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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의 적화야욕 드러나다
대공전문가 4,000여명 (국정원 581여명, 경찰 2,500여명, 기무사 600여명, 검찰 40여명
“1998년 김대중이 남한의 대북전문가 4,000명을 숙청했다는 것은 사실로 확인되었다. 2011.12.25자 중앙선데이는 김대중 정부가 98년, 이종찬 국정원장-이강래 기획조정실장의 주도로 남한의 대공전문가 4,000여명 (국정원 581여명, 경찰 2,500여명, 기무사 600여명, 검찰 40여명)을 일거에 숙청했다는 사실을 끈질기게 추적하여 사실임을 확인했다”며 “북한에 우리가 심어놓은 우리 측 간첩 300명 정도가 1998년 10월에 일거에 처형됐으며, 이들 중에는 3성장군인 임태영과 2성장군인 우명훈이 있다.
이들이 바로 박대통령 시절에 우리가 북에 심어놓은 간첩이며 이들은 처형되기 전까지 만 30년 동안 들키지 않고 출세를 잘했다.
그런데 김대중이 남한에서 4,000여명의 대북전문가를 대량학살한 후부터 갑자기 체포되어 9월말부터 조사를 받고 10월에 모두 처형됐다.
이는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 김일성의 전사 김대중이 명단을 넘겨주었기 때문”이라는 탈북자 김유송씨의 증언도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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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통제 시작되다************
*****언론사 편집장이나 보도국장은 김대중에 의해 종북세력이 차지했다******
물컵 던진 그날 박지원 수석 중앙일보 왜 왔나
[중앙일보] 입력 2002.02.23 12:13
박지원(朴智元)
문광부장관은 4일 국회 문광위 국감에서 '물컵 사건'을 진술하며 지난해 3월9일 자신이 중앙일보에 갔던 것은 홍석현(洪錫炫)사장이 불러서 간 것이라고 했다.그랬다가 술에 취한 상태였기 때문에 '작은 소동'이 있었을 뿐이라는 식으로 말했다.언론탄압과는 무관하다는 얘기다.
그는 자신에게 불리한 대목은 다 빼 버리고 편리한 얘기만 골라서 진술하고 있다. 지난해 3월9일 밤 박지원 당시 청와대 공보수석이 술에 취한 채 중앙일보에 나타나 물컵을 내던지며 행패를 부린데는 이유가 있다.
3월10일자 중앙일보 가판(街販·가두판매를 위해 전날 저녁 발행하는 신문)
1면 오른쪽 톱기사는 '주양자 장관 곧 경질'이라는 단독기사. 여권 고위관계자의 말을 인용, "청와대와 자민련간에 朱보건복지부 장관을 경질키로 의견을 모았다"고 보도한 것이다. 4면의 해설기사도 朱장관을 경질키로 한 배경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당시 청와대는 조각(組閣)
직후 터져 나온 朱장관 부동산투기 의혹때문에 곤혹스러워 하고 있었다. 김영삼(金泳三)
정권 초기 많은 각료들이 비리로 물러나 큰 타격을 입은 사실을 의식했음직 하다. 朱장관 기사를 게재하기 직전 편집국장은 기사를 작성한 기자에게 기사의 정확성을 재차 확인했었다.
그러나 청와대는 여러 경로를 통해 기사가 사실과 다르다며 기사삭제 요구를 해왔다.밤 9시쯤 朴수석은 정치부 야근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朱장관 기사는 틀린 얘기다.작문이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朴수석등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여러 경로를 통해 중앙일보에 기사 삭제 압력을 가했다.
결국 1면의 朱장관 기사가 2면으로 옮겨지는등 곡절이 있었다. 하지만 朱장관은 4월27일에 사퇴했다. 중앙일보 기사가 정확했음이 입증된 셈이다.
어쨌든 이 과정에서 朴수석은 洪사장과 통화를 시도했고 집무실에 나와있던 洪사장과 연결됐다.洪사장은 朴수석이 중앙일보 기사에 대해 여러 불만을 늘어 놓자 “그러면 와서 얘기하라”고 말했다.
그날 밤 朴수석은 물컵을 박살낸 직후 洪사장등 간부들에게 술에 취한 채 "내가 오늘 얼마나 많은 더러운 얘기를 했습니까"라며 흥분했다. 朴수석 스스로도 여러 차례에 걸친 기사삭제 요구를 '더러운' 것이라고 자인했다. 이에 洪사장 곁에 있던 금창태(琴昌泰)
부사장은 "더러운 일이 될 수 있게 내가 한 번이라도 화를 냈나요? 내일 아침 신문 보면 알거요. 그런데 또 왜 와가지고 이런 행패를 부리면…"이라고 어이없어 했다. 그러면서 琴부사장은 "언론이라는 것은 권력의 탄압으로 크는거요. 밟아가지고 죽는 게 아니고…"라고 혀를 찼다.
이게 '물컵 사건'의 배경이다.하지만 朴장관은 딴소리를 하고 있다.
특별취재팀
************언론 완전 장악************
******[국민의 정부 언론탄압 진상을 밝힌다]******
[중앙일보] 입력 2002.02.23 12:13
98년 3월 9일 밤. 중앙일보 서소문 사옥 21층 사장실.
11시가 조금 넘었을 때 박지원(朴智元.현 문화관광부장관)
당시 대통령 공보수석이 들이닥쳤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들어서는 그의 입에선 술냄새가 물씬 풍겼다.
"정권에 비판적인 중앙일보의 보도태도가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다."
朴수석은 들어서자마자 중앙일보에 대한 불만을 원색적으로 토해 냈다.
이런 당돌함에 방에 있던 중앙일보 발행인 홍석현 사장과 당시 편집인 금창태(琴昌泰)
부사장, 그리고 한남규(韓南圭)편집국장은 아연할 따름이었다.
사장실에 전화를 했다가 간부들이 모여있다는 얘기를 듣고 달려온 朴수석의 입에선 협박조의 얘기가 거침없이 이어졌다.
"우리가 이제는 야당이 아닌 집권당인데 계속 이렇게 섭섭하게 할 수 있나" "내가 하지도 않은 얘기를 엉터리로 쓴다" - .
중앙일보 간부들은 "뭐가 섭섭하다는 말인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얘기하라" 며 반박했다.
언성이 높아갔다.
끝내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朴수석은 벌떡 일어섰다.
몸을 굽혀 탁자 위의 크리스털 유리 물잔을 집어든 그는 탁자옆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조각과 얼음조각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琴편집인 등은 어이없어 하는 洪사장을 피하게 한 뒤 "이게 무슨 짓이냐" 며 朴수석을 붙들었다.朴수석은 "이거 놔. 나 갈거야" 라며 뿌리쳤고 그 와중에 고성과 몸싸움이 벌어졌다.
한바탕 소란이 있은 후 韓국장의 안내를 받으며 사장실을 나온 朴수석은 중앙일보 정문을 나서면서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 는 듯 넙죽 맨 땅에 엎드려 큰 절을 했다.
그리고는 "잘 해봅시다" 라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시계는 0시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땅에 민주적 정권교체를 이뤘노라고 자부하는 현 정부 실세의 위세는 사실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게 확인된 직후부터 시작됐다.
97년 12월 대통령선거 다음날인 19일, 박지원씨는 김대중후보의 당선을 알리는 기사가 나가자마자 중앙일보 경영진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1면 톱기사의 컷(제목)이 다른 신문에 비해 너무 작습니다."
金후보의 활짝 웃는 사진과 함께 실린 기사의 제목( '김대중후보 당선' )
이 신문 전체 폭의 3분의2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朴씨에게는 불만스러웠던 것이다.
그가 전화를 끊으면서 남긴 말의 여운은 길었다.
"이제 우리가 집권했는데, 두고 봅시다."
이후 공보수석이 된 朴씨는 물론 국내언론 담당비서관이었던 박준영(朴晙瑩.현 공보수석)
씨 등 청와대 관계자들의 전화는 거의 매일 걸려왔다.
기사를 넣어달라, 빼달라, 고쳐달라. 때론 "어른(대통령)이 불쾌하게 생각하신다" 는 말로 압력의 강도를 높였다.
오죽하면 중앙일보는 사장과 편집인, 편집국장과 정치부장석 등의 전화에 녹음기를 달았겠는가.제작 간섭의 실상을 생생하게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언론에 대한 간섭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아예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끔 편집 진용을 구축하려고 시도했다.
편집국장과 정치부장 등 편집국 주요 간부와 논설실장을 비롯한 논설위원에 '누구를 빼고 누구를 앉히라' 는 요구까지 해왔다.
물론 洪사장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럼에도 정권 획득이 언론사의 인사권까지 보장한 양 으름장은 끝이 없었다.
민영 언론사에 대해 이러했으니 여타 언론에 대한 정권의 간여수준이 어떠했는지는 미루어 짐작이 가는 것이다.
권력의 전횡은 집권이래 1년7개월 동안 계속됐다.
그 과정에서 많은 언쟁과 논박이 있었고, 간혹 기사가 누락되거나 변질되는 일도 있었다.
대부분의 외압을 물리쳤다고는 하지만 중앙일보가 심각하게 반성해야 할 대목이다.
어쨌든 중앙일보 사장이 구속되는 사태에 이른 마당이다.
특별취재팀
언론주무 부서 장관이 이처럼 살벌한 공포분위기를 조성한 것은 아주 이례적입니다. 박장관은 사건 직후 홍사장에게 '잘해봅시다'라고 화해했지만, 나중에 홍석현은 탈세혐의로 감방갑니다. 공운영이 가지고있던 안기부 X-파일을 박인회가 실세 박장관에 가져간 게 99년 9월쯤이고 홍사장이 구속된 게 10월 초입니다.
홍석현과 박지원은 악연이지만, 홍석현은 DJ의 임기말 DJ와 독대를 갖고 화해합니다. 그 때 임기말 총리후보로도 거론됩니다. 중앙일보는 이후 2002년 대선때 중립을 지킵니다. 박지원은 원하는 대로 후계정권 노무현 정권을 출범시켜 권력10년의 길로 들어서는 듯 했죠. 그러나 곧 현대 150억원 사건으로 발목이 잡히고 말았습니다. 반면 홍석현은 노대통령과 눈이 맞아 주미대사로 발굴됐다가 이번 X-파일 사건으로 낙마합니다. 참으로 세상은 뒤죽박죽이고 새옹지마입니다.
************박근혜는 신문방송을 믿지마라************
방대한 호남인맥 정보통 활용
박 의원은 이어 문 후보 낙마와 관련해 “100%다”라는 자신감을 피력했다. 이에 문 후보가 사퇴와 관련해 ‘야당에 가서 물어보라’는 발언에 대해선 “야당이 답하겠다. 사퇴하라”라고 말하는 펀치력(?)을 구사하기도 했다.
박 의원이 낙마시킨 인사는 천성관 검찰총장 후보, 김태호 총리 후보, 신재민 문화체육부 장관 후보, 이재훈 지식경제부 장관 후보, 정동기 감사원장 후보, 김병화 대법관 후보,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 등이다.
하지만 정작 낙마왕 박 의원을 저격하려던 과거 한나라당이나 새누리당의 공세는 번번이 빗나갔다. 특히 여권에서 자신만만해하던 박 의원의 저축은행 뇌물 비리사건 수사도 흐지부지돼 가고 있다. 그렇다면 의문이 든다. 도대체 박 의원의 그런 괴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여기에는 박 의원 특유의 일목요연한 처세술이 바탕이 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인사들이 많다. 박 의원에게는 여당도 야당도 없으며 치밀하고 방대한 그의 언론, 사법, 재계, 정계의 호남 인맥은 결정적인 정보력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 그러한 박 의원의 처세술은 198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1년 1월 박지원은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할 때 미국 한인회장의 자격으로 참가해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환영 행사를 치렀다. 1985년에도 박지원은 뉴욕평통자문위원회 회장을 맡을 때 전두환 당시 대통령 환영식을 주도했던 것으로도 알려진다.
그러한 박 의원은 보수 한나라당에게는 공적 1호였지만 저축은행 로비 사건등 여러 비리 혐의에 연루된 사법기관의 수사는 언제나 미온적이었다는 평가를 듣는다. 박 의원이 보해저축은행 뇌물 혐의와 관련해선 “돈을 받았다면 목포 역전에서 할복이라도 하겠다”고 말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박 의원이 언론의 영향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그러한 이유로 DJ 정권 시절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재임시 막대한 언론 로비를 해왔다는 증언들이 있다는 점이다. 2003년 박지원 장관의 기자 촌지 혐의와 관련해 언론노조는 “피를 토하는 심정”이라는 표현으로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보수언론에 압력을 넣어 편집국장 보도국장을 김대중지지자로 심어놔
당시 박지원 장관은 언론사 간부들에게 300만~500만원의 촌지를 돌리며 기자들에게도 고급 위스키와 현금 공세로 초토화(?)를 시켰다는 세간의 이야기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이러한 의혹에 대해 지난 2003년 전국언론노조,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한국기자협회 등 언론 시민단체들은 일제히 박지원 장관으로부터 촌지를 받은 기자들을 성토하며 자체 조사에 착수키로 하는 동시에 검찰에 대한 엄중수사를 촉구하고 나서기도 했다.
대한민국 기자. 2만여명이란다.박지원 : 내돈안먹은기자 있으면 나오라고 공언한다.뇌물준 공직자 왜처벌 안하나 범죄자 아닌가!!
1996 년부터 칼럼자가 발행하는 INSIDE THE WORLD 주간지에 ‘김대중 X-파일’을 연재 하기 시작 하자 97 년 5 월 봉투에 ‘ 큰것 5 섯장’ 을 넣어 어느날 밤 편집국 을 방문 편집부장 에게 마껴 놓고 간 것을 새벽에 돌려 보냈다.
그 다음날 고종사촌 형인 조우승 박사 병원에서 만나자고 연락이 와서 현장에 갔더니 박지원이 ‘큰것 다섯장’이 든 봉투를 다시 꺼냈다. 그래서 그 자리에 화를 내며 물리 쳤다.그는 몹시 서운해 해면서 헤어졌다.
20 여분후 조박사가 “주간지 경영에 어려운데 받아 쓰지 그랬어 특별히 큰 것 다섯장이라는 거금 이라고 했는데…” 하면서 몹시 아쉬워 했다. 칼럼자는 그 봉투에 얼마나 큰 액수가 들어 있었는지 알수가 없다. 그러나 박지원이 형에게 “큰것 다섯장인데 이런 촌지는 준적이 없다.총재께서 손사장에게는 큰 호감을 갖고 전해 달라고 했는데” 하고 말했다는 것이다.
98 년 2 월 청와대 대변인으로 입성한 박지원이 형에게 인사를 하러 왔을 때 조박사는 “잘해야 한다. 정권이 끝난 후에라도 감옥에 가지 않고 청문회에 불러 나가지 않도록 매사에 조심하라”고 충고 했다.
그때 박지원이 “형님- 요즘도 손충무 사장 자주 만납니까?” 하고 물으며 “이제 만나지 마십시오. 우리가 손을 봐 줄 것입니다.이번에는 빠져 나가지 못할 것입니다.야당 대변인 5 년 하면서 한국 언론계에 내돈 안먹은 놈 없는데 손충무 한테 만 무시를 당했습니다” 하고 말 하드라는 것이다.
박지원으로 부터 그런 이야기를 전해들은 조박사가 평소 골프를 함께치는 A 박사 J 대사와 본사 취재부 차장이 함께 있는 장소에서 들려준 이야기다.
98 년 4 월 초 박지원이 조박사의 한의원에 찾아와서 정력제 보약을 제조해 달라고 하면서 “지금도 손충무 치료 받으러 옵니까?며칠내에 언론에 크게 보도 될것입니다” 하고 말해 주었다.
98 년 5 월 중순 김대중 이희호 여사가 선거때 마다 많은 도움을 받은 김해김씨 종친회 간부 K 회장 일행이 D.J 부부의 점심 초청으로 청와대를 방문 했을 때 평소 K 회장과 칼럼자의 관계를 알고 있는 박지원이 K 회장에게 “각하께 손충무사장 이야기는 꺼내지 마십시오.단단히 손을 봐주기로 결정 됐습니다.” 하고 말했음을 K 회장이 3 명의 증인들이 있는 가운데 들려 주었다.
그 말이 있은 2 주후인 6 월 1 일 긴급 구속을 당했다.그러나 그들이 문명자를 내세워 모의 하고 꾸민 음모는 증인들의 증언으로 허위로 밝혀져 무죄가 선고 됐는데도 대한민국 밖에 없는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죄’로 2 년간 징역살이를 시켰다.
2 년만에 감옥에서 나와 조박사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때 조박사는 ”박지원이 저놈 분명히 천벌을 받을 것이다.저놈은 분명히 감옥에 갈것이며 청문회에 불려 나갈 것이다” 하면서 몇 개월에 걸쳐 박지원의 부정부패 사실과 그의 행동에 대해 증언 해주어 지금 칼럼자의 취재 노트 2 권이 빽빽 하게 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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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박지원이는 주둥아리가 열개라도 할말이 없는인간인데,
저놈이 누구의 빽을믿고 오만방자한지 정치가 썪은건가요??
언론이나 신문방송 100%믿으시면 안됩니다
비정상을 정상화로 바꾸실때 장급 인사하실때 진정으로 대통령을 사랑하시는,
지인들의 조언도 들으시고 소통의 폭을 넖혀 소통하는 대통령이되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역적놈 박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