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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책한 권
지나간 책한 권 속
소중한 보물을 발견하고
이 글을 읽고 또 읽고 -
소중한 보물인 듯싶어
배움터 지킴이 동료들에게 소개하고 싶었다.
오전 출근하여 -
한 시간 가량 입력하고 -
어깨가 다 아프다
전산 실력도 없는 사람이
자판 두들기려니 --
그래도 점심시간 전 마감하고 나니 뿌듯하다
좋은 글이라 생각되어 올린다
작가의 마음이 충분히 공감이 간다
10분 전 12시
점심시간이 다 가온다
식사시간에는 용감한 병사가 된다.
오늘도 좋은 하루 파이팅!
연말 보너스
연말이다. 박스 공장에 다니는 나는 회사에서 보너스를 받았다
아줌마가 넉넉한 삼송리의 선술집 '무진장' 에서 미더덕 찜에
소주 한잔을 걸쳤다. 술기운이 얼큰하게 올라왔다 .
동산리에 살던 나는 버스를 타고 불광동을 나왔다.
네거리 갈채 스탠드바에서 맥주를 마셨다. 아가씨는 노래를 부르라고 했다
나는 '어쩌다 마주친 그대'를 불렀다. 세상에 이렇게 좋을 수가 -
나는 스탠드바를 나와 또다시 불광 시장으로 들어 가 노점에서
돼지 껍질에 소주 한 잔을 더 마셨다. 술자리에서 나와 장난감 가게에서
딸아이의 불럭을 샀다. 노점에서 사과 삼천 원어치를 사니 한 보따리다.
버스를 타려니 아내가 마음에 걸린다. 그래서 오던 길로 도로가 시장에서
아내의 점퍼를 샀다.
이 꾸러미 저 꾸러미 - , 술이 취해서 버스에 올라 이내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버스 기사님은 문산 종점이라며 내리란다.
눈을 뜨니 사과는 당구공처럼 버스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아저씨! 이 사과들 아저씨 씻어 잡숴요. 좋은 거 드려야 하는데 미안해요.
그런데 지금 몇 시예요?
게슴츠레한 눈으로 기사에게 “몇 시 냐 ” 물으니 벌써 자정이 넘었단다.
블록과 점퍼 보따리를 들고 서울 쪽으로 터벅터벅 내려오니 택시가 다가왔다
선택의 여지도 없이 택시를 탔다. 그리고 또다시 잠이 들었다.
어디 쯤일까-- , 술이 덜 깨어서 택시에서 내린 나는 어딘지를 분간할수 없었다.
봉일천쯤 되는 모양이다. 그래도 손에는 블록과 점퍼가 들려있다.
술도 깰 겸 그냥 걸어야 할 것 같다.
서울 방향으로 한 시간여 걸어 내려오려니 이 추운 겨울에 길가에서 웅크리고
잠든 걸인이 보인다.
'그래, 하나 더 사면되니까 이 점퍼를 주어야지-
점퍼를 꺼내 걸인에게 덮어 주었다. 너무 기분이 좋다. 콧노래 가 나온다.
블록을 덜렁 덜렁 들고 집으로 향한다. 술이 얼추 깨어간다.
걷는데 무엇이 허전한 느낌이 든다. 지갑을 찿아보았다.
이럴 수가 -- , 아무리 찿아보아도 지갑이 없다. 그 택시 기사에게 아리 랑 치기를
당했나 보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다. 화가 나서 블록을 팽개쳤다.
내가 얼마나 고생해서 번 돈인데-
동네에 도착하여 사글세 방 집 주위를 빙빙 돈다. 아내에게 무어라 변명을 하지--.
아내는 밤새 기다렸나 보다. 호가 원망이 되고 , 원망이 미움이 되고 ---,
급기야 미움이 걱정이 되어 기다렸나 보다.
분간 방 문을 두드리니, "왜 이렇게 늦었어?"
아내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반긴다.
"으응 -" 할 말이 없다.
"저 말이야-"
자초지종을 말하려는데,
"왜 무슨 일 있었어?"
아내가 눈이 휘둥그래서 되묻는다.
자기의 점퍼랑 아이들의 블록을 사 가지고 버스를 탔는데 그만 잠이 들어서
문산까지 간 거야, 그리고 택시를 탔는데 그 택시 운전사가 강도를 변하여서 그만---"
나는 생각나는 대로 둘러대었다.
"어디 다친 데는 없어?"
"응. 괜찮아 "
나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그럼 됐어. 돈은 또 벌면 되는 거구. 자기가 다치면 우리 집은 끝장이야 ---"
아내는 내 품 안으로 안겨왔다.
그해 겨울, 나는 연말 보너스로 가장 값진 '아내의 마음" 을 선물로 받았다.
-1991
제목 리어카 한대 김순진 수필집 에서 --
37. 추억 한 토막.
과거는 아름답다고 했던가.
귀농생활이 비교적 생소한 나머지 가끔은 힘들다는 생각도 들 때가 있다.
하지만 내가 과거에 회사생활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다 보면 오히려 귀촌생활은 마냥 행복하기만 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더 많은 편이다.
이미 회사를 퇴직한지도 18년이 되었다. 회사에 다닐 때 갑자기 지방발령으로 전주공장에 가서 3년 반 동안 중간간부로 근무할 때의 일이다.
본사에서 가끔 회장님이 내려오셔서 1박 2일 머무시곤 하였다.
그럴때면 공장 전체가 비상이 걸린다. 워낙 부지런하시고 근검절약이 몸에 밴 분이라 아침 7시 이전에 출근하여 공장 내를 순찰하신다.
회장님이 서울로 올라가실 때까지 비상이 걸린다.
공장 곳곳에는 먼지 하나 휴지조각 하나 없이 깨끗했었다. 모든 간부들은
숨을 죽이고 지내게 된다.
어느 날 점심시간에 회장님이 공장장을 불러 세웠다. 무엇이 마음에 안 드셨던 지 -- .한분은 공장장이고, 또 한분은 모 이사님이다.
그분들이 당시 50대 초반이었는데 회장님은 70대 중반을 넘기신 때였다.
응접실 의자에 앉으신 상태로 두 분은 부동자세로 서있고 회장님은 호통을 치셨다.
“손이 닳소! 몸이 닳소! 여기가 양노원인 줄 아오? 일하기 싫으면 집에 가소!”
자수성가한 분들의 생활방식은 다르다. 이미 작고하신 지 오래다. 당시 공장장도 지금은 80세 정도 쯤 되셨을 게다.
어디 사시는지 궁금하기고 하다. 모두가 지나가는 바람이었다.
지금도 회장님의 근검절약이 생각난다.
“손이 닳소. 몸이 닳소!”.
공장부지가 10만 평이었다. 당시 맥주공장을 신설하여 생산이 막 시작되던 때였다. 영등포 본사에서 공장 간부들과 관리직 간부들이 내려오고 현장 근무인원은 현지에서 채용하던 시기였다.
숙소는 근처 봉동에 아파트를 회사에서 얻어주어 출퇴근 하던 때였다.
현지에서 채용한 용역인원들은 아직 기술이 미숙하고 조직체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심지어 중간간부들도 힘들어서 사직하는 경우가 많은 때였다. 토요일, 일요일도 휴무 없이 기계는 돌아가고, 야근 철야작업까지 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현지에서 채용한 용역 인원들은 농번기가 되면 말도 없이 결근하니 낭패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당시를 생각하면 참 힘들고 괴로웠다.
임금인상 등 단체교섭 때는 해마다 파업을 하고, 공장 가동이 멈추곤 했었다. 당시 나는 관리 과장이었다. 나의 직무는 재품 출고 관리와 세무 담당이었다. 상하차 현장 직원 50여명과 사무직 6명이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했듯이 당시 나의 업무는 나날이 벅차고 괴로움의 전철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성싶다.
그렇다고 사표라도 낼 형편도 아니었다. 자식들은 커가고 있어 교육비를 비롯해 집에 생활비는 점차 부족하기만 했었으니 하는 수없이 이를 악 다물고 꾹꾹 참아내며 열심을 다해 일을 했었다. 마치 군대생활을 하는 것 하는 것 같았다고 할까?
어느 때는 두 달 동안 서울 집에 한 번도 못 간 적이 있다. 신설공장이라
할 일이 태산 같았다. 특히 용역들의 이직율도 높아 공장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어쩌다 내려오시는 회장님은 무조건 직원들이 노는 꼴을 못 보는 성격이었다. 현지 사정을 잘 모르던 회장님은 당신이 살아온 생활관만
내세워 불호령을 내리곤 했었다. 언제나 그래 왔듯이 새벽부터 저녁까지
공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아무리 작은 일일지라도 일일이 지적사항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그 회사를 어떻게 23년이나 참고 다녔는지 모르겠다.
맨 처음 입사하여 발령받은 부서는 본사 총무과였다. 그 당시엔 전산이 없어서 수작업으로 월급을 계산하고 봉투에 넣어주던 시절이었다.
누런 급료 봉투를 각 부서별, 직원별로 이름을 쓰고 급료 수당액을 기록한 후 갑근세, 보험료 등을 공제하고 돈은 은행에 가서 찿아다가 부서별로 나누어 주었다.
그때는 한자를 많이 썼다. 본사 직원 및 공장 직원 이름이 1,500명 이상이었는데, 2년 근무하는 동안 다 외워버렸다. 한자로 된 이름과 어느 부서에 근무하는 분들인지 저절로 외워졌다.
본래 총무란 그때나 지금이나 잡무를 총괄하는 일이라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편이다. 어린 아기가 자라서 유치원생이 되고 초등생이 되듯이,
그리고 어른이 되듯이 나는 자연히 힘든 업무에 적응해 나가면서 그러한 곤혹스러움을 참아냈던 셈이다.
일반 회사 생활이 얼마나 힘든지--. 특히 중간간부란 위의 분들 눈치보랴,
아래 직원들 비위 마추어주랴 마치 기생오라비와 같은 노릇을 해야 했다.
경리부 회계과 4년, 서울사무소 4년, 전주공장 3년 반, 감사부 발령을 받아
전국 지점을 3년간 돌아다녀야 했고, 일주일 출장, 일주일 내근하며 감사보고서 작성 등, 나날이 일에 시달리는 게 내 일상이었다고 하겠다
조달과 차장으로 발령을 받으니 겁이 났다. 그 자리가 돈이 생기는 자리라 그런가! 내가 감당할 자리가 아니었다.
돈암동 삼선교에서 영등포까지 전철을 타고 오전 7시 전에 도착하여 회장님이 공장을 순찰 도는 때 눈도장을 찍어야 했다.
어느 날 좀 늦었다. 회장님이 내 자리에 오시더니 많은 직원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나를 보고 “당신 여기 있을 필요 없어요” 하신다.
잠시 후 총무 전무가 불러가 보니 “어디 갈래요?” 하신다.
나는 얼떨결에 “감사 부요.” 라고 대답해버렸다. 그날자로 감사부로 발령이 나서 여기저기 감사를 다니는 중 감사보고를 회장님에게 보고하게 되어서 또 무슨 날벼락이라도 받지 않을까 초조한 나날이었다.
참 죽을 맛이었다. 그때 내가 죄지은 것도 없는데 부들부들 떨리는 일은 다반사였고 마치 고양이 앞에 쥐처럼 살았다. 그나마 다행히 공석이던 감사부장이 발령받아와서 그 이후로 회장님 앞에 보고하러 가는 일을
면케 됐다. 나에게는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다.
감사부 근무 3년 반 동안 제주도를 3번이나 갔고, 각 지방에 있는 지점 24군데를 2번 이상 다니며 전국 유람을 한 셈이다.
지점에 감사 차 나가면 감사팀에게 술부터 먹인다. 부산지점 일주일간 감사하던 어느 날 술이 취하여 숙소로 가기 위해 지나가는 택시를 잡으려 애쓰던 기억이 떠오른다.
소낙비는 내리고 택시는 잡을 수가 없었다. 지나가는 택시를 향해 손을 처들고 큰 소리로 "삼선교, 따블. 따블." 하던 일이 떠오른다.
그러다가 동 서울 관리차장으로 발령이 나서 좀 편했는데, 98년 구조조정 당시 계열사로 발령이 나서
안산공장 상표 만드는 신화 인쇄에 한 달간 근무하기도 했다. 너무 멀어서 삼선교에서 안산까지 전철 타고 2시간이나 걸렸다 .왕복 4시간이나 소요되었다.
한 달 다니고 나니 더 이상 힘들어서 못 다니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사표를 내고 그만둘까? 하는 생각이 매일 났다.
때마침 명예퇴직 신청을 받았다. 퇴직금 30% 나 더 준다고 하여 곧바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
총무 전무가 "당신은 아니야" 하고 말렸지만 이미 결심한 마음을 돌이킬 수가 없었다.
가정적으로도 만만치가 않았다. 그때 아이들이 고3, 고2였고, 내 나이 52세의 젊은 나이였으니 마음의 갈등은 이루 말로 하기 어려웠던 셈이다.
조금 일찍 나오긴 하였지만 어떤 면에서는 나이 더 먹기 전에 사회적응을 위한 측면에서는 잘 선택했다는 생각도 한다. 이를테면 어항 속 물고기가 밖으로 튀어나오려 애 쓰다가 어찌어찌 튀어나오기라도 한다면 그물고기는 죽을 수밖에 없지 않겠나?
그렇듯 나는 고생 좀 하며 살았던 셈이긴 하다.
38.손자 돌보기
서울에서 초등교사하는 딸이
방학이라 두 손주 몰고 와서 함께 지낸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
40개월. 9개월 외손주
슬퍼할 겨를이 없다
9개월짜리 말도 못 하는 것이 기어 다니기 선수다
윗니가 하나 난다.
아랫니 먼저 2개 나고 --.
40개월 큰 놈 말을 변호사보다 더 잘 한다
밤 11시가 넘어 배고프다고 밥 달라고 보챈다.
김에 밥 주고, 과자 달라고 하여 고깔 콘 10개, 건빵 2개 주고 -
배가 부른가 보다.
신나서 노래 부르며 뛰어다닌다.
졸려도 이놈이 자기 전엔 불침번 선다.
치 카, 치 카 시키고 -
졸린지 할머니 옆에 눕는다.
몰래 기저귀 갈아 채우고 -
어휴, 밤 1시가 된다.
몸이 녹초가 된다.
39. 나의 삶 나의 인생
불혹의 나이를 넘어선 지 8년이 되었다.
그동안 병원신세 한번 안 지고 건강하게 살아왔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가족들. 나를 지탱해주는 원동력이며 그 어떤 것 보다도 가장 소중하고 고귀하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 아닐까?
모두가 건강하고 씩씩하다. 중3인 선혜는 공부에 정신이 없다.
제대로 잠도 못 자고 학교와 학원에 시달린다.
본인이 원하고 있는 외국어 고교에 가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다.
아이들 학업 때문에 봉급의 50%가 학비로 충당되고 있다.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지만 부모로서는 “뼈를 깍는 아픔”이
있더라도 그것을 보람과 기쁨으로 알고 감당을 해야 하리라!
나보다 오히려 집사람이 더욱 강한 집념을 보인다. 무슨 일이든 한번 시작을 하면 좀처럼 변경을 하지 않는다. 피아노도 그러하다. 중2인 민철이까지 체르니 40번 까지는 가야한다는 것이 집사람의 뚝심이다.
현실은 고달프지만 앞으로 5년 후 10년 후를 내다보면 얼마나 즐겁고 기쁘고 희망적인가? 아이들은 곧고 바르게 성장하고 있다.
나처럼 키가 작으면 어찌 되는가? 때때로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중3, 중2이다. 키를 키우는 것도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하나님께 진심으로 기도해보지도 않았다.
인간적인 노력도 아니했다. 콩나물과 두부를 많이 먹여야 한다.
능력이 허락하는 한 씨를 뿌리고 가꾸듯이 ---
주어진 여건과 처지에서 항상 최선을 다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항상 긍정적인 자세로 문제마다 이겨 나가야 한다.
폭풍이나 소나기 후에 ‘무지개’가 피어나듯이 현실의 어려움은 장래의 소망을 위한 기초가 아닐까?
내가 무엇이 부족한가? 마누라가 없나! 자식이 없나! 직장이 없나!
인생이란 것이 뭐 특별한 것인가?
건강하고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잘 먹고 부지런하고 소망가운데 열심히 살면 되는 거지 마음먹기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이루어진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병원이나 감옥에서 햇빛 못 보고 고생하는 사람이 수없이 많고, 돈을 벌기 위해서 마음의 자유를 상실한 삶도 수 없이 많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순응해 나가면 된다.
시간은 정직하고,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자기의 일을 절대로 미루지 않는다.
어느 새 내 머리엔 흰 낙엽이 한두 개 생기고 , 얼굴엔 검버섯이 피어오른다. 족구를 해도 곧 지치고 만다.
떠오르는 태양도 아름답지만 석양에 지는 황혼도 아름답다.
단 1회 적인 삶. 후회 없도록 보람 있게 남은 인생을 열심히 살아야 하겠다. - 1994년 6월 어느 날-
40.사돈에게 보낸 편지
*신림동 사돈 이00님
사돈님 이번 이사 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집주인이 별난 분이라 이사 가는 당일까지도 마음 조리며 근심 걱정하시고
밤잠도 못 주무시고 --
지옥 같았던 불광동 집 떠나서 이제 문래동으로 이사 가고 -
사위가 출근시간이 단축되고 손자들 놀이터가 가깝고 -
1층이라 층간 소음도 없을 것이고 엘리베이터 고장 등 염려가 없어서 안심
이 됩니다.
신림동에서도 2호선 지하철 한번 타면 간다는 이야기 들었습니다.
귀촌한지 만 6년이 지나고 - 이곳 노은 생활이 차차 익어갑니다
이곳에 정착하고 나니 서울 살던 시절이 아득한 먼 과거 같고 어쩌다 서울
가면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힙니다.
저는 어린 시절 시골에서 초등학교 2학년까지 다녀서 그런가? 시골이 참 좋
습니다. 어느새 추운 계절이 다가옵니다.
황금 들녁이 바람에 물결치고 하늘은 더없이 높고 푸릅니다.
바람따라 흐르는 구름만 바다위 배처럼 흘러갑니다.
가는 세월 막을 수가 없고, 커가는 손주들 모습 보면 엔돌핀이 생기기도
하고 언제 크나! 하면서 제 자신 주름살은 못 봅니다.
어쩌다 거울을 들여다보면 흰머리 카락이 산을 이루고 듬성듬성 빠져버린
머리카락이 서글픈 생각을 초래합니다.
요즘은 걸음걸이, 말소리 모두 느려지고 - 몸도 마음도 종점을 향하여 말없
이 달려갑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큰 사고없이 살아온 날들이 감사할 뿐입니다.
사돈님 7 순이 가까워 오는데-- 어제 영찬이 에미 한테서 이번 주말 가족
끼리 식사한다고 소식 들었습니다. 그동안도 손자들 돌보시느라 고생 많이
하시고 -영찬이 아빠도 이제 자리를 잡아 가는듯하여 마음이 놓입니다.
거듭 7 순 축하드립니다. 축하금 조금 동봉합니다.
건강하십시오 2018.10.18.(목) 노은에서 신현대 드림
*충주 사돈 상견례 시 아들 소개 편지
신00 소개(1980.6.24. 양력)
제 아들이지만 부족한 점이 많고
속에서 처럼 자라서
세상 물정을 잘 모릅니다.
저희 는 자녀들에게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은 했지만
IMF 당시 으로 인하여 성장기에 있는 아이(고2)에게
정신적인 부담을 안겨주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엔 학원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중학교 1학년부터 동네 보습학원을 보냈고-
수학은 잘하였는데- 사회과목 특히 외우는 것에 약했습니다.
초등학생 때는 누나와 다투면 체벌을 가하기도 하였으나
중학생이 된 이후는 곁길로 가지 못하도록 울타리만 쳐주고
을 부여하였습니다.
기억에 남는 것은
초등학교 2학년 시절 짝꿍 여자애가 때린다 하여
태권도 도장에 보내 중3까지 다녔습니다.
3품이 되어, 학원에서 후배들을 지도하기도 하였습니다.
태권도 학과를 보낼까? 생각도 하였는데-
도장 선배들 중 껄렁한 애들이 자주 불러내어 태권도 도장을 못 나가게 하였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연년생인 누나가 피아노 학원에 다니는 것을 보고 저도 배우고 싶다 하여 초등학교 3학년부터 중학교 2학년까지 다녔습니다. 그 당시 남학생들이 피아노 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는데 체르니 40번 까지 한걸로 기억이 납니다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가지고 그 이후로 혼자 집에서 피아노를 자주 쳤습니다 아주 잘 가르쳤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년생이라 큰 아이 딸에게 주로 관심을 가지다 보니 둘째는 조금 소홀했습니다 그런대로 사고 없이 잘 자라 주었습니다.
아이큐는 126으로 좋은 편입니다 누나는 노력형이고 공부에 대한 욕심이 많았지만 민철이는 낙천적인 성격에다가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습니다.
중학교 때까지는 상위권을 유지했는데-
고교 입학 후 음악서클인 녹소니 중창단에 가입하여 수시로 연습에 참가하여 공부와는 담을 높이 높이 쌓아만 갔습니다.
고1때 담임선생님이 공부에 지장 있으니 녹소니 중창단 그만두게 하라고 말씀하시고 저도 자식을 달래 보았지만 - 거기 흠뻑 빠져서 학교에서 밤늦게 까지 노래 연습하고 -
고1 때는 그런대로 반에서 10등 안에 들었습니다.
갈수록 성적이 추락하였습니다.
2학년 여름방학이 지난 어느 날 아침 식사시간에 아들이 하는 말이
“아빠 나 선생님이 직업학교 가라는데- 반에서 20등 이하는 -”
하고 말하자 아내는 수저를 떨어뜨리고 눈물을 보였습니다.
저도 약간은 놀랬지만 “괜찮아 지금부터 하면 돼!
다음 중간시험에 당일치기로 며칠밤 열심히 공부하길래 지켜만 보았습니다.
그 당시 성적표는 학교에서 집으로 우편으로 발송-
성적표가 오지도 않았는데- 엄마 학교에서 편지 안 왔어? 하고 자주 물어보곤 하였습니다.
성적표가 도착하여 확인하니 반에서 2등 무려 20등이나 상승을 하였습니다.
이제사 정신을 차리나 보다 했는데- 고3이 되자 녹소니 리더가 되어 더욱 열심히 노래에 심취 -가수가 되려나보다. 라고 생각하였지만-
3년간 학교 축제때 마다 아들이 무대에 올라 노래 부르는 모습을 우리 부부는 함께 참석하여 녹음도 하고 박수도 치고 -자식이 원하는 길을 따라갔습니다. 고3 때는 솔로도 하였습니다.
저도 잘 부르지는 못하지만 팝송이나 가곡을 무척 좋아하는 편으로 노래를 부르다 보면 근심 걱정이 사라지고 마음이 평안해지곤 합니다.
우리 식구들은 자주 피아노와 기타를 치면서 함께 노래를 부르곤 하였습니다. 민철이는 기타치고 딸은 피아노 치고-
뿌린 대로 거둔다 하였듯이 수능점수가 별로 였습니다. 324점
평소 나는 아빠처럼 취직 안 할 거야 - 재수 한번 시켜달라고 졸랐지만
형편상 재수시킬 능력도 없었습니다.
수능점수에 따라 등록금이 저렴한 서울 산업대 보냈습니다.
건축과나 매스미디어 가 세다고 하여 구조 공학과 원서 넣었더니
1학기 장학생이 되어 다녔고- 누나를 따라 자연이 학교 서클인 CCC에 가입하여 열심을 내고 집회마다 참석하고 -방학이면 기도회 아니면 단기선교로 중국 일본 등- 공부와는 멀어지고 -
군입대 후 군대 교회에서 피아노 담당하면서 신앙생활에 매진 - 그러다 보니 졸업도 늦어지고 -
본인의 뜻대로 CCC 간사가 되었습니다. 어찌 살아갈는지-
부모로서는 걱정이 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이 선한길로 인도하시리라 믿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빛나는 햇살은 하수도 구멍까지도 비추지만 더럽혀지지 않는 것처럼
온 세상의 어두움을 비치는 햇빛과 같이 아들이 그러한 빛과 소금의 역할을감당했으면 -바라는 심정입니다.
저는 아버지처럼 매인 생활이 싫어요 회사 다니지 않겠다고 -
고등학교 때부터 선전포고 하였듯이 -
급기야 본인이 기도하고 원하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무척이나 반대하였으나 돌이켜보니 부모욕심이 자식의 장래를 막는다 생각이 들고 -
나쁜 일이 아닌 이상 기도하고 도와주어야겠다고 마음을 돌이켰습니다.
다행이 며느리가 될 지영이를 만나보고 더욱 마음이 놓였습니다.
이제 부모 품을 떠나 어른이 되어 이 험한 바다와 같은 세상 속에서 잘 적응하기를 기도합니다.
사돈댁의 사위 겸 아들도 된다고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놓입니다.
부족한 민철이 자식처럼 사랑해 주시고 잘못하면 꾸짖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2009.01.27.(화) 밤 11시 10분 신00 드림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