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불교 철학의 ‘고집멸도(苦集滅道)’라는 개념을 배운다. 해석하자면 고(苦)는 생로병사의 괴로움, 집(集)은 괴로움의 원인이 업과 번뇌에서 비롯되었다는 통찰이다. 번뇌 중 인간의 갈망 그리고 탐욕과 집착을 의미하는 '망집'을 가장 큰 원인으로 꼽는다. 멸(滅)은 고통 혹은 그 원인의 소멸에 관한 진리, 도(道)는 고통을 소멸시키기 위해 행하는 진리를 말한다. 수행자가 아닌 보통 사람에게 ‘고집멸도’가 큰 의미가 있겠냐 싶지만 살다보면, 고집멸도의 진리가 삶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무언가 이뤄내기 위해 집착하면, 오히려 그 과정이 고통스러워진다. 때론 목표를 이루겠다는 열망을 잊고, 눈앞의 과정에 집중할 때 심신이 편안해지고 결과는 자연스럽게 따라오기도 한다.
(△ 영화라고 해도 진부하다고 느낄 레스터의 우승.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출처:레스터시티FC 홈페이지)
창단 132년 만에 감격적인 우승을 맛본 레스터시티(이하 레스터)가 연일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있다. 레스터의 우승 배당률은 무려 1:5000이었다고 하는데, 앨비스 프레슬리가 살아있을 확률보다 작게 책정된 정도라고 한다. 사실 팀을 지도하는 라니에리 감독은 물론 선수들도 우승은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년 2등 감독이, 하부 리그에서 뛰거나 주전 경쟁에 밀렸던 선수들을 모아 우승에 성공했다. 영화로 쳐도 진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덕분에 레스터의 인기는 치솟고 있다. 실리적으로 봐도 레스터가 우승으로 받게 될 프리미어리그 중계권료도 어마어마하다. 아마 레스터의 팬들은 올 시즌을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이제 레스터가 바라봐야 할 것은 다음 시즌이다. 디펜딩 챔피언 레스터가 맞게 될 변화는 매우 클 것이다. 때문에 레스터에겐 선택과 집중이 매우 중요하다. 이번 시즌의 성과에 도취되어 너무 많은 것을 노리려고 한다면 그 어떤 것도 손에 넣지 못할 수도 있다. 자본이 팀의 성적을 좌우하는 가장 큰 힘이 되어버린 현재의 축구계에서 레스터의 우승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레스터는 많은 중소클럽들에게 수천억의 투자가 없어도 우승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준 선구자이다. 그래서 새 시즌의 레스터는 중소클럽들이 성공을 거둔 이후에 어떻게 다음 시즌을 준비해야 하는지 모범이 될 수도 있고 타산지석이 될 수도 있다.
때문에 시즌 후의 레스터의 행보에 많은 눈이 쏠리고 있다. 다음 시즌을 앞두고 선수단의 변화는 어떨지, 또 프리미어리그를 지배할 수 있을지, 동시에 레스터가 다음 시즌 유럽 무대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많은 이들이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새 시즌을 맞는 레스터는 그 준비 과정부터 ‘고집멸도’의 원리를 기억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 행복한 레스터시티 팬들. 132년 만의 첫 우승이라니 감동은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이다. 출처:레스터시티FC 홈페이지)
이번 시즌 눈부신 성과를 냈지만 레스터가 여전히 중소클럽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내년 시즌을 이번 시즌처럼 성공적으로 보내는 것은 더 어려워질 것이다. 우선, 다른 팀들의 견제가 심해질 것이다. 레스터가 이번 시즌 초반 엄청난 기세를 보이며 승점을 쌓을 때도 프리미어리그의 다른 팀들은 언젠가 내려가겠지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새 시즌을 맞으면 디펜딩 챔피언 레스터를 상대로 그런 ‘방심’을 보일 팀은 없다.
둘째로 주가가 폭등한 바디, 마레즈, 캉테 등의 이적 가능성이 작지 않다. 시즌 내내 좋은 활약을 보여 빅클럽들의 관심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언급되는 팀들만 해도 맨체스터시티, 아스날, 첼시 등 프리미어리그 팀들은 물론이고, 파리생제르망, 레알마드리드, FC바르셀로나 등도 이 선수들에 대한 관심이 있다는 소문이다. 주축 선수들을 지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전망이다. 대체자를 물색했을 때에만 선수의 이적을 허용한다는 방침이지만 거액의 이적료 제안이 오면, 팀도 그리고 선수 입장에서도 거절하기 쉽지 않다. 특히 선수가 이적을 바란다면 팀에서도 보내줄 수밖에 없다.
다음 시즌 레스터에게 가장 부담스러운 것은 빡빡해진 일정이다. 레스터는 UEFA챔피언스리그에 참여하게 되었다. 프리미어리그의 클럽들은 원래도 타 리그의 클럽에 비해 더 많은 일정을 소화한다. 여기에 챔피언스리그까지 치러야 한다면 스쿼드의 전체적인 질은 유지하면서도 양적인 팽창을 이뤄야 한다. 이번 시즌 분데스리가의 FC아우크스부르크가 유로파리그에 참여하면서 체력 관리와 경기력 유지에 어려움을 겪었고 강등권으로 순위가 떨어지기도 했다. 라니에리 감독이 경험이 많은 감독이긴 하지만, 레스터 선수 중엔 유럽대항전을 병행한 경험이 있는 선수가 많지 않다. 빡빡한 경기 일정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챔피언스리그에서만 부진한 것이 아니라 리그 경기까지 함께 부진에 빠질 수 있다. 레스터의 새 시즌이 마냥 장밋빛 미래로 빛난다고 할 순 없는 이유이다.
(△ 빅클럽의 관심이 연일 보도되고 있는 캉테. 레스터시티는 주축 선수들을 지킬 수 있을까. 출처:레스터시티FC 홈페이지)
레스터는 이번 시즌 하부리그에서 가능성을 발견한 선수들을 영입해서 좋은 성적을 올렸다. 그리고 다음 시즌에도 이적 정책의 기조는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많은 돈을 쓰지 않고 최대한 주축 선수들을 지키고 잠재력 있는 선수들을 영입해서 스쿼드의 양을 늘리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영입하는 선수들이 모두 제 몫을 할 것이란 보장이 없다. 또한 이번 시즌처럼 모든 선수들이 부상 없이 시즌을 치를 수 있을지도 미지수이다. 때문에 챔피언스리그를 병행하면서 이번 시즌과 같은 결과를 내려는 욕심을 부렸다간 오히려 어려운 시즌을 치를 수 있을 것이다.
레스터의 입장에선 성적을 비롯한 많은 것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할 것이다. 이번 시즌의 영광은 지나간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레스터 구단과 라니에리 감독 그리고 선수들까지도 시즌을 시작하며 우승할 것이라 생각한 이는 없었을 것이다. 그들에겐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집착이 없었다. 다만 눈앞에 다가온 한 경기, 한 경기에 최선을 다했다. 그런 그들의 마음은 비길 경기도 이기게 만들었고, 질 경기를 비기게 만들었다. 이겨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다면 오히려 시즌을 망쳤을지도 모른다.
레스터가 다음 시즌을 잘 보내기 위해선 본인들이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많은 팬들이 레스터가 챔피언스리그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레스터의 목표가 현실적으로 프리미어리그 2연패나 챔피언스리그 우승이 될 수는 없다. 프리미어리그의 순위표 상단에 꾸준히 자리 잡는 팀이 되는 것이 우선이다. 챔피언스리그에서도 성적보단 본인들의 축구를 보여주는 것이 목표가 되는 것이 현실적이다. 단기적 성공에 눈이 멀어 팀이 장기적으로 나아갈 방향을 잃어서는 안 된다. 팬들의 기대도 과도하게 느껴진다면 가끔은 그 기대를 저버릴 수도 있어야 한다. 레스터는 이번 시즌의 성공을 재현하겠다는 열망은 버려야 한다. 오히려 '집착'을 '멸(滅)'해야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다.
결국 특정한 성적을 내겠다는 것이 아니라, 다음 시즌에도 레스터다운 축구를 보여주는 것이 레스터의 차기 시즌 목표가 되어야 한다. 성공에 들뜨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 바는 아니나, 성공 이후에 자만심에 빠지는 경우를 보는 것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이미 이번 시즌레스터의 우승은 ‘기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 한 번의 기적을 이루는 것은 엄청난 일이겠지만, 매번 일어나는 일을 기적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레스터는 오히려 강등권 탈출을 목표로 삼았던 지난 시즌처럼 한 경기 한 경기에 집중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 될 것이다. 다음 시즌을 위해 레스터는 ‘고집멸도’를 외치며 마음의 집착을 배워내는 연습을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아, 지금은 기적 같은 우승의 기쁨을 만끽하는 것이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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