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Life-화가 김흥수, 인연이라는 것
화가 김흥수 창작 작품 기증식에 발걸음 했다.
2017년 5월 24일 수요일 오후 4시가 그 때였고,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장수길 23(대화동)이 그 곳이었다.
나는 화가 김흥수 그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 없었다.
어느 시대를 산 사람인지도 모르고, 그의 화풍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아예 ‘김흥수’라는 그 이름 자체가 생소했다.
내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하루 전날 전해 받은 초대장에 담겨있는 소개의 글로 아는 것뿐이었다.
다음은 그 글 전문이다.
화가 김흥수 창작작품 기증식에 초대합니다. 1990년 파리 뤽상부르 미술관 초대전시회 직후 프랑스 국영방송 Antenne 2는 ‘김흥수의 하모니즘은 이제 세계미술사의 한 페이지에 남게 되었다’며 두 차례나 전국적인 방송을 했습니다. 그리고 생전의 김흥수 화백님은 ‘1993년 러시아 푸슈킨 미술과과 에르미타쥬 미술관에서의 하모니즘 초대전에서는 매일같이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고 회고했습니다. 이번에 재단법인 한올에서는 귀중한 걸작들을 영구히 보존하고자하는 유족들로부터 작품을 기증받게 되어 여러분을 모시고 이 뜻을 함께 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김흥수 화백님의 창작미술이 세계미술사에 올바로 자리매김될 수 있도록 격려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재단법인 한올 이사장 김형성//
그래도 그의 작품 기증식에 발걸음 한 것이다.
아내까지 동행했다.
남편인 나의 강요가 있어서가 아니라, 아내 스스로 마음 내켜 나를 따라와 준 것이었다.
그렇게 나와 아내가 그 기증식에 발걸음을 한 것은, 오로지 오랜 인연의 친구가 나를 초대했기 때문이다.
어느 상장회사에 부사장으로 몸담고 있는 임채균 친구가 나와 아내를 초대한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그 친구와의 인연을 말하려면 4반세기 전의 세월로 거슬러 올라야 한다.
내가 대검찰청중앙수사부 검찰수사관으로 있을 때의 일인데, 그때 나는 내 심중에서 그동안 엮어온 인연 하나를 끊었었다.
그때 우리 부서 리더로서 직속상관인 검사가 바로 그 인연 끊은 주인공이었다.
딱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며칠 째 밤샘수사가 이어진 끝에, 리더인 그가 그동안 애쓴 우리 수사관들을 위로한답시고, 당시 대검찰청 청사가 자리 잡고 있던 서소문 일대에서는 최고 고급이라는 등심구이집 ‘남강’에서 만찬자리를 벌였는데, 바로 그 자리에서 그가 내게 한 말이었다.
원체 술을 좋아하는 그였고, 당시는 소위 ‘폭탄주’라고 해서 두 가지 술을 섞어서 마시는 분위기가 횡행하던 때여서, 리더인 그뿐만이 아니라 우리 수사관들도 마찬가지로 취했었다.
그래서 다들 횡설수설 대화가 계속되던 막판에 내가 그에게 술 잔을 권하면서 이렇게 혀 꼬부라진 말을 던졌다.
“형님요! 한 잔 받으시이소.”
분명한 기억은 아니지만, 나는 나이가 나보다 서너 살 더 많은 그였기에 상관과 부하의 의미보다는 형과 동생의 분위기가 더 좋을 것 같아서 그렇게 ‘형님’이라고 호칭을 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호칭이 받아들여질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곧바로 모진 답이 되돌아왔다.
“야 임마! 형은 무슨 형! 우리는 공적 관계야. 상관이고 부하인거야. 형이라고 불러서 은근슬쩍 사적 관계로 넘어가려고 하지 마!”
그러면서 내민 내 술잔을 탁 쳤다.
권하던 술잔이 상위로 아무렇게나 떨어졌고, 결국 그 술잔을 그에게 권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 순간, 내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그동안 직속상관으로서 존경하던 마음이 그 취기에도 싹 가시고 말았다.
그리고 슬펐다.
초등학교 다닐 때도 그랬고, 중학교 다닐 때도 그랬고, 고등학교 다닐 때도 역시 그랬듯, 공부라면 나도 좀 한다는 소리를 듣던 나였다.
그런 내가 동료 수사관들이 모두 지켜보는 그 자리에서 직속상관으로부터 수모를 당했으니, 나로서는 슬프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내 나이 열여덟로 고등학교 2학년일 때, 울 엄마만 죽지 않았어도, 그가 앉은 그 자리 같은 신분에 넉넉히 올랐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에까지 이어졌다.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된 울 엄마가 미웠고, 맏이를 끝까지 공부를 시키지 못한 우리 아버지가 미웠고, 한 집안의 장손이고 종손인 나를 도와서 대학을 보내지 않는 집안 어른 모두가 미웠다.
심지어는 내 삶을 주관해 온 것으로 믿었던 하나님에게까지 마음의 주먹을 휘둘렀다.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물 수가 없었다.
슬그머니 빠져나와서 서소문 그 밤길을 잠시 걸었다.
어디 방향을 정해 걸은 것이 아니다.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그렇게 걸으며 슬픈 내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아내와 두 아들이 기다리고 있는, 20평짜리 목동 신시가지 아파트로 향했다.
그렇게 집으로 향하면서 내 마음을 오지게 먹었다.
이렇게 먹었다.
‘당신과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다.’
그때쯤에 내게 새롭게 다가온 인연이 있었다.
우리 부서에 새로이 전입한 검찰수사관으로, 내게 14년 후배가 되는 임채균 바로 그 친구였다.
나는 그 친구에게 가급적이면 수사의 실무를 맡기려했고, 그 친구는 맡겨주는 내게 신뢰로 보답을 했다.
그렇게 위임과 신뢰로 엮어진 4반세기 인연이다.
그 긴 세월 속에 우리들 호칭은 호형호제가 됐다.
겨우 서너 살 차이에도 호형호제를 못한 그 슬픈 추억, 이 친구와의 인연 맺어짐으로 보상 받았다.
“형님, 보고 싶습니다.”
기증식이 있기 딱 하루 전날에, 그 친구가 내게 그렇게 전화를 걸어왔다.
보고 싶다고 하는데 안 볼 이유 없다하고, 밥 먹자는데 안 먹을 이유 없다하는 것이, 내 삶의 핵심이다.
어렵게 맺은 인연이 자칫 악연으로 이어지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좋아, 당장 보지 뭐.”
내 답은 그래야 했고, 당연히 그리 답했다.
그래서 이날 저녁으로 서초동 우리 법무사사무소 ‘작은 행복’ 인근의 양고기 전문집에서 저녁을 같이 하게 된 것이다.
바로 그 저녁 자리에서 임채균 그 친구가 다음 날에 있을 화가 김흥수의 창작작품 기증식에 발걸음 해달라면서 초대장을 내민 것이었다.
“저도 좀 괜찮은 일 하고 있습니다. 재단법인 한올에서 이사를 맡고 있는 것이 그것인데요, 우리 재단에서 김흥수 하백의 작품들을 기증받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뜻을 기려 좋은 일을 좀 하려고 합니다. 그 자리에 형님을 꼭 초대하고 싶습니다. 제 주위에서는 형님 한 분만 초대합니다. 제 자랑을 받아주실 분이 형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초대하는 이유까지 보태고 있었다.
“좋아, 가지 뭐.”
내 답은 그래야 했고, 당연히 그리 답했다.
그 저녁자리에 함께 있던 아내도 이렇게 맞장구 치고 나섰다.
“저도 따라 갈래요. 기증식에도 가보고, 일산 간 김에 거기 사는 동생도 좀 만나보고, 잘 됐네요.”
인연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기증서 서명이 끝나고 이어진 외빈 격려사의 순서에서 또 하나 소중한 인연이 엮이고 있었다.
처음 엮이는 인연이 아니라, 이미 엮인 인연의 새로운 발견이었다.
“다음은 남북민간협력위원회 성진용 회장님의 격려사가 있겠습니다.”
사회자가 그렇게 소개를 했을 때, 나는 내 귀를 의심해야 했다.
‘성진용’이라면 내 고등학교 동기동창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역시나 그랬다.
소개를 받고 나서는 사람이 바로 그 친구였다.
놀라운 등장이었다.
그저 고등학교 동기동창이라는 그 인연 만이었으면, 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평소 하는 처신이 하도 반듯하고 헌신적이어서, 언제 한 번 따로 만나봤으면 하고 나 혼자 마음에 담아둔 친구였기에, 내 그렇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그 순간의 놀라움을 위해, 4반세기 전의 그 슬픈 순간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 슬픈 순간을 잘 감당해서 지름에 이른 나였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게 그 인연을 선물로 주신 것이라는 생각에까지 이어졌다.
그런 내가 자랑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
인연이라는 것, 곧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첫댓글 고등동창!
좋은 자리에서 옛 인연을 다시나셨네?
그래 많나서 또 반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