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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 칸트 Kant (1724~1804)】 "실천이성비판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
순수이성비판이 나온지 7년 만에 실천이성비판이 나온다. 그래서 이 책을 제 2비판이라고 한다. 이 비판에서 순수이성비판에서 해결되지 않는 자유와 영생과 신의 문제를 해결한다. 이 세가지는 객관적 인식으로 해결할 수 없고 오로지 주체적 실천으로만 해결할 수 있다. 이 세가지 가운데서 자유를 제일 먼저 비판한다. 그것은 실천이성의 본질이 자유이기 때문이다. 성인의 본질은 자유함에 있다. 자유라하면 말로하면 힘을 가졌다는 말이다.
칸트는 실천이성의 본질을 자유라고 하여 신과 영생의 문제를 해결하고 실천이성의 형식을 도덕이라고 하여 인간과 사회와의 문제를 비판하려고 한다.
칸트가 말하는 도덕이란 무엇인가? 도덕이란 바로 산다는 것이다.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사는 것이 문제다, 칸트의 도덕의 근본법칙을 "네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도록 하라."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바로 살라는 말이요 나와 이웃이 모두 잘 살라는 말이 아닌가? 나와 남이 다 잘사는 방법은 모든 사람이 다 바로 사는 방법 밖에 없다. 바로 사는 것 이것이말로 도덕의 근본법칙이다.
칸트는 자유와 도덕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한다. "자유는 도덕의 존재근거요, 도덕은 자유의 인식근거다"
그러나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자유를 분석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도덕율을 분석해봄으로써 자유를 헤아리는 척도로 삼을 뿐이다.
칸트는 맨 처음 실천이성의 법칙을 정의하는데서부터 출발한다. 실천이성법칙이 되기 위하여 구비해야될 네가지 조건을 정리라고 하여 1.보편적 2.필연적 3.형식적 4.자율적이라고 한다.
보편적이라는 말은 도덕은 누구나 다 따라야 한다는 말이다. 모든 이성적 존재도 도덕율에 제한을 받아야 한다. 둘째 필연적이라는 말은 도덕에는 강제성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다른 힘에 의한 강제가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지배하는 강제다. 실천이성에는 자기가 자기를 지배하는 힘이 있다.
셋째 형식적이라는 말은 차라리 형상이라는 말이 더 적절한지 모른다. 형상과 질료 말이다. 칸트는 모든 피조물 속에 장엄하게 나타나 있는 신성이 생각하는 인간 속에도 깃들여 있다. 인간은 열정으 폭풍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바다처럼 고요한 신성을 간직하고 있다. 고 말한다.
끝으로 자율적이라는 말은 실천의 모든 동기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것이다.
실로 도덕과 자유는 하나의 두면으로서 나눌래야 나눌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그대로 그것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도록 행동할때 가장 행복하다.
바로 사는 것이 건강한 삶이요 인간은 건강할 때 가장 행복할 수 있다. 자유는 자기가 자기를 이길때 나타나는 제왕의 품격이요 방종은 자기가 욕정에 끌려 다닐때에 일어나는 노예의 형태다.
칸트 당시 철학자 엘랄트는 내 생애에 있어 부 잡을 수 있는 모든 향락도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의 행간에서받은 영향으로 하여 내 심정은 전율을 ㄹ으키고 모든 향락은 그 광채를 잃어버렸다.고 회고하였다. 칸트는 언제나 행복은 언제나 도덕이 완성되어 인간이 인간다운 고귀성을 지닌 후에야 이뤄지는 것으로 생각했다.
덕복일치다. 덕이란 바로 사는 일이요 바로사는 것은 이 세상에서 죽는 것이다. 덕복일치란 그야말로 죽음을 넘어서 사는 경지이기 때문에 칸트는 이러한 세계의 주인을 신이라고 부르고 이러한 세계를 최고선이라고 하였다. 칸트는 모든 사림에게는 자신의 마음을 속삭여 주는 양심의 소리로서 누구나 선천적으로 도덕율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칸트는 인간에게서 인격의 한없이 숭고함을 보여준다.
" 생각하면 할수록 언제나 새롭고 복받쳐오르는 감탄과 숭경으로 내 마음을 충만케하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머리위에 무수히 빛나는 별세계요 또 하나는 내 마음 속에서 언제나 움직이는 도덕율이다. 나는 이 두가지를 내 앞에 보고 직접 내 생애와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한다.
감각적 여건을 따라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도덕적이 아니다. 괴테도 향락을 천박한 것이라고
했지만 칸트는 쾌락을 인간의 고귀함과는 상관없는 걸로 여겼다.
'내 위의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법칙' 칸트가 자신의 도덕철학을 정리한 실천이성비판 결론에서 이야기한 말이다. 그리고 칸트의 묘비명에 그를 기리기 위해 적은 문구이기도 하다. 저 말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리고 칸트의 도덕법칙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다시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물론 순수이성비판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칸트의 이론은 관념어에 대한 정의, 복잡한 구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하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늘 하던 대로 칸트는 어떤 시대를 살았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핵심적인 구조만 짚어보려 한다. 그러고 나서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 잠시 생각해본다.
칸트의 도덕은 인지의 과정을 대상 중심에서 주체 중심으로 뒤집은 것과 마찬가지로 기존의 관념을 뒤집는 것에서 시작한다. 칸트 이전, 고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 도덕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선'이었다. 진, 선, 미라고 부를 때의 그 '선'말이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도 종종 사용하는 개념이다. 이때 '선'이라는 개념은 무엇을 의미할까?. 쉽게 말해 '좋은 것'이다. 선의 개념을 처음 이야기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의 행동이 '선'을 향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에게 인간이 향해야 하는 최고선은 '행복'이다. 즉 좋은 행동이란 무엇인가 하면, 행복을 증진시키는 행동이다. 우리 공동체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행동한다면 그 행동은 도덕적이어야 한다. 서양뿐 아니라 동양에서도 이러한 개념은 유사하게 형성되었다. 오히려 서양에서는 칸트 이후 이러한 관점이 뒤집히게 되는데, 동양에서는 꽤 오래 지속된다. 오늘날에도 동양에서는 선에 기반한 도덕관념이 유지되고 있다. 동양에서는 선이 내면화된 것을 덕이라고 이야기한다. 많이 들어보셨을 텐데, 우리가 덕이 많다 라고 이야기할 때 선이 내면화되어 있는 사람을 이야기한다고 볼 수 있다. 공동체의 행복을 위한 마음이 행동에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사람이라고 할까?.
아무튼 칸트가 뒤집은 것은 이러한 선 중심의 도덕관이다. 칸트는 선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법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선은 우리 공동체에게 좋은 것, 어떤 의미에서는 주관성을 내포하는 개념이라고 본다면 법은 의무다. 지켜야 하는 것이며 객관성을 내포하고 있다. 칸트가 법칙 중심의 도덕 철학을 만들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시대상도 당연하게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 칸트가 살던 시대는 도시가 만들어지고 거대해지던 시기다. 과거에 마을, 장원과 같은 공동체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사람들의 삶의 단위가 도시라는 거대하고 복합된 공간으로 옮겨지던 시기 말이다. 도시보다 작은 마을 단위에서는 서로를 잘 알고 있다. 그뿐 아니라 생활 방식도 유사하다. 대부분 농사를 짓고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하게 지낸다. 공동체의 선, 좋은 것을 결정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비슷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비슷한 이해관계를 가지게 되고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된다. 나에게 좋은 것과 우리 공동체에게 좋은 것이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도시는 그렇지 않는다. 도시는 개인적인 공간이며, 사람들은 서로 다른 생활 방식을 가지고 있다. 생계를 유지하는 방법도 다르다. 나에게 좋은 것은 상대에게 나쁜 것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도시라는 공동체에서 공동의 선을 규정한다는 것은 쉽지 않을 일이 된다. 기존의 '선' 중심 도덕 관념이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함께 보편적인 것을 추구했던 칸트라는 사람이 맞물려 법칙 중심의 도덕 관념을 만들게 되었다. 개인적인 이해관계와 무관하게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따를 수 있는 도덕 법칙을 찾게 된 것이다.
그래서 칸트는 개인적이면서도 보편성을 띄는 도덕을 만들어야 했다. 개인적인 공간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으면서도, 모두가 같은 도덕을 가질 수 있는 원리를 구성해야 했다. 이를 위해 칸트는 내가 나의 도덕법칙의 입법자가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법 중심의 도덕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다른 사람이 만들어 낸 법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도덕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우리 사회에 만들어져 있는 법을 지키며 살아간다고 할 때 법을 지키는 이유는 처벌이 두려움이 크다. 도덕과는 느낌이 다르다. 칸트는 도덕적이라면 스스로 법의 입법자가 되고, 이 법을 존중하는 마음, 즉 양심에 따라서 자신이 만들어 낸 법을 지키며 살아갈 때 도덕적이라고 이야기한다. 공동체의 규범이 아닌, 자유로운 의사결정 과정에서 스스로 도출한 법칙을 따르는 것이 칸트의 도덕이며 여기서 인간의 '인격성'을 찾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자율적 입법과 법률의 준수가 가능한 것이 인간에게 다른 동물과 다른 존엄성을 부여한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칸트가 이야기한 자율적 도덕 법칙의 입법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 스스로 법을 만든다고 해서 내 마음에 드는 행동을 모두 해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여기에는 엄격한 도덕 법칙이 따른다. 칸트는 우선 좋고 나쁜 마음에 따라 하는 행동은 선하지 않다고 규정한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우리가 길을 지나거나 TV를 보다가 어려운 사람들을 보고 기부를 할 때 동정심이나 안타까운 마음, 혹은 불편한 마음과 같은 감정에 따라 행동한다면 선한 행동이 아니라는 뜻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 행동은 자신의 감정을 회복하기 위한 행동이라고 볼 수도 있고, 보편적인 도덕 법칙을 만들고자 했던 칸트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감정이 사람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도덕적이라고 정의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칸트에게 도덕적인 행동은 그 동기가 반드시 스스로 입법한 도덕 법칙에 대한 존경에서 와야 했다. 자 그러면 그 도덕 법칙은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가, 여기서 정언명법이 등장한다. 이름만 들어도 복잡해 보이는데, 무슨 말이냐 하면 칸트가 정의한 '형식'이다. 칸트는 정언명법의 형식에 따라서 결정된 법칙은 도덕적이라고 이야기한다. 여기서도 이전의 도덕 철학과 다른 칸트의 특징이 드러나는데, 칸트는 도덕을 이야기할 때 어떤 행동만을 규정하지 않는다. 정언명법은 형식이며, 이러한 형식에 맞춰 각자가 스스로 법칙을 세우면 된다는 뜻이다.
정언명법은 이러하다. '마치 너의 행위의 준칙이 너의 의지에 의해 보편적 자연법칙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행위하라'말이 복잡해 보이는데, 간단히 하면 이렇다. 준칙이라는 건 우리 자신의 주관적인 기준이다. 나에게는 삶을 살아가는 기준이지만 아직 보편적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준칙이 보편적이라고 했을 때 괜찮다고 생각되면 그렇게 행동하라는 의미다. 항상 정언명법이 나올 때 등장하는 예시인 거짓말을 통해서 생각해보면 이렇다. 나는 거짓말을 해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직 준칙이다. 칸트는 이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되는 상황을 상상해보라고 한다. 모든 사람이 거짓말을 한다. 그러면 그 사회는 올바르게 돌아갈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거짓말은 도덕 법칙이 되지 못한다. 복잡해 보이지만 결국 어떤 행동을 할 때 모든 사람이 그 행동을 해도 괜찮겠어?라고 물어보는 것이다. 그래도 된다면 도덕적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물음을 통해 우리는 자율적인 입법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정언명법을 통해서 칸트는 모든 사람이 같은 도덕 법칙을 가질 수 있다고 봤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에 동일한 원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율적 입법과 이를 위한 정언명법의 규칙이 바로 칸트 도덕법칙의 기본적이 원리다.
칸트의 도덕법칙은 강력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답을 쉽게 제시해주지는 못한다. 예를 들어 오늘날 쟁점인 표현의 자유, 소수자, 낙태와 같은 문제는 정언명법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사람은 모두가 자유롭게 표현하는 사회가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언명법에 따라 입법할 지 모른다. 하지만 이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사회는 미풍양속을 해치기 때문에 나쁜 사회이며 정언명법에 따라 입법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어떤 문제들은 칸트 이전의 선, 좋은 것을 결정짓는 문제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칸트의 도덕 법칙은 보편적인 원칙, 기본적인 것을 세울 때 의미가 크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원칙, 자유와 평등에 대한 원칙과 같이 거대하고 근간이 되는 도덕 법칙은 정언명법에 의해 확립될 수 있다. 또 칸트가 제시한 각자가 자신의 입법자가 되는 행동은 정언명법을 잠시 놓고 보더라도 오늘날 점점 더 중요한 개념이 아닐까?
현대 사회는 너무나 복잡하고 다양하다. 모든 사람을 획일화된 법으로 규정하는 것이 쉽지 않다. 물론 법을 고쳐나가면서 다양한 행동을 규정해갈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복잡해진 법은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된다. 법을 다루는 사람들만이 이해할 것이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법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개인이 사회에 줄 수 있는 영향력은 반대로 점점 더 비대해지고 있다. 과거에는 사회에 해를 끼친다고 할 때 그 영향력이 크지 않다. 물론 그 사람이 높은 자리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을 다룰 수 있는 힘이 있다면 다르겠지만 일반적인 사람이라고 하면 자기 주변의 사람을 해치는 게 가장 문제 되는 일 중 하나였다. 하지만 요즘은 마음만 먹으면 더 큰 범죄도 저지를 수 있다. 칼 밖에 없던 사회에서 많은 사람을 해칠 수 있는 수많은 도구가 넘치는 사회가 됐다. 우리를 편리하게 해주는 자동차도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많은 사람에게 위험한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이러한 개인을 모두 규제하지는 못한다. 규제한다고 하더라도 사후적 규제일 뿐이다. 범죄를 저지른 후에 처벌하게 된다. 하지만 이미 저질러버린 일은 되돌릴 수 없다. 더군다나 그러한 범죄의 영향력이 점점 더 커지는 사회다. 굳이 강력범죄가 아니더라도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가능성은 더 커졌다. SNS를 통해 내가 퍼트린 내용이 순식간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이러한 사회가 올바르게 돌아가기 위해서는 사회가 가진 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행동을 스스로 규정하고, 스스로 입법자가 되는 사회가 필요하다. 칸트가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가 스스로 행동의 입법자가 되고 이 법을 존경하며 행동할 때 사회가 더 건강하고 도덕적인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처음에 이야기한 칸트의 묘비명, 그 문구를 이야기할 때 칸트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머리 위에 놓인 수많은 별이 빛나는 하늘을 볼 때 스스로 한없이 작은 존재라는 것을 느낀다고, 하지만 자신의 마음속을 보게 되면 자율적인 입법자가 될 수 있는 존재가 있다고 말한다. 세상에 수많은 존재가 있지만 인간과 같이 스스로의 행동을 자율적으로 규정하고 법칙을 만들 수 있는 존재는 유일하다는 뜻이다. 칸트는 그 지점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느낀다. 법을 만들고 규칙을 따르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을 느낀다. 칸트는 자유가 없다면 오히려 인간이 이러한 도덕법칙을 따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법칙의 존재는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자유로움을 보여준다. 우리의 자유를 스스로 증명하는 도덕적인 입법자로 가득한 사회, 그 사회가 바로 칸트가 기대한 사회가 아니었을까 이성적 판단을 해본다.
인식주관이란 시공과 범주의 선천적 형식을 가진 선험주관이다. 주어진 자료에 보편성과 필연성을 주어 법칙을 만드는 선험적주관이다. 이 말은 자연과학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이지 물질이 아니다.
이리하여 칸트는 인간만이 자연세계를 지배할 수 있고 자연세계를 넘어설 수 있는 위대한 존재라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동시에 인간이상의 세계인 종교의 세계에 대해서는 인간은 겸손히 무릎을 꿇고 시키는 대로 실천할 뿐이지 감히 그것을 알고 지배하려는 교만을 가져서는 안된다. 여기에서 칸트는 루터의 제자로서 말씀에 복종하는 양심적인 인물임에 틀림없다. 칸트는 루터의 노예의지론에 따라 형이상학적 월권을 경계하고 실천이성을 통해 신앙을 지킴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게 된다.
이것이 실천이성비판이다. 과학을 창조하는 인간의 존엄성과 신앙에 안심하는 인간의 존엄성을 겸비하지는 것이 칸트의 비판철학이다.
첫댓글 칸트의 실천이성 비판에서 그 동안의 선악 이분법적 도덕율을 비판하고 정언명법의 틀로 주체적인 자율적 도덕규범을 스스로 만들어 양심에 따라 지키라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집고 넘어갈 것은 예수께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의 말씀처럼 도덕률은 自他의 상호관계 속에서 성립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나의 도덕률이 타인에게는 폭력이 될 수 있다. 법과 원칙이 상대성을 잃고 자의적인 엿장수 맘대로 될 때 수 없이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윤석열식 도덕률이 된다. 주체적이며 자율적 도덕률이 세워지고 양심에 따라 실천 될 때 빠질 수 있는 함정이 바로 상대적인 利他가 배제된 상태다. 보편적이라는 말로만으로 담보될 수 없는 것은 로마 황제가 스스로 신이라고 보편성을 부여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붓다가 말한 것처럼 우주의 모든 사물은 서로 의지하여 성립하기 때문에 하늘의 별도 혼자 빛 날 수 없고 타자의 배려 없는 내안의 도덕법칙도 앙꼬 없는 찐빵이다.
구구절절 오른말씀입니다.^^*
도덕형이상학, 인식론과 존재론 모처럼 칸트를 통해서 밤 하늘의 별처럼 도덕법칙을 바라봅니다.
자유혼에서 샘솟는 장로님 주시는 말씀이 실천이성비판의 큰 줄기요 주해로 여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