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날씨를 보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뜬금없이 철 아닌 눈이 내려 창밖의 산야를 하얗게 칠해 놓았다. 어느새 비가 뿌리면서 그 순백 세상의 민낯을 여지없이 드러나게 한다. 검은 흙은 검은 흙이고, 마른 풀은 마른 풀이다.
그런가 싶더니 비는 문득 그치고 우중충한 하늘빛이 맑게 흐르는 물도 흐려 보이게 한다. 그것도 잠시다. 세상을 보고 싶어 몸살이라도 난 듯 구름 사이를 어렵게 비집고 햇살이 살포시 내려앉고 있다.
햇살이 힘겹게 뚫어놓은 구름의 문이 스르르 닫히면서 성근 눈발이 날린다. 눈발이 점차 굵어지더니 급기야는 아기 주먹만 한 크기로 내려앉는다. 한겨울에도 만나기가 쉽지 않은 눈 입자들이다.
언제 그런 눈이 내렸는가 싶다. 다시 하늘 문이 열리면서 맑은 햇살이 산과 들을 어루만진다. 이제는 저 구름도 물러나 푸른 하늘빛을 드러낼까. 아니다. 또다시 회색빛으로 변한 하늘에서 가루눈을 뿌려 댄다.
그것도 잠시 눈은 빗방울이 되어 눈의 알갱이를 밀어내고 내려앉는다. 하늘의 먹구름이 무슨 힘에선가 조금씩 밀려나더니 햇빛 몇 줄기가 빗겨 내린다. 그렇게 눈과 비와 구름과 햇살이 얽히고설킨 날이 몇 번 되풀이되는 사이에 날이 저물어간다.
저 날의 변환들을 감당해 내느라 하늘인들 얼마나 숨 가빴을까. 하늘도 밤이 되면 좀 쉬고 싶을 것이다. 환히 개게 할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날씨를 보고 있노라니 문득 내 살아온 걸음걸음이 돌아 보인다.
어느 날 무슨 필요에 따라 주민등록표 초본을 떼어 보게 되었디. 깜짝 놀랐다. 부모님 슬하로부터 분가하여 살게 된 이후로 주소지를 바꾼 횟수가 무려 스물한 번이나 되었다. 젊은 시절 식솔들을 끌고 이리저리 자주 옮겨 다닌 줄은 알았지만. 그토록 잦을 줄은 몰랐다.
대부분 발령지를 따라 봇짐을 싸 들고 옮겨 다닌 것이었지만, 옮기는 과정이며 살아가는 일들에서 희비며 고락이 교차하는 일이 빈번히 벌어지곤 했다. 수십 년 세월 뒤 끝에 선 지금은 젊어 한때 일로 가벼이 넘길 수도 있지만, 그때는 밤잠을 못 이루리만치 고뇌에 빠지기도 하고, 새로운 세상에 기대로 잠을 설치기도 했다.
아이들이 나고 키울 때까지도 셋방살이하면서 내 아이가 주인집 아이와 다투어 다치게 되어 병원까지 가야 했던 일이며, 셋집의 처지를 따라 어려움을 안고 방을 옮겨야 했던 일은 지금 돌아봐도 송연한 아픔이 되어 새겨져 온다.
그러다가 어렵게 작으나마 내 집이라고 마련했을 때의 그 감동이야말로 내 생애에 몇 번 되지 않은 큰 보람으로 안겨 오기도 했다. 그나마도 아이들이 커감에 따라 더 너른 집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 과정에서 또 봇짐을 싸야 했다.
그렇게 마련한 집이었지만, 나는 정착할 수가 없었다. 인사이동을 따라 떠돌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나 혼자 객지를 헤매기도 했고, 아이들이 제 살길을 찾아 떠난 후로는 멀쩡한 내 집은 비워둔 채 아내와 함께 다시 셋방을 전전하기도 해야 했다.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한 집단에 대한 관리 책임을 맡는데 이르게 되어 주어지는 집에서 거처할 수 있게 되었지만, 타관을 유랑해야 하는 일은 멈출 수가 없었다. 절해고도의 섬 살이도 마다치 않고 몇 상자의 짐을 거센 파도를 넘고 넘어 날라 고단한 몸을 눕히기도 했다.
그런 곡절들 속에서 겪는 일들이 힘들기는 했지만, 마냥 고통으로만 다가온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일들을 개척해 나간다는 도전 의지도 없지 않았고, 그 일들이 이루어졌을 때의 성취감으로 밤을 새워 가며 설레어 보기도 했다.
마치 궂고 개고. 맑고 흐리기를 거듭하는 오늘 날씨처럼 내 삶도 그렇게 변환이며 변전을 거듭해 왔다. 그 사이에 세월이 흐르고. 그 세월 속에 숱한 희로애락이 묻혀 가면서 그 흔적이 저 주민등록표에 고스란히 남았다.
이제는 이런저런 세월이 다 흘러가고, 주민등록표에 더 새겨질 흔적도 없게 되었다. 세상의 번다한 일들을 다 떨치고 퇴은 노옹이 되어 산야에 묻혀 산 지도 십수 년이 흘러갔다. 이 주민등록표 그대로 간직하다가 이 세상 영원히 떠났다는 딱 한 줄만 더 새기면 된다.
눈비가 섞바뀌던 날씨는 마치 어느 옛적 일이라도 되듯 하늘에는 드문드문 보이는 구름 사이로 노을빛이 곱게 번져가고 있다. 회색빛 구름마저도 노을에 젖으며 연황빛으로 물들어간다. 이제 해도 쉴 자리로 가야겠다는 듯 산마루 뒤로 서서히 잠겨 가고 있다.
나도 이제 저 노을이고, 저 해다. 무엇을 더 바라랴. 저 빛깔 고운 노을이 되는 일 말고, 가벼이 쉴 자리를 찾아가는 저 해가 되는 일 말고, 무엇이 나에게 더 있어야 하랴. 내 삶을 파노라마로 펼쳐 주고는 갈 길도 일러주는 오늘 날씨를 보면서-.♣(2025. 3. 20)
첫댓글 선생님 안녕하시지요?
쫓기듯이 요 며칠을 지냈습니다. 활짝 핀 목련과 다르게 먼 산은 희뿌연 미세 먼지로 갑갑합니다. 한 생을 산다는 것이 迂餘曲折 연속 같습니다. 글을 새기면서 지난날을 생각해 봅니다. 열심히 사는 것은 저무는 햇살로 번지는 노을빛을 보기 위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참 훌륭하십니다. 때때로 감동하고 공감하며 마음 그릇을 가득하게 채워 주십니다. 늘 감사하고 존경합니다. 부디 강녕하게 지내십시오.
크고 작은 집안일이며 여러 가지일로 매우 분주하셨지요?
선생님이 안 계신 지난 주는 무언가 좀 허전했습니다. ㅎ
어찌하였거나 우리는 모두 迂餘曲折 속을 살아가고 있지요.
저 노을빛 속에도 또 어떤 曲折이 들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내내 건승하시면서 좋은 일 많으시기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