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쉽지 않은 세상살이(신수작자경愼酬酌自警)」/ 미수 허목(眉叟 許穆, 1595~1682)
人情有萬變 인정은 시도 때도 없이 변하고
世故日多端 세상일은 하루하루 복잡해지네
交契亦胡越 친한 사이였다가도 아주 멀어지곤 하니
難爲一樣看 한결같이 보기가 영 쉽지 않네
위 시의 제목인 「신수작자경(愼酬酌自警)」은 사람과 응대하면서 삼가야 함을 스스로 다짐하기 위해 지었다는 듯을 담고 있다.
미수 허목(眉叟 許穆)은 임하(林下:숲속이라는 뜻으로, 그윽하고 고요한 곳, 즉 벼슬을 그만두고 은퇴한 곳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에서 독서하고 도를 논하는 산림(山林)으로 지내다가, 명망이 높은 인사를 국왕이 직접 초빙하는 제도가 마련됨에 따라 56세 되던 해에 능참봉(陵參奉:대리 임시관직)에 제수되었고, 81세가 되던 해에는 이조 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그 사이 남인이었던 미수는 당쟁 속에서 여러 차례의 정치적 기복을 겪었다.
산림(山林)에 묻혀서 지냈다면야 위와 같이 번민할 일도 적었으련만, 홍진(紅塵:번거롭고 어지러운 속된 세상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은 그의 마음에 많은 갈등을 일으켰을 것이다. 시시때때로 끓었다 식었다 하는 염량세태(炎凉世態:권세가 있을 때는 아첨하여 좇고, 권세가 없어지면 푸대접하는 세상의 인심) 속에서 늘 변함없는 것을 찾는다는 것은 애초 지나친 욕심이었을지도 모른다.
세상살이 속에 번민(煩悶)하는 것은 고금(古今)을 떠나 피하기 어려운 일이다. 내 마음을 나도 잘 모르겠으니, 남들이 내 마음 같지 않다고 한탄하는 것은 아직 내 소관이 아닌 것 같고, 일하느라 정신없이 바쁘다고 하지만 매 순간 집중했는가를 생각하면 할 말이 없다. 이런가 하면 저렇고 저런가 하면 이런 일상 속에서 어리숙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번민하느라 일을 또 보탠다.
조선 성종 때 불우헌(不憂軒) 정극인(丁克仁, 1401~1481)은 「상춘곡(賞春曲)」을 지어 속세를 떠나 자연에 묻혀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생활을 노래하였다. 이 곡 첫머리에,
“홍진(紅塵)에 묻힌 분네 이내 생애 어떠한고? 옛사람 풍류를 미칠까 못 미칠까?”
라고 한 내용이 있다. 춘흥(春興:봄철에 절로 일어나는 흥과 운치)에 젖어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모습은 보는 사람의 정신까지 개운케 한다. 그렇다 해도 홍진은 이래저래 떨치기 쉽지 않은 숙제이다. 홍진에 묻혀 살면서도 이치에 따라 경우에 맞게 산다면야 ‘지락(至樂)’을 누리는 것을 넘어 ‘지도(至道)’를 행하는 것이 될 터이니, 더없이 훌륭한 삶이라 할 것이다. 그 정도 되면,
“산림(山林)에 묻힌 분네 이내 생애 어떠한고? 옛사람 도리에 미칠까 못 미칠까?”
라고 당당하게 노래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산림에 묻혀 ‘지락’을 누리기도 쉽지 않은 마당에 홍진에 묻혀 이치에 따라 경우에 맞게 살기란 어렵고 또 어려운 일이다.
✵ 詩 상춘곡(賞春曲)/ 정극인(丁克仁)
홍진(紅塵)에 뭇친 분네 이내 생애(生涯) 엇더한고.
(속세에 묻혀 사는 사람들아, 이 나의 살아가는 모습이 어떠한가?)
녯 사람 풍류(風流)를 미칠가 못 미칠까.
(옛 사람의 풍류(멋)를 따르겠는가, 못 따를까)
천지간(天地間) 남자(男子) 몸이 날 만한 이 하건마는,
(세상의 남자로 태어난 몸으로 나만한 사람이 많지마는)
산림(山林)에 뭇쳐 이셔 지락(至樂)을 마랄 것가.
(산림에 묻혀 있는 지극한 즐거움을 모른단 말인가)
수간모옥(數間茅屋)을 벽계수(碧溪水) 앏픠 두고
(초가삼간을 맑은 시냇가 앞에 지어 놓고)
송죽(松竹) 울울리(鬱鬱裏)예 풍월주인(風月主人)되여셔라.
(소나무와 대나무가 울창한 숲 속에서 자연을 즐기는 주인이 되어 있도다.)
엊그제 겨을 지나 새 봄이 도라오니
(엊그제 겨울 지나 새봄이 돌아오니)
도화행화(桃花杏花)는 석양리(夕陽裏)예 퓌여 잇고,
(복숭아꽃 살구꽃은 석양 속에 피어 있고)
녹양방초(綠楊芳草)는 세우중(細雨中)에 프르도다.
(푸른 버드나무와 향그런 풀은 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서 푸르도다.)
칼로 말아낸가, 붓으로 그려 낸가,
(이 풍경을 조물주가) 칼로 재단해 내었는가? 붓으로 그려내었는가?)
조화신공(造化神功)이 물물(物物)마다 헌사롭다.
(조물주의 신통한 재주가 사물마다 야단스럽구나.)
수풀에 우는 새는 춘기(春氣)를 못내 계워 소리마다 교태(嬌態)로다.
(숲 속에 우는 새는 봄기운을 끝내 이기지 못해 소리마다 교태를 부리는 모습이로다.)
물아일체(物我一體)어니, 흥(興)이에 다를소냐.
(물아일체이거늘, (새와 나의)흥이야 다르겠는가)
시비(柴扉)예 거러 보고, 정자(亭子)애 안자 보니,
(사립문 주변을 걸어보기도 하고, 정자에 앉아 보기도 하니)
소요음영(逍遙吟詠)하야, 산일(山日)이 적적(寂寂)한데,
(이리저리 거닐며 나직이 시를 읊조려 보며, 산 속의 하루하루가 적적한데)
한중진미(閑中眞味)를 알 니 업시 호재로다.
(한가로움 속의 참된 즐거움을 아는 이 없이 나 혼자로구나.)
이바 니웃드라, 산수(山水) 구경 가쟈스라.
(여보게 이웃 사람들아, 산수 구경이나 가자꾸나.)
답청(踏靑)으란 오늘 하고, 욕기(浴沂)란 내일하새.
(답청은 오늘하고, 냇물에 가서 목욕하는 일은 내일 하세.)
아침에 채산(採山)하고, 나조해 조수(釣水) 하새.
( 아침에는 산에서 나물을 캐고, 저녁 때에는 낚시질하세. )
갓 괴여 닉은 술을 갈건(葛巾)으로 밧타 노코,
(이제 막 발효하여 익은 술을 갈포로 만든 두건으로 걸러 놓고)
곳나모 가지 것거 수 노코 먹으리라.
(꽃나무 가지 꺾어서 잔 수를 세며 먹으리라.)
화풍(和風)이 건듯 부러 녹수(綠水)를 건너오니,
(화창한 봄바람이 문득 불어 푸른 물결을 건너오니)
청향(淸香)은 잔에 지고, 낙홍(落紅)은 옷새 진다.
(맑은 향기는 술잔에 가득히 담기고, 붉은 꽃잎은 옷에 떨어진다.)
준중(樽中)이 뷔엿거든 날다려 알외여라.
(술동이가 비었거든 나에게 알리어라.)
소동(小童) 아해다려 주가(酒家)에 술을 믈어,
(아이를 시켜 술집에 술이 있는지를 물어서)
얼운은 막대 집고, 아해는 술을 메고
(술을 사다가) 어른은 지팡이를 짚고 아이는 술동이를 메고)
미음완보(微吟緩步)하여 시냇가의 호자 안자,
(나직이 읊조리며 천천히 걸어서 시냇가에 혼자 앉아)
명사(明沙) 조한 믈에 잔 시어 부어 들고, 청류(淸流)를 굽어 보니,
(맑은 모래 위로 흐르는 깨끗한 물에 잔을 씻어 부어 들고, 맑은 시냇물을 굽어보니)
떠오나니 도화(桃花)ㅣ로다.
(떠내려 오는 것이 복숭아꽃이로구나.)
무릉(武陵)이 갓갑도다, 져 매이 긘 거인고.
(무릉도원이 가깝구나, 저 들이 무릉도원인가?)
송간(松間) 세로(細路)에 두견화를 부치 들고,
(소나무 숲 사이로 난 오솔길에서 진달래꽃을 붙들고)
봉두(峰頭)에 급피 올나 구름 소긔 안자 보니,
(산봉우리 위에 급히 올라 구름 속에 앉아보니)
천촌만락(千村萬落)이 곳곳이 버려 잇네.
(수많은 촌락이 여기저기 널려 있네.)
연하일휘(煙霞日輝)는 금수(錦繡)를 재폇는 듯,
(안개와 노을과 빛나는 햇살은 수놓은 비단을 펼쳐 놓은 듯하구나)
엊그제 검은 들이 봄빗도 유여(有餘)할샤.
(엊그제까지 거뭇거뭇하던 들판에 봄빛이 넘쳐 흐르는구나.)
공명(功名)도 날 끠우고, 부귀(富貴)도 날 끠우니,
(공리와 명예도 나를 꺼리고, 부귀도 나를 꺼리니)
청풍명월(淸風明月) 외(外)예 엇던 벗이 잇사올고.
(맑은 바람과 밝은 달 외에 그 어떤 벗이 있겠는가)
단표누항(簞瓢陋巷)에 흣튼 혜음 아니하네.
(누추한 곳에서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헛된 생각을 아니 하네.)
아모타, 백년행락(百年行樂)이 이만한들 엇지하리.
(아무튼 한평생 즐겁게 지내는 일이 이만하면 족하지 않겠는가?)
- <불우헌집(不憂軒集)> -
박동인, '자연의 소리', 종이, 모자이크 아크릴,
▷ 정극인의 생애
정극인(丁克仁, 1401-1481, 불우헌)은 본관이 영광(靈光)이며, 자(字)는 가택(可宅), 호(號)는 불우헌(不憂軒)이다. 태종 1년 (1401) 8월 6일에 경기도 광주군 두모포리(京畿道 廣州郡 豆毛浦里: 지금의 서울시 성동구 옥수동)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학문을 하여 세종 11년(1429)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정극인은 평소의 소신이 척불(斥佛)이었는데 당시의 군왕(君王)이 흥천사(興天寺)에 사리전(舍利殿)을 창건하려 하자 조선조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들어 태학생(太學生)들의 권당(捲堂: 동맹 휴학)을 앞장서서 주장한 탓으로 왕이 크게 노하여 정극인을 참형(斬刑)에 처하라 하는 것을 간신히 사형을 면하고 북방으로 귀양살이를 갔었다.
귀양에서 돌아온 그는 처가가 있는 태인에 내려와 초가 삼간을 짓고 그 집을 불우헌(不憂軒)이라 하였다. 그 뒤 문종의 부름을 받아 관직에 나갔고 주위 친구들의 권유로 53세인 1453 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정언 벼슬에까지 이르렀으나 세조의 왕위 찬탈을 보고 1470년에 70세의 나이로 벼슬에서 물러나 태인에 돌아온 1475년에 동중향음주(洞中鄕飮酒)라는 친목계를 만들어 고현동 향약(古縣洞鄕約)의 시초를 만들었다.
또한 불우헌가(不憂軒歌), 불우헌곡(不憂軒曲)과 같은 왕의 은혜에 보답하는 노래를 읊었고 또한 상춘곡을지어 후세에 남기기도 하였다. 그 뒤 1481년 8월 6일에 태인에서 81세에 작고하고 묘는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은석동에 있다.
❁ 들풀의 Macro photograph
- 억새, 구절초, 가을빛, 산책길의 벤치, 호숫가의 산책로, 수련지의 가을, 수크령, 자작나무의 성장통, 감국, 대나무, 모과나무, 몬스테라, 미국부용화(히비스커스), 백송의 표피, 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탑과 탑비(국보 제102호), 호접란, 반가사유상 미니어처...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글: 하승현(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이보세상 불로그, 《원색한국식물도감(이영노,교학사)》, 《한국의 자원식물(김태정, 서울대학교출판부)》, 《Daum, Naver 지식백과》/ 사진: 이영일∙고앵자 생명과학 사진작가∙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
첫댓글 고봉산 정현욱 님
미수 허목이 우의정의 높은 벼슬까지 하며 공직에 몸담았으나 쉽지않은 세상살이를 겪으며 풍자시를 쓰는 등 태생적으로 정서가 넘치는 문인에 가까운 분이였나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