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오후 4시에 예리항에 내려 임시로 쓰고 있는 사무실을 향해 터벅터벅
걷고 있는데 왠 기차 화통 삶아먹은 소리로 뒤에서 누군가가 악다구니를 써댄다.
안 봐도 뉜지 훤히 알겠다.
곰팽이 상호일게다.
이번에도 나의 예감은 당골래 뺨 때리게 얻어 맞는다, 아니 들어 맞는다.
으레 다른 놈들이 그런 것처럼, 얘기의 인트로 부분은 먼저 욕으로 시작된다.
"씨벌넘! 흑산도 본토에 공급하는 가스를 독점공금하게 돼 요즘 돈을 불초시게
걷어들이는 것멩키로 긁어 모은다메"?라고 내 말한다.
저때 동백이가 흑산도 다녀와서 출첵에다 올렸던 내용이 생각 난 터였다.
상호 왈 "어떤 씨벌넘이 그런 중상모략을 읊어대디"? 라고 볼멘 소리를 해댄다.
"아니! 넘은 아니고 실은 그 반대다. 그런데 젊잖은 체면에 <녀>에다가 <ㄴ>이
첨가된 구 누군가라는 말은 내 차마 못하겠다". 라고 말하니 이 넘도 더 이상
묻질 않는다.
역시 나이란 똥폼으로 먹진 않은 모양이다.
이리 젊잖게 이야기를 가름하니 말이다.
이렇게 수인사를 마치구서 여장을 풀고 고향의 넉넉한 품에 몸을 맡기니 눈은
천근만근 감겨오고 명일부터 시작될 일정에 돌입한다.
첫날의 공략지는 읍동이다.
가가호호 방문하여 지지를 읍소하며 다니는데 옆에 걷고 있는 형의 선거운동원
사리 요셉이가 다음 들를 집이 상호 집이라 한다.
현관문을 열어 젖히니 여자 아이들 서넛이 놀고 있다.
"네가 상호 딸이냐"? 물으니 두 아이가 그렇단다.
이번엔 내 이리 묻는다.
"얘들아! 사심을 갖지 말고 객관적으로 봤을 때 네 아빠랑 이 아저씨랑 누구가
잘 생겼니"?
"당연 우리 아빠가 일빳다로 잘 생겼죠".
"우리 아빤 남자답게 덮수룩한 구렛나루에 시원한 이마에 거기다가 우리처럼
예쁜 딸들을 생산해 내셨잖아요"? 그런다.
그런가보다.
눈에 콩깍지가 끼면 -이는 적절한 표현은 아닌 듯 싶지만 암튼- 다른 건 뵈는 게
없는 모양이다.
에이 이참에 나두 열과 성을 다해 15일만에 애나 하나 만들어버려?
다음 집은 박자 갑자 철자의 따님 되시는 해녀네 집이다.
형하곤 전부터 아주 잘 아는 사이다.
그러나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랬다고 한 표라도 확실히 해두려는 일념하에
이 똘레 이리 말한다.
"저는이라 경희하곤 중학교 친구인대다 평소에도 안부를 묻는 둥 굥장히 친한
사이여라".
"혹시 경희가 전화해 도순이 찍어야된다 안 합디여"?
이번엔 아버님 이리 말씀하신다.
"응! 그렇고 보니 서울 막내 가게에서 한 번 본 것도 같네".
아싸! 확실한 한 표 획득이다.
지금은 농촌. 어촌 공히 바쁜 한 철인 까닭에 갯밭에 나가계신겐지 집이 비어있어
친구 부모님들께 일일이 인사 드리지 못함이 못내 아쉽다.
영석이. 천일에게는 이 똘레가 왔다 감을 하늘로 땅으로 알려주고 6월 세째주엔
우리 모임이 인천쪽에서 있을 예정이니 꼭 한 번 들러주십사 당부하는 말을
뇌까리다보니 어느덧 읍동 일정은 파한다.
다음 방문지는 진리
읍동에서 차를 타고 해수욕장을 거쳐 당산을 지나 창고를 지나 마을어귀 가게 앞
당도하니 채송화 오빠(기산 형님)가 나와 계신다.
기산 형께서 먼저 인도한 곳은 대청골이다.
'대청골에선 누가 살았더라'? 아무리 기억을 쏟아내 보아도 인철(윤)이 밖엔
생각이 나질 않는다.
대청골 친구들! 섭섭함에 앞서 나의 기억세포가 감소해가고 있슴을 더 안타깝게
생각해주소서.
그럼 안되겠니?
다음 들를 곳은 2학년 땐가 인철(이번엔 박, 그것도 진말 넘 말고 사촌 넘)이와
자취한 바 있던 상동이다.
먼저 건강이 몹시 좋지 않으신 최정일 형님을 찾아뵙는 것으로 시작한다.
형님의 피골이 상접한 모습을 뵈니 건강하다는 자체만으로도 그 얼마나 엄청난
축복일진대 불만일색으로 삶을 살아왔던 나의 삶의 행태들이 환기되어 일순
얼굴이 화끈해 온다.
문안을 마치구 길을 다서는데 옆집이 무지 낯익게 다가온다.
종석이네 집이다.
선거운동 다니면서 한가지 깨닫는 점이 있다.
이것은 비단 표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끝나지 않고 알렉스 헤일리 <뿌리>에서의
쿤타 킨테의 예에서 보여주듯 나의 일가를 추적해 나가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 종석이 어머님계선 나의 할머니뻘 되셨다.
헌대 이 말 괜히 했나 싶다.
담에 종석이 만나면 그 뻐기는 꼴 어찌 봐주냐?
상동에서 내려와 들렀던 곳은 노나메기의 집, 어머님께선 마당 입구에서 뭔가를
고르고 계셨다.
노나와 친구임을 밝히고 인사드렸더니 반가워해 주신다.
접때 아버님께서 건강이 좋지 않아 뭍에 나오셨다가 욱이가 목포까지 모셔
드렸다는 얘길 들었지만 지금 건강은 어떠시냐 물으니 그만그만 하신단다.
요즘엔 욱이가 일땜에 서울에 장기간 체류하는 것 같더라는 말씀을 드리니 낯에
수심이 어리신다.
어쩌다가 그 같은 가시밭길을 걷게 되었는지 하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시기로
아마 언젠가는 욱이의 수고가 빛을 발하는 날이 올 것이라 위로를 드리고
밑으로 내려와 우향하는데 역시도 낯이 무지 익은 두 분이 보인다.
용택이 부모님이다.
어머님껜 "고모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고 인사 올리니
"넌 도순이 막내동생 아니냐"?
"니가 용택이 친구되지"? 반갑게 맞아 주신다.
그동안 세월의 부침과 더불어 삶의과정에서의 부침 탓인지 두 분 모습이 집 어귀
아름다리 소나무. 벚나무 두 그루와 아주 대조를 보이신다.
마침 선창가에 나서시는겐지 트럭에 올라 타시는데 차의 뽄새가 예사롭지 않다.
양쪽 후렌다가 푹 찌그러져 있었다.
"아니 고숙! 요놈의 차는 왜 이 모양이다요"? 라고 물으니
어머님 이리 말씀하신다.
"아이구! 말마라".
"무면허에다가 차를 몇 번이가 박은 줄 아냐"?
"그나마 사람 안 박은게 천만다행이지".
운전하구 가시는데 곁에 계셨던 기산 형님께서 이리 말씀하신다.
출발지에서 도착지까지 쭈욱 1단으로만 달리신다고.......
담 코스는 흑산 초등학교 방면이다.
'가만 있자'.
'여긴 누가살았더라'?
재은이가 학교 아랫쪽 맞은 편에 살았던 것이 기억이 난다.
때마침 기산 형님과 우리 형이 곁에 없어 지나가시는 어느 어르신께 "어르신!
혹시 이 근처에서 선씨 성을 가진 분이 안 사요"? 라고 물으니
"이 양반이 어디서 선 밥묵고 와서 무신 선 소리를 이리 내지른대"?
"그 집안이 흑산을 뜬 게 어젠대? 라고 말씀 하신다.
그래서 살았던 집만 확인하고 초등학교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지지를 호소하고
뒷문으로 나오는데, 과거 반공교육의 상징 -'난 콩사탕이 싫어요' 라 외치다가
장렬하게 생을 마쳤다는 이 승복 동상- 오롯하게 서 있다.
뭐든 가볍게 보지 않는 이 똘레 가만히 여기저기 살피다보니 이리 적혀 있다.
기증자 조합장 박찬대!
이 분이 누구냐?
바로 순정이 아버님이 아니던가?
그래 바로 핸폰으로 전활 때려 지금 흑산에 선거운동차 와 있는데 흑산초교에
와 있다가 재밌는 사실을 발견했노라고 그래서 전화때렸노라고 말하니
자기가 전학 온 기념으로 기증한 것이란다.
그리구 열심히 운동해서 좋은 결과 가져오기 바란다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첫댓글 여러분! 정말 미안합니다. 간략하게 쓰려했는데 이번에도 그리 안되네요. 그 밖에 마을들은 담 기회에 올려볼랍니다. 헌대 호응도가 별로 인 것 같습니다.ㅋㅋㅋ
ㅎㅎ똘래야~재밌다.근데 우리 집엔 왜 안 들렸냐?하기사 그 땐 엄마 아부지 우리 집에 와 계셔서 헛탕 칠께 뻔했지만...
ㅎㅎㅎ.... 난 콩사탕이 싫어요.....
똘레야 , 다음을 준비하는 믿음의 촛불을 더욱 밝히기를 바란다. 우선 시커멓게 탄 마음의 건강을 추스려야 한다. 삶은 아픔과의 끊임없는 투쟁임을 잊지 말아라!
한상아 우리집 흑산뜬지 20년이 다된다. 나도흑산간지가 10년이 넘었네...아무튼 이글읽으니 흑산에 있는듯 좋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