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런 하딩은 미합중국 제29대 대통령으로1865년생으로 1920년에 당선되어 1921년에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1923년 사망할 때까지 집권했습니다. 하딩의 재임기는 막 1차대전이 끝나고 광란의 20년대라 불리는 황금기가 시작되던 시대로 또한 1920년 선거는 미국 역사상 최초로 여성이 투표권을 가지고 투표한 선거이기도 합니다.
하딩의 당선은 전임 윌슨 행정부의 상황에서 찾아야 합니다. 전임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은 1차대전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워낙 참혹했던 전쟁이었기에 국민들의 피로감이 상당했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계속 국제문제에 개입하려는 윌슨에게 진절머리를 느끼고 있었기에 당시 정권교체가 유력하다는 예측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야당이던 공화당 내에서는 각 정치파벌들이 서로 자기가 미는 후보를 대통령 후보로 만들기 위해 경쟁했는데 이 때 하딩도 경선 후보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통령 후보는 크게 3명으로 압축되었지만(하딩 5위) 이들 중 누구도 과반을 확보하지 못한 채 전당대회로 넘어갔는데 거기서 투표를 9번이나 해도 누구도 과반을 확보하지 못하는 참사가 터집니다. 그런데 9차 투표에서 원래 5위였던 하딩이 1등을 하는 일이 벌어졌고(38%) 과반은 아니지만 어차피 기존 후보 셋이 아홉번이나 경쟁했는데도 밀렸던 만큼 각 파벌들은 또 한번 투표 해봤자 어차피 과반이 나올지 알 수 없고 어차피 이길 선거니 대충 아무나 후보로 정하고 끝내자고 합의하여 하딩이 후보가 됩니다.
하딩은 별로 대단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연방 상원의원이란 고위 정치인이긴 했지만 상원의원 중에서 별 존재감이 없는 인물이었고 그나마 전전전대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1920년 선거에 출마하려고 했을 때 그에게 접근해 부통령 후보직을 약속받았지만 정작 루즈벨트가 선거를 겨우 1년 앞두고 사망해서 다시 별 볼일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0년의 선거가 워낙 뻔해보였기에 공화당은 조금 변변치 못해도 당선이 확실할거라고 여겨 하딩을 후보로 밀었던 것인데(그런데 사실 공화당은 9차까지 하고 대충 타협해서 이걸로 끝났지 민주당은 아무도 타협하지 않아 44번이나 투표하고서야 결정났습니다.) 정작 하딩은 자기가 대통령을 원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에게 그럴만한 능력도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경선 후보에 있을 적부터 별 노력도 안 했고 후일 대통령 당선 후 친구에게 역시 자신은 대통령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고 이 자리를 맡지 말아야 했다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어쨌든 이렇게 떠밀려서라도 대통령 후보가 된 하딩이었지만 공화당의 예상대로 대통령에 당선되긴 했는데 국민들이 민주당 정권에 질린데다가 공화당은 그 대안이 될만한 공약을 내밀었으며 하딩은 능력은 없었지만 꽃미남이었던 것도 표는 물론 사망할 때까지 많은 인기를 얻은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당선된 하딩이었지만 역시나 그의 말대로였습니다. 하딩이 업적이 없는건 아니라서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을 통해 1차대전 이전에 열강들간에 벌어진 무한 건험 경쟁을 종료시켰고 영일동맹 해체, 일본의 중국에 대한 21개조 요구 철회, 칭다오가 중국에게 반환되게끔 하고 9개국 조약을 통해 일본의 중국으로의 야욕을 억제시키는 외교적 성과나 1차대전 참전용사들을 국가에서 돌봐주려고 하는 등 잘한게 없는건 아니고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전 미국 대통령을 연방 대법원장에 앉히고 상무장관에 후일 미국 대통령이 되는 허버트 후버를 앉히는 등 사람 보는 눈이 아얘 없지는 않았지만 딱 여기까지였습니다.
하딩의 문제는 인사와 사생활이었습니다. 앞서 보듯 인재를 보는 눈이 아얘 없는건 아니지만 그 뿐으로 파벌간의 합의로 대통령이 되었다 보니 파벌들의 요구를 무시하기 어려워 파벌들이 앉힌 내각 인사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고 본인 친구들을 정부 자리에 한자리씩 앉혀주었는데 그것도 문제였지만 이들이 일으키는 부패도 상당해서 재향군인회 회장이 보훈병원 예산을 횡령하여 들키자 유럽으로 도주하고 법무부 장관이 부정에 연루되는가 하면 티포트 돔 스캔들이라는 워터게이트 이전에 최대의 정치 스캔들이 벌어지는 등 난장판이었습니다.
하딩 개인의 사생활도 막장이라 이 때에 미국에서 수정헌법으로 금주법이 만들어졌지만 본인은 법을 실컷 어겨가며 폭음을 즐겼고 포커 도박을 일삼아 백악관에서 자주 거금이 오가는 도박판이 벌어지는가 하면 대놓고 불륜을 저질렀는데 심지어 사생아까지 두기도 했습니다.
하딩은 재임 2년만에 여행 중 돌연사했는데 건강이 나빠진 상태에서 의원들의 압박으로(전임 윌슨이 재임 중 반신불수가 된지라...) 유세 목적으로 여행하던 중 주변인이 저지른 비리 보고에 식중독까지 걸리기도 했던 상황에서 결국 폐렴이 도저 사망했는데 워낙 급작스레 죽었다 보니 당시에는 독살설이 돌았고 30년대까지도 독살설이 돌기도 했습니다.
하딩은 대통령으로서 문제가 많았지만 그래도 당시에는 1차대전의 상흔의 여파로 하딩처럼 너무 나서지 않는 대통령을 선호하였고 하딩이 미남이고 하다 보니 당시에 하딩에 대한 평은 나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며 하딩에 대한 평가는 점점 박해져서 현재에는 남북전쟁 직전의 대통령들과 견줄만큼 평이 나쁩니다.(거의 최하위권에 위치하고 꼴찌를 간당간당하게 면하는 수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