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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17일 화요일(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제1독서 : 로마 1,16-25
복 음 : 루카 11,37-41
그때에 37 예수님께서 다 말씀하시자,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그분을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시어 자리에 앉으셨다.
38 그런데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39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40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41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갑곶성지에 처음 소임을 받아 갔을 때, 큰 나무 찾기가 힘들었습니다.
몇 그루의 큰 나무가 있기는 했지만, 그 숫자가 너무 적어서 휑하다는 느낌을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고민을 많이 하고 있는데, 어느 신부님께서 작은 벚나무 15그루를 심으라면서
성지에 놓고 가셨습니다. 이 15그루 만으로 이 횅함을 없앨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래도 신부님께서 특별히 신경 써서 보내주신 것이라서 정성껏 심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 뒤, 다시 성지에 가게 되었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그때 심었던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벚나무가 너무 크게 잘 자라 있는 것입니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 미래에 큰 결실을 볼 수 있습니다.
씨앗을 심어야 나무 한 그루 이상의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역시 별것 아니라는 생각보다는 지금 당장 작은 씨앗 하나 심는다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작은 습관도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어떤 과자 광고 문구 중에 ‘손이 가요, 손이 가, ***에 손이 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딱 하나 먹고 나면, 이를 멈추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스마트폰도 그렇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메시지 확인을 위해 무의식적으로 스마트폰을 보면,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뉴스도 보고, 인기 영상도 보고, SNS 등도 확인하면서
오랜 시간을 스마트폰 만지작거리는 데 시간을 쓰게 됩니다.
작은 악습도 멀리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별것 아니어도 이것이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이라면, 미래를 위한 과감한 시작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해 놓고, 유다인의 관습대로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는 그분의 모습을
불편하게 쳐다보는 바리사이의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시지요.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 찬 모습이 아닌, 자선을 통해 더러워진 마음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주일 미사 참석 한 번 한 것으로 신자의 의무를 다한 것처럼 생각한다면,
또 교회 안에서는 헌신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가정이나 사회 안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은 모습으로 사는 것이 바로 겉과 속이 다른 모습입니다.
따라서 가장 기본에 충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자선, 바로 사랑의 실천이라고 하십니다.
이 사랑이 나의 마음 전체를 깨끗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은 주님의 뜻이기에 아주 자그마한 것이어도 가장 큰 결실을 볼 수 있습니다.
어느 교우가 제게 말씀하십니다.
성당에서 반갑게 웃으며 인사하는 모습에 더 성당에 오고 싶다고 하십니다.
성당 의자에 편안히 앉을 수 있도록 배려하시는 모습에
‘역시 신자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십니다.
자기 아이가 성당에서 시끄럽게 떠드는데도, 웃으면서 “아이가 참 밝네요.”라고 받아주시는 모습에
편안한 마음으로 성당에 올 수 있게 되었다고 하십니다.
자그마한 사랑 실천이지만, 그 결실은 어떤 전교 활동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그마한 사랑은 적극적으로, 하지만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악은 철저히 피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사랑을 말하는 입은 신조차 막을 수 없다(신용목).
천국의 곳간이 채워질 것이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사랑하면 사랑이신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 때문에 예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음의 깨끗함은 사랑을 실천함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마음의 깨끗함은 겉모양을 깨끗이 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 즉 자선을 베풀게 됨으로써 깨끗해집니다.
자선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선은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 위에 내리게 하는 힘이고,
우리 구원의 확실한 표입니다”(성 요한 비안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자선을 되도록 많이 해야 합니다.
“자선으로 씨를 뿌릴 때 거기서 거두는 열매로 천국의 곳간이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성베드로 솔로그).
올바른 지향으로 하느님을 위해서 자선을 실천함으로써 마음을 거룩하게 하시길 바랍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외적인 더러움을 씻는 것입니다.
그리고 먹거나 마시는 그릇을 깨끗이 씻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겉모양의 깨끗함보다는 내면의 정결이 더 중요합니다.
모든 불의와 부도덕한 행위에서 정화될 때 그 사람은 하느님이 보시기에 깨끗합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외적 정결함을 강조하고 중요시하지만 정작 자신의 마음은 잘 가꾸지 못했습니다.
거짓으로 선을 행하는 사람들, 안 보이는 속은 내버려 두고 겉꾸미는 사람들,
말과 행실이 다른 사람은 그릇을 닦는 일보다 마음을 닦는 일이 우선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늘의 그물은 누구도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외적인 규정을 지키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혼자 있어도 부끄러움이 없는 마음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고 주 하느님은 속마음을 들여다보시니
여러분의 마음이 하늘을 향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선을 숨겨 두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입니다”(마태6,4).
얼굴도 이쁘고 말도 잘하면 금상첨화, 둘 중의 하나가 부족하면 천만다행,
둘 다 부족하면 설상가상이랍니다. 그러나 고쳐야 할 것은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에 도금을 입히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마음을 잘 가꾸는 날 되시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의 저자 혜민 스님의 ‘완벽하 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을 읽었습니다.
오늘은 책의 내 용 중에 일부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는 뭔가를 이야기할 때, 상대로부터 옳은 이야기를 듣고 싶다기보다는
그냥 내 말을 잘 들어주길 바랄 때가 많아요.
누군가 나에게 이야기할 땐 섣불리 조언하려 하지 말고,
상대의 이야기 연료가 다 떨어질 때까지 들어주세요.
상대를 내 마음에 맞게 바꾸려 하지 않고 따뜻한 관심으로 바라보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사랑의 가장 순수한 표현입니다.
바꾸고 싶어 하면 상대의 모습은 사라지고 내 기준으로 만들어낸 상대의 문제만 보여요.
진정한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 같아요.
내 마음에 맞는 부분 이외에 내 마음에 맞지 않는 부분이 좀 있더라도
그것들을 모두 품어 줄 수 있을 때, 좋아하는 감정이 사랑이 되는 것 같습니다.
내가 잘 안다 하고 보면 더 이상 상대를 보려고 하지 않아요.
‘내가 잘 모른다.’하고 볼 때 상대를 자세히 보려고 해요.
그래서 사랑은 ‘잘 모른다.’하고 보는 상태예요.
혹시 주변 사람들을 내가 이미 잘 안다고 여기는 건 아닌지 다시 한번 살펴보세요.
‘잘 안다.’하고 보는 것은 현재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고
내 과거의 생각으로 보는 것입니다.”
가끔씩 ‘저를 잘 안다.’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사실 제 마음은 저도 잘 모르는데 그분들은 어찌 저의 마음을 잘 아는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제가 4년 만에 한국으로 휴가를 가는 것은 미국이 좋아서일 수도 있지만,
코로나 팬데믹도 있었고 신문사의 일이 바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제가 해산물을 좋아하는 것은 해산물 자체가 좋은 것도 있지만 질긴 고기를 잘 먹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머니를 닮아 치아가 튼튼하였다면 고기를 더 좋아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주어진 과제를 미리 하는 것은 부지런해서일 수도 있지만,
미리 해야만 편안하게 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남의 부탁을 쉽게 거절하지 못하고, 다른 이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지만
사실 혼자 있는 것이 편할 때가 많습니다.
새벽에 기도하고, 아침에 산보하고, 좋아하는 책 읽고, 혼자 식사하는 것도 좋습니다.
돌아보면 저도 저의 좁은 판단으로 쉽게 남을 평가하고 비난한 적이 있습니다.
저와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저와 다른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맞습니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복음서를 읽으면 예수님을 ‘잘 안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모님을 알았고,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며 사탄의 유혹을 물리친 것은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것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과 표 징으로 ‘복음’을 전한 것도 몰랐습니다.
빙산의 일각처럼 예수님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족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걱정이 되어서 찾아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나의 어머니이고, 나의 형제이며 자매입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모두 나의 어머니이고, 나의 형제이며 자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라고 하셨을 때입니다.
베드로는 펄쩍 뛰면서 ‘그런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율법과 계명에 대해서는 전문가라고 자부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잣대와 기준으로 사람들을 평가하고, 판단하였습니다.
율법과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단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형식을 문제 삼으려는 바리사이에게 율법의 정신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겉으로는 친절한 척하고, 웃으면서 뒤로는 남을 험담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지만 남을 돕는데, 인색한 사람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욕심 때문에 형제와 다투는 사람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참된 신앙생활을 이야기합니다.
“복음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믿음에서 믿음으로 계시됩니다.
이는 성경에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 다.’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오늘 내가 하는 말이 상대방에게 위로와 기쁨을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칭찬과 격려의 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따뜻한 말, 친절한 말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어떤 바리사이의 집에 초대받았을 때에 일어난 일을 전해줍니다.
그런데 당혹스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루카 11,38)
왜 그렇게 놀랐을까요?
식사 전에 손을 씻는 의식은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위생상의 관습이나 예의였을 뿐 아니라,
나아가 세상과 접촉함으로 인하여 생기는 불결을 제거하기 위한 정결례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예수님께서 율법을 어기셨기 때문에 그들은 놀랐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놀라는 바리사이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루카 11,39)
이는 진정한 ‘정결례’는 겉을 씻는 일이 아니라 속을 씻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지만,
그 속에 담긴 음식에는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루카 11,39)고 하십니다.
이는 단지 속을 씻는 일이, 겉을 씻는 일보다 낫다는 것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속에 담고 있는 것을 정당하게 취득한 것인지를 들여다보게 합니다.
곧 불의와 착취, 부정과 탐욕, 이기와 사악함을 동시에 질타하십니다.
그러니 우리의 속이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는지, 또 그것들을 어떻게 채웠는지,
왜 채웠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단지 이러한 사실을 깨우쳐 주시는 것만이 아니라,
깨끗해지는 방법도 말씀해 주십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
이처럼 더러움을 비워내는 길, 깨끗해지는 길은 형제와 이웃에게 ‘자선’을 베푸는 일임을 말씀하십니다.
착취와 사악으로 가득 채운 속을 비우는 방법은 바로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정결법이라는 율법의 본래의 정신이 ‘사랑’에 있음을 밝히십니다.
곧 ‘정결법의 정신’은 깨끗하게 씻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있습니다.
그러니 속에 있는 것을 비워낸다고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면 비워지고 깨끗해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 마음 안에 부어주신 하느님의 사랑’(2코린 4,7) 으로 말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5)
그러니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 안에 그분의 사랑이 담겨 있음을 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놀랍고 신비로운 것은 그 사랑을 베풀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를 명심해 새겨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하십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
<오늘의 말·샘 기도>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
주님!
제 속을 들여다보게 하소서!
탐욕으로 채운 것을 사랑으로 나누게 하소서!
제가 온전히 깨끗해지고, 당신 얼굴 뵙게 하소서!
제 속에 당신의 뜻을 품고, 당신의 향기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겉은 깨끗이 닦아도 속에는 착취와 사악이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께서는 바리사이들이 겉으로는 깨끗해 보일지 모르지만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하시면서 잔과 접시의 겉과 속을 닦는 비유를 말씀하신다.
겉과 속을 만드신 하느님께서는 겉과 속이 다 깨끗하기를 바라신다.
우리의 겉이 깨끗해지려면 그 안에 담긴 내용물이 순결해야 하는데,
이 내용물은 바로 자선과 자비와 하느님의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38절).
주님의 행동이 보통 사람과는 다른 특별한 것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의인이요 예언자라고 하는 자가 전통적 습관을 따르지 않은 것을 보고 놀랐다.
예수께서는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신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39절)
예수께서는 식탁에 놓인 잔과 접시를 들어 비유로 말씀하셨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육신의 더러움뿐 아니라, 마음에 감추어진 것까지 씻어내야 한다고 하신다.
이는 육체를 지으신 분이 영혼도 지으셨다는 뜻이다.
겉과 속이 다 하느님의 작품이기 때문에 씻을 때는 똑같이 씻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육신의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내는 방법을 예수께서는 알려주셨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자선을 통해 깨끗해질 수 있다.
자비가 우리를 깨끗하게 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깨끗하게 한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깨끗하게 되었다.”(요한 15,3). 또한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 주고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 준다.”(토빗 12,9) 했으며,
“네 곳간에 자선을 쌓아 두어라. 그것이 너를 온갖 재앙에서 구해 주리라.”(집회 29,12) 하셨다.
자비로운 행위는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나그네에게 잠자리를, 도망자를 숨겨주는 것만이 자선이 아니다.
병든 이와 갇힌 이를 찾아가고, 포로를 풀어 주고, 지친 사람의 짐을 져 주고,
눈먼 사람을 인도하고, 슬퍼하는 이를 위로하고, 병든 사람을 고쳐주고,
길 잃은 이에게 바른길을 일러 주고, 조언을 해주는 것도, 필요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도 자선이다.
용서하는 것도 자선이고 훈육하여 잡아주는 것도 자선이다.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의 죄를 용서하고 그가 용서받기를 기도한다고 하면 그는 자선하는 사람이다.
용서하고 기도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잘못한 자를 꾸짖고
적절한 벌과 함께 그를 바로잡아 줌으로써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자선에는 종류가 많다. 자선을 베풀면 우리 죄를 용서받는 데 도움이 된다.
언제나 자선을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
손을 잘 씻고 계십니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름 위생 관념이 철저했습니다.
손이건 발이건, 그릇이건 제구건, 틈나는 대로 씻고 또 씻었습니다.
아마도 전염병이나 피부병 앞에 취약하던 당시, 걸리면 죽음이었으니
나름 최선의 예방책으로 그렇게 씻어댄 것 같습니다.
제 어린 시절 돌아보면 씻는 것과 관련해서는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정도였습니다.
제대로 씻는 것은 일 년에 두 번 추석과 설날, 동네 목욕탕 가서 빡빡 씻는 것뿐이었고,
여름이 오면 동네 개울가에서 물장구치며 겨우 몸에 물을 대는 정도였습니다.
팬데믹 이후 전국민적인 손 씻기 열풍이 불어 저도 이제 수시로 손을 씻는 편입니다.
그런데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몸에 밴 습관처럼 뽀드득뽀드득 손을 씻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저와 같이 볼일을 보신 영감님들 칠팔 명이
단 한 명도 손을 안 씻고 우르르 나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순간 제 입에서는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처럼,
‘세상에 어떻게 저럴 수가!’ 하는 탄식이 저절로 흘러나왔습니다.
사실 손을 자주 씻는다는 것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특히 다양한 종류의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이 시대 손 씻기는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식사 전후, 외출 전후, 작업 전후 손 씻기는 이제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질타하시는 것은 오로지 손 씻기에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옆에 사람이 숨이 넘어가든 말든, 손 씻는 관습에만 혈안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틀과 형식 율법에만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우리 각자에게 자유 의지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또한 세상의 모든 억압이나 부자연스러운 제도나 관습, 대상들로부터
초월할 수 있는 역량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이 세상,
공동의 유익과 선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른바 규정이요 메뉴얼, 더 나아가서 법규요 헌법입니다.
그러나 그런 제도적이고 법적인 요소들은 다른 무엇에 앞서
인간의 유익과 선익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법적인 요소들이 강조되면서 웃기는 일이 생겨났습니다.
보다, 인간다운 삶, 사람을 살리기 위해 제정된 법이나 규정들이 점점 강화되고 경직되면서,
나중에는 마치 부메랑처럼 인간을 힘들게 하고 고통 속으로 몰아가는 대상이 되고 만 것입니다.
유다인들의 율법 규정들, 특히 안식일 규정, 정결례 규정이 더욱 그러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발밑을 내려다봅니다.
혹시라도 내 안에, 우리 가정 안에, 우리 본당 공동체 안에, 직장 공동체 안에서
그런 위험 요소들은 없는지 살펴봐야겠습니다.
사람을 살리고, 구성원 서로 간의 우애를 돈독하게 해주기 위해 제정된 룰이
오히려 관계를 파괴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안겨주는 애물단지로 전락한 것은 아닌지
곰곰이 살펴봐야겠습니다.
위선으로는 지속할 수 없는 행위가 하나 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손을 씻지 않고 식사하시는 것을 보고 안 좋은 생각을 품습니다.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율법이라기보다는 관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위선을 꼬집습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 나쁜 욕망으로부터 깨끗해지는 방법도 제시하십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세 범주로 나뉩니다. 모든 행위는 ‘욕구’에 의해 발동됩니다.
인간의 기본 욕구는 ‘생존 욕구’입니다. 곧 더 가지고 더 먹고 더 세지려는 욕망입니다.
아기들의 모든 행동은 이 생존 욕구에 기인합니다.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는 행위가 첫 번째 범주입니다.
두 번째 범주는 그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오는 방어기제입니다.
오늘 바리사이들이 하는 행동들입니다. 곧 손과 접시를 깨끗이 씻는 행위입니다.
이것으로써 그들은 자기들이 깨끗함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이는 속이 더러움을 감추기 위한 위선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범주입니다.
두 번째 범주의 행동은 첫 번째보다 더 안 좋습니다.
본인들이 하는 행동을 보고 남을 속이는 것은 물론이요, 본인들도 속기 때문입니다.
본인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본인들은 남들보다 깨끗하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스스로 나아질 기회를 잃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의 행동은 첫 번째에 속했기 때문에 회개할 수 있었으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그 위선적 행동으로 깨끗해질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에 구원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세 번째 범주는 생존 욕구에서 벗어나기 위한 행동입니다.
이러한 목적이 그 사람을 깨끗하게 만듭니다.
교회에서는 그 방법으로 기도와 단식과 자선을 하라고 권합니다.
생존 욕구에서 벗어나려는 목적으로 하는 기도와 단식과 자선은 모두 그 사람을 깨끗하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어떻게 인간이 깨끗해질 수 있는지를 몸소 모범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기도와 단식을 제외하고 ‘자선’만을 강조하실까요?
사실 기도와 단식은 위선적인 두 번째 범주에 속하는 행위로 사용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기도는 오래 하고 단식하며 힘든 얼굴을 하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자선만을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재물에 대한 욕망은 욕망의 가장 근저에 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1티모 6,10)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도 십일조를 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자선을 베풀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 것에서 재산에 줄어드는 모습을 보고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 중 어떤 누구도 매일 기도할 수 있고 매일 단식할 수 있는 사람은 있어도
매일 자선을 베풀어 성인들처럼 가난해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만큼 재물이 욕망의 근저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선악과를 바치는 것, 곧 십일조를 바치는 것,
제때 소출의 일부를 주님께 드리는 것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영화 ‘황시의 아이들’(The Children of Huang Shi)은
1930년대 중국의 진실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1937년 중국에서 일어난 일본군의 침략 중에 한 일어난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합니다.
중심인물은 영국 기자 조지 호그는 특종을 잡을 욕심에
일본군의 무자비한 난징 학살 현장을 취재하던 종군기자입니다.
그는 일본군에 붙잡혀 사형당할 위기에 처합니다.
잭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지만, 부상으로 돌아갈 처지가 못 된 그는 안전한 ‘황시’로 몸을 피합니다.
황시에는 고아원이 하나 있었는데 60명의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조지는 처음에는 고아들을 위해 도와주려는 마음에서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아이들과 가족 같은 관계를 맺게 됩니다.
또한, 그는 아이들을 안전한 장소로 이동시키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며
700마일을 걸어가는 여정을 시작합니다.
이 여정 중에 그는 아이들을 위험에서 보호하려는 노력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교육도 제공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를 통해 조지는 단순히 기자에서 아이들의 보호자, 교사, 그리고 친구로 변모하게 됩니다.
이 여정을 통해 조지는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며,
고아들과 함께하는 시간 동안 진정한 사랑, 희망, 헌신에 대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이 영화는 그런 의미에서 사람의 내면의 변화와 성장,
그리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인간의 강인함에 대한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욕심은 사랑할 때 사라집니다.
자선이 그만큼 강력한 힘을 얻는 이유는 바로 ‘사랑’에 가장 근접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기도와 단식도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세 악한 욕망의 반대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자선은 사랑에 근접합니다. 그래서 저절로 악한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쉰들러는 돈만 아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유태인들을 돕기 위해 자기 재산을 쓰다가 결국 재산을 다 잃고 맙니다.
그런데도 마지막에 자기 차를 팔지 못한 것, 금 배치를 팔지 못한 것을 후회합니다.
그것을 팔았더라면 몇 명은 더 구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욕망은 재물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재물로 얻은 기쁨이 재물에 대한 욕심을 사라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선은 그만큼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데 강력한 무기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