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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11일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제1독서 : 요나 4,1-11
복 음 : 루카 11,1-4
1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3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4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람은 다음 네 가지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1) 나도 알고, 남들도 아는 나의 모습.
2) 나는 알지만, 남들은 모르는 나의 모습.
3) 나는 모르지만, 남들은 아는 나의 모습.
4) 나도, 남들도 모르는 나의 모습.
대부분 첫 번째와 두 번째 모습에 집중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 대해 자기가 제일 잘 안다고 여기며,
그중에 어떤 모습은 다른 사람들이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다며 불평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안에 세 번째와 네 번째 모습도 있음을 인정합니다.
즉, 자기도 모르는 새로운 나의 모습이 있고,
때로는 남들이 나에 대해 더 잘 알 수도 있음을 받아들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남들에게 거짓된 모습을 보이려 하기보다 자기 모습을 더 잘 알기 위해 노력합니다.
반대로 어리석은 사람은 다른 이가 바라보는 자기 모습에만 더 큰 관심을 두기에
늘 거짓과 위선 속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진실로 지혜롭기를 원하십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지혜롭다고 인정받던 바리사이, 율법학자 등의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위선자’라는 표현으로 꾸짖으시며,
이런 거짓된 지혜로움에서 벗어나길 바라십니다.
위선자란 자기를 세상에 숨기고 더 나아가 하느님께도 숨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거짓된 나를 숨기지 않는 참된 겸손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나를 잘 알 수 있도록 깊은 묵상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직접 가르쳐주십니다.
그 기도는 우리가 매 미사 때 바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그 시작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길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를 높이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가 낮아져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에는 ‘하느님’이라고도 함부로 부를 수 없었는데,
이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만큼 하느님과 우리의 간격을 좁혀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모두 잘 알고 계시고, 사랑으로 함께하시는 분임을
‘아버지’라는 표현으로 강조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사랑으로 가까이 오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사랑에 대답해야 할까요?
자기를 숨기는 데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 겸손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겸손함은 반짝이는 빛이다. 정신이 지식을, 마음이 진실을, 받아들이도록 준비시킨다(폴린 드 뮐랑).
하면 할수록 더 잘하게 됩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기도는 하면 할수록 더 잘하게 됩니다. 기도를 자주 함으로써 기도를 배우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도 기도의 참맛을 느낄 수 없습니다”(알베리오네).
그리고 기도는
“영적 생활의 기초입니다. 기도할 때 그대는 하느님과 통교하게 됩니다.
마치 전등이 발전기와 연결됨으로써 빛을 발하는 것과 같습니다”(구엔 반 투안 주교).
그러므로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호흡을 해야 살듯이 기도해야 신앙의 삶을 지킬 수 있습니다.
“비록 잘못에 떨어졌다 할지라도 기도하기를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잘못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힘은
꾸준히 계속되는 기도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며 죄를 용서하시고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하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나라는 하느님의 다스림을 의미하고 하느님의 다스림이란 결국 사랑의 삶을 말합니다.
요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까롤로 까레또는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요, 사랑이 없으면 지옥”이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을 때 바로 그곳이 아버지의 나라입니다.
또한 우리는 매일 필요한 양식을 청해야 합니다.
양식은 단순히 밥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필요한 양식은 그날에 필요한 양식입니다. 잠언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마십시오. 먹고 살 만큼만 주십시오.
배부른 김에 하느님이 다 뭐냐? 하며 배은망덕하지 않게,
너무 가난한 탓에 도둑질하여 하느님의 이름에 욕을 돌리지 않게 해 주십시오”(잠언30,8-9).
매일의 양식을 달라고 간절히 ‘날마다’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육적인 양식뿐 아니라 영적인 양식을 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과 더불어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생명의 빵을 매일 모셔야 합니다.
미사는 다른 여느 기도 중에 가장 중요한 기도이며
영성체를 통해서 가장 완전하게 주님과 하나가 되는 은총의 혜택을 입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18,13)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실수와 잘못 안에 용서받아야 할 연약함을 지니고 살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유혹은 믿음으로부터 멀어지는 위험을 의미합니다. 그 유혹은 항상 있게 마련입니다.
예수님도 유혹을 받으셨고 말씀으로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사실 우리의 진보는 유혹을 통해 이뤄지고 유혹을 통해 자신을 완전히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겸손한 사람은 기도하게 됩니다.
성 레오교황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성인이여, 기뻐하십시오. 당신께 면류관이 가까이 있습니다.
죄인이여, 기뻐하십시오. 당신은 죄의 용서에로 초대받았습니다.
이방인이여 용기를 내십시오. 당신은 생명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 생활을 청산하고 낡은 인간성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의 탄생에 참여하게 된 자들로서 육신의 행위를 끊어버립시다.
부패한 행실로 말미암아 이전의 비참한 상태로 돌아가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받아야 하는 과거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갈망하는 현재와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미래의 다스림이
하느님 안에 있음을 잊지 않고 자비와 사랑, 섭리의 하느님과 더불어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사제생활을 10년 했던 2001년 때입니다.
본당 사제로 사목하면서 바쁘게 지냈지만, 영적인 갈망이 있었습니다.
강론 준비하고, 미사를 봉헌하고, 신자들과 친교를 나누고, 아픈 사람을 찾아가면서 지냈지만,
영적인 목마름은 계속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너는 잘하였다. 그러나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라라.
그러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부자청년은 슬퍼하며 예수님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가진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30대 후반의 저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기도와 침묵’이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나서 일곱 마귀를 떨쳐버릴 수 있었던 것처럼
‘기도 사제모임’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베드로와 요한이 한걸음에 예수님의 ‘빈무덤’을 찾아갔던 것처럼
매주 금요일에 왕복 200킬로가 넘는 혜화동 신학교엘 갔습니다.
기도모임 사제들은 매주 금요일 성체조배를 하였고, ‘영신수련’에 대한 책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영신수련’은 제게 영적인 갈증을 채워주는 가뭄 끝의 단비가 되었습니다.
영신수련 지도 사제들은 매년 신학생들의 8일 피정과 30일 피정을 지도하였습니다.
저는 선배 사제들에게 배우면서 신학생들을 위한 피정에 함께 하였습니다.
선배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힘을 주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지도자가 힘을 주면 학생들도 힘을 주게 되고
그렇게 되면 지도자도 힘들고 학생들도 힘들다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라고 하였습니다.
피정에 깊이 들어가면서 학생들은 ‘열등감과 죄의식’에 빠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내면을 깊이 보면서 지난날의 잘못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피정을 준비하면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먼저 묵상하면 좋다고 하였습니다.
신학생들은 이미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니
‘선택’보다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 위한 ‘명상’을 하면 좋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영신수련 피정에 함께하면서 좀 더 깊이 알고 싶었습니다. 주
교님께 ‘해외연수’를 청하였고, 주교님께서는 저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영신수련을 공부하였고, 직접 40일 피정을 하였습니다.
해외연수를 마친 후에 돌아와서 영신수련 지도사제 모임에 함께 하였고,
2014년 성소국장이 될 때까지 10년 넘게 학생들과 함께 피정을 하였습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영적인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세례를 받았고, 어엿하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보다 먼저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고,
이미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 또한 스승인 요한에게 배워서 열심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우리도 요한의 제자들처럼
‘기도’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아름다운 기도를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의 기도’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기도를 외우면서 영적인 갈증을 채울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외우고, 주님의 기도에 따라서 살면 아무런 걱정도, 갈등도 없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200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신앙인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유일한 기도문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바치는 모든 기도문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습관처럼 주님의 기도를 외우기보다는
주님의 기도가 주는 영적인 힘을 느끼면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예전에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지 마라.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고 하지마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라고 하지 마라. 아들딸로 살지도 않으면서.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하지 마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만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며'라고 하지 마라.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지 마라. 내 뜻대로 되기만 바라면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하지 마라.
죽을 때까지 먹고 남을 양식을 쌓아 두려 하면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하지 마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고 하지 마라. 죄지을 기회를 애써 찾아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하지 마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아멘'이라고 하지 마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도 않으면서.”
오늘 하루 ‘주님의 기도’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그 가르침대로 살면 좋겠습니다.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주십시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기도’는 마음을 온전히 드러내는 지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도를 “욕망의 해석자”라고 표현했습니다.
그의 기도를 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고민하고 있고,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십계명’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며,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주님의 기도’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가장 완전한 기도이다.
~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올바르게 바랄 수 있는 것을 모두 청할 뿐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청해야 할 것을 순서대로 청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기도는 청해야 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줄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정서까지도 형성시켜 준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드림으로써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고,
욕망을 훈련시켜 하느님의 목적과 조화를 향하도록 변화한다.”
그렇습니다.
‘기도’를 보면, 그 사람이 보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이 기도에 담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도 안에는 그 사람이 담겨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기도'에는 예수님이 담겨있습니다.
곧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당신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담기기를 바라시는 것들이 무엇인지가 담겨있습니다.
그러니 이 기도문에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자 하셨던 것들이 수정처럼 농축되어 있습니다.
이 기도문은 비록 짧지만, 그리스도교 신학과 신앙의 근본과 핵심이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참으로 복음 전체를 요약한 것이다.”
사실 이 기도는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준 기도’로서, ‘예수님의 기도’라는 사실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기도를 드릴 때,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께 기도드리게 됩니다.
그러니 이 기도의 배후에는 언제나 예수님이 함께 동행 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아드님을 통하여 비로소 ‘아버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처럼 이 기도는 우리에게 ‘아버지’를 선사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느님의 아들이 되게 합니다.
곧 성자의 반열에 들게 하고 하느님이 되게 합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놀라운, 고귀한 기도인지요?
사실 올바르게 사는 것은 올바른 기도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루카 11, 4)
주님!
유혹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게 하소서!
없애려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속에서 잠시도 떨어져 있지 않는
당신의 사랑을 볼 수 있게 하소서!
스스로 구원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구원자이신 당신께 의탁하게 하소서.
그 속에서 제 마음을 드리게 하시고
당신께 속한 자로 살게 하소서. 아멘.
저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주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심으로써
제자들이 기도를 통해 당신과 하느님과의 관계에 참여하게 하신다.
우리도 하느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2절)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아들과 같게 하신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하며,
하느님의 자녀답게 그분께 맞갖은 삶을 살아야 한다. 그때 우리의 간청을 받아주실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2절),
이 기도는 그분의 이름이 우리 안에서,
우리 마음과 뜻 안에서 거룩하게 지켜지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이 기도는 그분의 이름이 영예롭고 거룩한 것임을 알고 고백하는
마음과 믿음이 자신에게 생기게 해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이 기도가 생명의 근원이며 축복의 원천이다.
구원받아 높이 들어 올려지는 데 더 좋은 기도는 없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2절)
아버지의 나라는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마태 25,34)이다.
이것이 우리의 청원이다.
그 나라는 올 것인데, 만일 우리가 왼쪽에 서게 되면 우리는 그 나라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그 나라에서 모든 구원받은 자들에게 돌아갈 몫을
우리도 받을 수 있도록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3절)
일용할 양식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말한다.
주님께서는 빵만이 아니라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다.
또한, 영적인 양식으로 단 하루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요한 6,35)하신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 양식을 청하는 것은 그분 안에 살고 그분과 하나 되기를 청하는 것이다.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4절)
우리는 지은 죄를 용서해 주십사고 하느님께 빌어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그들이 어떤 잘못을 했든지 용서해야 한다.
이렇게 용서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주님의 기도는 마지막으로 유혹자에게 끌리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즉 죄만 용서해 주는 것이 아니라, 죄를 피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소박하고 인정 많고 사랑스러웠던 사목자, 요한 23 교황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사목 노선이나 행동 방식을 유심히 분석해보니,
역대 교황님들 가운에 한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요한 23세 교황님.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요한 23세 교황님이 시작하셨지만,
아직도 진행 중인 제2차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실현하시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계시는 분위기입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소박하고 인정 많고 사랑스러웠던
요한 23세 교황님의 모습을 기억하고 그리워합니다.
그는 정녕 脫權威主義의 전형이었습니다.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 그는 베네치아 대교구 교구장이자 추기경으로 사목하고 계셨습니다.
베네치아에서 보여준 그의 모습은 너무나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는 추기경이기에 앞서 베네치아 시민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베네치아 시민 모두의 부담 없는 친구였습니다.
그는 수많은 다리 위를 걸어 다니며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의 집을 스스럼없이 방문했습니다.
발걸음을 멈추고 아이들의 머리를 한참 동안 쓰다듬어 주는가 하면
열심히 노 젓는 뱃사공의 뚝심을 칭찬했습니다.
큰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모퉁이 길을 돌아오는 할머니들에게 따뜻한 말을 건넸습니다.
당시로서는 3D업종이었던 부두노동자들과 조선소 근로자들의 친구가 되어
그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안타까워했습니다.
교황으로 선출되고 나서 맞이한 첫 번째 성탄 전야,
그는 어린이 병동을 찾아가 아이들과 함께 지냈는가 하면,
그다음 날 성탄절 아침에는 교도소에 갇혀있는 ‘사랑하는 아들들’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는 그 누구보다도 가장 가까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해주었습니다.
교황청에 근무하는 직원들, 운전기사, 주방 아주머니,
비서 신부님과 절친 관계, 1촌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이런 요한 23세 교황님의 행보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에 의해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습니다.
요한 23세가 교황으로 선출된 후 군중들에게 인사하려고 발코니에 섰을 때
사람들은 깜짝 놀랐고 조금은 웃었습니다.
세련되고 이지적이던 전 교황님들과는 달리 너무나 편안한 할아버지,
넉넉하다 못해 뚱뚱한 할아버지 한 분이 딱 나타나신 것입니다.
큰 체구를 고려해서 크게 맞춘다고 맞춘 수단인데도 몸에 꽉 끼어서 꽤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유머 감각이 탁월하셨던 교황님은 힘겨운 투병 생활 끝에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비서 신부님을 향해 장난기 어린 얼굴로 농담을 건넬 정도였습니다.
다음의 일화를 통해 그가 얼마나 유머러스한 분이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한번은 교황님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 가운데 한 부인이 그를 뚫어지듯이 바라보다가
이렇게 중얼거렸답니다.
“새 교황님은 너무 늙고 뚱뚱하셔!”
그 말을 들은 교황님께서는 화를 내기보다 오히려 만면 가득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자매님,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는 미인 선발 대회가 아니랍니다.”
한 신앙인이요, 동시에 사목자로서의 좋은 모델이 되어 주신 요한 23세 교황님,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우리에게 아버지요 선물로 보내주신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이 땅의 모든 사목자들이 교황님을 닮아 더 겸손하고, 더 온유하며,
양들을 향한 자비심과 연민의 마음으로 충만하길 기도합니다.
주님의 기도 : 가장 완벽한 기도
박상대 마르코 신부
루카 복음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가르침은 바로 ‘기도’에 관한 것이다.
오늘 복음은 모든 기도의 모범이 될 ‘주님의 기도’를
예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시는 대목이다.
우선 루카 복음의 주님의 기도(11,1-4)와 마태오 복음의 주님의 기도(6,9-13)를 비교해 보면,
루카는 5개의 청원을, 마태오는 7개의 청원을 담고 있다.
루카에는 마태오의 첫 번째 청원인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와
일곱 번째 청원인 ‘또한 우리를 악에서 구하소서.’가 빠져 있다.
루카는 주님의 기도를 ‘아버지’라고 시작하는 반면,
마태오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며 시작한다.
마태오는 산상설교(5-7장)의 테두리 안에서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지만,
루카는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자기들도 기도하고자 하는 제자들의 요청에 의하여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우리는 오늘 편의상 현행의 주님의 기도를 묵상해 보자.
주님의 기도는 우선 예수님이 아버지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로 볼 수 있다.
이 기도는 일곱 가지 청원을 담고 있는바, 전반부의 세 가지 청원은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에 관한 것으로서 하느님에 대한 청원이며,
후반부의 네 가지 청원은
‘우리의 일용할 양식’, ‘우리 잘못의 용서’, ‘우리를 유혹으로부터 보호’,
‘우리를 악에서 구제’에 관한 것으로서 우리 인간과 삶에 대한 청원이다.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의 청원에 의해
이 땅에 하느님의 영광(이름)과 통치(나라)와 섭리(뜻)가
계시 되었음을 선포하는 감사와 찬양의 기도이다.
아울러 이 땅 위에서 살아가는 우리 인간의 육체적 구원(양식)과 영혼의 구원(용서)을 도모하여,
모든 인간을 온갖 유혹과 악으로부터 완전히 해방시켜(해방)
종말론적 구원(영생)을 주시려는 예수님의 다짐기도인 것이다.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께서 당신의 기도인 ‘주님의 기도’를
이 땅 위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바침으로써
이 기도는 제자들의 기도가 되었고, 우리의 기도가 되었다.
주님의 기도는 다른 어떤 기도가 필요 없을 정도로 완벽한 기도이다.
주님의 기도 후반부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인간이 하느님께 청하는 일용할 양식은 어제나 내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늘만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께 우리 죄의 용서를 청하는 것은 우리의 지나간,
즉 이미 행한 어제의 잘못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께 갖은 유혹과 악으로부터 보호와 해방을 청하는 것은 未知의 내일을 위한 것이다.
이렇게 주님의 기도 후반부는 우리 인간 자신과 실존을 위한 것으로써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차원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아울러 우리가 오늘만을 위한 일용할 양식을 청할 때는
창조주이시며 만물의 주인이신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또 우리가 어제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청할 때는
우리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 봉헌을 생각하며
구세주께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또한 우리가 다가올 온갖 유혹과 악으로부터의 보호와 해방을 청할 때는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강림하신 진리이며 위로자요 협조자인 성령 하느님께 의지하여
우리의 미래를 맡겨드리면서 그분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주님의 기도는 한 분이신 하느님의 이름과 통치와 섭리를 청원하며,
성삼이신 하느님의 각 위격에 일용할 양식과 용서, 보호와 해방을 청원하면서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완벽한 기도인 것이다.
이제 주님의 기도는 매일매일 하느님 성삼께 바치는 나의 기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주님의 기도를 매일 외우는 것으로만 끝난다고 생각하면 큰 오신이다.
그것은 주님의 기도가 모든 신앙인이 지녀야 할 진실한 삶의 자세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기도는 이 기도가 담고 있는 내용의 실천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기도 중에서 자신의 신원을 재삼 확인하시고,
신원에 따른 사명을 다짐하신 후 항상 그대로 행동하신 것처럼 말이다.
이 점이 어제 복음에서 밝혔듯이,
관상과 활동을 한데 묶어 적극적인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이유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이 예레미아 수녀
공관 복음서 안에 주님의 기도는 두 가지 형태로 우리에게 전해져 온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조금 긴 형태의 기도문이고,
루카 복음은 마태오 보다는 짧은 형태의 기도문이다.
루카 복음은 두 가지 기원과 세 가지 청원으로 전하고,
마태오 복음은 세 가지 기원과 네 가지 청원이 나온다.
‘주님의 기도’는 마태오와 루카 복음에서만 전해 주는 것으로 보아
‘예수 어록(Quelle)’에서 이 기도문을 옮겨왔다고 본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 어록에 있는 그대로를 옮겨온 것 같고,
마태오 복음사가는 자기 나름의 의도를 가지고 덧붙였다고 본다.
이유는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주님의 기도문 안에
예수님께서 평소에 사용하시지 않는 표현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표현하시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시지는 않으셨다.
또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든가,
“우리를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표현 양식이 아니다.
루카 11,1을 보면, 예수님께서 장소가 알려지지 않은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고,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라고 요청했고,
제자들의 요청에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세례자 요한뿐만 아니라 유대교의 단체들은 자기들 나름의 특별한 기도를 바쳤다고 보는데
예수님의 제자들도 하나의 단체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한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청했을 것으로 본다.
두 가지 기원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이다.
하느님이 이 세상에 거룩히 알려져서
하느님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흠숭, 찬미, 감사를 받게 해 달라는 기원이고,
세 가지 청원은 우리의 영육에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시기를 비는
“일용할 양식”, 단절된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용서”,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주시기를 빈다.
유혹은 악마에게서, 세상에서, 자신의 욕망에서 오는 것으로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유혹과의 투쟁이다.
삶에서 유혹은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도움을 간절히 청하며 새롭게 시작하는 하루가 되자.
[출처] 루카 11,1-4 연중 제27주간 수요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