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부탁을 받는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공동구매라는 명목으로 춘차를 사야하는 부담을 안게 된 것은 어떤 면에서는 섶을 지고 기름에 뛰어드는 행동이나 다를 바 없으며 다도의 정신에는 더더욱 반하는 일이라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매년 필자 주위의 분들과 신차를 공동 구매해 온 것이 햇수로 12년째!
이력이 날 만도 한데, 해마다 이 때면 남모를 가슴앓이가 되곤 한다.
매년 다시는 하지 않는다고 다짐을 하고도, 봄바람이 일면 또 다시 불길이 가슴 속에 당겨졌다.
올해는 애초부터 조짐이 좋지 않았다. 재작년부터 가뭄이 계속 되는 운남 지역의 기후도 만만치 않거니와 여기 저기서 들려오는 모차가 급등한다는 소식은 더욱 긴장을 더했다. 봄마다 모차 가격이 급등한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올해는 왠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더구나, 부활절을 한국에서 보내야 된다는 강박 관념은 더욱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다. 어쨌든 4월에 주로 있는 부활절은 춘차 시기와 늘 맞물려서 매년 안타깝게 했다. 올해는 몇 분 되지 않지만 안면도 없이 인터넷에서 춘차를 사 달라고 부탁하는 분들이 계셔서 가격마저 고정된 터였다.
마음 같지 않아서 9일에도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출국하지 못하고 10일에야 겨우 청도행 비행기를 탔다. 오랫동안 비워둔 병원에 오니 할일은 첩첩 산중이었다. 다행히 새로 중국인 내과 선생님이 한 분 더 오셔서 발등의 불은 끄고 있었다.
그 날 밤으로 쿤밍을 갔으나 답은 없었다. 춘차 가격이 다락같이 뛰어서 상인들은 차 팔기를 꺼리는 분위기였다. 예상했던 가격은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평범한 모차 가격도 1킬로그램에 100위안을 상회하고 있었다. 쓰마오를 거쳐서 멍하이까지 갔으나 아까운 시간만 허비하는 꼴이었다. 몇몇 차창에 전화해서 알아온 실상이 이제 현실로 짓눌러왔다. 아무 성과 없이 금요일이 왔다. 토요일은 황도에서 차모임이 있는 날이다. 춘차도 중요하지만 차 모임은 더욱 중요하다. 일단 눈물을 머금고 청도로 후퇴를 했다.
다회는 성대하게 끝났다. 새로 연 찻집 주인장의 배려에 힘입은 바가 컸다. 꽃차로 시작하여 군산은침, 용정, 벽라춘이 주욱 돌고 철관음과 기문홍차 그리고 보이차 청병으로 다회를 마무리했다. 차 마시는 내내 춘차 걱정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간혹 춘차 가격을 묻는 분들께는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새로 한 주가 밝았다. 월요일이지만 막상 출발할 엄두가 안 난다. 머뭇거리고 있는 내게 약사 선생님이 일침을 주신다.
“운남 가신다면서 아직 출발하지 않으셨나요?”
완지급 급지완이라. 이럴수록 침착해야 된다는 생각만 다졌다.
일단 북경을 가 보기로 하고, 북경발 운남행 비행기를 예약했다. 내일 오후 3시35분발이다.
저녁 6시30분 황도발 북경행 버스에 오름으로써 춘차 구매의 본격적인 원정은 시작되었다. 침대버스이다. 여기서 북경까지는 12시간 남짓. 누워도 잠이 오지 않는다. 기차를 타면 8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인데 미리 예매를 하지 않아서 침대칸을 구할 수 없단다. 중국도 이젠 생활수준이 높아지다 보니 침대칸부터 동이 난다. 며칠씩 앉아서 기차를 타고 가는 풍경은 점차 줄어들어서 멀지 않아 화제꺼리로나 존재할 것 같다.
침대버스를 타 본 사람은 잘 알겠지만 버스 안의 환경은 계절적인 요인이 많다. 겨울철이면 따뜻해진 공기를 아끼기 위해서 환기를 거의 안 시키기 때문에 괴롭기 짝이 없다. 이렇게 차내부 공기가 탁해지면 의례 구토를 일으키는 사람이 있어서 시큼한 대기를 공유해야 한다.
완전히 따뜻해진 것은 아니지만 간간히 환풍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마음을 다소 가볍게 만든다. 북경행 승객들이라 문화 수준이 높아서인지 잡담도 거의 없고 금새 잠이 들었다.
2. 마렌다오
아침 6시가 되어서야 북경 동부 터미널에 도착을 했다. 터미널 앞에서 2위안에 4개하는 교자를 사 먹었다. 안에 고물이 있는 것을 교자라고 하고 안에 고물이 없는 것을 만두라고 한다. 우리 나라의 고기 만두는 여기서 교자라고 불린다. 교자도 크게 네 가지가 있다.
안에 넣은 재료에 따라 야채 교자와 고기 교자가 있다. 야채 교자라고 해서 쌈빡한 맛이 날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야채이기 때문에 식용유를 듬뿍 넣어서 오히려 더 느끼한 경우가 많다.
또 익히는 방법에 따라 찐만두(증교)와 삶은 만두(수교)가 있다.
필자가 먹은 것은 뉴로 청지아오(소고기 찐만두)였다.
마렌다오까지는 택시를 탔다. 시력을 기울여가면서 북경 지도를 들여다 보면 버스로 싸게 이동할 수 있겠으나 마음이 바쁜 탓이라 택시에 올랐다. 운전기사는 북경 토박이였다. 큼직한 얼굴에 빙그레 웃음을 띤 모습에 왠지 마음이 밝아졌다.
마렌다오에 도착하니 벌써 상점 문들이 열리고 있다. 몇 년전만 하더라도 보이차 상점이 거의 없던 곳이었다. 그런데, 물어보면 다들 10년은 넘었다고 한다. 연수를 속이는 것은 한국이나 진배 없다는 생각이 든다.
간단히 몇몇 보이차 가격을 물어봄으로써 응수 타진을 했다. 미리 많이 살 것이라고 말하고 도매가격을 물었다. 백 위안을 넘게 얘기한다. 깎으면 한참을 내려가겠지만 어차피 북경에서 사서는 단가를 맞추기 어렵다. 일반적인 북경 가격은 운남 가격의 3배다. 지금처럼 가격이 폭등하는 때에는 되레 북경이 쌀 수도 있지만 대체적인 가격은 그렇다.
마렌다오에 오면 수십 년 된 차가 즐비하다. 다들 어디서 가져왔단 말인가? 5년 전만 해도 여기에 보이차 가게가 눈을 씻고 찾아야 겨우 찾을 수 있었는데, 대체 이들은 이 오래된 차를 어디서 가져왔단 말인가? 선견지명이라도 있어서 차 장사를 시작하기 전부터 보이차를 사 모았단 말인가? 이들이 속여 파는 년수에 한국 상인들이 두세 배를 곱하면 한국에서는 갑자기 30-40년 산으로 둔갑을 한다.
생병(청병)의 경우 대체로 7년만 넘으면 거의 숙성이 되는데, 한국에서는 어찌된 영문인지 30년 된 생병도 아직 숙성이 덜 돼 있다. 기후나 지역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같은 지구상인데 신기하다. 언젠가 필자가 11년 된 생차를 어떤 모임에 조금 나눠 드린 적이 있는데, 대뜸 숙병이란 판정이다. 운남에선 7년 이상이 되면 비닐에 넣어 보관하기도 한다. 더 이상은 숙성이 안 된다는 것이다.
몇몇 작은 가게에 들러서 물어보니, 20년 이상된 차도 몇 톤씩이나 갖고 있단다. 대단들하다. 필자의 경우 매년 천편 정도씩 사 모았으나, 지금은 1,2 건이 있는 것도 드물다. 물론, 헤픈 인심 때문일 수도 있으나, 그만큼 해를 묵히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아마도 소장해본 분들은 동감하시리라 믿는다. 차가 있는 것을 알면 만날 때마다 나누자는 것을 철면피가 아니고서야 어찌 배겨나겠는가?
보이차집들만 보아 놓은 보이성이란 집단 상가에 들어섰다. 오늘은 여기서 승부수를 던져야 한다. 최근 갓 결혼한 복건성 차 주인이 있기 때문이다. 나이는 젊으나 호기가 하늘을 찌르므로 딱한 사정을 말하면 도와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친구의 처삼촌 중 둘이나 시솽반나에서 큰 차창을 하고, 장인 어른이 차청을 수집하러 다닌다. 이 친구는 어려서부터 차 가게에 일을 해 왔는데 올해는 드디어 자신의 가게를 가지게 되었다.
이 가게에 들르기 전에 이 가게에서 물건을 떼어 파는 가게에 먼저 들어갔다. 이 상인에게 응수 타진을 해 봐야만, 윗선의 거래 시세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버거운 질문을 수 없이 던지면서 나름대로 유도심문을 한다. 상대방도 보통 한국인이 아니란 것을 알아채고는 커버링을 더욱 높힌다. 예상 가격에 빡빡하지만 맞출 수 있다는 느낌이 오자 갑자기 포커 페이스를 풀고, 필자의 스무고개에 답해 준 쥔장에게 약간의 거래를 한다. 작년 춘차를 한 건 샀다. 만족은 아니지만 그래도 마수꺼리로 그만하면 되었다는 표정이다.
괜히 중국 차창 광고할 일이 아니므로, 지금부터 말하는 차창 이름을 “모”차창이라고 부르려고 한다. 글이란 것이 생명이 있어서 자칫하면 필자 개인의 느낌이 객관화 되어서 엉뚱한 뒤풀이가 되는 수가 많기 때문이다.
모차창 북경 지사는 비싼 임대료에도 불구하고 이름에 걸맞게 널찍하고 가지런하다. 젊은 새댁이 인사를 한다. 나이는 어리지만 직원이 아니라 사장 부인이다. 소수민족이면서도 이렇게 당당한 한족 사장의 부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이 새댁의 친정이 보이차로는 일가를 이룬 가정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연애할 때부터 잘 알고 지냈기 때문에 서로가 반갑다. 이 차창의 광주 지사에서 일하던 이 새댁을 지금 이 사장이 꼬인 것이 결혼까지 왔다. 사적인 비밀은 이쯤에서 지켜주기로 하고, 곧 나타난 사장에게 축하 인사를 던졌다. 이렇게 큰 가게를 이렇게 젊은 나이에 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덧붙였다. 2층에 차구 상점까지 더 내었다고 자랑을 한다.
현재 버는 것은 거의 없지만, 이 많은 직원들에게 봉급을 주면서 부도를 내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조심스레 말한다. 그렇다. 나이 25세에 이만한 안목과 배짱을 지녔으면 장래가 밝다. 패기가 만만하고 눈에 광채가 있다.
본론을 꺼냈다. 순간 난감하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물량도 2톤 밖에 안 되니 더욱 안색이 어두워진다. 당장 타협안이 제시되었다. 3월에 들여온 차 천여 편이 있는데 그걸로 안 되겠냐는 것이다. 내 차를 사는 것이면 몰라도 다른 사람들 부탁을 받아서 그런 것이라고 말하니 순간 멍해진다. 도저히 안 되는 가격을 말한다는 것이다.
필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오늘 운남으로 간다고 말했다. 젊은 사장이 쿤밍까지 가느냐면서 자기도 오늘 시솽반나를 간단다. 필자더러 시솽반나까지 같이 가잔다. 일단은 성공의 조짐이 보인다. 내심 반갑지만, 비행기표를 쿤밍까지 밖에 안 끊어서 쿤밍서 반나까지 버스로 가겠다고 대답했다. 젊은 친구가 펄쩍 뛴다.
“대체 쿤밍서 반나까지 몇시간 걸리는지 아는가”
“요즘은 길이 좋아져서 12시간이면 가잖아.”
답답한지 내 팔을 잡아끈다.
단골 비행기표 파는 여행사이다.
쿤밍서 비행기를 바꿔타고 시솽반나까지 가자는 것이다. 오늘 비행기라 할인이 안 된다.
며칠 전이면 500위안이면 탈 수 있는데, 750위안이다.
내숭을 한 번 더 떨었다.
“지금 차 값이 올라서 경비도 안 되는데, 이렇게 비행기 삯까지 내면서는 안된다.”
그랬더니, 젊은 사장이 드디어 걸려 들었다.
“리라오빤은 그런 사람으로 안 봤는데, 정말 쫀쫀하다. 반나에 가서 그 가격으로 차를 못 구해준다면 쿤밍서부터 더 들어간 경비는 내가 다 부담하겠다.”
나는 얼버무리는 말로 ‘쿤밍 있는 친구들한테 부탁을 할려고 했더니...’하면서 ‘그래도 내가 누굴 믿겠냐? 묘 사장이 날 좀 살려 달라.’고 은근히 기댔다.
쿤밍발 시솽반나행 7시 비행기표를 예매했다.
당장 점심 도시락이 날아왔다.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는데, 일어나서 가잔다. 알고 보니 이 친구는 2시 출발 북경발 시솽반나행 비행기였다. 먼저 반나에 가서 기다릴테니 필자더러 비행기를 갈아타고 오라는 것이다. 비행기표 파는 사장이 공항까지 태워다 줬다. 어림잡아 100위안은 벌었다. 보통 택시를 타면 고속도로비까지 120원 정도는 찍힌다.
묘사장은 차가 채 멈추기도 전에 내려서 ‘자이 젠’을 하면서 달려갔다.
필자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티케팅이 안된다. 공항을 이리 저리 돌아다니는데, 일단의 미국인들을 만났다. LA에서 온 패키지 팀들이었다. 퇴직한 부부들인데, 4주째 이러고 다닌단다. 다들 북경이 LA보다 더 화려하다면서 중국의 발전에 놀라는 눈치다. 아직도 한국 사람들 중엔 서울이 북경보다 더 번화하다고 믿는 분들도 많은데...
나보고 어딜 가냐고 해서 장난 삼아 “Eden"이라고 대답했다.
“Where?"
다들 입을 모았다.
지상에 낙원이 있다면, 운남 외에 어디에 있으랴.
3. 시솽반나(西双版納)
이 지명 중 ‘솽’은 발음이 무척 어렵다. 더구나 이름이 길기 때문에 다들 “반나”로 통칭한다. 반나는 필자도 이번이 세 번째이다. 이곳은 중국이라기 보다는 베트남에 속한다. 원래, 이곳이 태국인의 12마을이었고 당연히 태국 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베트남과 미얀마가 강해지면서 태국과는 떨어지게 되고 결국 중국에 들어오고 말았다. 스솽은 12(十双)을 다르게 읽는데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
북경에서부터 2시간 연착된 비행기 탓에 기내에서 내내 초초했다. 왜냐면 쿤밍에서 갈아타는 비행기를 놓치기 때문이다. 못내 안절부절하면서 공중소저(空中少姐, 스튜어디스)에게 항의를 했다. 승무원들은 되레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그 비행기도 십중 팔구는 연착이니 걱정이 없다고 한다. 빨리 내리도록 배려해 준다고 착륙 직전 비즈니스 클래스로 옮겨 주었다. 아뿔사 쿤밍 공항에서는 브릿지 차가 와서 버스로 운송하는 게 아닌가? 빨리 내려도 아무 이득이 없었다. 시솽반나 행 비행기는 3시간이나 연착을 해서 수속을 마치고도 찜통같은 대기실에서 졸아야했다. 늦어서 미안하다고 항공사에서 컵라면 하나씩 돌렸다. 다들 좋아라 하면서 컵라면에 물을 붓고 대합실에서 먹는다. 한국 같으면 몇 번이고 직원들이 머리를 조아릴 일이나, 여긴 예사다.
밥 먹을 생각도 없었다. 더욱이 전화가 안 된다. 공항 대합실에 공중전화가 불통이라니... 항의를 해도 담당자가 퇴근을 해서 내일 담당자에게 얘기하란다. 북경의 묘사장이 반나 공항서 기다릴 것을 생각하니 오금이 저렸다. 매일 아내한테 전화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전화가 안 되면 괜시리 불안하다. 반나에 가고 멍하이를 가면 국제 전화할 곳이 더욱 줄어든다.
12시가 넘어서 겨우 반나에 도착을 했다. 이럴거면 버스를 타고 오는 게 낫겠다고 투덜거렸지만, 버스는 쿤밍서 여기까지 12시간이다. 그래도 비행기가 낫지. 묘사장이 눈이 빠져라고 기다리고 있다. 나를 보더니 죽은 부모가 살아온 양 덥석 안는다. 아들 또래 중국인에게 도움을 받다니, 내심 내 자신이 측은하다. 어디서 구했는지 현대 소나타를 타고 나타났다. 중국에 이제 한국 차가 없는 곳이 없다. 한 마디를 더 거든다.
“일본차보다 한국차가 승차감이 좋다.”
마음속으로 ‘쎄쎄’를 할까 ‘스마?’를 할까 망설이다가 내뱉었다.
“쎄쎄!”
태국식 호텔에 묵을 것인가 일반 호텔에 묵을 것인가 묻는다. 좋을대로 하라고 했더니, 한 턱 쓰는 김에 태국식 호텔에 묵었다. 방 값이 1인실에 390위안이다. 자주 이용하므로 우대받는 것이란다. 으윽! 이렇게 비싼 방은 정말 오랜만이다.
새벽 1시가 가까운데 밥 먹으러 나가잔다. 야자수가 우거진 대로변에 포장마차 촌이 있었다. 꼬치구이 야시장이다. 이름모를 생선과 쇠고기로 허기를 채웠다. 들어오는 길에 묘사장이 억지로 과일을 사줬다. 산죽(山竹), 둘리안 같은 비싼 과일도 여기는 싸다. 산죽은 500그램 한 근에 4위안, 둘리안은 6위안 몽키 바나나는 1위안이다.
밤새 모기 때문에 더러 깨기는 했지만, 남국의 정원에서부터 폐부로 전해오는 신선한 공기에 짧은 밤을 아쉬워했다.
4. 멍하이(勐海)
어디서 구했는지 도요타 승합차에 오르란다. 가만히 보니, 나 외에도 약 5명이 더 있었다. 베이징(北京 북경), 시안(西安 서안), 상하이(上海 상해), 광조우(廣州 광주), 안지(安溪 안계) 등지에서 보이차를 사러 온 상인들이다.
올해 보이차가 오른 탓이 모두들 광동 상인들 탓으로 돌려졌다. 광동 상인들이 수 년간 보이차를 사 모우고, 올해 드디어 싹쓸이를 했다는 것이다. 광동상인들이라면 그럴 만 하다. 광동에서 온 상인이 어깨를 으쓱이면서 광동인의 위세를 과시한다. 광동이나 복건성 상인들의 단합력과 상혼이면 이만한 것은 문제도 안 된다. 멍하이(勐海 )로 가는 어귀마다 모차를 담은 마대푸대가 쌓여있다. 차에서 내려서 일일이 물어봐도, 과연 이미 팔린 물건이란다. 입도선매인 셈이다.
가는 길에 잠시 점심을 먹었다. 운남을 오면 음식 맛이 한국 양념과 거의 같아서 옛날 여기가 우리 땅이었을 것이란 막연한 생각이 들곤 한다. 아침을 호텔 조식으로 떼웠기 때문에 시장하던 참이라 허겁지겁 먹어 배가 무를 즈음, 본 요리가 등장했다. 이럴 땐 요즘 젊은 친구들 말로 ‘허걱’이라고 해야 한다.
토종닭 구이였다. 그것도 1인당 1마리였다. 묘사장이 객기를 부린다. 특히 푸젠(福建, 복건) 상인들은 누가 의시대는 꼴을 못 본다. 안계 친구가 실룩거리자 묘사장이 닭구이 1마리에 10위안이니 별거 아니라고 말한다. 배가 불러서 닭다리만 한 쪽 뜯었다. 숯불구이인데 입에서 녹는다. 여기 말로는 꿔지(닭구이)라고 부른다.
푸젠인에게 뭔가 자랑거리를 내어 놓으면 한참을 듣고 있는다. 그리고는 한 마디로 초를 친다.
“니 슈어 전머양?(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름대로 장사에도 기질이 있어서 지고 못 배긴다.
가령 어떤 친구가 A 물건을 만들었다고 치자. 이 물건을 시장에 20위안씩 팔아서 대박이 터지면, 곧장 짝퉁 물건이 나온다. 짝퉁이 나오기 시작하면 20위안짜리를 2위안으로 가격을 내려버린다. 그러면, 짝퉁 만드는 회사는 영락없이 손해를 보게 마련이다. 2위안은 생산원가도 안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여기선 ‘물 먹인다’고 한다.
화장실 가는 길에 식당 위 정원을 찍었다. 작은 연못이 위에 연꽃이 유려하다. 이 허술한 식당의 주인도 이런 풍류를 즐기는데... 곳곳에 모차 말리는 작은 대바구니가 널려 있다. 보이차가 비싸다고 여기까지 와서 사가는 내 자신이 얄밉다. 이 차 한 장에 얼마나 많은 땀과 피가 배어있는가? 보이차는 단순한 물건을 넘어서서 운남인의 혼이 배어있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5. 모(某) 차창 - 이름을 밝히지 못해 죄송합니다.
멍하이에서 멍아(勐阿 맹아)로 접어든다. 멍아는 멍하이에 속한 전(鎭 진)이다. 포장도로가 끝날 무렵 차창이 나선다. 사장은 하니족이다. 중국에는 56개 소수민족이 있고, 운남에는 52개 소수민족이 산다. 곳곳에 소수민족들의 텃세가 있다. 이쪽 난뤄산 일대는 하니족들의 보금자리이다. 전에 멍하이에서 작게 차창을 하다가 국영차창을 세내어서 이곳으로 이전했다. 사장 나이래야 겨우 32세! 한 때는 식인 풍습이 있던 곳이라 으스스하게 생각하면 더욱 스릴이 있다.
32세에 이만한 차창을 하게 된 것은 개인의 힘은 아니다. 가족들과 친지들이 밀어주는 덕분이다. 지금은 1억위안(125억)을 넘는 부자가 되었지만, 친척들 대하는 태도는 겸손 그 자체다. 나이는 어려도 제대로 살아온 모습이 보인다.
필자랑 알게 된 것은 불과 3년 남짓이나 어디 하나 흠 잡을 데가 없다.
우선 조카사위인 북경 묘사장의 말을 듣더니 눈살을 찌푸린다. 조용한 말로 “자네는 너무 성급해서 탈이야”라고 나무란다. 그러더니, 여기 저기 전화를 한다. 남방 말이라 1/3도 못 알아듣지만, 앞뒤를 맞춰보니 친척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눈치다. 그러더니, 묘사장과 나더러 어딜 가자는 거다. 지명을 분명히 말했는데 기억이 안 난다. 내가 한자로 적어달라고 하니, 자신들도 중국어로 어떻게 적는지 모른단다.
현대 4륜 이었는데, 서울대공원에도 이만한 놀이기구가 없을 것이다. 비포장을 사정없이 달렸다. 고등학교 체력장 때 턱걸이 30개 하던 팔에 힘이 완전히 빠져서 부들부들할 즈음 도착한 곳은 묘사장의 장인어른 댁. 장인어른이래야 이제 50세이다. 집안의 어른다운 위엄으로 멀리 온 손을 반겼다. 한국에서 왔다고 인사를 하니, 외국 사람은 이 마을에 처음이란다. 묘사장과 한참을 옥신각신했다. 무리한 가격을 부탁하는 마음이 저렸다.
마당에 뛰어노는 닭을 잡더니, 곧 구이가 되어 저녁 밥상에 올랐다. 묘사장 장모님이 내게 말을 건다. 내 성이 “이”라고 하니, 동성이라며 반가와한다.
나보고 당장 “띠디(남동생)”이라 부른다.
따져보니 나보다 어리다.
산간오지 마을은 위성 안테나로 바깥세상을 본다. 묘사장이 올 춘절때 사 드린 거란다. 일년 내내 춥지 않은 곳이라서 방한 시설은 없다. 바닥은 신을 신고 들어가며, 침실은 시멘트로 높게 만든 침상이 있다. 슬하에 4남매인데, 아들하나는 쿤밍서 수리조합에 나가고 나머지 딸 셋은 모두 다도(茶藝)학교에 보냈다. 차로 시작해서 차로 끝나는 가족이다.
한참을 토론을 하더니 묘사장이 얼굴이 밝아진다. 묘사장 장인 어른의 동생 중 6째, 7째가 차창을 한단다. 6째 동생과 7째 동생이 도와서 만들어 준단다.
밤중에 차창에서 4륜차를 보내왔다. 미쓰비시 파제로이다. 현대차는 차창 주인이 타고 일제차는 직원이 타고 다닌다. 여기서는 현대가 더 알아준다. 기분이 좋다.
멍아에서 30위안짜리 여관에서 묵었다. 어제 390위안짜리 호텔보다 더 편했다. 이 공기를 한국에 가져가고 싶다. 하루에 단 5분만이라도 이런 공기를 마시며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물맛도 전혀 오염이 없다. 달다. 쇳내가 전혀 나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니 개운하다. 10년 째 피곤함이 일야(一
夜)에 씻은 듯하다.
차창에 가기 전에 옆방의 묘사장 방을 두드리니 아직 자고 있다. 얼마나 부담이 되었을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언젠가 갚아야지.
우체국에 가도 전화가 안 된다. 왜 안 되냐고 따져도 소용없다. 80년대 우리나라 공무원식이다. 철밥통이 보장되기 때문에 인정사정이 없다. 항의해도 가만히 노려볼 뿐 거만한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 중국 전설에 여와란 복희씨 딸이 인간을 만들었다고 한다. 손으로 하나 하나 만들다가 지겨워서 나중엔 새끼 줄에 진흙을 뭍혀서 막 흔들어서 대량 생산을 했다고 한다. 손으로 일일이 만든 것은 관원(공무원)이 되고 진흙에서 아무렇게나 떨어져 나온 것은 백성이 되었다고 한다. 아직도 이 전설 속에 있는 중국! 관료주의가 팽배해있다.
차창에 가니, 언제 나왔는지 묘사장 장인이 나와있다. 자세히 보니 차창 사장과 많이 닮았다. 다만 카리스마가 더 있어 보인다. 단아한 몸이지만 위엄을 부리면서 물담배를 빨아 당긴다. 이 차창의 쥔장 아내인 경리가 몹시 심술이 난 얼굴로 장부를 들고 앉아있다. 계약을 했다. 떠듬거리는 중국어로, 한국 친구들에게 많이 소개하겠다고 했다. 발린 소리지만, 이 외에 주장할 구실이 없었다. 한국 있는 지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차창 사진을 찍었다. 아직도 보이차가 만들어지는 자세한 공정을 모르는 분들이 많다. 차창 주인인 왕사장에게 사진을 공개하지 않겠다는 조건 하에 찍었으므로 약속을 지켜 공개적으로 올리지는 않을 것이다.
반장차를 만들고 있었다. 반장촌에서 차잎을 땄다고 해서 반장(班章)이란 이름이 붙는다. 맛이 쌉싸름한 것이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는 남방 사람에게 딱이다. 오래된 고목에서 딴 차잎은 노반장이라고 부르고, 고반장이라고도 부른다. 모차가 1킬로에 1,500위안이 넘는다면서 혹시 한 장이라도 그냥 들고 갈까봐 안달이다. 샘플로 한 장을 달라고 했더니, 소병으로 하나 권한다. 쫀쫀하다.
가공비는 들쑥 날쑥이다.
원래 가격은 돌로 누르는 것은 1장에 1킬로에 12위안이고, 기계로 찍는 것은 1킬로에 8위안이다. 양에 따라서 가격이 좀 달라진다. 10톤 가공할 때의 가격이다.
돌로 찍는 것은 약 450킬로그램의 돌로 누른다. 입김을 불어 넣을 때 선선히 공기가 들어간다. 잘 부스러지지만 빨리 익는다. 옛날 방식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는 이런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맛이 빨리 들지만 깊지 않다.
기계로 찍는 것은 잎맥은 상하지만, 메주 눌리듯이 해서 천천히 익으면서 감칠 맛이 난다. 기계로 누른 것은 오래 되면 숙차라고 오해를 많이 한다.
내 차는 증기에 2분을 쐬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리고, 누르는 것은 돌로 기계로 두 종류를 시켰다.
운에 맡긴다. 어떤 분에 어떤 차가 들어갈지는 그것마저 구분시키기엔 염치가 없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일단 달성한 셈이다.
여유가 생기니 다른 사람들도 보인다. 차창 앞에 트럭들이 장사진을 치고 서 있다. 10톤 이하는 가공을 하지 않는다고 일일이 돌려보낸다. 여기서는 나처럼 2톤 정도로는 명함도 못 내민다. 또 일단의 상인들이 들어온다. 악수를 나누다 보니 광주에서 단계석 차판을 만드는 사장이다. 누군가 돌차판을 구해달라는 분이 계셔서 정보를 구했다. 동류의식에서인지 쉽게 여러 가지 설명을 덧붙여가면서 입에 침을 튀겼다. 한국 사람들이 단계석이 아닌 오석 차판을 더러 사간다고 귀뜸이다.
6. 난뤄산(南糯山, 남나산)
난뤄산은 6대차산 중 하나이다. 어떤 분들은 이 곳을 6대 차산에서 뺀다. 그러나, 하니족들이 알면 큰일 날 소리다. 매년 춘절(설날)때 이 신성한 산에 모여서 잔치를 벌인다. 하니족에겐 6대 차산에 평범하게 나열되어 있는 것도 서운해서, 차산 중에 제일이다. 여기엔 800년된 야생차가 있다. 얼마 전까지 스마오(思矛)에 3,200년된 차나무가 있었는데 관광객들 때문에 죽었다. 이 일대에선 800년이 으뜸이란다.
필자는 시간이 없어서 그냥 갔으면 하는데, 차창 사장과 묘사장이 가보잔다. 묘사장도 그 나무를 본 적이 없단다. 외진 산비탈을 오르는데, 시멘트 포장을 하고 있었다. 공사판이 벌어진 산길을 그것도 좁은 길을 여러 차들이 비켜가면서 가자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마지막 마을이 나오자 차를 세우고 어떤 하니족 집으로 들어갔다. 육촌이라고 소개를 했다. 거기서 오토바이를 빌어 이동을 했다. 필자도 한 오토바이 하는데, 차창 사장이 맘이 놓이지 않는지 나보고 뒤에 타란다. 몸무게 85킬로그램의 필자가 몸무게 55킬로그램의 청년에 매달려서 갔다. 천길 벼랑길을 오토바이로 달리는 것도 이 번 여행의 시종일관한 위기감에 일맥상통한 느낌이다. 가는 길에 잠시 오토바이를 세우고, 차나무에 기생하는 겨우살이 비슷한(이것도 차로 마신다.) 식물을 보여주기도 하고, 나무 위에 올라가서 차잎을 따는 사람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눈다.
별로 굵어보이지 않는 나무인데, 온통 철조망에 가려있다. 이 부근에서 가장 오래된 800년 이란 수령 때문에 일본인들이 와서 차잎을 자꾸 따가기 때문에 요즘은 지킴이까지 서 있다. 일본인들은 경운기를 타고 와서 차 잎 하나에 천 위안씩 뇌물을 주고 몰래 기념품으로 가져간다고 귀뜸이다. 이 차나무 지키는 청년이 차창 사장과 같은 하니족이다. 그냥 차잎을 하나 따 줄까 묻는다. 필요 없다고 했다. 우리 나라 나무는 아니지만, 이런 기념수는 보호가 되어야 된다.
오는 길에 큰 정자가 태국식 건축 양식으로 서 있었다. 차창 주인이 새로 짓는 건물이다. 하니족 전통 양식이란다. 지붕은 태국식으로 뾰족하고, 1층은 주춧돌에 기둥으로 되어 있는데, 창고로 쓸 예정이란다. 2층은 전망이 좋아서, 반은 찻집을 하고 반은 여관을 할 예정이란다. 미리부터 이런 저런 투자를 해 두는 젊은 사장의 패기가 부럽다. 나중에 친구들과 여행을 오면 여기서 하루를 묵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는 길에 멍하이의 따이(大益 대익)차창에 들렀다. 이 부근 차창의 백미이다. 브랜드 이미지가 강해서 비싸다. 일반 차창의 차보다 1/3은 비싸게 팔린다. 이름이 좋다. 여기에도 트럭이 줄을 섰다.
오늘은 따이주(汰族,태족)의 잔치다. 곱게 차려입은 색시들을 오토바이에 싣고 건장한 남정네들이 내달린다. 알고 보니, 민족 바자회. 집에 있는 물건들을 들고 나와서 서로 사고 팔고 한단다.
비행장에 도착하니 이제 덥다. 며칠간 긴장을 해서, 이 열대 지방에 와서도 더위를 몰랐다. 마음이 느슨해지고 잠이 쏟아진다. 갑자기 소나기다. 일종의 스콜이다.
소나기가 되어 왔다가 가는 필자의 모습이 빗줄기에 어린다.
인생도 한 바탕 소나기일 터!.
기행문은 필자 개인의 주관적인 글입니다. 신문 기사나 객관적인 글과는 다릅니다. 제가 느낀대로 쓴 것이니 너무 민감하지 마시구요. 세익스피어를 읽고 리어왕이 역사적인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하는 것과 같네요. 중국은 물류 비용이 비싼데, 어떻게 운남 가격과 북경 가격이 같겠습니까? 항공 운임만 차 한 편당 0.5위엔입니다. 광주가 운남보다 더 근접하죠. 거리가 가깝습니다. 한국도 남쪽으로 갈수록 주유소 기름값이 싼 이유가 정유 공장이 다들 남쪽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보이차 가공시 사용되는 압모석은 대체로 25~37kg정도이고, 모차의 증기를 쬐는 시간은 40~50초 정도가 일반적입니다. 님의 말대로 450kg의 압모석을 사용한다면 그 돌을 들고 사용할 사람이 있을까요? 450kg의 돌로 2분 동안 증압한 차를 누른다면 병차가 아닌 말 그대로 떡이되고 맙니다.보이차에 대해서 잘모르는 분들을 위해서 지적해 둡니다. 기행문은 개인의 주관적인 글이 아니라, 실제 행한 것을 기록하는 것이지, 행하지도 않고 생각대로 쓴다면 그냥 새파란 거짓말이 됩니다. 주의하십시오.
중국어를 1개월 공부했다는 님의 중국어 실력으로 소수민족말을 1/3을 채 못알아듣는 정도라면 그냥 거짓말이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군요^^.(새파랗다 못해 새빨갛죠^^) 중국인에게 물었읍니다.한국에서 자란사람이 1개월 중국어 공부하고,운남소수민족 말을 1/3을 알아들을 수있냐고?: 거짓말이랍니다. 무조건 님의 글을 거짓말로 몰아 부친다는 것을 반박해 주세요, 제발 새파란 거짓말장이님^^.
첫댓글 맹해의 大益차창보이차가 기가 막히지요^^.
“니 슈어 전머양?(무슨 소리 하는 거야?) ???
기행문은 필자 개인의 주관적인 글입니다. 신문 기사나 객관적인 글과는 다릅니다. 제가 느낀대로 쓴 것이니 너무 민감하지 마시구요. 세익스피어를 읽고 리어왕이 역사적인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하는 것과 같네요. 중국은 물류 비용이 비싼데, 어떻게 운남 가격과 북경 가격이 같겠습니까? 항공 운임만 차 한 편당 0.5위엔입니다. 광주가 운남보다 더 근접하죠. 거리가 가깝습니다. 한국도 남쪽으로 갈수록 주유소 기름값이 싼 이유가 정유 공장이 다들 남쪽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민감할 것 까진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는 곳인데 최소한 거짓말은 빼셔야죠^^.
大益牌란? 1987년에 맹해차창에서 주책상표로 상표등록한 것인데, 님은 맹해차창과 대익차를 혼동하신 것 같군요^^.맹해에 대익차창은 없읍니다.다만 맹해차창의 대익패 시리즈는 존재합니다.물론 (올해차에 한해서) 가격도 싼차에 비해서는 5배 이상하는 것도 있읍니다.
보이차 가공시 사용되는 압모석은 대체로 25~37kg정도이고, 모차의 증기를 쬐는 시간은 40~50초 정도가 일반적입니다. 님의 말대로 450kg의 압모석을 사용한다면 그 돌을 들고 사용할 사람이 있을까요? 450kg의 돌로 2분 동안 증압한 차를 누른다면 병차가 아닌 말 그대로 떡이되고 맙니다.보이차에 대해서 잘모르는 분들을 위해서 지적해 둡니다. 기행문은 개인의 주관적인 글이 아니라, 실제 행한 것을 기록하는 것이지, 행하지도 않고 생각대로 쓴다면 그냥 새파란 거짓말이 됩니다. 주의하십시오.
아래 카페에 그 돌에 대한 사진이 있으니, 직접 보고 거짓인지 아닌지 생각해 보세요. 안 보신 분이 더 잘 아시는 것 같아서 신기합니다. 25-37킬로로 눌러서 보이차가 된다면야 얼마나 편하고 좋겠습니까? ^^cafe.daum.net/qingdaoclinic
이 글은 여행다회 후기로 옮겨 드림니다...홍보용 글은 정보공유의 홍보방들에 하시면 되고,이글은 홍보와는 상관이 없어 보이니 여행다회후기로 옮겨 드림니다.공동구매 후기인 셈이네요..운남여행하는 사진도 있었으면 더 현장감이 있을것 같은데..조금 아쉽습니다...^^
대단한 정성입니다. 감동 먹었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느껴지는 훈훈함이 더욱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진도 보고 싶어 청도한인병원 카페에 가입했죠.^^
흥미진진하게 잘 읽었습니다.
재밌습니다.바람이겠죠.인생^^
중국어를 1개월 공부했다는 님의 중국어 실력으로 소수민족말을 1/3을 채 못알아듣는 정도라면 그냥 거짓말이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군요^^.(새파랗다 못해 새빨갛죠^^) 중국인에게 물었읍니다.한국에서 자란사람이 1개월 중국어 공부하고,운남소수민족 말을 1/3을 알아들을 수있냐고?: 거짓말이랍니다. 무조건 님의 글을 거짓말로 몰아 부친다는 것을 반박해 주세요, 제발 새파란 거짓말장이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