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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팬들이 많으신가요? 얼마 전 읽은 영화평 하나 올립니다.
영화 자체도 제가 무쟈게 좋아하는 영화지만(제가 처음에 사용했던 베티블루라는 아뒤를 혹시 기억하시는지..) 영화평(아마추어가 쓴 것인데)이 저를 더 열광하게 만들었습니다.
다 읽기 지루하시면 맨 끝에 있는 포스터만 보셔도 됩니다. 다음칼럼 피노키오님의 "이백 편의 영화"에서 퍼왔습니다.
당신은 이런
여인을 사랑할 수 있는가?
아무 곳에서나 극한적인 분노를 터뜨리는 여인,맘에 들지
않으면 칼을 휘두르고,화가 나면 집 안에 있는 모든 가구와
집기를 모조리 창 밖으로 던져버리는 여인,집과 환경이 싫어
그 집을 떠나고 싶으면 집에 불을 질러버리는 여인,그리고
자신에게 적대적인 모든 것들에게 성난 이를 드러내고
저항하는 여인...
당신은 그런 여인을 사랑할 수 있는가?
그러나 그녀는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의 가장 특별한 재능을 제일 먼저
알아챈다.세상 그 어느 누구도 그의 재능을 알아주지
않는다해도,그녀 만은 그를 믿으며 확신한다.그녀의 마음
속엔,그와의 세계가 다른 모든 세계 위에 군림하며 독립한다.그리고
그녀는 그 왕국의 여왕인 동시에 노예이다.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몸 속 모든 에너지와 영혼을 다 소진하여 자신의
남자를 사랑하고 그로 인해 자멸한다.
당신은 그런 여인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이토록이나 장황하게 설명을 시도하려는 이 여인의 이름은
베티이다.성은 모른다.이 여인에겐 성 (family name)이나
주민등록번호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베티는 쟝 쟈끄 베네 감독의 1986년 영화 <베티블루>
에서,어떤 구체적인 실체가 아닌 일종의 에너지로서,아니면
어스름한 푸른 톤의 분위기 전체로서 존재한다
베티가 그 영화에서 뿜어내는 존재감은 너무도 강렬해서,
사람의 눈을 거의 찔러댈 지경이다.
베티라는 이 캐릭터의 강렬함은, 주인공 여배우였던
베아트리체 달 마저 집어삼키는 수준에 이른다.그래서
이탈리아 출신의 전직 모델인 이 배우는 베티의 캐릭터에
너무 매몰된 나머지, 훗날의 출연작들 - 특히 내겐 '샹떼'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 에서 그 존재가 점점 미미해져갔다.첫
출현이 너무도 충격적이었던 탓이다.'디바'로 화려하게
데뷔하였던 감독 쟝 쟈끄 베네 역시 <베티블루> 이후에
그 만한 작품을 내놓지 못하였다. 다만 참으로 다정하게
베티를 사랑했던 죠르그
역의 쟝 위그 앙글라르 만이 꾸준하게 프랑스 영화의 엔딩
크레딧 위에 자신의 이름을 올려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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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베티와 죠르그의 길고 즉물적인 정사장면으로
시작한다.
거의 실제를
방불케하는 그 정사장면에서 관객들이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면,곧바로 그들의 파격적인 사랑이 이어진다.그들은 거의
벌거벗은 채,서로의 육체에 끝없이 탐닉하는 듯 보여진다.세상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마치 양 쪽 눈을 안대로 가린
경주용 말처럼,그들은 그들 만을 쳐다본다.
죠르그는 방갈로의 관리인겸 노무자이며,베티는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긴 전직 웨이트리스이다. 그들에겐 인생에 관한
그 어떤 계획도 없으며 미래도 없다.장래를 위한 준비
따위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다. 죠르그는 썰렁하고
살풍경한 방갈로를 수리하고 페인트칠하며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뿐이다.
그러한 무미건조함을 먼저 못 참아내는 쪽은 물론
베티이다.
베티는 우연히
보게된 죠르그의 소설 원고에서 그의 재능을 간파하고 그의
소설을 타이프라이팅하기 시작한다.그리고 죠르그의 삶을
바꾸기 위해 방갈로 주인과 대판 싸움을 벌이고 집을
불태워버린다.
파리로 옮겨간 그들의 삶은,적어도 외면상 특별히 달라진
것은 아니지만,베티는 끊임없이 자신이 타이프한
죠르그의 원고들을 출판사로 보내고,회신이 오기를
기다린다.그러나 죠르그의 원고는 철저하게 거절당하며,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베티는 서서히 좌절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남프랑스에 있는 친구의 피아노 가게를
대신 운영하게 된 베티와 죠르그는 그 곳에서 약간의 여유와
행복을 맛보게 된다.조금은 안락하고 조금은 부드러운
생활이 이어진다.
그러나 베티에겐 여전히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죠르그의 글을 출판하기 어렵게 되자,베티는 그들만의
아이를 원하게 된다.그러나 그마저도 쉽지 않다. 몇 번의
유산 끝에 아이를 가지기 어렵게 되자,베티는 심각하게
발작한다.그녀의 히스테리성 발작은 자학의 수준으로
진행되어,결국 베티는 자신의 눈을 칼로 도려내고 온몸을
자해한다.베티는 정신병원에 갇히게 되고,약물에 의해
진정되어 의식을 잃고 억제대에 묶인 채 침상에 누운 모습은
예전의 베티가 아니다.
죠르그는 그러한 베티의 모습을 참아내지 못한다.영화 중
죠르그의 표현대로,'무릎이 꺾인 야생마'인 베티가 그런
식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죠르그에겐 그녀가 죽은
것이나 다름 없이 여겨진다.결국 여장을 한 채 병원에
잠입한 죠르그는 베티를 살해하고,집에 돌아와 자신과
베티의 지난 사랑에 관한 소설을 쓰기 시작하며 영화가
끝난다.
- -
이것이 이 영화 <베티블루>의 이야기이다.
필립
지앙이라는 소설가의 원작을 영화화한 이 영화는 이야기의
충격적인 반전들과 베티라는 캐릭터의 유니크한 강렬함,그리고
영화 전체를 관류하는 가브리엘 야레드의 잔잔한 음악,두
연인의 끈질기고 애절한 사랑,게다가 무엇보다 블루 톤의
색조 때문에 좀처럼 뇌리에서 잊혀지기 어려운 영화이다.
사랑 그 자체가 최고의 가치로 올려져 있는 것과 더불어,그
사랑이 파괴적인 죽음에의 충동과 영화 내내 대비되어
그려져 있는 것 자체가,관객들의 감정을 극단으로 오가게
하고 있다.
난 이 영화를,아직 '미성년'이던 시절 어느 서울 시내의
재상영 소극장에서 보았다.
그 당시 아주
친했던 어떤 친구가 '이 영화는 꼭 보아야한다'며 거의 등을
떠밀다시피하여 나를 극장으로 들여보냈던 기억이 난다.
많은 장면들이 잘리고 끊겼다는 것을,직감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지만 그것과 상관 없이 영화는 내게 충격적이었다.무엇보다
'사랑은 꼭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던 소년 시절의 내게,이
영화의 비극적인 결말은 받아들이기 조차 어려운 어떤
것이었다.
그 커플,죠르그와 베티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서로의 입장과
존재를 완전히 받아들이던 사람들이었다.비단 육체적인
커뮤니케이션을 떠나서,그들은 서로가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 빠졌을 때,서로를 이해하는 차원을 넘어서 상대방이
절망하고 있는 그 가장 극한적인 세계를 향해서 함께
추락하는 사람들이었다.그래서 베티가 자해했을 때,망연히
앉아있는 베티의 처절한 몰골을 바라보며,죠르그는 자신의
얼굴에 음식 오물을 쳐바르며 함께 울었던 전 것이고,
심지어 음악을 전혀 모르는 베티가 죠르그와 두 대의
피아노를 이용해서 같이 연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그들의 사랑 때문에 죠르그는 베티의 자유로운 영혼이
자해에 의해 한 번 파괴되고,정신병원의 약물에 의해서 재차
허물어지는 꼴을 감내할 수 없었던 것이다.그래서 죠르그는
베티를 살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꼭 그렇게까지 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무엇보다 왜 베티는 그렇게까지 자멸해버렸을까? 도대체
그녀가 어떤 사람이길래 그토록까지 처참하게
파멸되어버렸던 것일까?
십 년 전의 나는 전혀 알 수 없었다.그 때 난 그저 베티를
젊디 젊은 에너지의 화신으로만 보았었다. 아무것도 거칠 것
없고 모든 것에 반항하며,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서라면 불가능해보이는 일까지도 서슴지 않는 야성의
여인으로만 보았었다.그리고 그 야성이,학교와 가족 같은
집단과 조직에 의해서 점점 길들여져가고 있던 내 자신의
반대편 보상심리를 일깨웠다고 생각했다.그녀의 정열과
힘이,광고를 연상시키는 감미로운 화면과 음악,그리고
충격적인 스토리 라인과
더불어 나를 함몰시켰었던 것이고 말이다.따라서 내겐
베티의 자멸이 나의 자멸인 양 느껴졌고,슬퍼하는 죠르그를
따라 함께 슬퍼했었다.
그러나 십 년이 흐른 지금,
베티의 자멸은
또다른 의미를 가지고 내게 다가온다.이번의 난 좀 더 늙고
냉정해진 것이다.
우선 베티의 광란은, - 그녀는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또 참을 수 없는 일을 당하고 있다고 느낄
때,거의 매번 발작했었다.- 일종의 분노발작 (temper tantrum)으로도
보였다.어찌 보면 그녀의 행동은 어린아이의 그것과
유사했다.혹시 독자 여러분은 백화점 복도나 길거리에서,엄마에게
요구하는 일이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떼굴떼굴 구르며 우는
아이들을 본 적이 있는가? 그것이 바로 분노발작이다.그런
아이들은 자신의 욕구가 해소되지 않을 때,그런 식으로
자신의 분노를 표현한다.
물론 베티의 고함이나 분노가 아이들의 그것과 정확히
똑같다는 것은 아니다.틀리다.첫째로 그녀는 스무 살이다.그러나
자신의 분노를 적절히 통제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그녀는
아이들과 유사하다.요컨대 베티는
물리적인 나이는 스무 살일런지 모르지만,감정적인 나이는
미성년에 불과한 사람,아니 아이에 불과한 사람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일종의 괴리감이 그녀에게 찾아드는
것이다.그녀의 자멸은 이 괴리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인간 내부의 욕망과 외부환경의 차이,육체연령과
정신연령의 차이,그리고 적절히 제어되지 못한 벌거벗은
영혼,이것이 베티의 파멸을 유도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베티의 내면과 영혼이 아이의 그것이라는 것이
베티 비극의 원인이라는 말인가? 글쎄다. 아직은 이유가
부족하다.겉으로는 또 말로는 표현하고 있지 않지만,그녀는
자신이 스무 살이 넘었다는 것을 미성년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그리고
무엇이 자신을 본래의 나이와 위치로 가져다 놓을 지도 알고
있다.자신의 괴리감을 온전히 메꿀 방법이 있기는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대답에 대한 힌트를 이 영화의 원제목에서 얻었다.
<베티블루>란
제목은 미국 개봉 당시의 타이틀이고,사실 원작소설과
프랑스에서의 영화제목은 37.2도 아침( 37.2 Le Matin) 이다.이것은
'여인이 임신하기 가장 좋은 신체상태'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렇다,베티가 가장 원했던 것은 '임신'이었다.
'임신'이란 무엇인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한 작업'이지 않는가? 그러나 미성년의 상황,아이의
상황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그러나 베티에게 임신은,자신이
성년자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중요한 기준이었다.그렇게 함으로써,자신내면의
미성년과 육체적 성년의 상황을 조화시키려 했던 거였다.그리고
그것 만이 그녀가 현실감을 잃고 무너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고보면 베티가 죠르그의 소설에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도 짐작이 간다. 소설이야말로 창작물,'순수한 만들기'의
전형이 아니던가? 그녀의 자멸은,그녀가 분신처럼 생각하는
죠르그의 소설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할 때 시작되었고,자신이
임신가능성이 없다고 생각되었을 때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던 것이다.
베티의 비극은 미성년의 비극이다.
물론 어쩌면 이런 말은 다 오버일런지도 모른다.무언가를
만들어내야,또는 '아이를 가질 수 있어야' 미성년에서
성년으로 옮겨갈 수 있다는 소리는 어쩌면 지나친 비약일
수도 있다.그러나 나는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말이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베티'가 그랬다는 소리다.그리고 사실
물리적인 나이만 한 두 살 더 먹는다고 해서 성년의 자격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숱한 '미성년'들을 숱한 '분노발작'들을 바로
우리 주위에서 보고 있으니 말이다..
다만 우리가 베티의 '미성년'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그녀의
발작이 너무나 순수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그래서 오늘
나의 글은 죄다 베티를 변호하기 위해
쓰여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 -
오늘,아주 오랜만에 이 영화를 보다가,나는 어떤 면에서
베티와 통하는 인물이 하나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짐작이
가시는가? 그것은 우리 문학사에서 쓰여진 가장 훌륭한 소설
중 하나인 '춘향전'의 여주인공 성춘향이다.
물론 성춘향과 베티는 비슷한 점보다는 다른 점이 훨씬
많다.
무엇보다
춘향은 완전히 '성년의 의식'을 가진 인물이다.그녀는
뚜렷한 주관을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춘향은 유교적인
의식과 연인을 향한 사랑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며,부당한
권력에 확고하게 대항했던 여인이다.
춘향전의 원전을 읽어보면,그녀는 어엿한 성인이며
자신만의 계산속에도 밝으며 자신의 사회적 위치에도
뚜렷한 자각을 가지고 있다.그동안 우리가 보아온 영화나
드라마의 춘향이가 무슨 '사랑'이나 '정조관념'의 화신인
것처럼 그려지고,춘향 역을 맡은 배우들이 무슨 공주처럼
예쁘고 부드러운 배우들이어서 그렇지, 실제의 춘향이는
당차고 매섭고 강하다.공주와는 거리가 멀다.1960년대에
만들어진 신상옥 감독의 '춘향전'의 춘향이인 최은희가 가장
실제의 춘향 이미지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춘향이 베티와 비슷하다고 내가 느낀 대목들은?
그것은 가령 이런 것이다.다음의 대목은 이몽룡이 춘향을
은근슬쩍 남원에 떼어놓고는 서울로 올라가려고 '무마작업'에
들어갔을 때의 춘향의 반응이다.
-춘향은 이 말을 듣더니 화를 발끈 내어 얼굴빛까지 변한다.머리를
흔들고 눈을 휘두르면서 안색이 붉으락 푸르락한다.눈을
치켜뜨면서 눈썹이 꼿꼿해진다.코가 벌름벌름하고 이를
뿌드득 간다.온 몸을 수수잎 떨듯한다.마치 매가 꿩이라도
채갈 듯이 도사리고 앉더니 갑자기 소리를 지른다.
'어허,이게 웬일이오!
벌떡 일어나더니 치맛자락을 쭉 찢고,머리카락을 두손으로
와드득 쥐어 뜯어서 싹싹 비비더니 도련님 앞에 내던진다.그리고
면경,체경,산호로 만든 죽절을 모두 팽개쳐 방 문 밖에 탕탕
부딪친다.
어떤가, 베티의 장면들과 유사하지 않은가.이 장면은 마치
베티가 죠르그와 살던 방갈로의 집기들을 모두 다 창 밖으로
던져버리고 집에 불을 지르는 장면들과 너무 비슷하다.이몽룡,정말
뜨끔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장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춘향이가 변사또의 고문에 못이겨 발악하여 대드는
장면이다.
-소녀를 이렇게 할 것이 아니라,죽여서 몸뚱이를 토막지어
아주 박살을 내주시오.
그리고 또 한 마디 한다.
-여보시오,사또! 들으시오.이렇게 남에게 한을 품게 하여
사람의 생사를 모를 만큼 형벌을 하다니 어찌 그리 이치를
모르시오.계집이 한번 마음 속에 깊이 원한을 품으면 무더운
오뉴월에도 서리가 치는 법이오.원한을 품은 영혼이 우리
성군 계신 곳에 가서 이 억울한 사정을 아뢰고 보면 사똔들
무사할 줄 아시오? 어서 죽여주시오!
춘향이는 이토록이나 강력했다. '김희선'정도의 배우가
소화해낼 수 있는 인물이 아닌 것이다.
춘향과 베티는 전혀 다르면서도 비슷하다.
정열과 사랑의
에너지로 뭉친 채 현실에 과감하게 저항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춘향이 '현실에 성공한 어른'이른 관점에선
정반대로 틀리다.
그런데, 난 이상하게 베티의 편을 들어주고 싶다.'어른의
세계'에서 실패하고 깨어진 가엾은 그녀의 모습이,다시는
영화세계 속에서 재현될 것 같지 않다는 것이 첫번째
이유이고,또 다른 이유는 그녀의 모습 속에서 또다른 나의 '미성년'을
느끼기 때문이다.
첫댓글 지금과 달리 대학신입생때 이 영화는 막돼먹은 영화일뿐이었죠. 그러나 이 영화와 함께 몇개의 선문답류의 대화만 가지고도 채팅이나 독토에서 주목받을 수 있었던 기억이.. 그리고 찾아다녔던 문화원의 영화들.. 얼마나 쓸데없이 건방졌었는지.. 가끔 그때가 그립기도 하지만.. 후후
소개글만 읽고 펌글은 부러 읽지 않았는데,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일어나는 모든 사태의 책임은, 영화를 소개한 이에게 있음을 밝힙니다. 영화 다운 받고 보고 하는데 한 한달 걸리겠네, 첨밀밀두 아직 다 못 봤으니...
ㅎㅎ 밤만님, 경고합니다. 이 영화 보지 마세요. 중독성이 강합니다. 제가 어떤가요 물었지, 꼭 보세요...했나요? 이 영화 관람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은 이 글을 읽으신 눈의 주인에게 있습니다.
다행히 인터넷에 공짜 영화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