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는 묘지 투어가 아주 일상화되어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묘지 투어를 하고, 묘지 해설사라는 직업이 있을 정도죠. 유럽과 한국은 묘지와 죽음과 관련된 시설을 보는 시각이 다릅니다. 묘지를 '신들의 땅'이라고 가르치는 기독교 문화와 '귀신이 사는 곳'으로 가르치는 유교 문화에서는 생각의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은 삶의 일부, 메멘토 모리와 카르페디엠
유럽인은 죽음을 삶의 일부분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묘지를 공동체의 한가운데에 두죠. 화장장이나 봉안당도 혐오 시설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집 앞에 그런 시설을 짓는다고 님비(NIMBY) 시위 같은 일이 일어날 리 없습니다.
유럽인들은 묘지가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와 현재를 즐기라는 뜻의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동시에 가르치는 살아 있는 교육 현장이라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앞서간 이의 생애를 통해 현재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는 것이죠. 그들은 죽음을 자각하는 자만이 참된 삶을 깨닫게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럽의 묘지는 보통 공원처럼 잘 정돈되어 있고, 독서나 명상의 공간으로도 많이 활용됩니다.
유럽인들에게 묘지가 어떤 의미를 가진 공간인지 알았으니, 어디를 가면 좋을지 알아볼까요?
<언젠가 유럽>에서 추천하는 묘지 투어 도시는 바로 파리(Paris)입니다! 파리의 묘지는 단순한 묘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파리만의 색깔이 듬뿍 담긴 멋진 공간입니다. 파리에서 생활하는 일반 시민들뿐만 아니라 파리를 '예술의 도시'로 만든 수많은 거장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파리의 3대 공동묘지
1. 페르라셰즈 묘지(Père Lachaise Cemetery)
<언젠가 유럽>에서 작가가 파리에서 가장 격조 있는 공원묘지라고 표현한, 세계에서 유명인이 가장 많이 묻힌 공동묘지입니다. 몇 년 전, tvn 알쓸신잡에 출연한 김영하 작가가 파리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이라고 밝혀 화제가 되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에는 소설가 발자크와 마르셀 프루스트,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프레데리크 쇼팽,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프랑스 국민 가수 에디트 피아트와 도어스의 멤버 짐 모리슨, 가수 겸 배우 이브 몽탕과 시몬 시뇨레, 성악가 마리아 칼라스 등 인류 예술사의 한 획을 그었던 유명인들이 많이 잠들어 있습니다.
페르라셰즈 공원묘지(출처:pixabay)
프랑스의 국민 여가수, 에디트 피아프 (97구역 91번)
페르라셰즈 묘지에서 순례자들이 가장 많이 찾고, 가장 오래 머무는 곳.
20세기 프랑스 최고의 가수이자 샹송의 여왕, 에디트 피아프가 잠들어 있는 곳입니다. 이곳은 피아프의 아버지 루이 가시옹과 에디트 피아프의 가족묘로, 생전에 두 번 결혼한 피아프의 두 남편도 함께 묻혀 있습니다.
그리고 작가가 보자마자 울컥 슬픔을 느꼈다는 이름, '마르셀 뒤퐁'이 피아프의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죠. 마르셀 뒤퐁은 피아프가 거리 가수로 활동할 때 잠깐 사랑에 빠져 동거한 남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입니다. 불행하게도 아이는 두 살 때 수막염에 걸려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죠. 먼저 하늘나라로 간 아이는 엄마 피아프를 과연 알아보았을까요?
피아프의 묘 (출처= <언젠가 유럽>)
시를 그린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96구역 70번)
모딜리아니는 살아생전 가난에 찌들다가 죽고 나서야 유명해진 비운의 천재 화가입니다.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 있어 찾기 힘든데도 사람들이 많은 핫한 곳이죠. 그의 무덤에는 붓을 비롯한 여러 가지 미술도구가 놓여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알코올 중독자였던 화가를 생각해 맥주 병뚜껑을 올려놓고 가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모딜리아니의 묘 (출처= pixabay)
가장 위대한 폴란드 음악가, 프레데리크 쇼팽
우리에게 '녹턴'으로 유명한 피아노의 시인, 쇼팽. 폴란드 출신의 쇼팽은 파리에서 음악가로서 전성기를 맞이해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쇼팽의 묘지는 꽃과 폴란드 국기로 언제나 축제 분위기입니다. 쇼팽을 보기 위해 파리를 여행하는 폴란드 사람들의 필수 코스로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 폴란드 국기가 많다 보니 겨울철에도 빨간 단풍이 든 것 같은 착각이 든다고 하는데요, 사후에도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쇼팽은 외롭지 않을 것 같습니다.
쇼팽의 묘 (출처= pixabay)
2. 몽마르트르 묘지(Montmartre Cemetery)
몽마르트르 묘지는 정문 입구를 찾는 게 쉽지 않은데, 가장 편리한 방법은 블랑슈 역에서 내려서 물랭루주 방향으로 큰길을 따라 쉬엄쉬엄 걸어가는 것입니다. 몽마르트르 묘지는 언덕의 비탈에 있어 묘지 전체가 굴곡이 있는 편인데, 묘지를 지형 그대로 꾸몄기 때문에 오르락내리락 걷는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소설가 스탕달, <나는 고발한다>로 유명한 프랑스 지식인 에밀 졸라, 화가 에드가 드가, 전설적인 러시아 출신의 무용수 바슬라브 니진스키 등 19~20세기를 풍미한 유명 인사들이 묻혀있는 곳입니다. 물랭루주와 몽마르트 언덕, 사크레쾨르 대성당, 테르트르 광장이 모두 근처이니 함께 묶어서 돌아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몽마르트르 묘지 (출처= 위키백과)
에밀 졸라 (19구역 45번)
가난한 무명작가로 시작했지만 1876년 연재를 시작한 총서 제7권 <목로주점>으로 베스트 작가 반열에 올라서며 자연주의 문학을 확립한 19세기 프랑스의 대문호입니다.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1898년 독일 간첩 누명을 쓴 유대인 군인, 드레퓌스 대위의 무죄를 폭로한 격문 <나는 고발한다>입니다. 진실과 정의를 사랑했던 이상주의적 사회주의자였던 그는 권력 앞에 묵살당하는 진실을 용기 있게 세상에 외쳤고, 결국 드레퓌스는 구명되었죠. 현재 그의 유해는 프랑스 정부에 의해 1908년 몽마르트르를 떠나 팡테옹 국립묘지에 안치되었습니다.
에밀 졸라(좌), 1898.1.13 <로로르>지에 게재된 선언문(우)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달리다 (18구역 7번)
이집트 출신의 샹송 가수이자 배우. 프랑스어를 비롯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독일어, 아랍어 등 10여 개국 언어로 노래를 부른 가수로 유명합니다. 그녀의 묘지에는 그녀가 실제 무대에서 입었던 드레스 차림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마치 '달리다 단독 콘서트'에서 그녀가 걸어 나와 이제 막 노래를 부르려는 모습처럼 보입니다. 가장 젊고 아름다운 그 시절 모습 그대로 말이죠.
놀랍게도 이곳은 한 건축가가 묘지를 공연 무대로 설계한 것이라고 합니다.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가수에게 이보다 더한 예우도 없겠죠. 작가가 최소 세 번 이상은 듣게 된다는 그녀의 명곡 <파롤 파롤>을 들어보시고 방문한다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몽마르트르 묘지에 잠든 달리다의 묘 (출처: <언젠가 유럽>)
3. 몽파르나스 묘지(Montparnasse Cemetery)
몽파르나스 묘지는 지하철을 타고 라스파유역으로 가는 것이 가장 편리합니다. 앞서 소개 드린 페르라셰즈나 몽마르트르에 비하면 규모가 작고 아담한 묘지로, 평지에 조성되어 있어 걷기 편하고 구획이 반듯해서 찾아가기 쉽습니다. 묘지마다 개성 있는 조각과 석상 등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몽파르나스 묘지에서 만날 사람들은 문학 분야가 가장 두드러지는데, 프랑스 상징주의 대표 시인 샤를 보들레르, <제2의 성>의 작가 시몬 드 보부아르, 실존주의 사상가 폴 사르트르, <고도를 기다리며>의 극작가 사뮈엘 베케트, <여자의 일생>을 남긴 모파상, 근대 비평의 아버지 생트뵈브, 다다이즘의 선구자 트리스탕 차라 등이 있습니다.
몽파르나스 묘지의 묘에 있는 조각상 (사진출처= atlasobscura.com)
몽파르나스 묘지의 묘에 있는 조각상 (사진출처= atlasobscura.com)
비록 지금은 유럽에 갈 수 없는 방구석 여행자이지만,
언젠가 떠날 유럽 여행을 꿈꾸며 집에서 <언젠가 유럽>과 함께 유럽 인문 기행을 떠나보세요!
랜선 여행이지만 마음도 지식도 충만해지는 멋진 경험이 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