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한동네에서 살았는데, 또 이사를 가야할 일이 생길 것 같다. 아니면 기러기가 되덩가
어려서 가장 감명깊게 본 책들이 만날 여행기들이라서 그런지 역마살이 있나보다
외팔이 왕호 영화를 보고나서부터 젓가락 대가리를 붙잡는 게 버릇이 되어 어른들에게 밥먹으면서
한소리씩 들었다. 왜 그리 어디 멀리가서 살려고 하냐~ 하고
한국서 최초로 나름데로 세계 여행한 이는 이름도 기억안나는 우체부 아저씨였다. UN참전국에다가 우리나라 학생들이
건낸 펜팔편지를 건네는 것이엇다. 이 양반 벨기에에서 미성년자들 호텔방으로 들였다가 혼낫다.
조악한 사진과 우체부라는 공무원신분으로 돌아다닌 이라서 뭐 그리 흥미는 없었지만 민둥산, 골목, 기왓집이 눈에 보이는 전부였던 당시에는 베스트셀러였다.
그러다가 재일교포 친척이 무역을 한다고 드나들고 부친이 같이 일을 하신다며 부산에 내려가셔서 송도에 일본식 여관을 사서
사무실겸 거처로 쓰셨다. 친척이 민단사람들이나 일본인 기술자들을 많이 대려와서 그런 집이 필요했엇나보다. 양변기 만드는 틀같은거를 일본사람 기술자가 만들러 오면 통역하고 대구까지 가서 그걸 한국인 기술자들에게 가르쳐주고, 또 생산품이 일본으로도 가고, 양식기 만들때 붙이는 전사지 ( 껌사면 들어있는 판박이 같은건데, 종이에
그려진 그림을 유약바른 접시위에 놓고 구우면 그 그림이 접시에 붙어나옴)같은 거 수입해서 팔고, 목기그릇 - 옻이나 황칠한거
, 그리고 연어잡는 곰 목각 같은 거 수출하는 업이었는데...
당시에 나는 부산서 살면 햇엇다. 그 집 바로 앞이 송도 해수욕장이어서 놀기좋았다. 옛날이라서 여관서 밥도 팔았는데 그냥 눌러앉으신, 진주서 온 아줌마가 아주 정갈히 음식도 잘하셨더랬다. 해파리채가 그리 맛있을 수가 없엇다. 미역이랑 우뭇가사리 해파리 오이에 검은께가 뿌려진 거즐 사스마그릇이라고 불리는 유리그릇에 담아서 내놓는데, 그거 서너젓가락이랑 빨간반찬이라고 하는 우럭 비슷하게 생긴 생선으로 끓인 생선국 - 이게 아주 생선살이 달다 이나 구이랑 제주도서 온 표고가 든 짜왕무시로 밥두그릇은 비웟다.
일본여관이라서 그런지 아주 정원이 아기자기 햇는데, 만병초, 군자란, 문주란, 백리향, 암소철, 수소철, 금송,측백, 삼나무, 관음죽, 왜종려 우거지고 벽에는 수선화가 빽빽하게 차있었다.
환갑이 되시던 해에 업을 팽개치시며 서울서 살게되면서 그 여관을 팔아버렸는데... 미국에 이민오기 전에 어찌되었나 보러갓더니 내머난 모텔이 들어서 있드라.
2주일에 한번씩 서울로 오르락 내리는 일을 15년이 넘게 하신것이니, 돈벌어서 철도청, 한진고속, 고려항공, 한국항공, 대한항공
좋은 일만 했다고 하시았는데, 학교를 다닐 때는 무조건 방학때는 부산서 있을 수 있엇는데, 부산서 있으면서 다른 동네에는 가질 않앗다. 함 슬슬 걸어서 초량동, 부산세관, 용두산, 코모도어호텔, 영도에 가본 외에는 해운대나 달맞이 그런데는 가본적이 없다.
여관에서 시간보내는 것이 너무 좋아서.
친척은 일본서 잡지들도 많이 가져왓다. 당시엔 한자모르면 신문도 못본 때니, 국민학교 6학년 정도면 TV뉴스만 봐도 신문에 나오는 한자에서 절반 정도는 읽을 때니, 일본말 배우기가 참 수월햇다. 集 이라는 한자가 나오면, 아 저거 학교주변에 공원모집할 때 나오는 한자니 척알고 , 일본책에 그 한자가 나오면 , 아부지 이거 뭐라고 읽어요. 하면 아쯔마루 . 모여모여 아쯔마레 아쯔마레. 熊은요 구마구마 우리집 개이름 . 그러면서 일본말도 제법했엇다.
방학이면 만날 부산서 빈둥거리는 형제를 위해서 사오신 책이 김찬삼여행기, 처칠이 썻다는 제2차 세계대전
그해 여름방학 동안 사회과부도까지 펼쳐가면서 세상구경을 다 햇다.
김찬삼여행기는 칼라화보가 야해서 당시에 어린애들이 보기엔 좀 과한 감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 화보에 나온 여자들 얼굴은 기억이 나는데, 그 아래론 기억이 안난다. 어려서 오마니손에 이끌려서 울면서 머리감던 여탕 벽에 걸려있던 물아껴쓰자던
글귀도 생각나는데, 이상하게 당시에 아줌마들 얼굴이랑 긴머리는 기억이 나는데, 그 아래론 기억이 안난다. 뭐 얼굴 뜯어먹으려고 얼굴만 죽어라 봣는지.
김찬삼교수에 대해서 여새 기자들은 그를 무전여행자라고 소개를 했는데, 이는 크나큰 왜곡이다. 김찬삼교수는 50년대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유학할 정도로 유복한 이었다. 당시에 미국서 차를 몰고 유학생활을 햇다. 세계여행도 동아일보가 스폰서를 했다. 그가 보내는 편지와 사진이 동아일보에 실시간 연재되어 당시 외국물정에 목마른 국민들에게 정보제공을 햇다.
당시 우리 한국인이 환장하던 일제물건을 유렵사람들은 어찌 생각하는지.
우리가 항상 영화를 보기전 대한늬우스에 나오는 우리 청룡부대 백마부대에게 쳐발리는 월남... 화면에는 만날 물소랑 맨발의 월남인만 나오지만, 당시에 월남의 신혼부부들은 일본으로 신혼여행가는게 붐이었다는
그리고, 목사의 자식으로 태어나 흰빵 검은빵의 세상사에 반성, 백인이면서 흑인을 돕기위해서 가봉에 간 수바이쳐 박사의 의료촌에 가서, 그런 곳에서도 백인의 개가 흑인보다는 잘먹고 잘사는 현실에 절망하는 것이, 요새 한창 돈독오른 사이비 여행가의 글과는 큰 차이가 난다.
이 김찬삼교수가 황해도에서 피난나온 곳이 인천이라서, 영종도에 김찬삼기념박물관이 생겼다고 하니, 한국에 계신 분들은 한번 구경가길 바란다.
알케미스트 라는 책을 보면 막뚭 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김찬삼교수 인생도 막뚭이 아닐 수 없다. 황해도 부잣집 아들이 전쟁 통에 서양신문물이 가장 먼저 들어온 인천으로 피난하고 다른 세상으로 떠나고, 세계일주를 하곤 그런 교수를 흠모하는 여성과 로맨스가 생겨 간통으로 곤난당하고, 생지옥 인도..그 느릿느릿 가는 인도열차에서 사고당해서 뇌기능이 정지되어 죽고, 그의 기념박물관은 한국의 관문 인천국제공항이 있는 영종도에 지어진 것이 카르마의 결과가 아닌가 한다. 이게 팔자가 아니면 뭐란 말잉가
일본아줌마 잡지 주부의벚 에 항상 나오는 왜놈들이 다다미에 가따나 꽂고 여자들 윽박지르는 소설도 대충 읽기는 읽되 먼 뜻인지는 모르는 그런 시절이었다
김찬삼여행기랑 2차세계대전을 보면서 언젠가 세상을 함 보리라~ 하고 살아왓는데. 소원은 좀 이루었다.
가장 동경을 하던 곳은 유럽이었다. 그런데 연이 안닿는 지 두어번 방문하고는 얼씬도 못하게 된다.
회사의 보살핌을 받아 남미와 동남아에서 30대의 대부분을 보냇고, IMF사태가 터지고 나서 미국으로 오게되었다.
60세 은퇴.... 나는 50은퇴를 꿈꾸며 살았는데, 빠가본드에게는 그런 행운은 찾아오지 않는지
50이 가까운 나이에 새로운 계획을 세워야 한다.
대학을 나오고 20대 후반에는 가정을 꾸리고, 30대 중반에는 중간관리자 40대 중반에는 임원... 50대 중반에는 퇴직금 두둑히챙겨 여관이라도 하나 운영하는 우리 세대의 스테레오 희망은 나에게는 신기루가 되엇다.
2월 부터는 나도 집을 떠나 콜로라도나 캔사스로 돌아다니게 되었다.
대물림이라는게 뭔지 아들 넘두 독일에서 대학을 다니고 싶다고 한다. 그넘 삼촌도 하나, 독일간다고 도이찌스프라췌 책끼고 괴테하우스 뻔질나게 댕기더니 네모공주랑 정분나서 결국 대학원 못가고 군대에 간 일이있다. 며칠 전에는 군대에 가서 독일로 가겠다는 협박도 했다.
엣날에 독일에 가면 외국인유학생도 무료로 공부한다고 시관이랑 병호가 이야기 한 것도 같은데, 지금도 그런지 모르긋다. 그래주면 너무 고맙고. 안그러면 나두 이젠 유학비 벌어여 할 시기가 왔기 때문이다
실로 수년만에 집에서 찌라시를 만들어 먹으면서 식구들끼리 이야기를 했는데, TV에서 보던, 돈이나 벌어 바치는 가장이 되어여 할 시기가 도래한 둣한다. 내가 없을 때에 이사가는 일은 없어여 할텐데
어릴 적 홍제동에서 살 때, 새벽4시 통금이 끝나면 리어카끌고 영등포까지 가서 과일받아다가 장사하는 부부가 동네에 계셨다
만날 왜군들 입던 홀태바지에 고무신, 집에서는 게다신고 다니는 늙은 아저씨.
과일행상만으로 자식 다섯 대학을 보낸 분이었는데, 나는 생각할수록 이거 참 많이 부족한 듯하다.
김찬삼교수가 보고 적은 1960~70년대의 세상과 지금은 개벽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소련이나 유고슬라비아 같은 나라가 없어지고, 무수한 나라가 생겼다.
벳넘들 상대하는 여자들과 호랑이연고 (그냥 호랑이그림이 그려진 것을 뭐 호랑이기름이 들어갔다고 남대문 화교들이 사기침) 사장 호문호가 만든 세멘트로 만든 서유기공원 하나 달랑이던 싱가폴이 지금은 삐까뻔쪽하게 뱐했고
페샤와 지나 카이버고개 넘어 찍은 사진에 나오는 부미얀 석불은 이젠 세상에 존재치 않는다.
똥돼지 수출하는 화물선타고 홍콩 구룡에가서나 볼 수 있던 중공땅, 지금은 중공이 한국의 걍제에 가장 큰 파트너가 되었다.
인간세상에서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은 북한과 시리아 정도인 모냥이다
첫댓글 술사서사 나무 타사타불....잘 읽었습니다.
꽤나 많은 단어를 다시 떠올리게 됩니다. 재밋게 잘 읽고갑니다.
글의 맛이 특이하시네요 .. 뭐랄까.. 예전 국민학교 시절에 읽던 글을 다시 읽는 느낌.. 그땐 글들이 맛갈났던 기억이네요.
학교 다녀오면 밖이 캄캄해지는 줄도 모르고, 책에 푹 빠졌던 .. 넘 오래전의 추억이 다시 살아 나네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요새는 정겨운 단언디라잉 뱃놈, 백정, 깍쇠, 양샥씨, 양공주, 쌩양아치, 날건달, 한량, 딱쇠, 38따라지, 딸깍바리...에씨트라 빡빡이 율브란나 에씨트라 얘실트라
헤이유님 어려서 홍제동에 사셨다고요? 혹시 서대문구 홍제동인가요? 저도 홍제동에서 오래 살았어서... 나이도 저와 비슷하네요.
반갑습니다.
옛추억을 떠올리는글 잘 읽엇습니다. 저도 어릴적 고등때 홍제동 유진상가근처에서 많이 놀앗지요 ㅎㅎ
집은 응암동이고 친구들과 만나는곳이 홍제동 이엇죠 ~~ 벌써 34~5년이 흘럿네요
반갑습니다. 저두 무악제 넘어서 학교 댕겼어요
헤이유님.. 그 물괴기 이름이 ..ㄱ아직도 .. 빨간고기라고 합니다..왜 인지는 모르나...그냥 빨간고기라고.. 트럭에서 방송하면서도 팔고 ,,,, 그럽니다... 요새는 잘 안보이는거 같습니다.. 옛날엔..갈치,고등어, 빨간고기.. 쉽게 접하는 물괴기 였습니다..지금은..갈치 좋은거 한마리 1-2만원 은 줘야 되는ㄱ ㅓ같습니다... 특대좋은거는 몇만원에서 돈십만원 하는거 같아요...ㅎㅎ 약식 , 광어 ,우럭이 싼거 같습니다..
헤이유님.. 그 물괴기 이름이 ..ㄱ아직도 .. 빨간고기라고 합니다..왜 인지는 모르나...그냥 빨간고기라고.. 트럭에서 방송하면서도 팔고 ,,,, 그럽니다... 요새는 잘 안보이는거 같습니다.. 옛날엔..갈치,고등어, 빨간고기.. 쉽게 접하는 물괴기 였습니다..지금은..갈치 좋은거 한마리 1-2만원 은 줘야 되는ㄱ ㅓ같습니다... 특대좋은거는 몇만원에서 돈십만원 하는거 같아요...ㅎㅎ 약식 , 광어 ,우럭이 싼거 같습니다..
빨간고기요? 피난갔다가 눌러앉은 이들이 빨간반찬 빨간반찬 해서리 이 뭔가..했는데 그 생선을 빨간고기로 부르는 군요. 밥상에서 이것저것 따지면 혼나니까 닥치고 먹어서 그걸 물어볼 생각도 안했네여. 대가리 쪽쪽 빨면 단물이 줄줄 나오는데. 한국 생선이 고소하니 맛나죠. 노는 물이 달라서 그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