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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14일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제1독서 : 요엘 4,12-21
복 음 : 루카 11,27-28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27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28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남편은 가장의 책임을 다하지 않고 술에 빠져만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며, 아내가 말합니다.
“언젠가는 아이들은 집을 떠날 거예요.
그러면 당신은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은 걸 후회하겠죠.”
이 말에 남편은 “그건 미래의 내가 겪을 문제지. 나는 그 인간과 상관없어.”라고 말한 뒤에,
곧바로 보드카를 병째 부어 마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갑자기 심장마비로 쓰러집니다.
이 주정뱅이 남편처럼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나’와 상관없을까요? 깊은 상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미래의 ‘나’라는 목표를 설정하고, 그 지점에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의 ‘나’가 해야 할 것이 분명해집니다.
미래의 ‘나’가 아이들과 함께 즐겁게 잘 지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장 술을 끊고 아이와 함께해야 할 것입니다.
미래의 ‘나’가 건강한 모습으로 튼튼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금 당장 운동을 시작하고, 몸에 좋지 않은 것을 피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미래의 ‘나’가 하느님 안에서 기쁘게 생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금의 ‘나’는 기도해야 하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하느님과 더 가까운 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지금의 ‘나’가 가지고 있는 악습이 있다면 미래의 ‘나’를 바라볼 때 해결책을 찾게 됩니다.
미래의 ‘나’와 단절된 사람은 눈앞의 목표만 추구하거나 도파민이 잠깐 활성화되는 쾌락만을 추구합니다.
당연히 지금 원하는 ‘나’가 될 수 없게 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미래의 ‘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의 ‘나’가 미래의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세상의 것만을 추구하면서 주님의 것을 잊어버립니다. 과연 무엇이 미래의 ‘나’에게 필요할까요?
군중 속에 있던 어떤 여자가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을 행복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관점으로만 바라보면서,
이렇게 사랑과 존경을 받는 예수님을 낳은 성모님이야말로 행복할 것이고 하지요.
하지만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세상 안에서 늘 고통과 어려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의 순종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신 성모님의 모습입니다.
지금의 고통과 어려움만이 전부라고 생각했다면, 하느님이 말씀을 듣고 지킬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미래의 ‘나’,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나’를 떠올렸기에
철저히 하느님 말씀에 충실하실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를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미래의 나‘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명언:
마음이란 나를 살게 하는 뿌리. 조심조심 다뤄야 한다.
“괜찮아, 괜찮아.” 다독여 가며(이해인).
하느님께 시선을 두는 사람은 행복하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우리는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행복을 원하면서도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처지, 상황에 행복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행복은 주변 환경에 있지 않고 오히려 내면에 있습니다.
결혼을 앞둔 젊은이를 만났습니다.
남자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멀리 부산에서 청주라는 곳까지 올라온 여자 친구에게
‘힘들었겠다’고 위로의 말을 건넸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올라오는 동안 너무도 설레고 기뻤습니다.
친구를 만난다는 것이 행복이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중심을 어디에 두는가가 중요합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하느님을 뵈려고 애쓰고, 하느님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함을 안타까워 할 때가 행복의 순간”이라고 했습니다.
성 요한 비안네는
“박해와 모욕을 당할 때보다 더 행복한 순간은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행복은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하느님 안에 있음이 행복입니다. 하느님을 차지한 사람이 행복합니다.
인간적인 차원을 넘어 시선을 하느님께 고정해야 하겠습니다.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큰 소리로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11,28).
참된 행복은 말씀을 행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채워져서 행복하기보다는 행하는 그 자체가 곧 행복입니다.
성모님이 모든 여인들 중에 가장 복되시다는 것은
훌륭한 아들을 낳아 젖을 먹여서가 아니라 오히려 말씀을 듣고 그것을 지켰기 때문에
다시말하면 말씀대로 순명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고 믿음에 따르는 순명을 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실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순간이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수고와 땀도 기쁨입니다.
어렵고 힘든 고달픔에도 불구하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할 수 있음이 곧 행복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양보와 배려, 희생을 하고 있다면 행복합니다.
사랑을 행하고 있다면 복됩니다.
혹 어떠한 시련이 오더라도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희망을 그치지 않는 한 행복이 거기에 있습니다.
순교자들은 목숨을 내놓으면서도 행복했습니다. 하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정오만 되면 성당에 들어갔다가 금방 나오는 노인이 계셨습니다.
이를 이상히 여긴 관리인이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노인이 말했습니다.
“나요 기도하러 옵니다. 그런데 저는 기도할 줄을 몰라요.
그래서 그저 12시만 되면 이리로 와서 ‘예수님, 나요. 나예요’ 하고 인사만 하고 가는 겁니다.”
얼마 후에 그 노인이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노인은 병실에서 밝고 환한 웃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 모습을 본 간호사가 그 비결을 여쭤봤습니다. 노인이 말했습니다.
“그건 매일 나를 찾아오는 방문객이 나를 즐겁게 해 주기 때문이오.”
간호사는 주변을 둘러보며
“날마다 찾아오는 방문객이라뇨? 할아버지는 가족도 친지도 없으시잖아요?”
“그래도 매일 오는 사람이 있지.”
“그 방문객은 언제 오시나요?”
“매일 열두시면 내 침대 저쪽에 그분이 오시지.
내가 그분을 쳐다보면 방긋이 웃으면서 한말씀하고 바로 돌아가셔.”
“뭐라고 하시는데요?”
“간단해. ‘여보게, 날세. 나, 예수네” 라고 하지.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뉴욕에 온지 4년 만에 한국으로 휴가를 가려고 계획하였습니다.
성지순례를 전문으로 하는 여행사에서 ‘한국 성지순례’를 기획하였고,
제게 같이 갈 수 있는지 문의하였습니다.
저는 한국 휴가를 계획하고 있었기에 시간이 맞으면 함께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지난 10월 2일부터 한국 성지순례를 하였고, 어제부터는 저의 개인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3년 전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신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12년 전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신 아버지 옆에 나란히 있었습니다.
그토록 사랑했고, 그토록 존경했던 아버지 옆에 있으니, 어머니는 참 좋으실 것입니다.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3년 늦게 갔지만
어머니는 늘 그렇듯이 따뜻한 미소로 아들의 인사를 받으십니다.
오늘은 가족들과 함께 절두산 성지에서 미사를 봉헌하기로 했습니다.
성지의 신부님이 배려해 주었고, 순교자들의 전구로
부모님께서 천상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기를 기도하려 합니다.
가족들은 부모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신앙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수 있도록 기도할 것입니다.
이제 주교님께 인사도 드리고, 그리운 동창 신부님들도 만나면서 남은 날들을 보내려고 합니다.
돌아보면 모든것이 감사할 일입니다.
한국에 오니, 뉴욕에서 저를 따뜻하게 대해 주었던 분들이 생각납니다.
제가 4년 동안 무탈하게 잘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가족처럼 지냈던 브루클린 한인 성당의 신부님들이 있습니다.
‘삼인행이면 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라는 말처럼
비록 저보다 나이가 어린 신부님들이지만 배울 점이 많았습니다.
한 신부님은 큰 바위 얼굴처럼, 고향의 느티나무처럼 모든 신부님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였습니다.
신부님의 사제관은 고향을 떠나온 신부님들에게 ‘사랑방’이 되었습니다.
한 신부님은 캠핑을 좋아했고, 자전거를 좋아했습니다.
우리는 팬데믹 동안 함께 캠핑을 하였고, 자전거를 타면서 팬데믹을 견디었습니다.
한 신부님은 계획의 달인이었습니다. 여행을 가면 모든 것을 혼자 준비하였습니다.
항공권 예매, 호텔 예약, 자동차 렌탈, 식당 예약, 음식 준비를 모두 완벽하게 해 주었습니다.
한 신부님은 언제나 말이 없지만 뒤에서 부족한 것들을 채워 주었습니다.
신부님의 요리는 거의 요리사 수준이었습니다. 캠프장에서는 장작을 태워서 따뜻하게 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들이 많았기에 저는 아무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었습니다.
교우들 중에도 착한 사마리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신문 홍보를 위해 LA에 가면 언제나 따뜻하게 저를 맞이해 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공항까지 마중 나와 주시고, 편안한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바쁜 중에도 저를 위해서 차량 봉사를 해 주었습니다.
매일 아침 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준비해 주었습니다.
ME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ME 봉사자들은 함께 피정을 준비하였고, 야유회를 다녀왔습니다.
팬데믹 기간 중에 줌으로 하는 강의를 도와주었습니다. 집으로 초대해서 집밥을 준비해 주었습니다.
‘사랑은 결심이다.’라는 ME의 가르침대로 부부들은 사랑으로 대해 주었습니다.
브루클린 한인 성당의 공동체가 있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아파서 제가 잠시 미사를 도와주었는데 어느덧 3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았는데 이제는 제가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물고기는 물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고, 행복한 것처럼
사제는 교우들과 함께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고, 보람 있습니다.
브루클린 한인 공동체와 함께 있는 시간들이 제게는 행복이었고, 즐거움이었습니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감사할 일입니다.
살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성공, 재물, 업적, 인간관계, 가족, 건강’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것들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아프고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 것입니다.
친구가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 함께 가주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같은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우선순위는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이타적인 삶이었습니다.
신앙인들이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삶의 우선순위로 정한다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삶의 우선순위로 정하면 좋겠습니다.
복음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것을 삶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제들은 행복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삶으로 드러나는 신앙인들은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의 ‘행복 선언’을 들려줍니다.
오늘 복음의 앞부분(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마귀의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어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고
모욕하는 자들을 권위 있는 말씀으로 제압하셨습니다.
그러자 군중 속에서 한 여인이 너무도 감동을 받아 탄성을 올립니다.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루카 11,27)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찬사를 부인하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나 단지 혈족관계에만 치중한 그 말을 넘어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여기서 여인의 행복 선언과 예수님의 행복 선언은 사뭇 다릅니다.
이처럼 모두 ‘행복’을 찾지만, 각자가 찾는 행복이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대체 어떤 행복이 참된 행복일까요?
여인은 아기를 간직했던 태중과 젖을 먹인 가슴이 행복하다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이들’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보낸 찬사를 떠올려 봅니다.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복되십니다.”(루카 1,45)
아우구스티노 역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마리아께서는 그리스도의 몸을 잉태한 것보다, 그리스도를 믿었던 점에 있어서 더욱 복됩니다."
그렇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으셨습니다.
하여, 말씀을 잉태하시고 이루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허용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승복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믿고 지키고 실행한 것입니다.
이처럼 행복은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믿고 지키면 발생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행복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서 발생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주님께 있을 뿐이요,
우리가 주님을 믿을 때 우리에게서 발생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믿음이 곧 행복’입니다.
그것은 ‘경청한 바를 믿는 일’ 입니다.
‘말씀을 경청하는 일’, 그것을 우리는 성모님에게서 배웁니다.
그것은 먼저 '믿는' 일입니다.
말씀보다 앞서 말씀하시는 분을 믿는 일입니다.
그래서 비록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다하더라도 그분을 믿고 말씀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베네딕도의 규칙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들어라, 아들아,
~ 마음의 귀를 기울이고
~ 기꺼이 받아들여 보람 있게 채움으로써
~ 순명의 노고로 되돌아가라.”
이는 ‘마음의 귀로 듣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우리가 제대로 듣지 못하는 것은 들려주는 대로 듣지 않고
자기 방식으로 듣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듣는다는 것은 ‘마음의 귀로 듣는 일’,
곧 ‘말씀하시는 분의 마음에 주파수를 맞추는 일’,
‘마음의 귀를 경작하여 사랑과 믿음으로 듣는 일’입니다.
그것은 ‘먼저 사랑하고 믿는 일’, 말씀보다 앞서 ‘말씀하시는 분을 사랑하고 믿는 일’입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받아들여지면, 그 믿음의 능력으로 말씀이 성취되고 실현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진정 참된 행복을 바란다면,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들은 바를 사랑과 믿음으로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행복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주님!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듣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들은 말씀을 잉태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으로 잉태하게 하소서.
하여, 말씀을 품은 감실이 되게 하소서.
또한 품은 말씀을 지키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말씀을 알아듣지 못할 때도 사랑으로 지키게 하소서.
또한 말씀을 경작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다름, 아닌 당신의 희망을 이루어지도록 경작하게 하소서.
주님, 저를 경작하여 당신 말씀을 이루소서.
아멘.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있던 한 부인이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27절) 하고 있다.
부인의 찬사는 우선은 예수님을 두고 한 것으로, 바로 그의 어머니인 마리아에 대한 찬사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28절) 하신다.
더 중요하고 우리가 모두 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며,
이런 사람들이 진실로 행복한 사람들이다.
혈연관계로 그분의 형제나 친척이라고 해도, 그분을 믿지 않는다면 그 관계는 아무것도 아니다.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미 당신의 신앙으로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이웃 사랑으로 실천한 분이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세상의 구세주로 낳아주실 수 있으셨던 분이기 때문에 복되시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낳아 기르신 까닭에 복되기도 하시지만,
그보다 더 큰 의미는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신앙인들 가운데 한 분이신 까닭에 복되시다는 뜻이다.
마리아께서는 몸과 마음으로, 즉 신앙으로 예수님을 품으셨기 때문에 복된 분이시다.
예수님의 몸을 잉태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을 믿으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마리아께서 복되신 것을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도 주신다.
마리아께서 복되신 것처럼 이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하는 사람들이 계속 누릴 수 있도록 해 주셨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하느님을 체험할 수도 있고,
이 체험으로 신앙인의 삶을 갖게 된 것을 감사하기도 할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삶이 끝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 항상 새로이 태어나는 것을 체험한다면
구원을 항상 체험하며 완성해 가는 것이다.
구원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뵐 때 완성되겠지만, 이 세상에서부터 구원은 체험되어야 한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말씀에 한순간 감격하고 체험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 꾸준히 지키고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바로 예수님을 낳아 젖을 먹이신 성모님이 행복하신 것 같이,
아니 오히려 더 행복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제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항구하게 살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는 틀렸다고 포기하지만, 하느님 앞에는 절대 불가능이 없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매실이며, 감나무며, 무화과나무 묘목 수백 그루를 심은 지 벌써 3년이 지났습니다.
여린 묘목을 한 그루 한 그루 심을 때, 참 고생이 많았습니다.
초보들이라 삼백여 평 되는 밭을 갈아엎고, 멀리까지 가서 묘목을 사오고,
구덩이를 깊이 파고, 묘목을 심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고...
다들 나무라고는 심어본 적이 없는 초보들이라 웃기는 일도 많았습니다.
접붙인 부분은 비닐로 감싸져 있었는데, 그걸 벗기지 않고, 심었다가, 다시 파내서 제거하고 다시 심고...
그리고 수시로 들여다봤습니다. 언제쯤 열매가 맺히려나?
밭이 워낙 돌밭이고 척박했던지? 아니면 저희가 게을렀던 탓인지, 성장이 엄청 더뎠습니다.
최근에는 잡초가 허리까지 올라와, 너무나 미안했습니다.
그래서 오랜만에 예초기를 돌리다가, 그야말로 감동적이고 눈물겨운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아직도 여리고 키가 덜 자란 감나무 묘목에서 튼실한 감이 2개나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열매를 맺은 것이 너무나 신기했습니다.
그간 제 머릿속에 우리 과수원은 삼 년째 아무런 결실도 없으니, 실패인가보다 했습니다.
그런데 딱 감 두 개로 인해 새로운 희망이 생겼습니다.
우리 각자의 인생도 마찬가지겠지요.
우리는 자주 지난 삶 돌아보며, 내 인생은 이렇게 실패로 끝나는구나,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할 것 없겠구나, 하지만, 하느님 입장에서 보면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좌절하고 낙담하고 슬퍼하는 어느 날,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은총에 힘입어 마치 기적처럼, 동화 속 이야기처럼
우리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찍고 반전할 수 있음을 굳게 믿습니다.
우리는 틀렸다고 포기하지만, 하느님 앞에는 절대 불가능이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나자렛의 마리아 인생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변방 중에 변방 갈릴래아, 그중에서도 낙후된 지역 나자렛이었습니다.
당시 나름 잘 나가던 예루살렘 사람들은 나자렛 사람들을 대놓고 무시하며,
‘나자렛에서 뭐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는가?’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 척박하고 낙후된 변장 나자렛의 어린 소녀 마리아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상상조차 못한 일을 시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를 총애하셨습니다.
그녀를 당신께서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실 사다리요 통로로 선택하셨습니다.
마리아 입장에서 이보다 더 큰 축복과 은총은 다시 또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외아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찾아오셨습니다.
자신의 몸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열 달 가까이 자신의 태중에 모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의 육체를 통해 탄생하셨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젖을 물렸습니다.
당신 품에 안고 애지중지 키웠습니다. 이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연유로 군중 가운데 누군가가 크게 외쳤습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을 행복합니다.”
그 말씀을 들은 예수님 반응이 의외입니다.
저 같았으면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과 예우를 갖추는 차원에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렇다마다요. 저희 어머님 마리아,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모릅니다.
신앙심을 또 얼마나 깊으신지? 이 세상에 저희 어머님 같은 분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이랬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여러분, 이 대목에서 보이신 예수님의 반응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불효막심한 대답일까요? 도무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예수님일까요?
사실 인류 역사상 가장 하느님 말씀을 잘 경청하고
구체적인 삶 속에서 지키고 실천한 사람은 바로 성모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은 불효막심한 말씀, 어머니를 깎아내리는 말씀이 아니라,
바로 어머니에 대한 극찬의 말씀, 칭송의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제 모습, 우리의 모습을 내려다봅니다.
매일 선포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는 잘합니다.
그러나 지키고 실천하는 모습은 너무나 부족합니다.
선포되는 말씀 따로, 구체적인 생활 따로인 우리입니다.
언젠가 우리 모두 하느님 대전에 서게 될 텐데, 그때 가장 큰 관건은 바로 이것입니다.
들은 말씀을 얼마나 마음 깊이 간직했고, 얼마나 그 말씀을 매일의 구체적인 삶,
구체적인 관계, 구체적인 사건 안에서 실천했는가? 바로 그것입니다.
행복한 영적 가족공동체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은 일년 365일의 매일미사 복음 중에서 가장 짧은 복음으로 기억된다.
비록 단 두절의 복음이긴 하나 그 담고 있는 내용은 실로 엄청난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군중 속에서 한 여인이 감격하여 외친
행복찬사와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응 찬사로 엮여져 있다.
희랍어 原文을 보면 “복되도다! 당신을 품은 태와 당신이 먹고 자란 젖은!”(27절)하고 여인이 외쳤다.
여기서 태와 젖은 어머니를 가리키는 비유법으로서 예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를 의미한다.
아들이 잘되어, 존경을 받으면 그를 낳아 기른 부모도, 덩달아 존경을 받기 마련이다.
제자가 잘되면 스승이, 부하가 잘되면 상관이,
자식이 잘되면 부모가 덩달아 기뻐하고 자랑스러울 것이며,
사람들은 당사자뿐 아니라 당연히 그들을 가르치고 키운 사람들까지 존경하고 부러워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계산법이다.
예수님의 생각은 다르다.
예수님은 진정 당신을 따르는 방법으로 모든 혈통과 인연과의 단절뿐 아니라,
모든 물질적 소유와의 이별을 요구하셨고,
심지어는 자기 자신마저 버릴 것을 요구하셨다.(마태 19,29; 마르 8,34)
그분은 세상에 칼을 내리쳐 가족끼리 서로 맞서게 하려 하셨다.(마태 10,34-35)
예수께서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와서 만나려고 했을 때도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인가?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라고
힘주어 말씀하셨다.(마태 12,48-50; 마르 3,33-35; 루카 8,20-21)
이렇게 예수께서는 인간적이고 물리적인 혈통에 근거를 둔 가족공동체의 벽을 무너뜨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며,
그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로 구성될 새로운 의미의 靈的 가족공동체를 선포하신 것이다.
오늘 복음이 함께 외치는 한 여인의 마리아에 대한 행복찬사는 유효하다.
그러나 그 찬사는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實存 속에서 유효성을 가진다.
즉 여인이 외친 예수의 어머니에 대한 행복찬사가 예수님의 대응찬사 속에서 의미를 찾는다는 말이다.
여인이 감격하여 침묵을 깨고 예수의 어머니를 행복하다고 외친 이유는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또 감격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대응찬사는 당신의 어머니를 외면하려 하신 것이 아니라,
어머니 마리아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완벽하게 실천한 여인임을,
그래서 가장 행복한 여인임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하고
대답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이 자신을 통하여 실현되도록 사셨던 분이 아닌가?
그래서 성모 마리아는 비록 당신의 삶이 외롭고 힘들었을지언정
모든 여인 중에 복되시고, 모든 복된 사람들 중에 眞福者가 되신 것이며,
영적 가족공동체의 어머니이시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