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마리아(1862~1927) 】
" 독립을 위해 자식들을 조국에 바친 진정한 독립운동의 어머니 "
독립운동가, 건국훈장 애족장(2008)
1862년 4월 8일 ~ 1927년 7월 15일
“아들아! 나라를 위해 떳떳하게 죽으라.” 어머니는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올바른 일을 하다 맞이하는 죽음에 당당하고 떳떳하게 맞서라고. 그리고 그것이 효도라고.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심정은 이루 말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죽음을 맞이하는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1909년 일제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저격한 도마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 어머니와 주고받은 편지의 내용이다. 국가를 위해 희생을 각오한 아들의 다짐을 끝까지 지켜준 어머니 조마리아. 독립운동가의 어머니이자 자신 또한, 독립운동가로 살아온 조마리아 여사의 이야기를 담아본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바친 조마리아 여사와 가족들
조마리아 여사는 1862년 황해도 해주군의 명문가 집안에서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기가 그지없어 많은 집안에서 혼사를 논했고, 그중 같은 지역에 사는 동갑내기 안태훈 선생(1862~1905)과 혼인하였다. 남편 안태훈 선생은 박은식과 함께 황해도 내 양대 신동으로 불렸는데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하여 안진사로 불렸으며, 개화파 박영효가 선발한 일본 유학생에 선발되기도 하였다. 평소 천주교에 관심을 두고 있었던 그는 1896년 명동성당 찾아가 천주교에 귀의하였고 어머니, 아내, 누이동생들도 세례를 받게 하였다. 이를 계기로 조마리아 여사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일생을 살아가게 되었다.
조마리아 여사와 안태훈 선생 사이에는 안중근, 안성녀, 안정근, 안공근 3남 1녀의 자녀가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장남 안중근은 일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고, 차남 안정근은 북만주 독립군을 통합시켜 청산리전투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삼남 안공근은 백범 김구와 함께 한인애국단을 운영하며 윤봉길과 이봉창의 항일의거를 성사시켰고, 딸 안성녀는 안중근 의거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하여 손수 독립군의 군복을 만들었다. 조마리아 여사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자식들을 모두를 조국에 바친 진정한 독립운동의 어머니라 할 수 있다.
애국 계몽을 추진하며 국채보상운동에 매진하다
대한제국이 러일전쟁 발발로 위기에 처하자 안태훈과 안중근 부자는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심한다. 조마리아 여사는 이를 적극 지지하며, 두 부자를 지원한다. 하지만 남편 안태훈 선생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조마리아 여사는 자식들과 함께 국내에 남아 민족 인재 양성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을 추진한다. 먼저 삼흥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에 매진하는 한편 천주교 학교인 돈의학교를 인수, 제2대 교장을 역임했다. 일제의 침략이 극에 달한 1907년,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다. 서상돈이 이끈 국채보상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고, 조마리아 여사도 적극 동참한다. 안중근 의사가 자청하여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를 개설하였을 때, 조마리아 여사도 국채보상 의연금을 기부하며 가족이 소지한 패물을 모두 보탰다.
출처 : 문화제청
아들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중국 하얼빈 역에서 한국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다. 이 의거는 국내외에서 반일운동을 벌이던 한국인에게 큰 찬사를 받았고, 나아가 서구 열강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한 국제적인 사건이었다. 1910년 2월 14일 일제가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조마리아 여사는 분노를 표하며 “이토가 많은 한국인을 죽였으니, 이토 한 사람을 죽인 것이 무슨 죄냐”며 일제를 강하게 질타하였다. 조마리아는 죽음을 앞둔 안중근을 면회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당차고 의기로운 어머니였지만, 죽음을 앞둔 아들을 차마 만나볼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조마리아 여사는 뤼순감옥으로 형을 면회하러 가는 아들들에게 한 톤의 편지를 보냈다.
"다른 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아마도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재회하길 기대하지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이 편지와 함께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아들이 죽은 후, 조마리아 여사는 남은 자식들과 함께 연해주로 망명한다. 안중근 의사의 가족이란 이름에 감시와 탄압으로 독립운동을 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조마리아를 비롯한 안중근 유족은 안창호 선생의 도움으로 연해주 크라스키노를 거쳐 러시아 동부 각지를 돌며 동포들의 독립의식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강연활동과 방문활동을 전개했다.
상해 임시정부에 횃불을 피우고 눈을 감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아들 안정근이 대한적십자회의 운영을 맡기 위해 상해로 먼저 떠났고, 조마리아 여사는 1922년 뒤따라 상해로 이주한다. 상해에 도착해서 본 임시정부의 상황은 매우 열악했다. 특히, 재정적 어려움은 임시정부를 이끌어 가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조마리아 여사는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를 재정적으로 후원하기 위해 ‘임시정부경제후원회’를 창립하고, 정위원으로서 임시정부 후원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녀는 백범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와 함께, 상해 독립운동진영의 안주인이자 어머니로 불렸으며 1927년 7월 15일 위암으로 서거하기까지 오로지 나라만을 생각했다.
정부는 2008년 조마리아 여사의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생전 ‘여중군자’와 ‘여걸’이라는 평을 들었을 정도로 신망이 조마리아 여사. 이러한 인품은 어려움 속에서도 자식들이 독립운동을 할 수 있게 해준 가르침의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최근에는 그동안 조명 받지 못했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의 흔적을 찾고 알리는 움직임이 늘어가고 있다. 조마리아 여사도 그중 하나이다. 앞이 아닌 뒤에서 묵묵히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그녀, 이제 안중근의 어머니가 아닌 한 명의 독립운동가로 조마리아 여사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억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