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소경왕(昭敬王 선조(宣祖))이 나라를 중흥하였을 때 처사를 선발하였는데, 호남의 위씨(魏氏) 두 사람이 가장 어진 명성이 있었다. 효자 위덕의(魏德毅)는 고향 마을에서부터 도보로 2000리 길을 와서 왕을 따랐으므로 임금이 그를 행궁(行宮)으로 불러서 보았으며, 한양으로 돌아와서는 현감에 선발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공은 유일(遺逸)로 향리에서 천거되어, 문열공(文烈公) 김천일(金千鎰)ㆍ충의공(忠毅公) 최경회(崔慶會)와 더불어 왕실을 회복하기를 맹서하였다. 그러므로 호남의 충성스러운 지사(志士)들이 그를 의지하여 중시하였다.
공의 휘는 대용(大用)이며 자는 경행(景行)으로, 그 선조는 중국 사람이다. 신라 때 위경(魏鏡)이 처음으로 와서 벼슬하여 회주(懷州)를 식읍으로 하사받았다. 회주는 지금 장흥부(長興府)가 되었는데, 그 후 자손들이 인하여 살게 되었다. 고려 시대에 와서는 대학사 온(溫)이 명신이 되었는데, 공은 대학사의 12세손이다. 증조부 유정(由貞)은 생원이었고 조부 원충(元忠)은 군수를 지냈으며, 부친 억문(億文)은 부정(副正)을 지냈다.
공은 젊어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였고 문장을 잘 지었다. 가정(嘉靖) 34년(1555)에 진사에 합격하여 이름이 태학에서 높았으며 문정공(文靖公) 윤두수(尹斗壽)와 서로 친하게 지냈다. 얼마 있지 않아 남쪽으로 귀향하여 6경을 연구하며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초야에서 소요하였다.
평수길(平秀吉)이 난을 일으켰을 때 공이 63세였는데, 병으로 자리에 누워 있었으므로 종군할 수가 없었다. 이에 호남의 의사(義士)들에게 서찰을 보내어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칠 것을 권면하였다. 김문열공ㆍ최 충의공이 행조(行朝)에 천거하니 왕이 가상히 여겨 하교하여 특별히 형조 좌랑(刑曹佐郞)을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만력(萬曆) 25년(1597)에 왕이 하교하기를, “위모는 초야에서 뜻을 길러 의로운 명성이 더욱 드러났으니, 올려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삼는다.”라고 하였다. 이듬해 형조 참의(刑曹參議)를 제수하였으나 또 나아가지 않았다. 38년 4월 2일에 집에서 돌아가셨으니 누린 햇수가 81년이었다. 모월 모일에 부의 남쪽 개손(介孫)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필인 숙부인(淑夫人) 광주(光州) 김씨는 승문원 교리 김협(金浹)의 딸이다. 아들 1명을 낳았는데 홍주(弘宙)라 하며 군자감 정(軍資監正)을 지냈고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참의는 3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산보(山寶)는 첨정(僉正)을 지냈고, 차남 정보(廷寶)는 현감을 지냈으며 3남 국보(國寶)는 통덕랑이었다. 장녀는 주부(主簿) 정경일(鄭敬一)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장사랑(將仕郞) 최환(崔渙)에게 시집갔다. 현감은 아들 4명을 낳았는데 천기(天機)ㆍ천추(天樞)ㆍ천표(天杓)ㆍ천두(天枓)이다. 딸은 3명인데 장녀는 백한우(白漢羽)에게, 차녀는 부사(府使) 송후경(宋後璟)에게, 3녀는 이송룡(李松龍)에게 시집갔다. 통덕랑은 아들 4명을 낳았는데 천구(天耈)ㆍ천규(天奎)ㆍ천회(天會)ㆍ천상(天相)이다. 천상은 내승(內乘)을 지냈다.
수길의 난 때 소경왕이 서쪽으로 몽진하게 되자 공은 유자(儒者)로서 가동(家僮)을 보내어 활과 화살, 양식을 갖추어 전사들을 도왔으니 아, 어질도다. 공의 7세손 위영국(魏榮國) 등이 그 명을 짓기를 청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대인은 그를 벗삼았고 / 大人友之
열사는 그를 천거하여 / 烈士擧之
대부 벼슬 내렸으나 / 爵下大夫
절조 지켜 마음 변하지 않았도다 / 而守不移
예양강물 출렁출렁 / 汭水湯湯
흘러가고 흘러오며 / 以泝以沿
공의 풍도를 / 維公之風
영원토록 전하리라 / 永世其傳
始,昭敬中興之時,甄拔處士,而湖南魏氏二人,最有賢名。孝子德毅,自閭里徒步,勤王二千里,召見行宮,及還都,選爲知縣,辭不赴。公以遺逸擧於鄕,與文烈公金千鎰、忠毅公崔慶會誓復王室。故湖南忠志之士,倚以爲重。
公諱大用,字景行,其先中國人也。新羅中,鏡始來仕,賜食邑於懷州。懷州今爲長興府,其後子孫因家焉。至王氏世,大學士溫爲名臣,公大學士十二世孫也。曾祖曰由貞,生員;祖曰元忠,郡守;父曰億文,副正。
公少好學,有文辭。嘉靖三十有四年,擧進士,名重大學,與文靖公尹斗壽相友善。未幾南歸,治六經,不赴貢擧,逍遙於丘園之中。
平秀吉亂,公時年六十三矣,寢疾病,不能從軍。乃貽書湖南義士,勉以死事。金文烈公、崔忠毅公薦于行朝,王嘉之,下敎特除刑曹佐郞,辭不就。
萬曆二十五年,敎曰:“魏某,養志林泉,義問尤著,其陞爲通政大夫。” 明年,授刑曹參議,又不就。三十八年四月初二日,卒于家,享年八十一。某月某日,葬于府南介孫之原。
配淑夫人光州金氏,承文院校理浹之女也。生子一人,曰弘宙,軍資監正,贈戶曹參議。參議生子三人、女二人:子長曰山寶,僉正;次曰廷寶,縣監;次曰國寶,通德郞;女長適主簿鄭敬一;次適將仕郞崔渙。縣監生子四人:曰天機,曰天樞,曰天杓,曰天枓。女三人:長適白漢羽,次適府使宋後璟,次適李松龍。通德郞生子四人:曰天耈,曰天奎,曰天會,曰天相爲內乘。
秀吉之亂,昭敬西遷,公儒者,猶遣家僮,具弓矢、餱糧,以助戰士,嗚呼仁哉!公七世孫榮國等請爲之銘。銘曰:
大人友之,烈士擧之。爵下大夫,而守不移。
汭水湯湯,以泝以沿。維公之風,永世其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