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24. 3. 19. 화요일.
<아름다운 5060카페> '자유게시판방'에는 '마스리' 회원의 글이 올랐다.
'돈의 철학'
' .... 경주 최부잣집이 오래간 것도 ‘흉년에 논[田畓] 사지 말라’, ‘주변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 천년의 왕도(王都)가 경주였고, 그 천년 왕도의 흔적이 없어지지 않고 최 부잣집에 남았다고 본다.'
내가 댓글 달았다.
내 댓글 :
위 문구....
경주 12대 최부자댁.
경주에 있는 최부자댁 건물...그 거 지금은 누구의 소유일까요?
마지막 12자 부자는 최준.
일제강점기에 독립자금을 몰래 밀송했고.....
영남대학교 전신인 대학 건립하다가 붕괴사고로 인명사고 발생.
수급하려고 돈을 삼성 이병한테서 빌렸고, 최부자댁 건물은 보증으로 ...
삼성 이병철회장은 삼분 밀수사건으로 수사에 오로자 사건 무마용으로
경주 최부자 건물을 박정희한테 헌납하고는 풀려났지요.
지금은 박정희네 소유.
12대 최부자 최준선생을 제가 대학시절에 뵈었지요.
1970년에 작고하셨고.
'경주 최부자'네는 망해서 지금은 아무것도 없지요.
경주 최부자댁 이야기는 이제는 전설이 되었을 뿐 .
경주 교동에 있는 최부자댁 내력을 조금 검색한다.
1960년대 말 나는 아버지를 따라서 경주 최부자댁을 방문했으며,
경주최씨 중앙종친회에 참가하는 아버지를 따라서 서울에 방문했다.
멀리서 최준 선생을 보았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경주최부자 12대인 최준은 1970년에 돌아가셨다.
최부자댁에 대한 자료를 조금만 수집한다.
최부자댁은 경주최씨 시조인 최치원의 17세손이며, 조선시대 경주 지방에서 가문을 일으킨 최진립(1568~1637)으로부터 비롯했다.
최진립은 조선시대 경기 수군절도사, 전라 수군절도사, 공주 영장 등을 역임한 무신으로 임진왜란 때 참전하고, 정유재란 때에도 공을 세웠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1637년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1647년에 청백리에 올랐고, 경주 숭렬사와 경원의 충렬사에 제향 되었으며, 시호는 정무(貞武)다.
대구 청구대 붕괴 사고(大邱青丘大崩壞事故)는 1967년 6월 15일 신축 공사가 진행 중이던
청구대학 구내의 5층 건물 일부가 붕괴하면서 7명이 사망하고 20여 명이 중경상을 입은 사건이다.
경주 최부자의 모든 재산은 영남대로 넘어갔다.
경주 교동고택도, 조상들이 묻힌 선산도 최부자의 역사가 깃든 유물은 영남대 소유다.
대구대와 청구대의 통합으로 만들어진 영남대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퇴임 후 뒷자리로 봐둔 곳이라는 설이 파다했다.
통합 작업은 정부 주도로 이뤄졌다. 이병철 삼성 회장의 큰아들 이맹희의 회고록을 보면,
이후락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이 삼성에게 대구대를 넘기라고 했다는 증언이 나온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숨지자, 퍼스트레이디였던 박근혜 현 대통령 당선인은 이듬해인 1980년 29살의 나이로 영남대 이사장에 추대된다.
학내 구성원들의 반발로 박 당선인은 이내 이사장직에서 사퇴하고 이사로 남지만,
1981년 대학정관 제1조에 ‘교주 박정희 선생의 창학정신에 입각해 교육을 실시한다’는 조항이 들어가 논란을 부른다.
마지막 최부자 최준, 200억 독립자금 대고, 영남대에 전 재산 기부
최부자댁은 군사정권 시절 전 재산을 들인 영남대(전 대구대)의 운영권을 삼성 이병철에게 넘겼고,
삼성은 1966년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곤경에 빠지자, 영남대를 박정희 정권에 넘겨 버렸다.
이로써 최부자댁이 지켜온 부는 끝나버렸고, 영남대학교의 소유권은 박정희-박근혜에게로 이어졌다.
'모든 것은 아는 만큼만 보인다'라고 말하면서 이쯤에서 줄인다.
바깥으로 나가서 바람이나 쐬야겠다.
2024. 3. 19. 화요일.
이제는 글 조금만 써야겠다.
시시하니까.
내 본래의 놀이터로 되돌아가서 문학카페에 산문일기나 끄적거려야겠다.
첫댓글 제 시에도 경주 치부잣집이 등장합니다.
'하늘과 맞닿은 인도 라다크 지역 오지奧地에서 달라이라마 제자로 31년 수행 ․ 봉사를 실천하고 귀국한 히말라야 산타 청전 스님
못 배운 사람, 못 가진 사람의 어머니였던 성인聖人 고故 마더 데레사 수녀님
‘사방 1백리 안에 굶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을 지키며 살았던 경주 최부잣집 사람들
네팔 오지에 ‘희망 베이스캠프’ 차린 나마스테 코리아 봉사단*
세월호 침몰 사고 때 활동한 5만 7천 명의 자원봉사자
헤비타트에서 집짓기 봉사활동을 하는 92세의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예.
댓글 고맙습니다.
박 시인님도 경주 최부자댁 이야기를 잘 아시는군요.
이씨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몰락한 집안이지요.
관직 등에 나가지 않고는 고작 먹고 사는 데에만 관심을 가졌지요.
최씨 대부분 다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최씨는 대부분 경주최씨에서 파벌로 분리되었지요.
강릉최씨, 해주최씨 등....
지금도 최씨네 출세한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학교 다닐 때 民法(物權法)을 講義하시던 京城帝大를
나오신 최식(崔拭) 선생님이 전통(傳統)있는 慶州 崔氏家門의
後孫이라고 당시에 들었습니다 부자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재산을 어떻게 관리하고 쓰느냐가 더 중요했지요
.
잔치에서 잠깐 뵌 최부자는 꼿꼿하면서도 선비의 기풍이 흐르더군요.
우리나라 전통 부자들은 대부분 땅부자라 해방 이후 1950년
토지개혁으로 재산을 다 잃게 되었습니다 이중에 일본등에서
신식 상업적 공부를 한 호암과 같은 분들은 토지개혁 전에
학교를 세운다던가 양조업(막걸리 도가)이나
정부도정 정미소를 설립하여 일부 재산을 유지한 분들도 있었는데
경주 최부자 댁도 토지개혁의 큰 피해자라고
봄이 맞을 것 같습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아는만큼 보인다...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오만과 편견..
인터넷상에 떠도는 수많은 거짓자료..
그리고
잘못 알거나 잘못 해석함에 따른 크나큰 폐해는
차라리 모르는게 낫다는 말을 실감하게 하는 오늘입니다...
역사부터 인터넷정보
전부 믿을건 못되는군아 많이 느낀답니다
선배님 댓글 공감합니다 ^^
@지 인
댓글 고맙습니다.
예....
비밀 자료는 대체로 숨기고 감추지요.
지금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낫다'를 직접 실천하시나요?
이 세상에는 엄청난 지식 경험 등이 있겠지요.
개인이 '안다'라는 수준은 태평양에 있는 모든 모래알 가운데 한 알 정도이겠지요.
늘 사물을 뒤집어서 보는 습관을 조금이라도 가지면 좋겠지요.
왜 그럴까?
그 반대는 무엇일까?
등으로요.
댓글
고맙습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저는 최치원의 34대손 관가정 파 입니다
어린시절 친척 집이라면서 언니 가 데려 간곳이 경주 최 부자 집 이였어요
앨범에 사진이 있었는데 찿아 보니 안 보이네요 😂
댓글 고맙습니다.
'관가정' 청은 최치원의 11세손.
경주최씨 종파 가운데 으뜸되는 파이지요.
경주최씨는 신라말, 고려조에서는 그럭저럭 세를 유지했는데 이씨조선조에는 별로 없지요.
관직 숫자 순위는 전국 성씨별 가운데 74위 쯤. 이씨조선조에서는 몰락한 성씨.
경주최씨 가문의 시조인 최치원 선생의 동상과 시비가 부산 해운대의 동백섬에 있지요.
해운대의 아름다운 경관에 반한 최치원은 자신의 호를 '해운'을 따서 그 지역 지명을 해운대라고 붙였다.
최치원이 직접 새겼다는 '海雲臺'는 동백섬 절벽 한편에 남아 있다.
최치원의 동상과 시비가 동백섬 언덕에 생겼다.
@최윤환
문과 급제자를 비교하면 아래 통계....
인구 순위 1위 김해김씨는 12번째
순위 2위 밀양박씨는 7번째
순위 3위인 전주이씨는 1번째
순위 4위인 경주김씨 11번째
순위 5위인 경주이씨 순위 20번째
순위 6위인 경주최씨는 급제자 45명으로써 73 ~75번째로 크게 밀려났다.
타성은 문관 급제자 몇 백 명씩 배출하는데 경주최씨는 인구숫자 6위인데도 문과 급제는 고작 45명이다.
왜? 이렇게 저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고려조에서는 제법 위대받는 성씨였는데 조선조에 와서는 몰락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부할 줄 모르는 성격때문이었을까?
예컨대 1960년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1824 ~1964년)는 경주최씨.
2대 교주인 최시형(1827 ~1898년)은 경주최씨. 두 사람 모두 처형당했다.
1870년대 초 대원군의 횡포에 반기를 들었던 최익현도 경주최씨. 나중에 잡혀서 일본 대마도에 굶어죽었다.
경주최씨 지금도 유명하지요
댓글 고맙습니다.
별로 유명한 것 없지요.
우리나라 성씨에는 '김이박최정....'에서 인구 순위 4위
본관별 성씨에서 '경주최씨' 그 자체는 인구순위 6위. 전국에 걸쳐 경주최씨는 97만 명이 되겠지요.
인구는 많아도 크게 출세한 사람 없습니다. 특히나 정치계에서는 별로이지요.
구한말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 제1대 교주, 제2대 교주인 최시형.... 조선조 말에서 처형당했지요.
동학난 주동자, 사회혁명자로 인식되고.....
면암 최익현도 경주최씨.. 모두 고집통이지요.
옳다고 믿으면 고집피우다가는 처형당해서 죽고....
네 오늘도 한수 배웁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위 자료... 제 고교 카페에 있는 제 글에서 조금씩만 인용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