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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홍씨(당성홍)인주도령중랑장공파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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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씨 자료방2 스크랩 南陽(唐城)洪氏中郞將派13世寶文閣大提學洪汝方선생의장인!東來鄭氏符선생.
홍왕식 추천 0 조회 10 14.05.06 15:5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동래정씨부윤공정부선생!!

부윤공묘표(府尹公墓表)
  
부윤공묘표(府尹公墓表)
公姓鄭氏諱符東萊人鼻祖諱穆高麗左僕射始顯世襲珪組有諱筠太府少卿於公高祖也曾祖諱惟義判都津寺事祖諱瑚重大匡蓬山君考諱良生贊化功臣重大匡蓬原府院君諡良度名節著于麗史?順興安氏贊成文貞公謹齋軸之女也擧四男俱登文科有名于世公其三也始仕朝鮮按治漢都人畏法度之正以孫貴 贈左贊成公氣度非凡容貌雄偉淸儉正直有父兄風 太宗壬辰卒鳴呼今距公之世年代殊遠文獻無傳官歷事蹟不能詳記成?齋俔叢話曰鄭贊成矩留後符兄弟皆知樂贊成能?琴留後則無所不曉又曰牧使安從約公之妹?也其家有鬼憑一少婢的知吉凶人畏信之鄭相國矩符兄弟至則鬼怖走公去後復還兄弟知之勅鬼逐之竟無影響云此可知公之正氣矣 配鐵城貞敬夫人固城李氏三司左使希泌之女也 世宗丁巳卒壽八十四生二男三女長欽之文刑判贈純忠積德補助功臣領議政萊山府院君諡文景次款之生員女長適判書洪汝方次適奉禮李?次適吏?趙瑞康文景生六男二女長甲孫文左參贊諡貞節載東國名臣錄次麟孫經歷次興孫府使次昌孫文佐翼功臣領議政蓬原府院君諡忠貞配成宗廟廷與兄甲孫俱選淸白吏次喜孫監察次六孫牧使女長適副正朴去頑次適參議李啓基生員生二男長永孫次自孫內外曾孫甚麗不能盡錄惟蓬原長男价南坮承旨三男?文左議政諡恭肅最顯噫記德之闕四百有餘年墓表尙無恐逾久而逾忘敢敍祖系孫派及所傳事以備後識初葬豊壤直洞
睿宗戊子以光陵禁標移葬于楊州蜂峴酉坐原夫人合?時値冬節忽有群蜂遮途不得運柩以傳旨遂入葬于蜂至處以因爲里名云爾 
                         癸未十月 日竪(檀紀四千二百七十六年) 
                                    漢城府尹公十七代孫 寅春 謹撰
有司十七代孫 寅晩 寅琥 寅明 .十八代孫 壽謨 顯謨 .十九代孫 鉉玉 九鉉 南秀.
▣.府尹公 碑文을 撰하신 寅春公은 第九代 會長을 歷任하신 鉉太 會長님의 祖考이시다.


공의 성은 정씨요 휘는 부(符)이니 본관이 동래(東萊)다.
비조 휘 목(穆)은 고려 때 좌복야(장관급 벼슬)을 지냈음이 처음으로 나타난다.
비로소 이름나 대대로 벼슬길에 올라 휘 균(筠)은 태부소경(太府少卿)을 지내셨는데, 공의 고조시며, 증조 휘 유의(惟義)는 도진시 판사(도진都津: 궁중에서 쓰이는 생선, 고기, 소금, 연료 등을 맡아보던 관청. 사제감司帝監)를 지냈고,

祖 諱 호(瑚)는 중대광 봉산군,

考 諱 양생(良生)은 찬화 공신 중대광 봉원 부원군이시며,

시호가 양탁(도)으로서 명절로 고려사에 나타나 있다.
비(?)는 순흥 안씨로 찬성(정1품) 문정공 근재(謹齋) 축(軸)의 따님이다.

아들 넷을 두었는데, 모두 문과에 올라 세상에 이름을 날렸는데,

공은 그 셋째다.
처음에 조선조 안렴사가 되어 한양도읍을 다스렸는데, 사람들이 법률과 제도의 공정함을 두려워했다.
손자(孫子) 창손(昌孫)이 귀(貴)히 됨에 따라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을 증직(贈職) 받았다.
공은 기상과 도량이 비범하고, 용모가 씩씩하고 뛰어났으며 맑고 깨끗하며 정직하여 부형의 풍이 있었다.
1412(임진. 태종12)년에 졸하니 아! 이제로부터 공의 세대가 아득히 멀고 문헌이 전하지 않으니 지내신 벼슬과 지나온 발자취를 자세히 기록할 수가 없다.
성현(成俔)은 『용재 총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정 찬성 구(矩)와 부(符) 형제는 모두 음악을 알아 贊成은 거문고를 잘 탈줄 알았고, 유후(留後) 符는 밝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했다.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목사 안 종약(安從約)은 공의 매부다.

그 집에 귀신이 있어서, 한 젊은 노비에게 붙어서 길흉을 맞히어 사람들이 모두 믿고 두려워하였다.

 정 상국 구(矩)와 부(符)를 귀신이 두려워하여 달아났다가 공이 간 뒤에는 되돌아왔다.

 형제가 이를 알고 귀신을 타일러 이를 쫓으니, 마침내 아무 일이 없었다고 하더라니 이로써 가히 공의 정기를 알 만 하다.
부인은 철성(鐵城) 정경부인 고성 이씨이니, 삼사 좌사 희필(希泌)의 따님이다. 1437(정사. 세종 19)년에 세상을 뜨니 여든넷이었다.
2남 3녀를 낳았는데 맏이 흠지(欽之)공은 문과 급제 후 형조 판서를 지내고 보조공신 영의정 내산 부원군을 증직 받았으며 시호는 문경이시다.

둘째 관지(款之)는 생원이다.
맏 따님은 판서 홍 여방(洪汝方)에게 시집가고,

 둘째는 봉례(통례원의 정4품) 이 장(李?)에게,

셋째는 이조참판 조 서강(趙瑞康)에게 시집갔다.
문경공은 6남 2녀를 두었으니 맏이 갑손(甲孫)은 문과 급제하여 좌참찬(의정부의 정2품 문관)을 지내고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동국 명신록에 실려 있다.
둘째 인손(麟孫)은 經歷(종4품),

 다음 흥손(興孫)은 부사(府使),

다음 창손(昌孫)은 문과에 급제하여 좌익 공신(1456 세조 원년 성삼문 등 6신의 모계를 미리 알린 공로로 계양군, 신숙주 등에게 내린 훈호) 영의정 봉원 부원군을 지내고 시호는 충정(忠貞)이며 성종 신위 종묘에 배향되었으며,

형 갑손과 함께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다음 희손(喜孫)은 감찰(사헌부의 정6품),

 다음 육손(陸孫)은 목사(정3품 외직)를 지냈다.
맏 따님은 부정(종3품) 박 거완(朴去頑)에게,

 다음은 참의(정3품 당상관) 이 계기(李啓基)에게 시집갔다.
생원공(款之)이 2남을 두었는데,

 맏이는 영손(永孫)이요

 다음은 자손(自孫)이다.
내외 증손이 하도 많아 화려(華麗)하게 빛나 모두 다 기록 할 수가 없다.
오직 봉원부원군(창손) 맏 아드님 개(价)는 승지(정3품)이며

 삼남 괄(?)은 문과급제하여 좌의정(정1품)을 지내고 시호는 공숙(恭肅)으로서 가장 이름났다.
아! 덕을 기록하지 못함이 400여년에 묘표도 아직 없어서 세월이 오래 흘러가면 흘러갈수록 잊혀질까 두려워서 감히 할아버지와 손자 계열, 그리고 전해오는 일들을 기록하여 후세의 기록에 대비하고자 한다.
처음에 풍양(豊壤) 직동(直洞)에 안장하였다가 1468(무자. 예종睿宗)년에 광릉을 조성하게 되어 양주(楊州) 봉현(蜂峴) 유좌(酉坐 :西쪽)에 이장하였다.

 원래 부인을 합폄할 때에 때마침 겨울철인데도 홀연히 벌떼가 나타나 길을 막아 운구를 할 수 없었는데, 임금님 명으로 드디어 벌떼가 이르는 곳에 이장하고, 이로 인하여 마을 이름이 봉현이 되었다 한다.
1943(계미)년 8월 일 세우다(단기 4276년).

한성부윤 공의 17대손 인춘(寅春)이 삼가 씀
[정양완(鄭良婉) 敎授 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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