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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추구하라(시 42:1-5)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뉴스를 보면, 폭력과 죽음 등 전쟁에 관한 이야기들이 계속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인간의 이성과 지성이 발달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라와 나라간에, 민족과 민족간의 전쟁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폭력과 죽음의 소식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무수히 많은 교육을 통하여,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기보다는 상대방을 제거하고, 나 혼자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이러한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지나온 역사 속에서, 나름대로 이유야 있겠지만, 그 어떠한 이유라고 하더라도, 폭력과 살인은 정당화될 수가 없습니다. 복수는 복수를 낳을 뿐입니다.
길거리의 정치에 관련된 현수막들을 보면, 자기 자신의 비전을 말하기보다는 상대방을 비방하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 현수막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좋지만은 않습니다.
여야를 떠나서, 민족과 종교와 이념을 떠나서,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요? 미움과 증오를 버리고, 서로를 인정하고, 양보하고, 화해함으로,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만을 위하여 살아가겠노라고 헌신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의 풍조를 따라,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는 삶을 살아가기보다는,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처럼 굳건히 서 있어야 합니다.
강원도 양양에 가면, 하조대라는 곳이 있습니다. 하조대 정자 앞 소나무를 아십니까?
지금은 모르겠지만, 옛날 애국가 동영상 첫 소절에 나오는 소나무입니다. 바위틈새에 있는 그 소나무를 보면, 그 험한 곳에서 빼어난 자태를 유지하고 있음에 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환경이라고 잘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바다 바람 맞아가면서도, 그 바위틈새에서, 그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소나무를 보노라면, 우리의 믿음도 그리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좋은 시절이기에 좋은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힘들고 험한 세월이라고 할지라도, 멋진 믿음을 유지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시편 63:8절을 보면, 다윗은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라고 고백했습니다.
구중궁궐 안에서, 이렇게 고백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울 왕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다닐 때,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줄행랑을 칠 때, 바로 그러한 때에 고백한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일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고자 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남몰라라 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품어 주십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할 때, 주님의 오른손이 우리를 힘있게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세상을 가까이할 때, 세상이 우리를 붙들어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이용하려고 할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의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장애물이요,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우리의 몸도, 항상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가고자 애써야 합니다.
야고보는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약 4:8)라고 말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시 73:28)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멀리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가를 항상 생각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오병이어의 놀라운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그 기적을 눈으로 보고 들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이 되신다고 하는 이 말씀을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그 많던 사람들이 예수님 곁을 떠나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었을 때, 시몬 베드로가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8)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세상의 소리를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소리,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때로는 이해가 안되는 경우가 있어도, 때로는 손해가 되는 경우가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시편 63편을 보면, 다윗이 광야에 있을 때,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시 63:1-4)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간절히 주님을 찾았습니다.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마음과 몸과 영혼이, 일심으로 하나되어, 주님을 찾고 찾아야 할 것입니다. 어느 한 순간만, 하나님을 가까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항상, 언제나, 하나님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이러한 마음으로, 항상 하나님을 가까이해야 할 것입니다.
이사야 40:29-3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자 할 때, 하나님을 사모할 때, 하나님을 앙망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십니다.
이래도 저래도, 피곤한 세상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깨가 축 쳐질 수밖에 없는 그런 고달픈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하더라도, 맥없이 주저앉아, 낙심하고 절망의 한숨을 푹푹 내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봄으로, 주님을 가까이함으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새 힘을 가지고, 세상을 넉넉히 이기며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사 26:9)라고 고백했습니다.
밤에도, 우리의 영혼은 주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물질적으로, 어두운 밤이 온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오직 주님을 사모하고, 주님을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하나님을 추구하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이익과 욕망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목표요,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이용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의 삶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필요할 때에만 우리 곁으로 와 달라고 조르는 것이 아니라, 항상 우리 곁에 계실 수 있도록,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섬겨야 할 것입니다.
1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우리 영혼이 주님을 찾기에 갈급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볼 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사슴은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하였을까? 목이 말라서 일 것입니다.
그런데, 목이 마른다 할지라도, 시냇물 곁에 있으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해 했을까? 갈급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냇물이 바로 옆에 있는데, 시냇물을 찾아 헤맬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시냇물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시냇물 곁에 있었다고 할지라도, 시냇물에 마실 물이 없다고 한다면, 마실 수 있는 물이 있는 시냇물을 찾아 갈급해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 곁에 있습니까? 하나님과 항상 함께 하십니까?
하나님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풍부한 공급을 받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고 말씀하셨는데, 주님 곁에서,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고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참된 안식과 평안과 영생을 구하기 위하여, 이리저리 헤매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는 엉뚱한 것에 그들의 삶을 맡기기도 합니다.
마실 물이 없는 시냇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자신의 인생을 거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어리석고 미련한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이 있어도 되고, 없으면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없으면 살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여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관심이 하나님께로 집중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흐트려져서는 안됩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쳐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차를 운전하다 보면, 가끔 사고가 일어난 현장을 지나가게 되거나, 사고를 눈 앞에서 직접 목격할 때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좌회전하려고 신호를 기다리다가, 좌회전 불이 들어와 앞차들이 하나둘 좌회전하고, 그러다가, 바로 앞차가 유턴을 하는데, 꽝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정확하게 보지는 못했지만, 앞차가 유턴하고 있을 때, 우회전하려고 나오는 차가 있었는데, 서로를 보지 못해서, 충돌한 것 같았습니다. 보았다고 한다면, 누군가 멈춰서야 했는데, 멈추지 않고, 서로 먼저 가려고 하다가, 사고가 난 것 같기도 했습니다. 운전하면서, 가끔 되새기는 말이 있습니다. “집중하자”
“운전 경력이 오래되었다고 자신하지 말고, 운전에 집중하자”라는 생각을 항상 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오래 믿었으니, 이제는 조금 멀리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은 정말로 올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들었으니,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보다는 세상 소리에 귀를 기울여도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도 올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믿을수록,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여러분! 시냇물이라고 다 마실 수 있는 물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냇물이라도 마시면 안되는 물이 있습니다. 시냇물이라도 마실 수 있는 물이 없는 곳도 있습니다.
지난 추석에 서울에 올라갔는데, 추석 아침에, 도봉산에 올라갔습니다. 조금 올라가다 보면, 약수터가 하나 있습니다.
물은 쉴새없이 계속 나오고 있는데, 아무도 그 물을 마시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약수터 앞에, “식수 부적합”이라고 써 있기 때문입니다. 깊은 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이지만, 마실 수 없는 물입니다. 마시면 안되는 물입니다. 마시면 당장 죽지는 않겠지만, 계속해서 마시게 된다면, 몸에 해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간혹, 그 물을 마시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식수 부적합”이라고 쓰여있는 글을 미처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목이 말라, 물을 떠서 마시려고 하다가, 그 “식수 부적합”이라고 쓰인 글을 그때야 보고, 물을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샘물을 마실 때,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합니다.
예수님 곁에 있을 때, 그 샘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샘물은 “구원과 영생”입니다.
5절 말씀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우리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에고 에이미”(나는..이다)라고 말씀하신 일곱 마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생명의 떡이다”(6:35, 48),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9:5), “나는 양의 문이다”(10:7,9), “나는 선한 목자이다”(10:11, 1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15:1, 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사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영생을 누리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요즘, 뉴스를 보면, 마약에 관한 뉴스도 있지만, 특별히 사기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파라다이스 혼외자”, “재벌 3세”, “통장잔고 51조”, “롯데 시그니엘”, “경호원” 등 온갖 말들이 들려오는데,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어떻게 믿었을까? 사기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일관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그의 언변이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지금껏 드러난 일들을 종합해보면, 항상 경호원을 대동하고 다니고, 롯데 시그니엘에 거주한다고 해도, 그 사람은 사기꾼일 확률이 아주 높습니다. 그런 사기꾼에게 왜 속아 넘어갔을까요? 그의 말과 그의 환경을 보고,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보이스피싱을 비롯하여, 이런 사기꾼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속아 넘어가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추구해야 합니다.
신학생 때, 다른 종교시설을 탐방한 적이 있습니다. 성당, 동방정교회, 루터란 등, 내부에 들어가 보면, 장신물들이 멋지고 화려합니다. 직접 가보지 않아도. 사진으로만 봐도, 로마 가톨릭 성당의 웅장함과 화려함, 높은 사제들의 휘황찬란한 복장들을 보노라면, 뭔가 있을 것 같지만, 참된 구원과 영생은 없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의 겉모습에 속아서는 안됩니다. 그들의 화려함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합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은 외형적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신 주님께 소망을 두고, 주님만을 추구하며 살아감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복을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를 붙들어 주옵소서.
이 험한 세상에서 우리의 믿음을 지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굳게 지킬 수 있도록 주님의 능력의 손으로 붙들어 주옵소서.
“오직 예수”,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추구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