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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문화재를 지켜라 / 간송 전형필 선생
구 한말에서부터 해방 무렵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3대 부자를 꼽는다면 화신백화점을 가지고 있던 박흥식, 광산을 해서 큰돈을 벌었던 백 부잣집, 그리고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1906~1962) 집안이다.
※ 전형필(全鎣弼; 1906~1962, 한국 문화재 수집가)
본관은 정선(廷善). 자는 천뢰(天賚), 호는 간송(澗松)·지산(芝山)·취설재(翠雪齋). 휘문고등보통학교를 나와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법학과를 졸업한 이후 일제 강점기였던 당시 일본에 의해 문화재가 반출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오세창·고희동·김돈희·안종원·김용진·이도영·이상범·노수현 등과 함께 미술품과 문화재의 수집·보존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 보화각 상량식 기념 사진(사진 왼쪽부터 청천 이상범, 월탄 박종화, 춘곡 고희동,
석정 안종원, 위창 오세창, 간송 전형필, 박종목, 심산 노수현, 이순황)
특히 오세창의 고서화에 대한 감식안에 힘입어 1932년경 한남서림(翰南書林)을 인수하여 고서화와 골동품을 수집했다. 1934년 성북동에 북단장(北壇莊)을 개설하여 본격적으로 서화 작품과 조선자기·고려청자 등 골동품과 문화재를 수집하는 한편, 1938년 한국 최초의 사립 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을 북단장 내에 개설하여 서화뿐만 아니라 석탑·석불·불도 등의 문화재를 수집·보존하는 데 힘썼다. 그의 수장품은 대부분 국보 및 보물급의 문화재로 김정희·정선·신윤복·심사정·김홍도·장승업 등의 회화 작품과 서예 및 자기류·불상·석불·서적에 이르기까지 한국 미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40년대에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육영 사업에 힘썼고, 8·15 해방 후 문화재 보존위원으로 고적 보존에 주력했으며, 1960년 김상기·김원룡·최순우·진홍섭·황수영 등과 함께 고고 미술 동인회를 결성하고 동인지 <고고미술(考古美術)> 발간에 참여했다. 1962년 대한민국 문화 훈장이 추서되었다. 1966년 보화각은 간송미술관으로 개칭되었으며, 북단장에는 한국민족미술연구소가 설립되어 미술사를 연구하고 있다.
간송 집안은 윗대에 무과(武科)에 급제한 무반(武班) 집안이었지만 구 한말에는 상업에 뛰어들어 서울의 종로 4가, 즉 배오개 일대의 상권을 거의 장악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왕십리, 답십리, 청량리, 송파 가락동, 창동 일대뿐만 아니라 황해도 연안, 충청도 공주·서산 등지에까지 수만 석의 전답을 보유할 정도였다. 이처럼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간송은 1938년에 성북동 97번지에다가 보화각이라는 개인 박물관을 짓고 일제 치하에서 일본인 수장가들에게 흘러 들어가고 있던 민족 문화재들을 수집하여 보관하기 시작하였다.
▲ 보화각(동경대 건축과를 나온 박길용의 설계)
그는 고서, 그림, 도자기와 같은 우리 문화재들을 구입하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물건값을 절대로 깎지 않았기 때문에 중개상들은 귀중한 물건들을 간송에게 제일 먼저 가지고 왔다. 현재 간송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심사정(沈師正)의 <촉잔도권(蜀棧圖卷)>은 당시 서울의 큰 기와집 5채 값을 지불하고 구입한 그림이다.
※ 심사정[沈師正; 1707(숙종 33)~1769(영조 45), 조선 후기의 문인 화가]
본관은 청송. 자는 이숙(頣叔), 호는 현재(玄齋)·묵선(墨禪). 아버지는 문인화가 정주(廷胄)이다. 증조부 지원(之源)이 영의정을 지낸 이름난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할아버지인 익창(益昌)이 과거 부정 사건을 저지른 데 이어 왕세자(나중에 영조) 시해 음모에 연루되어 극형을 당하게 됨으로써 집안은 몰락하고 평생 동안 벼슬길에 나갈 수 없게 되었다. 1748년(영조 24) 어진모사중수도감(御眞摸寫重修都監)의 감동(監董)으로 추천되었으나 대역 죄인의 자손이라는 이유 때문에 파출(罷出)되었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천부적 자질을 지녀 스스로 물상을 그리고 현상을 만들 줄 알았으며, 20세 전후하여 정선의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웠다. 소론계(少論系)의 김광수(金光遂)·이광사(李匡師)·김광국(金光國)과 남인계(南人系)의 강세황(姜世晃) 등과 교유하며 남종화풍의 조선화(朝鮮化)에 크게 기여했다. 영모·화훼·초충(草蟲)·운룡(雲龍) 등 각 분야에 능숙했으며, 특히 산수를 잘 그려 정선과 함께 겸현양재(謙玄兩齋)로 손꼽혔다. 초기에는 정선의 화풍에 토대를 두고 황공망(黃公望)과 심주(沈周)를 비롯한 원말 사대가와 오파(吳派)의 남종화풍을 두루 섭렵하면서 이 화풍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그 진수를 터득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연마를 통하여 요체를 체득한 다음 50대에 이르러 강하고 거친 묵법(墨法)을 특징으로 하는 조선 중기의 절파(浙派) 화풍을 융합시켜 중국과는 구별되는 특유의 한국적 화풍을 이룩했다. 만년에 이르러서는 진경산수를 다루면서 눈에 보이는 실제의 경관을 초월하여 내재된 자연의 본질과 자신의 내면 세계를 융합시켜 새롭게 이상화된 산수화를 묘출함으로써 우리 산천의 이념화를 구현했다. 이밖에 영모·초충 등에서도 명대(明代)의 화법을 토대로 자신의 화풍을 이룩했다. 정선과 함께 영조 연간 최고의 대가로 손꼽혔던 그의 이러한 화풍은 최북(崔北)·김유성(金有聲)·이인문(李寅文)·이방운(李昉運) 등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대표작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강상야박도(江上夜泊圖)>(1747)·<파교심매도(奢芋荒巳踪)>(1766), 개인 소장의 <경구팔경도(京口八景圖)>(1768) 등이 있다.
▲ <촉산도권(蜀棧圖卷)>의 중간 부분. 지본담체
이 <촉잔도권>을 수리하기 위해서 일본 교토의 전문가에게 간송이 지불한 비용은 기와집 6채 값이었다. 간송은 물건 뿐만 아니라 사람농사도 잘 지었다. 미술사의 대가들인 최순우, 김원용, 황수영, 진홍섭, 정영호가 다 간송 문하를 출입하면서 그의 후원을 받은 후학들이다. 최순우(1916 ~1984)는 원래 본명이 최희순(崔熙淳)이었는데 간송이 순우(淳雨)라고 지어주었다.
▲ 최순우의 옛집
▲ 혜곡 최순우 기념관
‘우’(雨)자는 간송의 아들 항렬이 쓰는 글자이다. 아들같이 생각하고 지어주었던 것이다. 1961년에 최순우가 한국의 국보급 문화재를 구라파에 전시하기 위해서 김포공항에 가던 길이었다. 택시 안에서 최순우의 낡은 손목시계를 본 간송은 “우리 국보를 보여주러 가는 책임자가 이런 낡은 시계를 차면 체통이 안 선다.”하면서, 자신의 ‘론진’ 손목시계를 그 자리에서 풀어 채워주었다. 최순우는 살아 생전에 이 일화를 주변 사람들에게 여러 번 이야기하였다고 한다. 마지막 서울 부자의 품격을 대표하는 집안이 간송 집안이고, ‘간송 미술관’이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간송의 문화재 수집
돈은 벌기도 어렵지만 쓰기는 더 어렵다. 제대로 쓰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돈을 제대로 쓰려면 전문가로부터 레슨(?)을 받아야 한다. 그만큼 전문 분야에 속한다. 레슨을 받지 않으면 돈을 안 써야 할 곳에 돈을 쓰고 정작 돈을 써야 할 곳에 쓰지 않는 불상사가 발생한다. 특히 본인 스스로 돈을 모아 자수성가한 사람은 돈을 쓰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자수성가한 사람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1세는 짜지만 재산을 물려받은 2세는 도량이 넓고 식견이 있는 인물이어야만 돈을 제대로 쓴다. 근세에 한국에서 돈을 가장 잘 쓴 인물로는 인촌(仁村)과 간송(澗松; 1906~1962)을 꼽는다.
▲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간송 미술관 전경
※ 간송 미술관(澗松美術館; 서울에 소재한 미술관)
한국 최초의 민간 미술관.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위치해 있으며, 1966년 전형필(全鎣弼)의 수집품을 바탕으로 한국 민족 미술 연구소 부설 미술관으로 발족했다. 전형필은 1929년부터 우리나라 전적·서화·도자기·불상 등의 미술품 및 국학 자료를 수집하여 1936년 지금의 미술관 건물인 보화각(保華閣)을 지어 보관해왔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의 태평양 전쟁과 8·15 해방, 남북 분단 등 국내외의 격동 속에서 미술관을 일반에게 공개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아들인 성우(晟雨)·영우(暎雨)가 유업을 이어 1965년 가을부터 한국 고미술품 및 전적 정리 작업을 시작, <고 간송 전형필 수집 서화 목록(故澗松全鎣弼蒐集書畵目錄)> 상·하권을 간행했다. 1966년 정리 작업 진행 중에 한국 민족 미술 연구소와 간송 미술관이 발족되었다. 미술관은 연구소의 부설 기관으로 미술품의 보전·전시 업무를 맡고 있으며, 연구소는 이를 바탕으로 미술사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1층과 2층에 전시실이 있으며, 소장품은 전적·고려청자·조선백자·불상·불구(佛具)·부도·석탑·그림·글씨·와당·전 등 다양하다. 그 중 <훈민정음>(국보 제70호)을 비롯하여 10여 점이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많은 유물들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1971년의 개관 전시회 '겸재전'(謙齋展)을 시작으로 매년 봄·가을 2회에 걸친 수장품 전시회와 함께 논문집 <간송 문화(澗松文華)>를 발간하고 있다.
간송은 우리 문화재 구입에 10만 석 재산을 썼다. 영국인 존 가스비(John Gadsby)로부터 고려청자를 사들인 이야기는 흥미롭다. 1930년대에 가장 유명했던 고려청자 수집가는 영국인 존 가스비라고 알려졌었다. 그는 변호사였는데 젊었을 때부터 일본 도쿄에 주재하면서 돈이 생기는 대로 고려청자를 수집했다. 고려청자의 가치를 일찍 발견했던 것이다. 청자를 구하기 위해 자주 서울에 들어와서 골동품상들을 만나고 다녔다. 간송이 고려청자에 눈을 뜨고 보니 좋은 물건은 이미 가스비가 대부분 소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가스비가 수집해 놓은 청자를 판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1937년이었다. 간송은 지체 없이 도쿄로 갔다. 가스비의 거처는 일본 황궁 바로 뒤편에 있었는데 황궁에 사는 학이 날아와서 정원 연못의 금붕어를 쪼아 먹곤 하는 저택이었다. "선생이 수집한 고려청자는 반드시 조선 사람 손에 있어야 한다. 그 대신 가격은 부르는 대로 주겠다." 불과 서른 한 살의 새파란 간송이 백발의 가스비를 상대로 내뱉은 말이다. 한 푼도 깎지 않고 가스비가 요구하는 금액을 모두 지불하고 가스비의 소장품 일체를 넘겨 받았던 것이다.
이때 간송이 지불한 돈은 어느 정도 되었을까? 간송은 돈 이야기를 일절 하지 않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당시 쌀값 1만석의 금액이 들어간 것으로 추정한다. 이 돈을 지불하기 위해 공주에 있던 5,000석 전답도 팔았다고 한다. 이 청자들이 지금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간송은 갔어도 그가 쓴 돈은 지금도 남아 있다.
출처 : 한국독립운동사 원문보기▶ 글쓴이 : 신동현
첫댓글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우선 금전적인 문제와 더불어 문화재를 보는 혜안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간송 선생은 이 분야에서는 선각자라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선각자로서 기품과 더불어 심미안까지 갖춘 인물이라고 봅니다.
간송 선생의 덕으로 우리의 국보급 문화재를 지킬 수가 있어서 다행입니다.
독립 운동만이 애국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하죠.
이 역시도 애국의 한 단면이라고 보여지죠.
간송의 숭고한 정신으로 말미암아 일부지만 우리의 것을 오늘날까지 지켜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맞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간송 미술관에 있는 귀한 것들이 바로 그것들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