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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9일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제1독서 : 요나 1,1―2,1.11
복 음 : 루카 10,25-37
그때에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조명연 마태오 신부
소문의 속도는 대단합니다.
어떤 사람이 인구 3만 명이 사는 소도시에 깜짝 놀랄만한 소문을 가지고
아침 8시 회사에 출근해 세 사람에게 소문을 들려주었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세 사람은 각자 또 다른 세 사람에게 이 소문을 전하게 됩니다.
이렇게 한 단계 걸리는 시간이 15분이라고 했을 때,
3만 명이 사는 소도시 전체가 이 소문을 알게 되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계산을 해보면 간단합니다. 딱 2시간 30분이면 도시 전체의 사람에게 소문이 퍼지게 됩니다.
이론과 실제는 차이가 있다고 하시는 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이론과 실제는 차이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소문은 이론보다도 실제로 더 빠릅니다.
왜냐하면 요즘에는 직접 만나서 전달하는 것보다도 더 빠른 전달 수단이 있기 때문입니다.
각종 메신저(전화, 문자, SNS 등)의 발달로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더 많은 사람에게 더 빠르게 전달됩니다.
특히 그 소문이 좋은 소문이 아닌 나쁜 소문이라면 훨씬 더 빠르게 전달됩니다.
소위 ‘아니면 말고’ 식의 ‘카더라’ 통신으로 인해, 아픔과 상처를 받는 사람이 늘어나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은 과연 어떤 소문을 전달해야 할까요?
나쁜 소문, 가짜 소문이 아니라, 좋은 소문을 그리고 진리를 전달하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픔과 상처로 힘들어하는 사람을 만드는 내가 아니라,
사랑과 희망으로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나쁜 소문, 가짜 소문은 나 자신이 아니어도 빠르게 전달됩니다.
그 빠른 속도에 내가 더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좋은 소문, 기쁜 소식은 그 속도에 더 박차를 가할 수 있도록 나의 힘을 쏟아야 합니다.
특히 주님의 기쁜 소식을 빠르게 퍼져 나갈 수 있도록 온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웃 사랑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말씀이 나옵니다.
자기 편이 아니면 무시하고 경멸하는 이기주의가 더 강해지는 요즘에
이 말씀은 우리를 크게 반성하게 합니다.
강도를 만나 쓰러진 사람을 피하여 달아나는 위선적인 사제나 레위인과는 달리,
오로지 가엾은 마음 하나로 아무런 편견과 조건 없이 애덕을 실천하는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우리도 그런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찾으려고만 해서
주님의 기쁜 소식이라 할 수 있는 ‘사랑’이 점점 줄어들게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좋은 소문, 기쁜 소식이 계속해서 이 세상 안에서 울려 퍼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바로 내가 그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할 수 있는 이유를 찾으면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합리적인 이유나 제한적인 조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조건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오늘의 명언:
여러분에게 바라는 건 계속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모습을 유지하고, 친절한 행동으로 세계를 계속 놀라게 하십시오(마야 안젤루).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반영억 라파엘 신부
우리 본당은 ‘아나빔’자선함을 비치하고 어려운 이웃을 기억하며 기도하고 물적 예물을 모읍니다.
우리도 힘들고 어렵지만, 더 어려운 이웃을 남모르게 돕기 위해서입니다.
매월 10가구에 도움을 줄 수 있을 만큼 알맞게 채워집니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모든 이에게 주님의 강복을 청합니다.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웃 사람끼리 서로 돕고 의좋게 지내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무리 가까운 친척도 멀리 떨어져 있으면 이웃사촌만도 못하다(잠언27,10)고 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실제로 표현되어 곧바로 나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잠언에는 “네 친구와 아버지의 친구를 저버리지 말고 불행할 때 형제의 집으로 가지 마라.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낫다”(잠언27,10).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음의 중심이 어디 있는가?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한 비유를 들어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초주검이 되었는데
마침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는 피해지나가 버렸고
또 레위인도 지나갔는데 그도 역시 길 반대편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상처를 치료해 주고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준 사람입니까?’하고 되물었습니다.
율법교사가 자신 있게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루카10,37). 하고 대답하였고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10,37).하고 이르셨습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강도를 당한 사람을 남으로 보았고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남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 행동이 다르게 표현된 것입니다.
마음에 품은 것이 밖으로 나오게 마련입니다.
사실 “우리가 병들고 궁핍한 사람을 만지는 것은,
곧 고통받는 예수님의 몸을 만지는 것입니다”(마더데레사).
그리고 ‘누가 나의 이웃인가?’를 묻는 사람에게는 이웃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 주려고 마음을 먹을 때 이웃이 보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다 이웃입니다.
우리는 누가 내 이웃인가를 찾지 않고 내가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까지 미워하는 셈이며 멸시하는 사람입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아우구스티노 성인에 의하면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 하느님을 뵈올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동창신부님이 번역한 ‘황금전설’을 읽고 있습니다.
1,100페이지가 넘으니, 시간은 좀 걸릴 것 같습니다.
저자는 책의 구성을 4부분으로 정리했다고 합니다.
첫째는 ‘탈선’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셨던 아담이 죄를 지었고 낙원에서 쫓겨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을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런 탈선의 시간은 모세를 통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주실 때까지입니다.
둘째는 ‘갱신’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을 멀리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심판을 이야기합니다.
예언자들은 고통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전하며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예언은 앞날을 미리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은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는 것입니다.
갱신은 모세부터 예수님의 탄생 때까지입니다.
셋째는 ‘화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하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가르침을 따른다면 우리는 하느님과 화해하는 것입니다.
화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부터 성령강림까지입니다.
넷째는 ‘순례’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전하고,
그분의 부활을 믿으면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소풍이 끝나면 천국에서 영원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새로운 나라는 성령강림부터 지금까지입니다.
황금 전설은 이런 순서로 이야기를 전개하지만, 시작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이야기합니다.
탈선보다 대림을 먼저 이야기하면서 우리에게 ‘희망’을 전하겠다고 합니다.
한 권의 책이 800년 전 뜨거운 열정과 신앙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성서를 보면, 특히 구약성서를 보면 신약의 예표들이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나온 ‘요나’는 그의 삶이 예수님의 예표와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요나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결국은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잔을 거두어 주시기를 원했지만,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였습니다.’
둘째, 요나는 뱃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쳤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을 십자가의 희생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셋째, 요나는 삼일동안 큰 물고기의 뱃속에서 지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3일 동안 저승에 가셨고, 부활하셨습니다.
넷째, 요나의 말을 듣고 회개했던 니네베 사람들은 하느님의 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살아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고, 죽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섯째, 요나는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알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히브리 사람이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알았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가 하느님을 따르는 진정한 이웃인지를 말해 주십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강도를 만나 상처를 입은 이의 진정한 이웃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길을 가던 사마리아 사람은 지금 강도를 만나서 상처를 입은 이의 진정한 이웃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착한 이웃인지 질문을 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그렇게 하여라.’
우리는 신앙인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제자인 우리는 이제, 예수님의 뜻을 이웃에게 전하는 ‘예표’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어떤 율법교사와 예수님과의 두 번의 대화로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대화>에서,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 10,25)
이 질문은 아주 중요한 질문이기는 하나, 율법교사의 편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곧 그는 ‘무엇인가를 해야’ 구원을 받으리라 여기고 있습니다.
마치 스스로의 ‘행실’로 구원을 얻으리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이 자신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있다는 것과 자신은 그분께 메여있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할 일입니다.
곧 구원은 ‘무엇을 하느냐?’는 행위의 문제라기보다,
‘어떤 사람이 되느냐?’라는 존재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무슨 일을 하느냐보다 그 일을 사랑으로 하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곧 “마음과 목숨과 힘과 정신을 다하여 사랑하는”(루카 10,27) 일입니다.
<두 번째 대화>에서,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누가 제 이웃입니까?”(마르 10,29)
이 질문 뒤에도 역시 그의 옹졸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곧 사랑의 대상에 한계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의 사랑의 대상에는 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은 제외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마르 10,36)
예수님께서는 누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 대답하기보다,
오히려 ‘모든 이웃이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곧 우리는 모두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이웃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모두에게 이웃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단지 이웃이 아니라 형제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누가 나의 이웃인가? 라는 문제보다,
‘나는 이웃이 되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먼저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그가 나의 형제인가?’ 묻기에 앞서, ‘나는 그의 형제가 되어주고 있는가?’를 물어야 할 일입니다.
곧 내가 필요로 여기는 사람을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여기는 사람을 우선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루카 10,37)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기도에서,
이제는 “주님, 저희가 자비를 입었으니, 저희도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서로 사랑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기보다 “서로에게 사랑이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의 핵심 메시지는 <첫 번째>와 <두 번째> 대화의 마지막 구절에 있습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루카 10,28;37).
그러니 아는 것에 멈추지 말고, 행동으로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말로만 하지 말고 몸으로 실행하고, 의무적으로나 형식적으로 하지 말고
자발적으로 사랑으로 행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를 알 때가 아니라, 실행할 때 살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 10,25)
주님!
스스로의 행실로 구원을 얻으리라고 여기지 않게 하소서!
행위를 앞세우기보다, 존재를 앞세우게 하소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임을 깨닫게 하소서.
무엇을 하는지 보다,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묻게 하소서.
구원이 제 행위가 아니라, 당신이 주는 선물임을 깨닫게 하소서. 아멘.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조욱현 토마스 신부
율법 교사는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25절)
율법 학자지만 법조문만 잘 알 뿐 그 정신은 모르는 자들임을 보여준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율법의 첫 줄부터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신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26절)
율법 교사는 계명을 말씀드렸다. 주님께서는 그의 속마음을 아시고 말씀하신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28절)
그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이웃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29절) 묻는다.
주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준 사람만이 예리코로 내려가던 사람의 이웃이었다고 가르치신다.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36절)
사제도 레위인도 아니었다.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37절)이 그의 이웃이었다.
여기에 나오는 사마리아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34절)이라고 한다.
우리를 치유하시는 의사는 필요한 치료제를 많이 가지고 있다. 그분의 말씀이 치료제이다.
어떤 말씀은 상처를 싸매고, 어떤 말씀은 기름을 바르고 어떤 말씀은 포도주를 붓는다.
그분은 그에게 다가가 상처를 싸매주고 기름과 포도주를 발라주고
노새에 태우고 그의 짐을 대신 져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우리에게도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37절) 말씀하신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드리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35절)
이튿날은 바로 강도를 맞은 사람이 구원받은 날로 부활의 날이다.
그리고 두 데나리온은 하느님의 두 계약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아들이 상처 입은 값으로 우리가 치유되었다.
그 고귀한 피가 우리를 구원하여 죽음의 아픔을 면하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강도를 만나 매 맞고 반죽음 상태로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도와준 이가 당신이심을 알려주셨다.
우리의 상처를 보살펴 주는 이보다 더 가까운 이는 없다.
그분을 우리 주님으로 사랑하고 우리 이웃으로 사랑하자.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도 사랑하여야 한다.
하나 된 몸 안에서 다른 어려운 지체들을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오늘 우리 눈앞에 가장 위험에 처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수많은 법 가운데서, 사형제도, 종교나 신념에 의한 병역거부와 함께
찬반양론이 팽팽하게 맞서는 법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Good Samaritan Law)입니다.
이법은 한 마디로 표현해서, 위험에 처한 사람 앞에서
‘구조 불이행’을 저지른 사람을 처벌하는 법입니다. ‘구조거부죄’ 또는 ‘불구조죄’라고도 하지요.
이 법의 근거이자 원천은 루카복음 10장 30~37절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유다인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는 으슥한 산길을 홀로 걷다가 강도를 만납니다.
‘목숨이 제일 중요하지!’ 하면서, 있는 돈 없는 돈 순순히 다 털어주었으면, 아무 문제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목돈이었기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다가 무자비한 폭행을 당합니다.
그는 큰부상을 입고 길바닥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사제, 레위인이 황급히 자리를 피해 갔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과 적대관계에 놓여있던 한 사마리아 사람이
죽어가는 사람을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까지 데려갑니다.
지극정성으로 치료해 주고, 여관 주인에게 숙식비며 모든 경비 일체를 지불합니다.
뿐만, 아니라 잘 치료해줄 것을 당부하며,
추가로 지출되는 경비는 돌아오는 길에 계산하겠노라고 다짐까지 합니다.
한 인간 존재가 다른 동료 인간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지만,
가장 어려운 최선의 도움을 제공한 것입니다.
피범벅이 된 사람을 나귀에 태우는 과정에서 자신도 피범벅이 되었을 것입니다.
숙식비며 치료비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이미 잡혀있던 중요한 약속을 취소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착한 사마리아 사람에게 있어 자신의 눈앞에 죽어가고 있는 한 인간 존재,
그를 돕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다시 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복음의 가르침에 따르면, 지금 우리 눈앞에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
갖은 박해와 고초를 겪고 있는 사람들, 억울하게 무고당해 눈물 흘리고 있는 사람들은
또 다른 주님이며, 또 다른 예수님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가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은
변장하고 찾아오신 예수님이시며, 주님이십니다.
그렇다면 너무나도 당연히 그들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드려야 하고,
그들을 신속히 위험에서 구출해 드려야 마땅합니다.
오늘 우리 눈앞에 가장 위험에 처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지금, 이 순간 가장 시급하게 내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혹시라도 우리는 은연중에 무심코 스쳐 지나간 사제나 레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진정한 이웃 사랑
박상대 마르코 신부
루카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일 중요한 가르침을 손꼽으라면
“많은 일 중에 가장 요긴한 하느님 말씀의 경청”(10,25-37),
“주님의 기도와 옳은 기도에 대한 가르침”(11,1-13)과 함께
오늘 복음이 보도하는 “참된 사랑에 관한 가르침”이다.
예수님의 참된 사랑에 관한 가르침은 공관복음 전체에 나타나는 가장 핵심적인 말씀이다.
그런데 原典이 되는 마르코복음(12,28-34)이나 이를 참고한 마태오복음(22,34-40)에서는
첫째가는 계명으로 “하느님 사랑”(신명 6,4-5)을,
둘째가는 계명으로 “이웃사랑”(레위 19,18)을 제시하면서
이 두 계명이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며, 가장 큰 계명이라 요약하고 있다.
그러나 루카복음에서는 “계명”이라는 말을 찾아볼 수 없다.
루카가 원전을 각색하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곁들여 고유자료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마르코와 마태오복음의 같은 대목을 살펴보면,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와서 “모든 계명 중에 어느 것이 첫째가는 계명입니까?”하고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직접 사랑의 이중 계명을 설파하신다.
그런데 루카복음에는 예수께 와서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25절)하고 묻는다.
그 질문에 예수께서는 직접 대답을 주시지 않고,
그 교사로 하여금 스스로 답을 찾도록 유도하신다.
율법교사는 자신이 모세의 율법서에서 읽은 대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답으로 제시한다.
이에 예수께서는 율사의 대답을 옳은 답으로 인정하시고,
“그대로 실천하라. 그러면 살 수 있다.“(28절)하고 말씀하신다.
여기에 루카가 계획하는 편집 의도가 들어있다.
루카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 사랑의 실천, 즉 행동을 거듭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고맙게도 루카는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29절)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을 추가하여 사랑의 실천 방법을 가르쳐 준다.
이번에는 예수께서 직접 수고를 하신다.
예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하여 ”누가 나의 이웃인지?“,
그리고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지?“를 한꺼번에 가르쳐 주신다.
”이웃“이란 말 그대로 자신을 기준으로나, 타인을 기준으로 했을 때 ”제일 가까이 있는 사람“,
즉 나의 도움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인 것이다.
물리적으로나 장소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이 이웃이긴 하지만
그것으로 이웃 사랑이 실천되지는 않는다.
물론 함께 있어 주는 것도 사랑 실천이 될 경우도 있다.
그러나 오늘 비유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실제로 사랑을 베푸는 것을 예수께서는 ”이웃 사랑“이라고 하신다.
비유에 등장하는 첫째 인물인 사제는 길을 가다 강도를 만나서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얻어맞기까지 하여 반쯤 죽어있는 사람의 제일 가까운 이웃이 되었으나, 사랑을 베풀지 않았다.
사제의 머릿속에는 위급에 처한 사람보다는
”시체에 몸이 닿은 사람은 칠 일간 부정하다.“(민수 19,11)는 규정이 먼저 떠올랐을 것이다.
둘째 인물인 레위 사람은 성전 제사의식에서 제사장을 돕거나 종교적 업무에 종사하는 부류로서
육체적인 노동을 하지 않고도 십일조를 받아 걱정 없이 살 수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괜한 일에 관여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달랐다.
강도를 만난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가던 길이었으니, 그 사람은 유다인이 틀림없다.
유다교의 정통성을 상실한 이유로 사마리아 사람들이
유다인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받았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이 유다의 진정한 이웃이 되는 순간이었다.
비유에서 보듯이 사마리아 사람은 심하게 다친 유다인에게 기대 이상의 사랑을 베풀어 준다.
강도를 만나서 반쯤 죽게 된 사람에게 이웃이 된 자는 사제, 레위, 사마리아 사람 셋이었다.
사제와 레위는 그 사라을 보고 동정심을 가지긴 했겠지만,
피해서 지나가 버림으로써 즉 가까운 데서 먼 곳으로 가버림으로써 이웃이 되기를 거부하였고,
이로 인해 이웃사랑의 실천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유다인과 원수지간이었던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를 만난 사람의 진정한 이웃이 되었고, 실제로 이웃사랑을 실천하였다.
사랑은 바로 이렇게 행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자비를 베푼 사람
Sr. 김 메리 그레이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묻는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율법교사에게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해 주신다.
사제와 레위인들은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을 보았지만 지나가 버린다.
하지만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서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돌봐준다.
사제와 레위인, 그리고 사마리아인은 똑같이 그 사람을 보았지만, 행동은 달랐다.
어쩌면 사제와 레위인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자신의 입장이 먼저 들어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마리아인은 초주검이 된 그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이 처한 상황에 먼저 마음이 갔기에
가엾은 마음이 들어 돌봐주기까지 하지 않았을까..?
내 입장, 내 안에만 갇혀 있다면 이웃의 어려움을 볼 수 없는 것 같다.
나에게서 조금 벗어났을 때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생기고
고통 중에 있는 이웃도 보게 되는 것 같다.
내 어려움, 내가 가진 한계… 들에 갇혀
주위에 문을 닫지 않는 것이 어떻게 보면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게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청하며 묵상을 마무리한다.
[출처] 루카 10,25-37 연중 제27주간 월요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