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성은 정씨요 휘는 부(符)이니 본관이 동래(東萊)다. 비조 휘 목(穆)은 고려 때 좌복야(장관급 벼슬)을 지냈음이 처음으로 나타난다. 비로소 이름나 대대로 벼슬길에 올라 휘 균(筠)은 태부소경(太府少卿)을 지내셨는데, 공의 고조시며, 증조 휘 유의(惟義)는 도진시 판사(도진都津: 궁중에서 쓰이는 생선, 고기, 소금, 연료 등을 맡아보던 관청. 사제감司帝監)를 지냈고,
祖 諱 호(瑚)는 중대광 봉산군,
考 諱 양생(良生)은 찬화 공신 중대광 봉원 부원군이시며,
시호가 양탁(도)으로서 명절로 고려사에 나타나 있다. 비(?)는 순흥 안씨로 찬성(정1품) 문정공 근재(謹齋) 축(軸)의 따님이다.
아들 넷을 두었는데, 모두 문과에 올라 세상에 이름을 날렸는데,
공은 그 셋째다. 처음에 조선조 안렴사가 되어 한양도읍을 다스렸는데, 사람들이 법률과 제도의 공정함을 두려워했다. 손자(孫子) 창손(昌孫)이 귀(貴)히 됨에 따라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을 증직(贈職) 받았다. 공은 기상과 도량이 비범하고, 용모가 씩씩하고 뛰어났으며 맑고 깨끗하며 정직하여 부형의 풍이 있었다. 1412(임진. 태종12)년에 졸하니 아! 이제로부터 공의 세대가 아득히 멀고 문헌이 전하지 않으니 지내신 벼슬과 지나온 발자취를 자세히 기록할 수가 없다. 성현(成俔)은 『용재 총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정 찬성 구(矩)와 부(符) 형제는 모두 음악을 알아 贊成은 거문고를 잘 탈줄 알았고, 유후(留後) 符는 밝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했다.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목사 안 종약(安從約)은 공의 매부다.
그 집에 귀신이 있어서, 한 젊은 노비에게 붙어서 길흉을 맞히어 사람들이 모두 믿고 두려워하였다.
정 상국 구(矩)와 부(符)를 귀신이 두려워하여 달아났다가 공이 간 뒤에는 되돌아왔다.
형제가 이를 알고 귀신을 타일러 이를 쫓으니, 마침내 아무 일이 없었다고 하더라니 이로써 가히 공의 정기를 알 만 하다. 부인은 철성(鐵城) 정경부인 고성 이씨이니, 삼사 좌사 희필(希泌)의 따님이다. 1437(정사. 세종 19)년에 세상을 뜨니 여든넷이었다. 2남 3녀를 낳았는데 맏이 흠지(欽之)공은 문과 급제 후 형조 판서를 지내고 보조공신 영의정 내산 부원군을 증직 받았으며 시호는 문경이시다.
둘째 관지(款之)는 생원이다. 맏 따님은 판서 홍 여방(洪汝方)에게 시집가고,
둘째는 봉례(통례원의 정4품) 이 장(李?)에게,
셋째는 이조참판 조 서강(趙瑞康)에게 시집갔다. 문경공은 6남 2녀를 두었으니 맏이 갑손(甲孫)은 문과 급제하여 좌참찬(의정부의 정2품 문관)을 지내고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동국 명신록에 실려 있다. 둘째 인손(麟孫)은 經歷(종4품),
다음 흥손(興孫)은 부사(府使),
다음 창손(昌孫)은 문과에 급제하여 좌익 공신(1456 세조 원년 성삼문 등 6신의 모계를 미리 알린 공로로 계양군, 신숙주 등에게 내린 훈호) 영의정 봉원 부원군을 지내고 시호는 충정(忠貞)이며 성종 신위 종묘에 배향되었으며,
형 갑손과 함께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다음 희손(喜孫)은 감찰(사헌부의 정6품),
다음 육손(陸孫)은 목사(정3품 외직)를 지냈다. 맏 따님은 부정(종3품) 박 거완(朴去頑)에게,
다음은 참의(정3품 당상관) 이 계기(李啓基)에게 시집갔다. 생원공(款之)이 2남을 두었는데,
맏이는 영손(永孫)이요
다음은 자손(自孫)이다. 내외 증손이 하도 많아 화려(華麗)하게 빛나 모두 다 기록 할 수가 없다. 오직 봉원부원군(창손) 맏 아드님 개(价)는 승지(정3품)이며
삼남 괄(?)은 문과급제하여 좌의정(정1품)을 지내고 시호는 공숙(恭肅)으로서 가장 이름났다. 아! 덕을 기록하지 못함이 400여년에 묘표도 아직 없어서 세월이 오래 흘러가면 흘러갈수록 잊혀질까 두려워서 감히 할아버지와 손자 계열, 그리고 전해오는 일들을 기록하여 후세의 기록에 대비하고자 한다. 처음에 풍양(豊壤) 직동(直洞)에 안장하였다가 1468(무자. 예종睿宗)년에 광릉을 조성하게 되어 양주(楊州) 봉현(蜂峴) 유좌(酉坐 :西쪽)에 이장하였다.
원래 부인을 합폄할 때에 때마침 겨울철인데도 홀연히 벌떼가 나타나 길을 막아 운구를 할 수 없었는데, 임금님 명으로 드디어 벌떼가 이르는 곳에 이장하고, 이로 인하여 마을 이름이 봉현이 되었다 한다. 1943(계미)년 8월 일 세우다(단기 4276년).
공의 성은 정씨요 휘는 부(符)이니 본관이 동래(東萊)다. 비조 휘 목(穆)은 고려 때 좌복야(장관급 벼슬)을 지냈음이 처음으로 나타난다. 비로소 이름나 대대로 벼슬길에 올라 휘 균(筠)은 태부소경(太府少卿)을 지내셨는데, 공의 고조시며, 증조 휘 유의(惟義)는 도진시 판사(도진都津: 궁중에서 쓰이는 생선, 고기, 소금, 연료 등을 맡아보던 관청. 사제감司帝監)를 지냈고,
祖 諱 호(瑚)는 중대광 봉산군,
考 諱 양생(良生)은 찬화 공신 중대광 봉원 부원군이시며,
시호가 양탁(도)으로서 명절로 고려사에 나타나 있다. 비(?)는 순흥 안씨로 찬성(정1품) 문정공 근재(謹齋) 축(軸)의 따님이다.
아들 넷을 두었는데, 모두 문과에 올라 세상에 이름을 날렸는데,
공은 그 셋째다. 처음에 조선조 안렴사가 되어 한양도읍을 다스렸는데, 사람들이 법률과 제도의 공정함을 두려워했다. 손자(孫子) 창손(昌孫)이 귀(貴)히 됨에 따라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을 증직(贈職) 받았다. 공은 기상과 도량이 비범하고, 용모가 씩씩하고 뛰어났으며 맑고 깨끗하며 정직하여 부형의 풍이 있었다. 1412(임진. 태종12)년에 졸하니 아! 이제로부터 공의 세대가 아득히 멀고 문헌이 전하지 않으니 지내신 벼슬과 지나온 발자취를 자세히 기록할 수가 없다. 성현(成俔)은 『용재 총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정 찬성 구(矩)와 부(符) 형제는 모두 음악을 알아 贊成은 거문고를 잘 탈줄 알았고, 유후(留後) 符는 밝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했다.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목사 안 종약(安從約)은 공의 매부다.
그 집에 귀신이 있어서, 한 젊은 노비에게 붙어서 길흉을 맞히어 사람들이 모두 믿고 두려워하였다.
정 상국 구(矩)와 부(符)를 귀신이 두려워하여 달아났다가 공이 간 뒤에는 되돌아왔다.
형제가 이를 알고 귀신을 타일러 이를 쫓으니, 마침내 아무 일이 없었다고 하더라니 이로써 가히 공의 정기를 알 만 하다. 부인은 철성(鐵城) 정경부인 고성 이씨이니, 삼사 좌사 희필(希泌)의 따님이다. 1437(정사. 세종 19)년에 세상을 뜨니 여든넷이었다. 2남 3녀를 낳았는데 맏이 흠지(欽之)공은 문과 급제 후 형조 판서를 지내고 보조공신 영의정 내산 부원군을 증직 받았으며 시호는 문경이시다.
둘째 관지(款之)는 생원이다. 맏 따님은 판서 홍 여방(洪汝方)에게 시집가고,
둘째는 봉례(통례원의 정4품) 이 장(李?)에게,
셋째는 이조참판 조 서강(趙瑞康)에게 시집갔다. 문경공은 6남 2녀를 두었으니 맏이 갑손(甲孫)은 문과 급제하여 좌참찬(의정부의 정2품 문관)을 지내고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동국 명신록에 실려 있다. 둘째 인손(麟孫)은 經歷(종4품),
다음 흥손(興孫)은 부사(府使),
다음 창손(昌孫)은 문과에 급제하여 좌익 공신(1456 세조 원년 성삼문 등 6신의 모계를 미리 알린 공로로 계양군, 신숙주 등에게 내린 훈호) 영의정 봉원 부원군을 지내고 시호는 충정(忠貞)이며 성종 신위 종묘에 배향되었으며,
형 갑손과 함께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다음 희손(喜孫)은 감찰(사헌부의 정6품),
다음 육손(陸孫)은 목사(정3품 외직)를 지냈다. 맏 따님은 부정(종3품) 박 거완(朴去頑)에게,
다음은 참의(정3품 당상관) 이 계기(李啓基)에게 시집갔다. 생원공(款之)이 2남을 두었는데,
맏이는 영손(永孫)이요
다음은 자손(自孫)이다. 내외 증손이 하도 많아 화려(華麗)하게 빛나 모두 다 기록 할 수가 없다. 오직 봉원부원군(창손) 맏 아드님 개(价)는 승지(정3품)이며
삼남 괄(?)은 문과급제하여 좌의정(정1품)을 지내고 시호는 공숙(恭肅)으로서 가장 이름났다. 아! 덕을 기록하지 못함이 400여년에 묘표도 아직 없어서 세월이 오래 흘러가면 흘러갈수록 잊혀질까 두려워서 감히 할아버지와 손자 계열, 그리고 전해오는 일들을 기록하여 후세의 기록에 대비하고자 한다. 처음에 풍양(豊壤) 직동(直洞)에 안장하였다가 1468(무자. 예종睿宗)년에 광릉을 조성하게 되어 양주(楊州) 봉현(蜂峴) 유좌(酉坐 :西쪽)에 이장하였다.
원래 부인을 합폄할 때에 때마침 겨울철인데도 홀연히 벌떼가 나타나 길을 막아 운구를 할 수 없었는데, 임금님 명으로 드디어 벌떼가 이르는 곳에 이장하고, 이로 인하여 마을 이름이 봉현이 되었다 한다. 1943(계미)년 8월 일 세우다(단기 427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