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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10일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제1독서 : 요나 3,1-10
복 음 : 루카 10,38-42
그때에 38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39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40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41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평소에 메모지와 펜을 들고 다닙니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들을 잊어버리지 않고 기록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반짝이는 생각들이 묵상 글 작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되며,
강의할 때도 좋은 소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홀로 여행 중이었는데 너무 추워서 몸이라도 녹이려는 마음과 더불어
따뜻한 커피 한 잔이 생각나서 근처의 카페 들어갔습니다.
커피를 마시던 중, 여러 가지 생각이 나면서 이를 글로 남겨야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평소에 항상 들고 다니던 메모지와 펜이 가방에 없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카페 직원에게 펜을 빌렸고, 테이블에 놓은 냅킨에 글을 적기 시작했습니다.
냅킨 두 장에 빼곡하게 글을 적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졌고,
이 내용을 다음 피정 강의 때 꼭 사용하리라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쓴 글은 그 어디에서도 쓰지 못했습니다.
글쎄 카페에 나올 때, 글을 적었던 냅킨을 테이블 위에 놓고 나온 것입니다.
이 사실을 저녁에 도착한 숙소에 가서야 알 수 있었습니다.
아쉬웠지만 지나간 일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지요.
그리고 이렇게 후회할 일은 삶 안에서 계속되었음을 깨닫습니다.
이 후회를 줄여야 행복의 길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따라서 되돌릴 수 있는 일이라면 과감하게 잊어버리고
지금에 충실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의 약속을 받은 사람들을 떠올려 봅니다.
그들은 모두 지금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과거의 죄에 매여서 절망 속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회개하고 주님께 향하면서 지금 주님과 함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가십니다.
귀한 손님이 오셨다고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저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만 듣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 모습에 마르타가 약간 화가 났나 봅니다.
자기만 일하고 동생 마리아는 편하게 말씀만 듣고 있으니 말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몫과 마리아의 몫에 차이가 있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마르타가 시중드는 것도 중요하고,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 것도 중요했습니다.
단지 이 안에서 어떤 판단이 있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한다면서 분주하게만 지낸다면
주님과 함께하는 자리에서도 불평과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자기 자리를 주님과 함께하는 데 집중했다면, 시중을 들면서도 크게 기쁠 수 있고
또 발치에서 말씀을 들으면서도 기쁨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지금에 충실할까요?
혹시 어떤 판단으로 인해서 마르타처럼 불평과 불만으로
지금에 충실하지 못하면서 후회를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의 명언:
기도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신랑에게 말을 건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습니까?
그것은 당신께 말씀을 건네시는 그분을 경청하는 것입니다(성 예로니모).
활동에 앞서 기도를!
반영억 라파엘 신부
구역 반모임을 위해 가정 방문을 하면 먼저 기도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기도를 드리고 말씀 나누기에 마음을 쓰기보다는
손님 대접에 더 관심을 기울입니다.
대접에 소홀함이 없이 하려는 마음은 고맙지만, 선후가 바뀌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 안에서의 만남입니다. 나머지는 다음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적인 정이 우선되고 있음이 안타깝습니다.
마르타의 집에 예수님을 모셨는데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그런데 마르타는 음식을 준비하는 등 갖가지 시중을 드는 일에 분주했습니다.
그러다가 동생이 시중드는 일을 거들어 주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 청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10,4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몫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알았으면 그것을 관리해야 합니다.
마리아와 마르타의 모습이 서로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두 역할이 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귀한 말씀을 듣는 것이 먼저입니다.
훌륭한 분에게는 어떻게 하든 하나라도 더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기회를 놓치면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받기보다 하나라도 더 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마르타는 자기 일에 몰두하다가 그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기회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보고 다소 불편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사실 주님께 음식을 대접해 드리려 했으면 마리아가 도와주든 그렇지 않든 기쁘게 했어야 옳습니다.
자기가 정성으로 준비한 음식을 주님께서 잡수신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좋은 일을 열심히 해 놓고 마음 안에 화를 쌓아놓는다면 그만큼 보람도 없습니다.
차라리 하지 않고 편안한 마음을 지키는 것이 낫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 그 일이 내 몫이었으면 그것으로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아마도 마르타는 활동적인 여인인 듯합니다.
그러나 자기의 일에만 집착하면 그 활동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억지로 마지못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사도행전 6장 1절 이하를 보면 사도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자유롭게 전하기 위해
가난한 이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던 일을 그만하고 그 일을 부제들에게 맡겼습니다.
말씀의 선포가 그만큼 중요합니다. 모든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음식이 아니라 구원의 말씀을 먼저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곧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시중을 드는 일은 활동입니다.
그리고 활동은 기도 안에서 나온 활동이 아니라면
마음 안에 화를 담을 수밖에 없고 바른 활동이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기도하고 활동하시길 바랍니다. 기도는 주님과의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식사할 겨를조차 없이 바쁘게 활동하셨지만,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활동할 힘을 기도에서 얻었습니다. 기도 없는 활동은 무의미합니다.
또한 활동 없는 기도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기도와 활동, 활동과 기도의 조화를 이루되 먼저 기도하시길 희망합니다.
기도하면 할수록 활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세바시’라는 프로가 있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의 줄임말입니다.
산보 중에 가수 ‘김수철’ 씨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김수철 씨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합니다. 그것도 꾸준히 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비록 실패는 있을 수 있지만 언젠가는 좋은 결실을 맺는다고 합니다.
저는 김수철 씨의 노래를 듣고 자란 세대입니다.
“못다핀 꽃 한 송이, 일곱 색깔 무지개, 정신 차려, 젊은 그대, 나도야 간다.”와 같은 노래를 들었습니다.
김수철 씨는 우리의 국악을 공부하고 싶었답니다.
그렇게 국악을 40년 넘게 공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의 국악에 대한 열정은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는 ‘86 아시안 게임, 88 올림픽,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음악 감독을 맡았습니다.
우리에게 국악에 대한 관심을 주었던 영화 ‘서편제’에서도 음악감독을 맡았다고 합니다.
저는 김수철 씨의 노래는 들었지만, 그가 ‘국악’에 그렇게 많은 관심을 가졌는지는 몰랐습니다.
그냥 대중음악을 할 때는 재정적인 걱정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늘 허전함이 있었다고 합니다.
국악을 공부하고, 작곡할 때는 재정적인 걱정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늘 기쁨이 컸다고 합니다. 김수철 씨는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였습니다.
“힘들고 어렵겠지만 좋아하는 일이 있다면 꾸준히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반드시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저는 신학교에 입학하면서 관심을 갖고 좋아했던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강론’이었습니다. 사제에게 강론은 교우들과 만나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신자들에게 강론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기쁨의 시간입니다.
좋은 강론은 교우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한 주일을 지낼 수 있는 영적인 양식이 됩니다.
지루한 강론은 교우들의 몸을 움직이게 합니다.
성찬의 전례를 통해서 주님을 모시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말씀의 전례를 통해서 영적인 위로를 받고, 희망을 얻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렇게 강론을 좋아하고, 관심을 갖게 되니 학사 논문은 ‘현대인을 위한 설교’를 썼습니다.
석사논문은 ‘설교와 선교’를 썼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니 힘든 줄도 몰랐습니다.
논문을 쓰면서 강론에 필요한 4가지 요소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강론의 주된 재료는 ‘말씀’입니다. 모든 강론은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시작됩니다.
좋은 강론을 하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샘이 깊은 물과 같고, 뿌리 깊은 나무와 같습니다.
좋은 강론은 ‘시대의 징표’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문헌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현대인들의 슬픔과 기쁨, 희망과 고통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합니다.
좋은 강론은 ‘실천’으로 열매 맺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천’이 없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교만을 꾸짖으셨습니다.
김수철 씨는 50년 넘게 자기가 좋아하는 ‘국악’을 한다고 합니다.
저도 언제까지 일지는 모르지만 제가 좋아하는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몸과 마음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을 따라야 합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몫을 택하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선택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좋아하고, 꾸준히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요나의 말을 들었던 니네베 사람들은 모두 회개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을 벌하지 않으시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나의 몸을 가꾸는 만큼 나의 마음이 하느님께로 향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지금 마르타는 예수님의 몸을 섬기고 있다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섬기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르타가 ‘성찬의 전례’를 거행하고 있다면,
마리아는 ‘말씀의 전례’를 거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섬김이 진정한 ‘주님 섬기기’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할까?
그것은 주님을 섬기겠다고 나서기 전에, 먼저 주님께서 자신을 섬기시도록 승복하는 일입니다.
실상 주님을, 혹은 남을 섬긴다고 하면서, 막상은 자기 자기를 섬길 수가 있습니다.
마치 마르타처럼 말입니다.
사실은 자신의 부족함과 무능함을 받아들이는 자만이
진정으로 주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막상 주님 앞에 앉아서도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말이나 생각을 듣고 있거나 타인의 말을 듣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것이 그 어떤 섬김보다도 더 큰 섬김이 됩니다.
마치 마리아처럼 말입니다.
마리아는 지금 주님으로 하여금 자신을 섬기도록 허용해 드리고 있는 셈입니다.
곧 자신을 향한 주님의 섬김을 수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주님 되시게 해드리는 일에 해당합니다.
곧 ‘나는 섬김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신 말씀대로 해드리는 것에 해당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분과 한자리에 있게 합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그분의 일, 곧 섬기는 일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렇게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시고 우리를 섬기십니다.
그러니 하느님은 나의 종이 되십니다.
종의 모습으로 오시어 우리를 섬기십니다.
그러니 마리아는 지금 자신보다 더 작아진 예수님을 만나고 있는 셈입니다.
곧 ‘종’인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예수님의 섬김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당신께서 나를 섬기시도록 허용하는 일,
당신께서 나를 사랑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승복하는 일, 이것이야말로 당신을 섬기는 일입니다.
곧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꼭 한 가지, 그것은 자신을 그분께 내어드리고
주님을 주님으로 모셔 들이는 일, 주님께서 나를 섬기시도록 수락하는 일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정작 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無爲而無不爲)의 단계,
곧 무위(無爲)의 도(道)일 것입니다.
이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도 사실은 전부를 하는 신령스런 도(道)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관상하는 일이 바로 이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섬김은 주님을 주님 되시게 해 드리는 일인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 10,42)
그렇습니다, 주님!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입니다.
저는 그것을 이미 가졌고, 그것을 당신이 주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 어떤 처지에서도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 이상 근심 걱정할 일도 없습니다.
당신께서 저의 주님이라는 이 사실!
바로 이것이 제가 지닌 진정한 한 가지입니다.
오로지 이 '한 가지'로 하여 저는 행복합니다! 아멘.
마르타와 마리아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님을 집으로 모신 마르타는 깊은 애정으로 지극히 거룩하신 분과
그분의 제자들을 위해 음식을 장만하며, 몹시 분주하였다.
그런데 그의 동생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39절)
이것은 무엇을 하였다는 것인가?
주님의 발치에서 시장한 마리아는 바로 이 샘에서 정의의 곳간에서 먹고 마시고 있다.
자기가 귀 기울여 듣고 있는 그분의 진리를 먹고 있었다.
주님은 “나는 진리다.”(요한 14,6)라고 하신 분이시다.
그분은 생명의 빵인 당신을 마리아에게 먹이고 계셨다.
그분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요한 6,41)라고 하셨다.
그 빵은 사람을 먹여 기르되 절대 줄어들지 않는 빵이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모습에서 보듯이 덕은 한 가지의 모습이 아니다.
한쪽에는 분주한 섬김이 있고, 다른 쪽에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경청이 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 분주하게 일하는 것보다 우선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42절) 하신다.
시중드는 일로 바빠서 거룩한 말씀에 관한 지식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마르타가 열심히 시중을 들어 책망을 들은 것이 아니다.
다만 더 좋은 몫을 택한 마리아가 인정을 받은 것이다.
복음에서 보면 마르타는 마리아보다 더 뜨겁게 사랑했다.
주님께서 도착하시기 전부터 시중들 준비를 했고, 라자로를 살리시려고 주님께서 오셨을 때도
먼저 달려 나가 그분을 맞이하였다.
마르타는 주님과 그분의 제자들을 위해 시중드는 매우 거룩한 봉사를 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 그분의 영적 가르침에 모든 주의를 기울였다.
그렇다고 마르타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만, 비판하지도 않으셨다.
다만 마리아가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42절) 하심으로써
마르타의 몫은 남에게 빼앗길 수 있는 것이라고 하신다.
육신을 시중드는 일은 섬김을 받는 사람이 그곳에 있는 동안에만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마리아의 영원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실천하는 모습은 끝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평신도가 성화(聖化)되는 곳은 바로 이 세상 안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전형적인 마르타 스타일인 저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살짝 빈정이 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활동가 마르타가 아니라 관상(觀想)에 전념하는
마리아의 손을 들어주시는 듯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라이프스타일 때문에 깊이 있는 기도 생활이나
영적 생활에 몰입할 수 없는 평신도들께서 약간 속이 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장담컨대 절대 그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을 돌아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활 이전, 30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평범한 평신도로서의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30년의 세월은 복음사가조차 별로 쓸 말이 없을 정도로
그저 평범한 청년의 삶을 사셨던 나날이었습니다.
때로 어머니를 도와 설거지도 하셨을 것이고 마당도 청소하셨을 것입니다.
나자렛 사람들 사이에서 희로애락을 나누며 동고동락하셨던 것입니다.
좀 더 나이가 들어가면서 목수였던 양부 요셉의 일을 도와 묵묵히 대패질에 전념하셨을 것입니다.
다 만든 물건을 납품하러 다니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무슨 물건을 이따위로 물건을 만들었냐’는 주문자의 딱딱거림에 화도 나셨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30년이란 세월 동안 인간의 구체적인 역사 안에서 참 인간으로서
지극히 일상적인 삶을 사시면서 우리에게 ‘일상적 삶의 가치’를 직접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 평신도들께서 참으로 어떤 자세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가를
몸소 삶으로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극히 하찮아 보이는 우리의 이 일상적인 일들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로 변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평신도들께서는 매일 마주치게 되는 일상의 삶 안에서
하느님을 찾아 살아가야 할 것이며, 또한 이러한 일상의 삶은
결코 하느님과 분리될 수 없는 하나라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세상만사 안에 늘 현존하고 계시는 하느님의 자취를 찾는 노력(Finding God in All Things)을
계속할 때,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은 ‘기도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관상화’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평신도 영성과 관련해서 한국 천주교회는 참으로 특별한 사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계 교회사 안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초창기 한국 천주교회 평신도들의 신앙은
그렇게 적극적이었고 자발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토록 능동적이었던 박해 시대 평신도들의 역할이 교계제도가 확립되어 가면서
점점 수동적으로 변화되어 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탁월했던 초기 교회의 탁월했던 평신도들의 영성이었는데,
성직자들의 역할이 강화되어 가면서 즉시 힘을 잃어갔다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 평신도의 신원에 대한 불투명한 이해와 불충분한 개념 정립은
평신도 자신들에게 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에 불이익과 손실을 초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평신도 영성의 쇠락은 교회의 퇴보와 늘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 맡겨진 중요한 과제 하나 가운데 하나가 평신도 영성을 활성화시키는 일입니다.
평신도들 안에 활동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주의 깊게 바라보고,
평신도들이 지닌 카리스마와 창의력을 존중하고 교회 쇄신과 발전을 위해 최대한 활용해야 합니다.
평신도들은 교회 안에서 제2중대가 절대로 아닙니다.
장교인 사제들을 맹목적으로 졸졸 따라다니는 졸병 역시 절대로 아닙니다.
평신도들은 사제들의 수가 부족하고 그들의 업무가 과중하기에
이를 보완해 주기 위한 존재도 결코, 아닙니다.
평신도들 역시 성직자나 수도자와 마찬가지로 복음적 완덕에로 불림을 받은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단 평신도들께서 세상과 격리된 수도원이나 성전 안에서 살지 않지 않고 ‘세상 안에서’ 살아갑니다.
따라서 평신도들의 성화 여정은 당연히 ‘세상 안에서’ 그리고 ‘세상을 통해’ 전개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수도자가 평신도의 삶을 살길 원치 않으시듯이,
평신도가 수도자나 사제의 영성을 살길 바라지 않으십니다.
각기 소명에 성실하며 각자의 카리스마, 달란트에 따라
복음적 삶을 다양하게 표현하도록 마련하셨기 때문입니다.
평신도는 성직자나 수도자 못지않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독특한 영성을 지닙니다.
평신도 영성은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거나 도피하는 삶의 모습이 아니고
오히려 그 구조들 안에서 육화하여 복음화하며 그 안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성화하고 또한 성화되는 삶의 모습입니다.
평신도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봉사하며 성화되는 곳은 바로 이 세상 안입니다.
필요한 것은 하나뿐 : 첫 도미노를 찾아라!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마리아와 마르타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 봉사하기 위해 밤낮으로 뛰는 신앙인을 의미하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기도를 제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육체적인 봉사를 열심히 하는 신앙인으로서는
성당에 앉아서 기도만 하는 이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게으름뱅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필요한 것은 기도뿐이라고 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선택’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데도 우선으로 선택하고 집중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칫 그 우선순위를 잊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은 1965년에 개봉한 뮤지컬 영화로,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영화의 주요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인공 마리아는 오스트리아의 수녀원에서 수녀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고 있지만,
그녀의 자유분방하고 활발한 성격 때문에 수녀원에서의 생활에 적응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녀는 수녀원장의 권유로 트라프 대령의 집에서 아이들의 가정교사로 일을 하게 됩니다.
트라프 대령의 집에는 7 명의 아이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엄격한 규율 아래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대령은 아내의 죽음으로 아이들을 군인처럼 교육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규율만을 강조하는 트라프 대령에 반기를 든 마리아는
그 아이들에게 사랑과 자유를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선택한 것이 음악입니다.
음악의 즐거움을 전해줌으로써, 그들과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게 됩니다.
‘도레미파솔라시도’와 같은 노래를 통해 아이들에게 음악의 기본을 가르치면서,
그녀는 아이들과 함께 자연 속에서 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지냅니다.
음악은 마리아와 아이들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다리 역할을 합니다.
덕분에 아이들은 다시 웃음을 찾게 되고,
마리아 역시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진정한 자기 삶의 방향을 찾게 됩니다.
마리아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사랑은 트라프 대령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되며,
결국 그들 사이에는 사랑이 싹트게 됩니다.
영화는 마리아와 트라프 가족이 나치의 위협으로부터 도망치는 장면으로 클라이막스를 이루며,
결국 그들은 함께 오스트리아를 떠나 스위스로 피신하게 됩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은 마리아가 음악을 선택하고 그것에 집중함으로써,
트라프 가족의 삶에 변화와 행복을 가져다준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마리아는 아이들 교육을 위해 무엇을 선택하고 집중해야 하는지 알았습니다.
음악을 선택하니 나머지는 저절로 잘 되어갔습니다. 이것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 성공의 비결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모든 일에 다 집중을 잘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집중해야 할 하나를 잘 찾아내는 사람들입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아침에 명상하는 한 시간을 꼭 가졌습니다.
빌 게이츠는 일 년에 두 번, 생각하는 일주일을 가집니다.
마치 우리의 피정처럼 혼자 산속의 작은 집에서 생각에만 몰두합니다.
이런 것들이 위대한 발견을 하게 하는 그들이 선택한 가장 중요한 것들입니다.
그들은 이런 루틴을 절대 다른 것에 빼앗기지 않습니다. 그 중요성을 알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소설가 쏜턴은 “모든 위대한 변화는 차례로 쓰러지는 도미노처럼 시작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기도가 도미노의 첫 시작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 물리학 저널에 따르면 한 개의 도미노는 그다음 세워져 있는 도미노가
1.5배에서 많게는 2배까지 커도 넘어뜨릴 수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1cm 도미노로 시작해서 도미노 17개만 있으면
대한민국 초고층 빌딩 롯데 타워를 넘어뜨릴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원씽』의 저자 게리 켈러는 남다른 성과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이 도미노 원리에서 찾고 있습니다.
“삶은 크고 작은 수많은 문제들로 뒤덮여 있습니다.
하지만 우선순위를 세우고 줄을 맞춰 잘 세운다면 최초의 단 하나, 그것만을 움직임으로써
다른 문제들을 저절로 쓰러뜨릴 수 있습니다.”
게리 켈러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일,
그리고 그것이 나머지 모든 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일을 찾으라고 말합니다.
그것만 찾으면 다른 일은 할 필요가 없거나 쉽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겐 이것이 ‘기도’입니다.
사제라면 첫 도미노를 무엇으로 두어야 할까요?
성경은 오늘 복음에서처럼 친절하게 그 해답을 알려줍니다.
사도들이 여러 일로 바쁘다 보니 정작 첫 번째 도미노를 움직일 힘도 없게 되자
일곱 부제를 뽑아 그들에게 나머지 일을 맡깁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첫 도미노에만 신경 쓰겠다고 합니다. 그것이 이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사도 6,2-4)
사제가 성사를 집전하는 행위를 하는 직무라고 생각하던 저에게 큰 울림을 준 말씀이었습니다.
사제는 사실 성사를 집전하는 일보다 더 중요하게 기도로 말씀을 준비하는 일에 몰두해야 합니다.
그것만 하면 성사 집전도 쉬워집니다. 말씀 준비가 잘 안되었을 때는 미사가 두려워집니다.
그러면 미사 집전에 게을러지고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말씀 준비가 잘 되었다면 미사가 기다려집니다.
내가 깨달은 것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사제에게 첫 번째 도미노는 역시 말씀 묵상과 강론 준비입니다.
관상과 활동의 적극적인 조화
박상대 마르코 신부
어제는 우리가 루카 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다.
그 가르침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하느냐고 질문하는
어떤 율법교사 스스로가 뱉어낸 대답이었다.
바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었던 것이다.
누가 이웃이냐는 반문에 예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려 주셨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손님으로 모신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의
예수님에 대한 행동양식을 통하여 삶에 있어서 ‘실상 필요한 단 한 가지’를 가르쳐 주는 대목이다.
요한 복음에는 마리아와 마르타가 오빠인 라자로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동편 요르단강 쪽으로 3km 지점에 위치한 베다니아에 살았다고 한다.(요한 11,1)
그런데 루카가 말하는 ‘어떤 마을’이 베다니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예수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는 중이긴 하지만,
복음의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예수님은 아직 예리고 근처에도 이르지 못하셨기 때문이다.(루카 18,35)
루카에게 있어서 지리적 위치는 그리 중요한 요소가 되지 않는다.
루카는 그저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더욱이 예수님을 손님으로 맞이한 가족에게 실상 필요한 단 한 가지를 가르쳐 주고자 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손님을 자기 집에 초대하면 처음에는 주인이 손님에게 ‘베푸는 자’가 된다.
그러나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 위치가 바뀌어 손님이 주인에게 ‘베푸는 자’가 된다.
주인이 손님으로부터 ‘받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는 아브라함이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곁에서 야훼의 천사 셋을 보고 손님으로 맞아들인 경우와 같다.
아브라함은 낯선 사람 셋을 뛰어나가 맞으면서 손임으로 들어와 줄 것을 청한다.
아브라함이 처음에는 극진한 정성으로 손님들을 대접한다.
그러나 곧 야훼의 손님들은 그에게 이사악의 출생 소식을 선물로 준다.(창세 18,1-10)
주인이 오히려 손님으로부터 ‘받는 자’가 된 셈이다.
이것은 오늘 복음의 마르타와 마리아를 통하여 더욱 명확해 진다.
통상 집에 손님이 오면 음식으로 손님을 접대하는 데 바쁜 가족도 있을 것이고,
와중에 손님 곁에서 대화를 꾸려나가는 가족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흔히 있는 일로서 같은 자매끼리 마르타처럼 누구는 일하고 마리아처럼 누구는 일하지 않고
손님 곁에서 노닥거린다면 자매지간에 꼴사나운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마르타도 자신의 불평을 주님께 말씀드린 것이다.
예수께서 처음에는 마르타로 하여금 시중을 들게 하시지만,
당신 발치에 앉아 말씀을 경청하는 마리아의 태도를 통하여 자신을 ‘베푸는 자’로 부각 시킨다.
예수께서 베풀어주시는 것은 ‘실상 필요한 단 한 가지’로서 바로 말씀이신 당신 자신이시다.
예수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셨다.(마태 20,28)
그렇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삶 전체를 통하여 인간을 섬기러 오신 것이다.
따라서 말씀이신 예수님을 경청하고 받아들이는 것, 이것 이외에 더 필요한 것은 사실상 없다.
그렇다고 마르타의; 가정적이며 활동적인 태도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성서가 전해주는 마리아의 태도에서 ‘관상적 모범’을,
마르타의 태도에서 ‘활동적 모범’을 예수님을 따르는 방법으로 받아들였다.
觀想과 活動, 이 둘은 동시에 행할 수 없는 德目이다.
그렇다고 이 둘이 별개의 것이 될 수는 없다.
관상이 없는 행동은 생각이 없는 행동과도 같기 때문에 任意나 無作爲가 될 수도 있으며,
행동을 동행하지 않는 관상은 空想이나 虛像에 머무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관상과 활동은 적절히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소극적인 조화보다는 적극적인 조화가 필요하다.
누구든지 인생에서 성공하기를 원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무엇이 더 필요하고 중요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먼저 관상하는 것이며 먼저 기도하는 것이다.
이는 먼저 行動하고 思考하는 것보다 먼저 사고하고 그 다음에 행동하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이다.
먼저 관상한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모든 좋은 것을 소유하고 계신 하느님 말씀(요한 1,3-4)에 먼저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는 곧 하느님을 ‘베푸는 자’로 맞이하는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