 제3대 대통령인 제퍼슨 때부터였고 5대 대통령 먼로때 공식적인 법률화하였으며 7대 대통령인 앤드류 잭슨 때부터 적극적으로 활용되었습니다. 그는 엽관제가 민주주의의 실천원리라고 선언하고 인사행정의 기본원칙이라고 정했습니다.
잭슨이 이렇게 나온 이유는 당시의 임용제도에 있습니다. 오늘날 공채와 비슷한 과거제는 동아시아에만 존재한 제도였고 그 외의 나라에서는 추천이나 세습이 일반적이었는데 당연히 미국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이러다 보니 고위직은 상류층끼리 해먹는 문제가 벌어졌고 실제로 초대부터 6대까지의 대통령도 모두 상류층 출신으로 이는 민주주의를 내건 미국의 이념에 맞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잭슨은 사상 처음으로 서민 출신 대통령이었고 아직 공채 개념은 존재하지도 않았기에 상류층들의 독점을 깨기 위해 엽관제를 적극 활용한 것으로 덕분에 잭슨과 마찬가지로 서민 출신이었던 잭슨 지지자들이 공직에 임용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엽관제는 1883년까지 유지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국가의 업무가 확대되고 전문화되면서 능력이 아니라 충성도로 임용되는 엽관제는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해 1860년대 후반부터는 본격적으로 시정운동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엽관제로 의한 최악의 사태가 벌어집니다.
1880년 대선은 박빙의 승부였고 이 때 공화당 후보인 가필드는 공화당 내 최대파벌의 보스인 로스코 콩글링과 거래를 해 그의 지지를 받는 대신 그의 인사들을 임용하기로 약속했고 가필드는 힘겹게 당선됩니다.(이 때 표차가 겨우 1898표!)
문제는 당선된 뒤인데 앞서 약속한 대로라면 콩글링 일파에게 약속한 자리를 줘야 했지만 당시 미국 정치는 매우 부패했고 그건 콩글링도 마찬가지인 반면 가필드는 부패척결을 원했기에 부패척결을 위해선 콩글링과의 결별을 선언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이는 미국 역사상 2번째 대통령 암살사건으로 이어집니다.(첫빠따는 링컨)
암살범 찰스 기토는 콩글링 계파 사람으로 그 또한 자신이 한자리 받기를 원했으며 특히나 그는 자신이 가필드의 당선에 크게 기여했다고 믿어 가필드에게 파리 주재 미국 공사직(외교관)을 요구했지만 기여도도 적었거니와 무엇보다 콩글링 계파와 손절하기로 한지라 거절당했고 이에 불만을 품고 가필드를 죽여 부통령인 아서(가필드 후임인 채스터 앨런 아서)가 대통령직을 승계하도록 해야 자기도 한 자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겨(왜냐하면 아서는 콩글링 계파였습니다.) 가필드를 쏴죽입니다.
그러나 가필드가 시도한 부패청산 노력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서는 비록 콩글링 계파 사람이었고 가필드가 죽기 전에는 그의 행보에 불만을 가졌지만 자기도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콩글링 계파를 손절하고 1883년에는 아예 엽관제를 근절하는 펜들턴법에 서명하여 미국의 엽관제는 종식되고 그 대신 공개시험을 통한 임용이 이뤄집니다.
엽관제는 처음 실시되었을 때는 민주주의에 기여한 바가 컸습니다. 지금처럼 공교육이 정비된 시대도 아니니 설사 공채를 도입했다 쳐도 공직이 상류층 위주로 분배되는 것을 피할 수 없는데(멀리 갈거 없이 조선만 봐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집권당에 잘 보이는 사람을 써주는 엽관제가 시행되니 자기가 학연, 지연, 혈연 등이 없(거나 적)다고 해도 붙을 사람만 잘 정하면 공직을 얻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또한 임명권은 집권당에게 있으므로 민주주의에 의한 결정으로 공직 임명까지 되는 만큼 분명 다수결에 의해서 대통령 뿐만이 아니라 행정부 인사 전반에 걸쳐 정해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며 관료들이 위에서 아래까지 같은 편이라 추진력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예시로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은 고위인사들을 자기 측근들로 채웠다고 비판받았는데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자 고위인사들이 대통령 측근이다 보니 배신할 리가 없어 서로 단합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엽관제는 실력을 전혀 따지지 않는 만큼 국가가 발전하여 국가가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지고 또 전문성이 요구되면 효율이 떨어졌고 결국 집권당에 잘 보여야 하는 만큼 남용될 확률도 높았기에(당장 오늘날 '공천 학살'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집권당이 바뀔 때마다 휙휙 바뀌는 문제도 있어 시간이 지나며 공채에 밀릴 수 밖에 없는 제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