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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곶돈대 순교성지 안내
[ 강화도와 갑곶돈대 순교성지 ]
서울에서 한시간여 거리에 떨어져 바다와 자연을 맛볼 수 있는 강화도는 많은 이
들의 나들이 코스로 유명하다. 좋은 자연환경과 많은 문화유적,그리고 호국의 얼이
숨쉬는 곳이기에 강화도를 찾는 이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천주교인들에게 있어
서 강화도는 또다른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신앙을 증거하기 위한 선배 신앙인
들의 피어린 노력이 가득한 곳이기 때문이다.
강화도는 한국천주교회 창립 초기인 1795년, 조선에 최초의 선교사로 입국한 중국
인 주문모(周文謨)신부가 철종(哲宗)의 조모(祖母)인 송(宋)씨(은언군의 처)와 며느
리 신(申)씨를 각각 마리아로 영세를 준 것이 조정에서 알려지게 되어 왕족인 고부
(姑婦)가 함께 1801년(辛酉迫害)에 순교하게 되자, 이러한 연유로 1786년(정조 10
년)부터 자식 상계군(常溪君)의 역모죄로 강화도에 귀향하여 살던 은언군(恩彦君 ,
철종의 조부)도 강화부(관청리 형방)에 배소되어 처형되었고, 또한 신유박해의 순교
자요 백서(帛書)를 쓴 황사영(黃嗣永)의 탄생지가 이곳 대묘동에 있어 강화도는 한
국 천주교회 창립시기부터 인연을 갖고 있다.
1845년 5월 14일 김대건신부는 페레올 고(高) 주교의 명으로 선교사를 비밀로 입
국시키는 해로(海路)를 개척하기 위해 서울 마포를 떠나 이곡 강화 갑곶(甲串) 앞바
다를 지나 연평도, 백령도를 거쳐 순위도에서 관원에 잡히게 되었다. 그래서 이곳
갑곶 해안은 김대건 신부의 마지막 해로 여행지가 되었고, 1856년 베르뇌 장(長)주
교와 쁘띠니꼴라 신부, 쁘르띠에 신부, 1857년 페롱 권(權)신부가 비밀리에 입국한
요로이기도 하다.
강화도는 19세기 후반, 한구 역사에서 동,서양의 사상과 문화가 만나 첨예한 갈등
을 빚은 곳으로 상징되는 곳이다. 이러한 연유로 1866년(丙寅)부터 시작한 박해로
강화도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으나 현재 알려진 순교자로는 1868년, 프랑스
선교사를 입국시키는데 협력한 최인서(崔仁瑞 요한), 장치선(張致善) 회장과 천주교
인으로 최인서와 함께 있다가 잡혀 서울 포청에서 옥살이를 하다 강화 병영지 진무
영(鎭撫營)으로 호송되어 효수(梟首)당한 박서방(박순집의 형), 조서방, 그리고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때 미국 군함에 다녀왔다는 죄로 박상손(朴常孫), 우윤집
(禹允集), 최순복(崔順福) 등이 이곳 갑곶나루터(甲串津頭), 일명 '막구터'에서 목
을 베어 말뚝에 올려놓아 천주교를 경계하도록 하였다.
갑곶나루터에서의 순교사건의 경위는 다음과 같다. 병인양요 이후인 1871(辛未)
년 4월에 강화도 해역에 미국함대 4척이 나타나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
(General Sherman)호가 평양에서 조선인에 의해 방화된 사건의 책임을 묻고 통상을
요구했으나 대원군은 이를 거절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斥
和碑)를 세우고 더욱 심하게 천주교를 박해하였다. 이때에 이승훈의 증손인 이연구
(李蓮龜)와 균규(筠龜)가 제물포에서 잡혀 군문효수되고, 이승훈의 손자인 이재겸
(李在謙)의 처 정(鄭)씨와 그의 손 이명현(李明玄)과 백용석(白用石) 등도 이와 관
련하여 순교하였다. 미국군함이 물러간 5월 25일 고종(高宗)은 더욱 철저하게 천주
교인을 잡아 처벌할 것을 좌우포도대장에게 교서를 내리게 되고, 이 때에 미국 함대
에 왕래한 박상손(朴常孫), 우윤집(禹允集), 최순복(崔順福) 등이 첫 번째로 잡혀
가 갑곶진두에서 목이 잘려 순교하게 된 것이다.
문헌상의 갑곶진두의 정확한 위치를 찾은 인천교구 순교자 현양위원회는 그 자리
를 매입하여 지금의 갑곶돈대 순교성지를 조성하였다. 이후 2000년 대희년을 맞아
집중적인 개발을 진행하였으며 2001년 9월에는 순교자들의 행적 증언자이며 인천교
구 역사의 증인인 박순집(베드로) 증거자의 유해를 성지내에 안장하였다.
[ 갑곶성지의 사진 ]
* 성지입구
* 성지광장
* 순교자 기념비
* 박순집증거자 묘소
* 소제대와 성모상
멀리보이는 아치부터가 구(舊) 강화다리이다.
순례객들이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곳이다. 갑곶돈대의 세분 순교자를 기념하는 기
념비이다. 박순집 베드로 증거자의 묘소와 광장 십자가이다. 십자가의 길 앞에 소제
대와 성모상이 있다.
[ 찾아오시는 길 ]
강화대교를 건너면 이정표가 있다. 해안도로 방향으로 나와 강화역사관 못미쳐 구
강화다리쪽으로 백여미터 올라가면 갑곶돈대 순교성지가 있다.
* 강화 성지 및 성당 안내 지도
* 성지에서 미사나 고해성사를 원하는 단체는 강화 성지개발 담당 조명연 신부님께
(032-933-1525, 011-9496-0599)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 박순집(朴順集 1830 - 1911) 베드로 ]
※ 순교자들의 행적 증언자, 인천교구 발전에 초석이된 평신도
故 한종오 (인천교구성지개발위원/성황석두루가서원 대표)
많은 순교자들의 행적을 듣고, 목격한 것을 증언하고 순교자들의 유해 발굴에 큰
공을 세운 박순집(朴順集)베드로는 1890년에 인천 제물포로 이주(移住), 1911년에
숙골(현 도화동)에서 82세의 나이로 선종, 인천 교구와 인연을 갖게 되었다.
박순집 베드로는 1830년 10월 9일 서울 남문 밖 전생서(典牲署. 현 용산구 후암
동)에서 순교자 박(朴)바오로와 김(金)아가다 사이에서 태어났다. 박 바오로 나이
21세에 맏아들 요왕을 낳고, 24세 둘째 아들 베드로를 낳았다. 두 아들은 어려서부
터 부모의 신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으나 베드로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의 보살핌으로 성장하였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착한 베드로는 신체 발육이 남달라 성장하며 힘이 장사로 마
을 대항 씨름 대회에 나가 소년 장사가 되어 황소를 타 마을로 개선하기도 하여 주
위를 놀라게 하였다.
소년 박 베드로는 이조모(姨組母)댁이 1837년에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 앵베르
(Imbert 범(范))주교가 입국하여 은신하며 머물고 있는 북촌 마을 근처에 있어 이모
의 도움으로 주교님의 심부름꾼이 되기도 하며 주교님의 사랑을 받기도 했다. 그러
나 베드로가 주교의 사랑을 받은 지 1년 남짓한 1839년 기해(己亥)박해가 일어나 많
은 교우들과 앵베르 주교, 모방(Maubant 羅) 신부, 샤스탕(Chastant) 신부가 잡혀
주교와 신부들은 새남터에서, 교우들은 서소문 밖 형장에서, 당고개에서, 옥에서 치
명 순교하였다.
이러한 기해(己亥)박해 때 그의 부친 박 바오로는 훈련도감 포수(訓練都監 砲手)
로 봉직하고 있었기에 새남터에서 순교한 주교, 신부들의 순교 장면을 목격할 수 있
었다. 이에 박 바오로는 몇몇 교우들의 도움으로 새남터에서 주교와 신부들의 시신
을 지키던 군사들이 잠든 틈을 이용하여 모래로 대강 덮은 무덤 가까이 가서 손으
로 모래를 파헤치고, 잘라진 목과 시체를 전부 찾아내어 머리 셋은 다 수염이 길어
입에 물고, 시체 삼구는 등에 업고 양팔에 끼고 나와 기다리고 있던 교우들이 준비
한 관에 대강 수습하여 그 밤으로 노고산(老古山. 현 마포구 노고산동)에 안장하였
는데 이는 죽음을 각오한 순교자적 고귀한 희생이었다. 그 후 박 바오로는 복잡한
서울근교에 안장한 성직자의 묘가 안심이 안되어 1843년, 박씨 집안의 선산인 삼성
산(三聖山. 현 관악구 신림동)으로 이장하며 사기 그릇에 순교 연월일과 이름을 먹
으로 써서 묘에 함께 묻고, 후일 찾기 쉽게 표적을 해 놓기도 했다. 그리고 이 사실
을 삼성산에 모셔진 묘로 그의 아들 베드로를 데리고 가서 “후일 성교회에서 성직
자 무덤을 찾을 터이니 네가 잘 보아 두었다가 가르쳐 드려야 한다.”고 전하였다.
그리고 박 바오로는 김대건(金大建) 신부가 1846년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순교
하자 안성(安城) 미리내로 이장되기 전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새남터에서 김신부의
시신을 찾아내서 와서(瓦署. 현 용산구 한강로3가 왜고개)에 안장하였다. 당시 17세
였던 박순집도 서소문과 당고개를 거쳐 새남터 형장으로 가는 김대건 신부를 목격하
였다.
박순집은 25세에 그의 부친과 같이 훈련도감의 군인이 되었다. 1866년 병인(丙寅)박
해가 일어난 뒤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 주교, 브르뜨니에르(白) 신
부, 보리외(徐) 신부, 도리(金) 신부, 프티니콜라(朴) 신부, 푸르티에(申) 신부와
우세영(禹世英, 알렉시오) 등이 3월 7일과 3월 11일 새남터에서 순교할 때 박순집
은 군인으로 참여되어 이를 직접 목격하게 되었다.
그래서 박순집은 아버지 박 바오로의 뜻을 이어 가기로 결심하고, 박순지(朴順
之, 요한) 등 몇몇 신자들과 함께 3월 28(음) 시신을 찾아 내어 새남터 부근에 임
시 매장한 후 4월 14일(음)에 다시 와서로 이장하였다. 그리고 3월 7일과 9일에 서
소문 밖에서 순교한 남종삼(南鍾三, 요한)과 최형(崔炯, 베드로) 시신도 신자들과
함께 찾아내어 와서에 안장하였으며, 3월 9일에 순교한 전장운(全長雲, 요한), 3월
11일에 순교한 뒤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진 정의배(丁義培, 마르코) 회장의 시신은
훗날 노고산에 안장하였다.
병인년 박해가 날이 갈수록 혹독해져 갈 즈음, 불란서 함대가 서양 선교사의 처형
에 대한 항의로 강화도를 통해 한강 양화진까지 침입, 전투를 벌임과 동시에 강화도
에 상륙하여 많은 양민을 학살하고 관아와 민가에 방화한 후 많은 문화재를 약탈한
사건이 일어났다. 또한 대동강을 통해 평양까지 들어온 미국 상선이 통상을 요구하
다 아군에 의해 배가 전소된 사건을 빌미로 미국 함대가 인천 제물포까지 올라와 항
의를 하는 등의 사건이 발행하여 민심이 극도로 흉흉해지자 실권자 대원군은 천주교
인들이 서양 오랑캐를 불러 들였다는 빌미로 더욱 박해를 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박순집의 가족도 결국 검거망에 걸리게 되어 양화진(현 절두산)에
서 1866년 10월 17일 형 요왕의 아들 박 바오로(20세), 고모 박 막달레나, 1868년 3
월 29일 부친 박 바오로(63세)가 잡혀 순교하였고, 포청 옥에서 1868년 3월 26일 큰
삼촌 박 바오로(70세), 큰삼촌 아들과 그의 부인, 작은삼촌과 그의 부인, 3월 29일
형 박 요왕(46세), 형수 손 발파라(39세), 12월 21일 장모 홍 유시디아(58세), 1870
년 2월 21일 팔촌 형 박 바오로와 함께 옥사하였고, 인천 제물포에서 이모부 손 베
드로 넓적이(68세)와 이모. 이모부의 사위 박 치문(요왕. 42세)이 1868년 4월 20일
에 인천에서 순교하였고, 형 박서방(58세)이 4월 20일에 강화에서 순교하였다. 이처
럼 박순집 일가에서 16위의 순교자가 탄생하였으나 박순집은 여러 박해의 검거망을
기적적으로 피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래서 박 베드로는 가족 시체들을 찾아내
어 아버지와 형님 내외분, 백부의 시체를 「둔짐」이란 곳에 안장하였다.
공식적인 박해가 철회된 1876년, 박순집은 교회의 밀사 최지혁(崔智赫. 요한)과
고종의 유모 박(朴) 마르타의 딸 원(元) 수산나 등과 협력하여 드게트(崔) 신부, 블
랑(Blanc 白) 신부 등을, 1877년에는 리델(Ridel 李, 제6대 교구장) 주교, 두세
(丁) 신부, 로베르(金) 신부 등을 입국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 후 1888년에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白) 주교가 프오델(朴) 신부에게 조선 순교
자들의 행적을 조사하도록 하자 프오델 신부는 박순집을 불러 자신이 보고 들은 것
과 순교자의 유해가 묻혀 있는 곳, 자신의 집안과 다른 순교자들의 행적을 교회 법
정에서 증언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서기 권 타대오에게는 한마디도 바꾸지 말고 기록하도록 하여 증언록이
작성되었는데 이 증언록이 박순집 증언록(丙寅事蹟 朴順集證言錄)으로 3권에 153명
의 순교자 행적이 기록되어 현재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1899년 10월 30일, 박순집의 도움으로 와서에 있던 7명의 유해가 발굴되어 용산 예
수성심학교에 안장되었고, 1901년 10월 21일에 삼성산에 묻혀 있던 앵베르 주교, 모
방 신부, 샤스탕 신부의 유해도 발굴되어 명동성당에 안치되었으며, 1909년 5월 28
일에는 노고산에 묻혀 있던 남종삼과 최형의 시신이 발굴되어 명동성당에 안치되었
다.
이처럼 순교자들의 행적 증언과 유해 발굴에 큰 공을 세운 박순집은 1878년에 홍
제원(현 홍제동) 장거리 고개 밑에서 살았는데 교회를 위해 자신의 집을 공소로 내
놓았고, 1888년에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하자 셋째 딸 박황월(朴黃
月.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을 수녀회에 입회시켰다. 그래서 박수녀는 조선인 최초 5
명의 수녀 중 한 분으로 그가 95세의 일기로 선종하기까지 어릴 때부터 보고 들은
것을 자세히 기록하여 놓았는데 이 글에는 자신의 가족들의 순교 행적과 신앙생활,
수도회 역사의 내용으로 아버지 박순집 증언록처럼 교회의 산 기록이 되고 있다.
1889년에는 인천에 사는 한 교우가 박순집을 찾아와서 인천 제물포(濟物浦)로 내
려와 전교해 줄 것을 간곡히 청하자 1890년에 전교의 원대한 포부를 간직하고 아들
식구와 전 가족을 데리고 제물포로 이사했다. 박순집이 제물포에 와서 근교에 교우
를 살펴보니 자기를 인천으로 초대한 교우 가정과 또한 가정, 일본인 교우집, 중국
인 한 사람이 전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 베드로는 1889년에 한국인 59명, 일본
인 25명으로 설립된 답동본당(초대 주임 빌렘 신부) 사목을 도우며 전력을 다하여
전교에 힘썼다.그런데 1893년에 박순집의 집터가 경인 철도 부설로 인하여 철도 부
지로 편입되어 부득이 외곽지역인 주안 숙골(현 도화동)에 밭을 사서 이주하여 생활
을 하다가 1911년 6월 27일 82세의 나이로 "예수 마리아 요셉"을 부르며 선종 하였
다.
그런데 방안에는 향기가 풍기어 장손 요셉이 밖으로 나가 지붕을 올려 보자 동쪽으
로 뻗친 두 줄기 광채는 마치 쌍무지개 같았고, 이웃 동네 사람들은 온통 불빛에 쌓
여 있는 박 베드로의 집을 보고 불이 난줄로 알고 손에 손에 물통을 들고 불을 끄려
고 몰려왔다. 그러나 집은 타지 않고 광채의 서기만 있어 모두 놀라 장남 요셉에게
신비스런 현상을 이야기하며 주위를 살피니 박순집 베드로가 선종하면서 나타난 서
기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모두 땅에 무릎을 꿇고 박순집 베드로가 성인이 되었다
고 칭송하였다. 그리고 박순집 베드로의 시신은 독쟁이(현 용현동)에 묻었다.
이처럼 박순집 베드로의 일생은 순교자의 정신으로 신앙생활을 실천한 증언자의
삶이었다. 그리고 인천으로 이주해 와 살은 20여년은 평신도 사도직을 성실히 수행
하여 오늘날 인천교구 발전에 초석이 된 삶이었다.
그래서 인천교구 성지개발위원회에서는 교구 신자들의 순교자 현양정신을 함양하
기 위하여 용현동(독생이)에 묻혔다가 1961년 8월 31일 천주교 서울교구 절두산 순
교자 기념관내로 천묘된 박순집 베드로의 유해를 서울교구의 도움으로 2001년 5월
24일 그가 말년에 살았던 도화동과 인연이 있는 도화동 성당 내에 봉안하여 순교자
현양 기도 모임을 갖고, 9월 순교자 성월에 강화 갑곶 성지 내에 천묘하였다.
[ 박순집(朴順集) 베드로의 유해를 인천교구에 다시 모시며 ]
김진용/인천교구 성지개발위원
박순집 베드로! 그는 아직 시복 시성되지 않았기에 그에 대한 공식 명칭은 복자
또는 성인이 아니라 [순교자들의 행적 증언자]이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그의 사
랑의 생애가 너무도 위대하였기에, 고(故) 오기선(吳基先)신부님께서는 그를 [성웅
(聖雄) 박순집 베드로]라 칭하였고, 또 어느 신부님께서는, 그가 운이 좋아 잡히지
않았기에 순교하지 못했을 뿐, 순교를 각오하고 감시의 눈을 피해 수없이 사선(死
線)을 넘나들며 순교하신 주교님, 신부님들, 회장님들, 가족들의 시신을 찾아내어
암매장해 드린 그의 순교자적인 위대한 삶은 [신앙의 증거자]라는 칭호를 드려도 결
코 지나칠 것이 없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신다.
박순집 베드로는 그의 부친 박 바오로가 1839년, 기해(己亥)박해때 새남터에서 순
교하신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의 시신을 노고
산에 안장 4년후 선산인 삼성산으로 옮겨 모신 것을 그의 부친으로 부터 듣고 마음
속 깊이 새겨 놓았다.
그로부터 27년 후인 1866년, 대원군에 의해 일어난 병인(丙寅)박해 때 박순집 베
드로는 아버지의 유업을 본받아 새남터에서 순교하신 베르네 주교, 쁘르트니에르 신
부, 볼리외 신부, 도리 신부, 프트니콜라 신부, 프르티에 신부 등 6명의 성직자 시
신과 순교자 우세영(禹世英), 그리고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남종삼(南種三), 최형
(崔炯)의 시신을 와서(瓦署)에 안장하였고, 순교자 홍봉주(洪鳳周), 전장운(全長
雲), 정의배(丁義培)의 시신도 노고산에 안장하였다. 이처럼 부자가 대(代) 물림으
로 순교하신 성직자와 평신도의 시신을 목숨걸고 찾아내어 안장해 드린 이 의거는
참으로 죽음을 각오한 순교정신이 아니고서는 해 낼 수 없는 신앙의 증거적 활동이
며 가히 교회사에 영원히 빛날 신앙인의 귀감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이처럼 박순집 베드로의 순교를 각오하고 목숨을 건 그의 의거가 아니었던들,
그 많은 순교 성직자들과 평신도 순교자들의 거룩한 유해는 어찌 되었을까?
죽임을 당하지 않은 순교자(?) 박순집 베드로, 그는 어느 순교자 못지 않게 순교
의 문턱을 수없이 넘나들면서도 그 수많은 감시의 눈초리를 피해 신화(神話)처럼 잡
히지 않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그의 부친 박 바오로를 비롯한 일가 16명의 시신까
지도 걷우어 드렸다니, 하느님의 섭리, 하느님의 보호하심이 아니고서야 아무리 운
이 좋았다 한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으랴?
고 오기선 신부님은 말씀하셨다. 그를 "난세(亂世)의 성웅(聖雄), 박순집 베드로
라고"라고... 나는 감히 외치고 싶다. "그는 하느님께서 특별한 사명을 주어 보내
신 사람"이라고...
1876년 이후, 그는 리델(제6대 조선교구장) 주교, 블랑(후에 제7대 조선교구장)
신부를 비롯한 5, 6명의 성직자를 밀입국시키고 그들의 사목활동을 도왔다. 1888년
에는 교회 법정에서 그가 알고 있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증언하여, 그에게는 [순교자
들의 행적 증언자]라는 칭호가 붙게 되었고, 그 결과로서 [丙寅事蹟 朴順集의 證言
錄] 一, 二, 三권에 순교자 153명의 행적이 수록되게 하여, 그는 후세인들에게 교회
사 연구의 귀중한 사료(史料)를 남겨주었다.
1890년, 그는 인천 도화동으로 이사하여 인천교회의 창립사도가 되셨고, 1911년 6
월 27일, 82세의 일기로 주님 품에 선종하였다. 그가 선종하던 날, 마을 사람들이
보니 그의 집에 불이 난 것 같았다. 온 마을 사람들이 박서방네 집에 불났다고 그릇
에 물을 퍼 가지고 가서 보니, 불이 난 것이 아니라, 지붕 위로부터 두 줄기의 광채
가 하늘로 뻗어 있었고, 시신의 얼굴에는 흰 광채가 비치고 있었다는 구전이 대대
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독쟁이(지금의 용현 5동)에 묻혀 계시다가 1961년 8월 31일, 고(故) 오기선
신부님에 의해 절두산으로 천묘되었다. 그리고 2001년 5월 24일, 그의 유해 일부가
인천교구 성지개발위원회 주관으로 절두산에서 그가 살던 연고지 도화동 성당에 안
치된 후 9월 순교자 성월에 강화 갑곶 성지에 천묘되고 인천 가톨릭대학교에 모셔진
다.
박순집 베드로! 비록 그는 참수 치명자는 아니다. 그러나 그의 전 생애는 어느 순
교자 못지 않은 거룩한 삶을 살았다. 죽음을 당하지 않은 순교자, 시복되지 않은 복
자, 신앙의 증거자, 순교자 행적 증언자, 성웅(聖雄), 그 어느 칭호를 붙여도 지나
치지 않을 것 같은 위대한 평신도, 주님과 교회를 위해 박해의 살어름 길을 수없이
걸은 그의 전 생애는, 차리리 한순간에 희광이의 칼날 아래 목이 떨어진 순교자 못
지 않은 순교자적 삶을 살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으리라. 목숨을 걸고 행한 수많은
순교자들의 시신 안장, 그리고 성직자들의 영입과 보호, 순교자들의 행적 증언, 인
천 교회의 창립사도로서 초석이 된 그의 전 생애는 가히 우리 후손들의 귀감이 되고
도 남음이 있으리라. 신화와 같은 그의 임종 당시의 서광 이야기도, 비록 그가 참
수 치명자는 아니로되 순교자 이상의 삶을 살은 그의 전 생애로 보면, 가히 있음직
한 일이 아니겠는가?
영웅적인 위대한 삶을 살은 박순집 베드로! 차라리 희광이의 칼날 아래 한순간에
목이 떨어진 순교자 그 이상의 삶을 살았다고 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삶을 살은 그이
지만, 지금 그는 순교자도 복자도 더더욱 성인도 아니다. 그를 복자로 성인으로 모
시는 것은 우리들의 몫인 것이다. 그의 시복 시성을 위해 우리 모두 마음 모아 열심
히 기도 드리자.
그의 유해를 다시 모신 인천교구에 영광 있으라,
피어라, 순교신심의 꽃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