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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이야기 2(문리대 선생님들)
이 글을 쓰고 한 달이 넘게 지나 이제야 올립니다. 한국 선생님 이야기라 관련된 분들이 아직도 계실게고 또 이 글을 읽고 마음 상하시지 않을까 우려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저한 겁니다.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지적해 주십시오.
영국의 선생님 이야기를 쓰고 나니 자연히 한국에서 나에게 가르침을 주신 여러 선생님들이 떠오릅니다. 손주와 관계하여 영국 선생님 이야기가 한국에서 선생님 이야기로 이어진 것입니다. ‘막간’도 ‘후기’도 아니지만 ‘후기’라는 어중간한 제목을 이어 붙입니다.
나는 졸업 후 명절 때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는 선생님이 거의 없습니다. 재학 중에는 몇 번 갔습니다. 명절을 맞아 부모, 친지들 생각이 배로 난다는 왕유의 매봉가절배사친(每逢佳節倍思親) 마음으로 새해나 추석에 선생님 댁을 찾아 인사드리는 주변 친구들을 보면 부러웠습니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고향을 떠나, 중, 고등학교를 마산과 부산에서 3년씩 지냈으니 그 뒤 찾아 뵐 선생님들이 없었지요. 대학 때 기억나는 선생님으로는 영문학과의 박충집, 송욱, 고석구 선생님과 부전공을 한 사학과의 민석홍, 양병우 선생님 정도입니다.
사학과의 두 분 선생님은 3학년 때 역사를 부전공하면서 인연을 갖게 되었습니다. 특히 양병우 선생님은 역사학 서술방법론(historiography)라는 주제로 강의를 많이 하셨지요. 선생님의 영향으로 나는 독일 역사학자 마이네케의 <독일의 비극>과 (역사주의의 대두)를 읽었습니다. 600 페이지 정도 되는 <역사주의>는 절반 정도 읽고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다. 아르바이트해서 산 책이죠. 영국에 유학하기 전 찾아뵈었는데 당시 고대에 계시던 이인호 선생님을 만나 뵙고 가라면서 선생님 명함 뒤에 저를 소개하는 글을 써 주셨습니다. 신문사 일로 시간을 낼 수 없어 이인호 선생님을 찾아뵙지 못했지만 이 명함을 유학 후 귀국한 뒤에도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습니다. 10여 년 전 글방 모임에서 이인호 선생님을 처음 뵈었지요. 소개를 받은 지 40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1990년대 관악 캠퍼스 정문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큰 길 맞은편에서 오시는 분이 민석홍 선생님 같았는데 눈이 워낙 나쁜데다 눈썰미도 둔하여 긴가 민가 하는 사이에 지나쳐 버렸습니다. 길을 뛰어 건너 가까이 가서 보았더라면 하는 후회가 남습니다.
박충집 선생님은 우리가 학교에 다닐 때는 정년퇴임하시고 낭만주의 시를 강의하셨습니다. 워즈워스의 ‘Michael’ 등 장시가 기억이 남군요. 선배들과 함께 설 때 세배하러 갔습니다. 동숭동 문리대 뒤에 사셨습니다. 따님 두 분이 영문과에 다니셨구 둘째는 우리가 입학했을 때 조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를 보시드니 ‘구군, 한학을 공부했는가?’하고 물으시더군요.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나는 예습은 충실히 하지만 시험을 앞두고 복습은 별로 하지 않는 편입니다. 선생님 강의 중 물으시면 번역은 곧 잘 했지요. 그런데 시험문제를 받고 보니 아리송해서 뭘 써야할지 모르겠더군요. 그래서 고경명(高敬命, 霽峰 1533-1592) 한시 보고운증우인 이도석별지의 (步古韻贈友人 以道惜別之意) - ‘옛 사람의 운을 본받아 친구에게 주면서 석별의 뜻을 표하다’를 쓰고 ‘영시와 이 시의 이미지가 비슷하다’고 적고 나와 버렸습니다. 고경명의 시는 중학교 때 임진왜란에 관한 소설을 읽으면서 외운 것 같네요. 고등학교를 부산으로 가면서 어머니 제자인 마산고 국어선생님과 이 시 변역을 두고 편지를 주고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한번 보시죠.
立馬沙頭別意遲 입마사두별의지 백사장 앞에 말 세우고 이별하니
生憎楊柳最長枝 생증양류최장지 긴 버들가지에 가려 짜증만 나네
佳人緣薄多新態 가인연박다신태 미인은 인연이 짧아 고개만 숙이고
蕩子情深問後期 탕자정심문후기 정 깊은 사내는 뒷날을 약속하네
桃李落來寒食節 도리낙래한식절 복사꽃 오이꽃 다 지고 한식절은 왔는데
鷓鴣飛去夕陽時 자고비거석양시 자고새 날아가고 해도 저무네
草芳南浦春波綠 초방남포춘파록 방초 무성한 남쪽 갯가는 봄이 가득한데
欲採蘋花有所思 욕채빈화유소사 마름꽃 따려 하니 생각이 많구나.
나는 ‘생증양류최고지’로 알고 있는데 요즘 인터넷에는 ‘최장지’였습니다. 긴 가지나 높은 가지나 앞을 가려 짜증나는 건 비슷하죠. 박충집 선생님 질문에 ‘아이쿠, 내 답안지를 읽으셨구나... 그런데 이런 말씀하시는 걸 보니 쬐끔은 내 답안지를 이해해 주시는 것 같은데?’ 하면서 은근히 좋은 학점을 기대했는데 여지없이 C이더군요.
송욱 선생님은 괴팍하여 학생들이 말이 붙이기 어려워했던 분으로 유명했지만 멍청한 나를 좋아하셨습니다. 연구실은 어지러울 정도로 책들이 흩어져 있고 커피 잔은 몇 년을 씻지 않았는지 안이 새까맣게 되어 있었지요. 선생님이 돌아가신 해에 내가 귀국했는데 선생님은 나를 잘 아는 분에게 내가 언제 한국에 오느냐고 묻더랍니다. 몇 가지 추억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삼선교 부근에 집이 있어 주말에 부근 산에 오르시는지 등산복과 배낭 차림으로 버스를 타고 학교에 오시곤 했습니다. 나는 버스에서 간혹 선생님을 만날 때가 있었습니다. 성북동에서 하숙하던 시절이었지요. 설이나 추석에 고향에 내려가지 못하고 하숙집에서 아침을 먹고 학교교정이나 연구실 등에서 어슬렁거리면 송욱 선생님은 점심 후 꼭 학교로 나오십니다. 저녁에도 나오셔서 10시쯤 집으로 가시는데, ‘사모님 참 힘드시겠다.’고 같이 있던 친구에게 이야기하곤 했지요. 당시 나는 책을 읽을 때 카드에 메모를 했는데 200 페이지 정도 책 한권에 카드가 100장이 넘었지요. 이렇게 많아서는 비효율적이죠. 그래서 카드 정리를 어떻게 하느냐고 선생님께 물어 보았습니다. 한참 계시더니 ‘스스로 방법을 찾아야 되는 거야.’ 하시더군요. 정답이었습니다. 그 뒤 나는 평생 카드정리 방식을 발전시켰지요. 요즘은 책 표지를 넘기면 나오는 백지에 주요주제와 페이지를 기록하고 모자라면 종이를 한 장 더 끼웁니다.
고석구 선생님과는 3, 4학년 때 선생님 연구실에서 조교를 한 인연이 있습니다. 제가 공부를 잘하고 뛰어 나서 조교로 ‘발탁’된 게 아니었습니다. 2학년까지는 서교동 외가집에 있었으나 3학년 1학기 중간 쯤 외교관이었던 외삼촌이 귀국하여 하숙을 찾아야 했습니다. 우리가 대학 다니는 4년 동안 이 해가 유일하게 데모 등의 이유로 조기방학을 하지 않은 봄학기였습니다. 2학기부터 하숙하자면서 주변 선배들의 추천으로 고 선생님 연구실로 들어갔지요. 당시 선생님 연구실에는 군용 침대와 슬리핑백이 있었습니다. 자고 나면 슬리핑백을 말아서 침대 밑에 두고 간단히 청소를 하면 되었지요. 밥은 학교 앞 가장 싼 한식이나 진아춘 등에서 때우고 도서관에서 지내다가 선생님이 퇴근하신 후 잠만 잤습니다. 수위 아저씨들이 순찰을 돌아 10시가 되면 불을 껐지요. 겨울에는 난로에 19공탄 보다 큰 36공탄을 피웠지요. 2학기부터 학교 부근에서 하숙했기 때문에 아침저녁으로 연탄은 잘 갈아 동부연구실 조교들이 아침에 연탄불이 꺼졌으면 우리 방으로 새 연탄을 들고 수시로 찾아 왔습니다. 바꾸어 주는 것은 좋았으나 새 연탄이 완전히 피기 전에 선생님이 오셔서 왜 방에 연탄 냄새가 심하게 나느냐고 하실 때는 변명도 못하고.....
고석구 교수님은 다정다감하고 소탈, 솔직하신 분이었습니다. 우리가 1학년 때 Fulbright 프로그람으로 LA 지역, 아마도 UCLA에서 1년간 안식년을 지내셨습니다. 서울 사대 영어교육과 황찬호 교수(서울대 어학연구소장)와 같이 갔다고 합니다. 두 분은 문법과 해석 위주인 일제시대 영어교육을 받아서 회화연습은 하지 않으셨던 분들이라 전화 받는 걸 겁내셨다고 합니다. 외부에서 전화가 오면 서로 받지 않으려고 했다더군요. 이때의 경험이 얼마나 사무쳤는지 귀국해서 우리가 3학년일 때 ‘영문학 연습’, ‘섹스피어 강독’ 등 선생님 시간에 일본인 영어교육을 위한 Clark의 <Spoken American English>라는 책을 교재로 학생들을 볶아 댔지죠. 거기 나오는 회화를 외우라는 겁니다. 선생님이 영어로 하는 질문에 답을 못하면 ‘Shame on you!’하면서 호통을 치는 바람에 여학생들은 울기도 했고, 한 남학생은 점퍼를 벗고 교탁으로 올라가 ‘선생님, 영문학 연습시간에 이게 뭡니까?’라며 달려들었다가 화가 나 교실을 나간 선생님을 연구실로 따라가 싹싹 빌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우리나라 영어교육의 현실에 절망하셨던 겁니다. 섹스피어 강의는 듣고 싶으면 대학원 강의시간에 같이 들으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당시는 교수들의 전성시대였던 것 같습니다. 이대에 부임하여 첫 학기를 맞아 ‘당연히’ 첫 시간에는 교실에 들어가지 않았지요. 일주일은 기본이고 몇 주 지나서 교수들이 교실에 얼굴을 내미는 게 문리대에서는 ‘정상’아니었던가요? 그런데 이대에서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가장 연로하신 분을 포함해서 모든 교수들이 첫 시간부터 출석부 들고 교실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뒤에 깨달았지만 이게 선교사들이 세운 이대나 연대, 서강대 등 기독교 대학의 정신이었습니다. 첫 시간 빼먹었다고 나에게 직접 뭐라고 한 선배 교수들은 없었지만 그 다음부터는 나도 학기 첫 시간부터 출근했지요.
당시 영문과에선 교재가 강의 제목과 관계없는 게 있었습니다. 고석구 선생님 보다 송욱 선생님은 더 심하셨지요. ‘영문학 배경’, ‘영문학 연습’ 등 두루뭉술한 제목을 단 강의가 기억에 남군요. 송욱 선생님 ‘영문학 배경’의 교재는 월터 리프만의 <Public Opinion> 이었습니다. 정치학과, 사회학과 학생들이 많이 들어왔지요. 그 다음 해에는 프랑스 철학자이자 문학비평가인 바슐라르(Gaston Bachelard)의 <불의 정신분석학(The Psychoanalysis of Fire)>으로 강의 하셨구요. 모든 교재가 당신이 방학 중에 읽은 책입니다. 강의 제목과 관계없이 자기가 방학 중 공부한 책들을 교재로 삼았지요. 바슐라르는 영어 번역본이 없었습니다. 학생들은 불만이 많았지만 감히 뭐라고 하지 못했으니 이게 바로 교수들의 천국 아니었을까요? 다른 과에서도 이런 식의 강의가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학과 두 선생님들은 착실히 교재를 프린트하여 나누어주셨는데, 불어를 모르거나 1학년 교양불어를 겨우 시작한 학생들에게 불어책으로 강의하는 이런 폭군(?)이 지금 대학에서 생존할 수 있을까요?
학생들은 고석구 선생님이 당시 총장실 옆 느티나무 아래서 담배를 물고 고개를 숙이고 서성거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안식년을 다녀와서 부인과 이혼했습니다. 부인이 guilty side라는 정도만 이야기 합시다. 그리고 젊은 부인과 재혼했습니다. 나는 선생님 방에서 조교를 하던 선배들과 함께 설이나 추석에 선생님 댁으로 인사하러 몇 번 갔습니다. 선생님은 미국에서 사온 전축에 푸치니의 <나비부인>을 크게 틀어두고 젊은 사모님이 차려주신 음식을 안주로 우리들에게 계속 술을 권하더군요. 우리가 가져간 1.8리터짜리 정종은 다 비우고.... 이 사모님도 그 뒤 출산 중 돌아가셨다니 선생님의 여복이 별로였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술을 엄청 마시면서 ‘자네들 돈을 벌어야하네. 밀수를 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해. 다른 건 말짱 헛것이야.’라는 말을 반복하셨지요. 전북 군산, 옥구지역 갑부집안이고 후일 총리가 된 고건씨와는 사촌간인데 당시 돈에 쪼들렸던 것 같습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
어느 날 오후 연구실에 들어갔더니 황찬호 선생님이 계시고 그 옆에 나와 같은 학년인 김xx군이 앉아 있더군요. 김xx는 당시 손꼽히던 재벌인 풍한방직 아들로 영문과 학생이자 아버지 회사 기획실장이고, 결혼하여 남편이고 아들을 둔 아버지였으며, 승마국가대표 선수였습니다. 그 외 직함들도 있었는데.... 그는 1학년 가을에 결혼했습니다. 같은 날 영문과 1학년 김연태와 불문과 2학년 노서경(한국일보 25기)도 결혼식을 올렸지요. 나는 xx의 초청으로 결혼식이 열린 조선호텔에 가서 연태-서경 결혼식에는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xx는 1학년 때부터 넥타이를 매고 ‘간혹’ 학교에 나와 교복 단벌뿐인 나 같은 촌놈과는 확연히 구분되었지요. 그런데 xx는 황찬호 선생님과 나의 옛날 침대에 함께 앉아 두 분 선생님과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게 아닙니까?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방안은 연기가 자욱하고.... 뒤에 안 일이지만 두 분 선생님은 대학입시를 앞두고 xx의 영어 과외 선생님이었다고 합니다. 이제 세분은 모두 고인이 되었네요. xx는 국문과 교수 한분과도 과외하면서 맞담배질을 했다고 합니다. 이건 내가 직접 본 것이 아닙니다. 내가 몇 달 덮고 자던 슬리핑백도 당시 미군이 사용하던 얇고 따뜻한 것으로 상당히 비쌌는데 xx가 선물한 것이라 하더군요.
다음해(1967년) 가을 어느 날 선생님이 나를 부르시더니 봉인을 하지 않을 봉투와 5천을 주시더군요. 선생님 월급을 매달 내가 받아 왔지요. 5만원 정도였습니다. 1968년 졸업 후 같은 방에서 하숙하던 경제과 출신 친구는 한국은행에 취직한 뒤 자기 말로는 어린이날, 어버이날 등 특별 보너스를 합치면 5만원 정도였다고 하니 당시 48세(1919년생)이신 서울대 교수의 월급과 비슷했던 겁니다. 은행원 전성시대였습니다. 나는 한국일보 견습 일 때 6천원(하숙비가 점심 없이 6천 5백원) 견습 6개월 후에 1만 2천원이었습니다. 우체국에 가서 5천원을 우편환으로 바꾸어 봉투에 넣어 보내라 하시더군요. 봉투에 쓰인 수신인은 이혼한 전 부인이었습니다. 호기심이 발동하더군요. 우편환을 넣고 봉하기 전에 편지를 꺼내 보았죠. 너무 놀랐습니다. ‘어떻게 지내오? 당신 건강은 어떠하오? 건강 잘 챙기시오. 나와 애들을 잘 있소.’ 이게 뭐란 말인가? 이런 사모곡을 쓰려고 이혼을 했다는 말인가? 한 때의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이혼하고 이렇게 후회한단 말인가?
나는 3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사학과 부전공 수업을 듣느라고 영문과 강의는 전공필수 외에는 듣지 않았습니다. 다행인 것은 선생님 연구실에 러셀의 <서양 철학사> (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가 있어 열심히 읽었습니다. 같은 하숙방에 있던 철학과 김효명(서울대 철학과 교수, 작고)은 독일어판 빈델반트(Wilhelm Windelband)의 <철학사>를 읽고 있어 도움도 받고 비교도 하였지요. 900 페이지가 되는 방대한 책인데 특이한 것은 일반 철학사에서는 취급하지 않는 Byron을 한 장(chapter)으로 만들고 그 외 영국철학의 한 흐름인 공리주의자(Utilitarians)들과 William James, John Dewey 등 미국 철학자들, 그리고 논리 철학을 각 장으로 따로 취급했다는 점입니다. 효명이는 철학과에서도 이 책을 읽은 학생이 없을 거라고 나를 격려해 주었습니다. 1년 걸려서 어렵게 읽었지만 모르는 부분이 많았던 것은 당연하지요. 나는 이 책을 가지고 나와 지금도 필요할 때 참고로 꺼내 봅니다. 가장 인상적인 구절은 서문 첫 머리에 나오는 말, ‘지금까지 철학사는 수없이 많았다. 나는 이 많은 철학사에 단순히 한권 더 보태려고 이 책을 쓰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내가 책을 쓸 때 항상 가슴에 새기는 좌우명이 되었습니다.
유학 후 1980년 귀국한 뒤에도 이들 선생님들을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학교가 관악으로 옮긴 뒤 갈 기회가 별로 없었고 옛 문리대가 인문, 사회, 자연대학으로 나눠지고 인문대학도 각 학과별로 건물이 따로 있어 찾기 어려웠지요. 또 관악에 가더라도 강의나 전공 세미나가 주로 사회대학에서 열렸습니다. 1년 선배 김영무 교수나 철학과 친구 김효명 교수 연구실로 갔을 때 고석구 선생님을 이미 유명을 달리하셨습니다. (2020.10.2.)
사진은 최근 한 달 사이에 찍은 동부 연구실 쪽입니다. 끝 2층이 영문과 ‘사무실’이고 아래층이 국사 ‘연구실’이었지요. 영문과 사무실은 조교가 있었지만 학부학생들이 모여 잡담하는 곳이고 국사 ‘연구실’은 대학원 중심으로 공부하던 곳이었습니다. 저녁에 전등이 가장 늦게 꺼진 곳이기도 합니다. 1층 정문으로 들어오면 서양사 연구실이 있고 이희영 교수님 연구실도 있었는데... 지금은 아르코 예술극장으로 되어 있네요.
반대편 서부 연구실은 도서관으로 가는 정문을 통해 들어가는데 철학과, 국문과 등이 기억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