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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주년 기념 블루레이>
초판 DVD
<119분 / 15세 이상 관람가>
===프로덕션 노트 ===
무협영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 등 평단으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미국 내에 무협영화 열풍을 몰고 온 장본인. 이안 감독은 <매트릭스>의 무술감독 원화평과 함께 와이어 액션에서도 새로운 경지를 선보였다는 평가를 얻어냈다. 아카데미 10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어 외국어 영화상을 비롯 촬영, 미술, 음악상 등 4개부문 수상.
19세기 청조 말렵 혼란기의 중국. 당대 최고의 문파인 무당파의 마지막 무사 리무바이(주윤발 분)는 뛰어난 무공을 소유한 여무사 수련(양자경 분)과 평생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간직하고 있다. 그는 사부가 자객 푸른 여우(Jade Fox)에게 목숨을 잃자, 강호를 떠날 결심으로 선대부터 전해내려오는 보검 청명검을 수련에게 맡긴다.
수련은 무당파와 인연이 깊은 베이징의 호족 페이러에게 청명검을 전해주려던 자리에서, 고관 옥대인의 딸 용(장쯔이 분)과 첫 만남을 갖는다. 강호의 삶을 동경하며 용은 끊임없는 정략 결혼의 강요 속에서, 자신을 납치했다 풀어주며 '언젠가 꼭 다시 데려 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 마적단 두목 호(장진 분)에 대한 열정과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호가 찾아왔을 때, 용은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용은 수련에게 깊은 호감을 표하면서, 자매의 연을 맺자고 청한다.
한편 정체 모를 자객이 청명검에 손을 대고, 수련은 범인의 뒤를 쫓아 결투를 벌이지만, 결국 검을 놓치고 만다. 그 사건의 조사를 위해 파견된 수련은 용을 의심하게 되고, 실제로 용의 유모로 위장한 푸른 여우에게서 대단한 무공을 전수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수련과 함께 청명검을 찾아나선 리무바이는 용이 자신의 무술을 보이고자 보검을 훔쳤으며, 그녀가 무당파의 무공을 전수받을 수제자라는 것을 직감하고 설득하지만, 용은 그 제안을 거절한다. 마침내 두 여인은 운명적인 관계로 맞서는데...
=== 참고자료 ===
BBC 선정 21세기 가장 위대한 영화 100선
2016년 8월 23일 BBC 홈페이지
177명의 유명 평론가를 대상으로 BBC에서 21세기 최고의 영화 100편을 선정
2000년 이후에 개봉된 영화중에서 특별히 엄선
국내 영화도 2편 포함
1. 멀홀랜드 드라이브 (데이비드 린치, 2001)
2. 화양연화 (왕가위, 2000)
3. 데어 윌 비 블러드 (폴 토머스 앤더슨, 2007)
4.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미야자키 하야오, 2001)
5. 보이후드 (리처드 링클레이터, 2014)
6. 이터널 선샤인 (미셸 공드리, 2004)
7. 생명의 나무 (테런스 맬릭, 2011)
8. 하나 그리고 둘 (에드워드 양, 2000)
9.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아쉬가르 파라디 , 2011)
10.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에단 코엔, 조엘 코엔, 2007)
11. 인사이드 르윈 (에단 코엔, 조엘 코엔, 2013)
12. 조디악 (데이비드 핀처, 2007)
13. 칠드런 오브 맨 (알폰소 쿠아론, 2006)
14. 액트 오브 킬링 (조슈아 오펜하이머, 2012)
15. 4개월, 3주 그리고 2일 (크리스티안 문쥬, 2007)
16. 홀리 모터스 (레오스 카락스, 2012)
17. 판의 미로 (길레르모 델 토로, 2006)
18. 하얀 리본 (마이클 하네케, 2009)
19.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조지 밀러, 2015)
20. 시네도키 뉴욕 (찰리 코프먼, 2008)
21.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웨스 앤더슨, 2014)
22.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소피아 코폴라, 2003)
23. 캐시 (마하엘 하네케, 2005)
24. 마스터 (폴 토마스 앤더슨, 2012)
25. 메멘토 (크리스토퍼 놀란, 2000)
26. 25시 (스파이크 리, 2002)
27. 소셜네트워크 (데이비드 핀처, 2010)
28. 그녀에게 (페드로 알모도바르, 2002)
29. 월-E (앤드류 스탠튼, 2008)
30. 올드보이 (박찬욱, 2003)
31. 마가렛 (케네스 로너건, 2011)
32. 타인의 삶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2006)
33. 다크나이트 (크리스토퍼 놀란, 2008)
34. 사울의 아들 (라즐로 네메스, 2015)
35. 와호장룡 (이안, 2000)
36. 팀북투 (압델라만 시사코, 2014)
37. 엉클 분미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2010)
38. 시티 오브 갓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카티아 룬드, 2002)
39. 뉴 월드 (테런스 맬릭 , 2005)
40. 브로크백 마운틴 (이안, 2005)
41. 인사이드 아웃 (피트 닥터, 2015)
42. 아무르(마하엘 하네케, 2012)
43. 멜랑콜리아 (라스 폰 트리에, 2011)
44. 노예 12년 (스티브 맥퀸, 2013)
45. 가장 따뜻한 색 블루 (압둘라티프 케시시, 2013)
46. 사랑을 카피하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2010)
47. 리바이어던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 2014)
48. 브루클린 (존 크로울리, 2015)
49. 언어와의 작별 (장 뤽 고다르, 2014)
50. 섭은낭 (허우샤오시엔, 2015)
51. 인셉션 (크리스토퍼 놀란, 2010)
52. 열대병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2004)
53. 물랑루즈 (배즈 루어만, 2001)
54.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나톨리아 (누리 빌게 제일란, 2011)
55. 이다 (파벨 파블리코프스키, 2013)
56.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 (벨라 타르, 2000)
57. 제로 다크 서티 (캐스린 비글로, 2012)
58. 물라데 (우스만 셈벤, 2004)
59. 폭력의 역사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2005)
60. 징후와 세기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 2006)
61. 언더 더 스킨 (조너선 글레이저, 2013)
62.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쿠엔틴 타란티노, 2009)
63. 토리노의 말 (벨라 타르 , 2011)
64. 더 그레이트 뷰티 (파올로 소렌티노, 2013)
65. 피쉬 탱크 (안드리아 아놀드, 2009)
66. 봄 여름 가을 겨을 그리고 봄 (김기덕, 2003)
67. 허트 로커 (캐스린 비글로, 2008)
68. 로얄 테넌바움 (웨스 앤더슨, 2001)
69. 캐롤 (토드 헤인스, 2015)
70.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 (세라 폴리, 2012)
71. 타부 (미겔 고메스, 2012)
72.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짐 자무쉬, 2013)
73. 비포 선셋 (리처드 링클레이터, 2004)
74. 스프링 브레이커스 (하모니 코린, 2012)
75. 인히어런트 바이스 (폴 토머스 앤더슨, 2014)
76. 도그빌 (라스 폰 트리에, 2003)
77. 잠수종과 나비 (줄리언 슈나벨, 2007)
78.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마틴 스콜세지, 2013)
79. 올모스트 페이머스 (캐머런 크로, 2000)
80. 리턴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 2003)
81. 셰임 (스티브 매퀸, 2011)
82. 시리어스 맨 (에단 코엔, 조엘 코엔, 2009)
83. A.I. (스티븐 스필버그, 2001)
84. 그녀 (스파이크 존스, 2013)
85. 예언자 (자크 오디아르, 2009)
86. 파 프롬 헤븐 (토드 헤인스, 2002)
87. 아멜리에 (장피에르 쥬네, 2001)
88. 스포트라이트 (톰 매카시, 2015)
89. 머리 없는 여인 (루크레시아 마르텔, 2008)
90. 피아니스트 (로만 폴란스키, 2002)
91. 엘 시크레토 비밀의 눈동자 (후안 J 캄파넬라, 2009)
92.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 앤드류 도미니크, 2007)
93. 라따뚜이 (브래드 버드, 2007)
94. 렛 미 인 (토마스 알프레드슨, 2008)
95. 문라이즈 킹덤 (웨스 앤더슨, 2012)
96. 니모를 찾아서 (앤드류 스탠튼, 2003)
97. 백인의 것 (클레어 드니, 2009)
98. 텐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2002)
99.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 (아녜스 바르다, 2000)
100. 카를로스 (올리비에 아사야스, 2010)
100. 레퀴엠 (대런 아로노프스키, 2000)
100. 토니 어드만 (마렌 아데,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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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해설 ===
세계영화작품사전 : 무협 영화
와호장룡(臥虎藏龍, Crouching Tiger, Hidden Dragon)
요약
대만과 미국을 오가며 다양한 장르와 규모의 영화를 만들어온 리안 감독의 무협영화다. 무협영화의 예술성을 한 단계 도약시킴과 동시에 그 아름다움을 전세계 관객에게 널리 알린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왕도려의 무협소설을 각색한 영화로 강호와 속세 사이에 놓인 네 남녀의 욕망, 의리, 정절 등을 다루며, 동양적인 이야기와 서양적인 영상 기술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작품으로 손꼽힌다.
시놉시스
수련 중 무언가를 깨달은 무당파 고수 리무바이는 속세로 내려와 절친하고 애틋한 사이인 유수련에게 자신의 청명검을 베이징의 철총관에게 맡겨 달라 전한 뒤 강호를 떠나려 한다. 그런데 수련이 철총관의 집에 간 그날 밤, 청명검 도난 사건이 벌어진다. 옥대인의 집 근처에서 범인을 놓친 수련은 낮에 만났던 옥대인의 딸 옥교룡을 의심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래전 스승을 죽이고 무당파로부터 도망쳤던 푸른 여우의 소행이라 확신하고, 소식을 들은 리무바이도 베이징으로 온다. 결국 리무바이와 푸른 여우의 싸움이 벌어지는데, 그 과정에서 포졸장이 목숨을 잃으며 일이 커진다. 수련은 지혜를 발휘해 교룡으로부터 조용히 청명검을 되돌려받고 사건을 마무리지으려 하지만, 리무바이는 푸른 여우를 쫓아가 스승의 복수를 갚으려 함과 동시에 그동안 푸른 여우의 잘못된 가르침을 따라온 옥교룡을 자신의 마지막 제자로 삼아 무당심결을 전수하고자 한다.
한편, 부모가 원하는 정략결혼을 앞두고 있는 교룡에게 그녀를 잊지 못한 연인 나소호가 찾아온다. 마적 출신인 나소호는 그녀의 결혼을 막으려 하지만 오히려 사고만 저지르고, 교룡은 다시 청명검을 훔쳐 혼자 무당산으로 떠난다. 리무바이와 수련도 교룡과 푸른 여우를 뒤쫓아 무당산으로 향하고 중간에 그동안 숨겨왔던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리무바이는 교룡으로부터 청명검을 되찾기 위해 다시 한번 그녀와 맞붙는데 중간에 푸른 여우가 나타나 그녀를 데려간다. 그녀를 구하기 위해 뒤를 쫓던 리무바이는 푸른 여우의 계략에 휘말려 결국 독살당하고, 교룡은 뒤늦게 리무바이를 구하기 위해 애쓰지만 한발 늦는다. 수련은 슬프고 분한 마음을 억누른 채 그녀를 나소호의 품으로 돌려보낸다. 교룡은 나소호와 마지막 밤을 보낸 뒤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무당산 아래로 몸을 던진다.
작품 해설
1. 감독소개
〈와호장룡〉 〈브로크백 마운틴〉 〈라이프 오브 파이〉 등을 만든 리안은 할리우드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아시아계 감독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실제로 중국과 미국, 양국의 국적자인 그는 스스로를 어느 문화권에도 속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로 의식한다. 그는 로저 에버트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어떤 특정한 장소의 시민이 되어본 적이 없다. 내 부모는 중국을 떠나 대만으로 이주했다. 거기서 우린 아웃사이더였다. 다음엔 미국으로 건너갔다. 또 아웃사이더였다.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거기서도 아웃사이더였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감독으로서 그의 이력도 한곳에 정박해 있지 않다. 그는 미국에서 영화연출을 공부한 뒤 대만 정부가 실시한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수상하여 〈쿵후 선생〉으로 감독 데뷔하고 〈결혼 피로연〉까지 만들게 됐다. 그중 〈결혼 피로연〉이 세계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고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에까지 올랐다. 이후로 그는 대만과 중국을 오가며 영화를 만들었고 대부분이 중국과 미국, 동양과 서양 양쪽에서 모두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이름 앞에는 중국 감독도, 대만 감독도, 할리우드 감독도 똑같은 정도로 어색하거나 어울린다. 그리고 그런 혼종적 정체성이 그에게 세계적인 감독으로 거듭나는 좋은 자양분이 됐다. 그는 어떤 문화권을 배경으로 영화를 만들든지 상관없이 그 문화권 특유의 가치관으로부터 보편적인 서사와 영화언어를 이끌어내는 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와호장룡〉이 개봉 당시 역대 미국에서 가장 흥행한 외국영화의 위상에 오르며 관객의 호응을 이끌어낸 것도 동양적 무협 장르의 오랜 전통과 서구적 상상력과 표현력을 결합한 결과였다.
2. 번역의 문제
〈와호장룡〉은 왕두루가 집필한 5부작 무협소설 중 네 번째 이야기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 네 번째 이야기는 청나라를 배경으로 하여 네 남녀의 정절, 헌신, 신의 등의 도덕적 가치를 보여준다. 휘트니 크로더스 딜리가 쓴 〈리안 감독의 영화세계〉에 따르면 리안 감독은 이야기를 좀더 모호하고 드라마틱하게 발전시켰다. 원작에서와 달리 청나라 시대의 배경은 희미해졌다.
중요한 것은 특정 시대의 재현보다 서구 관객도 공감할 수 있는 상상적 중국의 재현이었다. 리무바이는 수련보다 일찍 죽음으로써 그들 사이의 은밀한 사랑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들었다. 교룡도 나소호와 헤어지고 부모와의 약속을 지키는 대신 무당산 아래로 몸을 던짐으로써 더욱 극단적인 엔딩을 가능케 했다. 그 결과 인물들의 억압된 욕망이나 근원적 상실감을 훨씬 더 비극적으로 표현한 영화가 나왔다. 그것은 서구 관객에게 익숙한 비극의 전통과도 맞닿아 있었다.
원작을 영화로 번역하는 데 있어서 또 다른 까다로운 문제는 언어였다. 리안 감독은 중국어 대사를 고집했다. “무협영화를 영어로 만드는 것은··· 서부극에서 존 웨인이 중국어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이유였다. 하지만 이것은 중국 관객만을 대상으로 한 영화가 아니었다.
그래서 중국인 작가 왕후이링과 차이궈룽이 중국어 대본을, 할리우드에서 리안과 꾸준히 작업해온 제임스 샤머스가 영어 자막본을 썼다. 당연히 지난한 중간 번역 과정이 따랐다. 샤머스가 스스로 인정하길 “원작 소설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만들어진 영어 자막본은 중국어와 중국 문화를 온전히 담기 어려웠으며 담는다 해도 서구 관객이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들은 영어권 관객이 받아들이기 쉬운 표현법을 고민했다.
중국어권 관객에게도 이 영화는 그리 매끄럽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주연을 맡은 홍콩 출신의 주윤발, 말레이시아 출신의 양자경, 대만 출신의 장첸도 완벽한 표준 중국어를 구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안은 표준 중국어 더빙을 활용하는 기존 무협영화의 제작방식을 거부했다. 배우들의 목소리가 지닌 힘이 정확한 억양을 통한 대사 전달로 얻어낼 수 있는 효과보다 더 강력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중국어권 관객으로부터 배우들의 능숙하지 못한 중국어 실력 때문에 몰입이 방해된다는 부정적 평가를 얻었다. 심지어 일부는 이 영화가 중국적 소재를 할리우드 방식으로 포장한 것일 뿐이라며 비난을 날리기도 했다.
하지만 세계 평단은 무협영화와 드라마의 핵심을 훌륭하게 결합해낸 점에 대체로 높은 점수를 주었다. 2001년 개봉 당시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와호장룡〉은 아카데미 영화상 역사상 외국어영화로는 최다 부문 후보에 오른 영화이기도 했다.
3. 무술
〈와호장룡〉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참고영화들은 물론 호금전의 작품들을 비롯해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중국의 무협영화들일 것이다. 휘트니 크로더스 딜 리가 집필한 〈리안 감독의 영화세계〉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리무바이와 교룡의 대나무숲 장면은 호금전의 〈협녀〉의 대나무숲 결투 장면에 대한 오마주에 다름 아니었다.
더불어 ‘푸른 여우’로 등장하는 정패패도 호금전과 자주 작업했던 여배우 중 하나였다. 전통적 무협영화들이 이 영화에 미친 영향에 대해 미국의 유명 영화학자 데이비드 보드웰도 지적한 바 있다.
“리무바이의 평온하고 침착한 태도는 호금전의 영화 속 협객들을 연상시킨다.··· 젊은 연인 옥교룡과 나소호는 〈소림여인자〉에서 결투를 벌이는 연인을 떠올리게 한다.··· 사막의 회상 장면··· 은 〈동사서독〉과 비슷한 면모를 보인다.”
더불어 호금전의 무협영화들에 대한 리안의 애착은 남달랐다. “중국인이라는 나의 정체성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이 정체성을 호금전의 영화나 이한상의 영화, 텔레비전 방송과 교과서를 통해 습득했다.” 그러므로 무협영화란, 늘 중국적인 것(혹은 지역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 사이의 균형을 고민하며 영화를 만들어온 리안 감독의 영화세계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참조점일지도 모른다.
더불어 원화평을 무술감독으로 섭외한 것도 이 영화의 성공에 주효했다. 서구 관객에게는 이미 〈매트릭스〉라는 작품을 통해 잘 알려져 있기도 한 원화평은 중국의 전통 무술부터 격투 기술, 경극 등의 전통을 줄줄이 꿰뚫고 있는 동시에 그것들을 자유자재로 연출해낼 줄 알았다.
그는 무협영화의 초자연적인 액션 신들을 어떻게 연출해야 하는지 잘 이해하고 있었고, 그런 점은 초반부에 등장하는 달밤의 도주 신, 대나무숲 장면에서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유려하고 아름다운 격투 신들을 통해 잘 표현되고 있다. 그의 도움과 더불어 리안 감독은 무협영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할 수 있었다.
주요 등장인물
리무바이(주윤발) : 무당파의 고수로 청명검을 버리고 강호를 떠나려 한다. 친구의 약혼녀였던 수련을 흠모하며, 교룡은 제자로 삼고자 하고, 스승을 죽인 푸른 여우와는 적대 관계에 있다.
유수련(양자경) : 무술과 지혜를 두루 겸비한 협녀다. 리무바이를 흠모하지만 죽은 약혼자의 친구라는 점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숨긴 채 살아왔다.
옥교룡(장쯔이) : 유모인 파란 여우로부터 무술을 배우며 자라 강호에 대한 동경이 깊다. 정략결혼을 앞두고 자신의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한다.
나소호(장첸) : 사막을 떠도는 마적으로, 옥교룡과 한때 사랑하는 사이였으나 신분의 차이 때문에 쉽게 이어지지 못한다.
벽안호/파란 여우(정패패) : 자신과 동침하고도 무술을 전수해주지 않았다며 무당파 스승을 죽이고 무당심결을 훔쳐 달아난 뒤 옥교룡을 제자로 삼아 복수를 꿈꾸며 살아왔다.
명장면 명대사
- 리무바이 : “본심을 되찾으라고 널 풀어줬다.”
- 옥교룡 : “강호 사람 주제에 본심을 들먹이다니. 원하는 게 뭐지?”
- 리무바이 : “무당심결을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 옥교룡 : “좋아. 3초식 안에 청명검을 뺏으면 따르겠어.”
이 대나무숲 결투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장면 중 하나다. 리안 감독과 원화평 무술감독의 연출력으로 빚어진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대사보다 흔들리는 대나무 위에서 두 주인공이 춤추듯 움직이는 모습, 그들과 함께 유려하게 움직이는 카메라의 동선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와호장룡 [臥虎藏龍, Crouching Tiger, Hidden Dragon] (세계영화작품사전 : 무협 영화, 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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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호장룡>의 철학적 분석 === <필로시네마 혹은 영화의 친구들 / 이진경 / 소명출판 / 13 ~ 26쪽>
<와호장룡(臥虎藏龍>에서 묘사된 '강호'의 공간적 특성에 관한 연구
1.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의 고원』가운데 유목주의를 제창하는 아름다운 글에서 전혀 다른 본성을 갖는 두 가지 공간을 구별한 바 있다. '홈 패인 공간', '매끄러운 공간'이 그것이다. 매끄러운 공간이란 유목민의 공간이다. 몽골의 초원이나 사막, 에스키모의 얼음 사막, 혹은 해상부족들의 바다처럼 운동이나 흐름이 모든 방향으로 향할 수 있는 공간이다. 여기서는 멈추고 머무는 점(가령 오아시스나 우물이 있는 곳)은 옮겨다니고 이동하는 선에 종속되어 있으며, 광대하지만 그렇기에 특별한 풍경을 통해 '이곳'이 어디인지 구별하기 힘든, 대신에 바람과 풀, 지표면의 흙의 색깔이나 감촉 등으로써 구별해야 하는 공간이며, 그래서 시각 대신에 촉각이 우위를 점하는 그런 공간이다.
반면 도시로 대표되는 홈 패인 공간은 국가장치가 작동하는 공간이다. 그것은 삶이나 운동, 흐름이 '마구잡이로' 흐르지 않도록 홈을 파 그 안으로만 흐르게 하는 공간이다. 자동차나 행인의 움직임을 가둔 도시의 도로, 거기서 막히면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갈 수 있는 방향은 홈으로 고정되어 있다. 이동이 있지만 이동은 언제나 점에서 점으로 이동하며, 선은 그것을 연결하는 것으로 점에 종속되어 있다. 서울-부산, 혹은 서울-대전, 대전-청주, 대전-대구 등등.
그러나 매끄러운 공간은 단지 외형상의 특징을 통해 정의되는 개념만은 아니다. 유목민은 이주민이 아니고, 이동하는 것이 유목도 아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이동하고 떠돌아다니면서도 마음은 어디 한 곳에 붙박이로 사로잡힌 그런 사람들을 수도 없이 보지 않는가. 가령 <동사서독>의 구양봉이 그런 사람이다. 그는 사막에 산다. 그리고 그때마다 이유를 갖고 떠돌아다닌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형수가 된 과거의 연인, 지워지지 않을 상처 같은 실패한 사랑에 사로잡혀 있다. 그의 마음은 마치 자폐아처럼 꽉닫혀 있다. 반대로 앉은자리에서 모든 삶을 사는 법도 있다. 화두 하나로 생사의 관문을 뚫으려는 선(禪)은 시방삼세(十方三世)를 일시에 관통하는 매끄러운 공간을 창안한다. 소림사 뒷산 동굴에서 면벽한 채 세상을, 중국을 사로잡은 달마 대사. 도(道), 그것은 어디서든 모든 곳을 향해 열린 길(道)이다. 그래서 토인비는 유목민을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라고 정의했고, 비슷하게 들뢰즈와 가타리는 황폐화된 환경을 두고 떠나는 이주민과 달리 유목민은 그 공간에 달라붙어서 그 공간에서 사는 법을 창안하고 그 공간을 새로운 삶의 공간으로 만드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2.
<와호장룡>은 이 두 개의 공간 사이에서 진행되고, 그것을 통해 그 두 가지 공간 사이에 있으며, 두 공간 모두와 소통하는 제3의 공간을 다루고 있다. 무사 내지 무인들이 떠도는 곳, 통상 '강호(江湖)'라고 불리는 세계가 그것이다. 하지만 그거야 모든 무협지, 모든 무협영화에 공통된 것이 아닌가? 물론이다. 그러나 전쟁이 등장하는 숱한 영화가 전쟁의 본질을 다루는 것은 아니며, 폭력이 난무하는 숱한 영화가 폭력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강호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보여주는 건 아주 쉽지만, 강호가 갖고 있는 본성을 보여주는 건 결코 쉽지 않다.
이를 위해 강호가 어떤 곳인가를 말하게 하는 서술적 방법이 통상 사용된다. 이 영화 또한 이런 방법을 사용한다. 그러나 여기서 이 영화가 다른 것은 강호를 보는 시각의 편차를 극대화하고 그 시점을 다변화한다는 점이다. 강호란 대체 어떤 곳일까? 먼저 자유로운 삶을 꿈꾸는 '용'에게 강호란, 권력과 부의 교환을 위한 결혼 같은 속박이고 얽매인 세계와 대비되는 자유로운 세계다. "강호인이 되면 정말 자유롭다죠?" 반면 그의 아버지 옥대인이나, 무당파를 돌보아주는 '아저씨' 패이러에게 강호란 혼란스럽고 바람잘 날 없는 세계다. 하지만 도시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선 국가관리 또한 "강호와 적절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용'이 속박과 자유의 대비를 보는 곳에서 그들은 질서와 혼란의 대비를 본다.
한편 용의 사부기도 했던 '푸른 여우'에게 강호란 강자가 지배하는 세계이자, 자신이 하려는 일에 방해가 되는 것이라면 누구든 죽여야 하는 "죽고 죽이는" 세계다. "방해가 되는 건 모두 죽여. 심지어 네 아버지라도. 강호란 그런 거야. 죽고 죽이고. 짜릿하지 않아?" 용이 꿈꾸는 자유란 그처럼 남을 짓밟고 죽여서 얻는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일까? 언뜻 보면 리무바이 또한 비슷하게 말한다. "강호란 고수와 부패가 판치는 곳이요." 하지만 사실은 푸른 여우와 정반대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일 게다. 그래서 푸른 여우는 "하나뿐인 제자" 용을 데리고 강호로 가고자 하지만, 리무바이는 강호의 최고수 자리를 버리고 강호를 떠나려 한다. 수련은 또 다르게 말한다. 자신은 강호에서 살았지만 자유로운 적은 없었다면서. "우정, 신의, 그게 없으면 오래 버티지 못해요."
강호를 살아보지 못한 채 추상적인 몽상 속에서 꿈꾼 사람의 발언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곳을 알고 나름의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이들의 발언이 다양한 만큼이나 강호의 이미지에는 흑백이 뒤섞이고 청홍이 교차한다. 강호는 푸른여우 같은 악한이 판을 치는 곳이고 권력과 손을 잡은 무사들이 휘젓는 공간이지만, 또한 리무바이처럼 도를 터득해 가는 사람도, 혹은 의리와 우정을 덕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는 공간이다. 그렇지만 좀더 단순하게 질문해 보자. 강호란 무도를 추구하며 자유로이 자신의 길을 가는 매끄러운 공간일까? 아니면 그곳 역시 정해진 길을 따라 권력과 부, 명예를 추구하는 홈 패인 공간일까? 다양한 삶을 옮겨가며 인생의 도를 터득해 가는 유목의 공간일까? 아니면 권력을 추구하고 권력에 봉사하며 입신양명을 꿈꾸는 정착의 공간일까?
3.
이런 방식으로 강호의 복합성을 보여줄 수 있을 진 몰라도 그것의 '본성'이 무언지를 보여주기는 힘들다. 이를 아는 건지, 이 영화는 다른 전략을 택한다. 그것은 강호를 다른 세계, 다른 공간과 대비하여 보여주는 것이고, 그것과 관련짓는 것이다. 상반되는 세계가 공간적 이미지로 표현된다.
먼저, 도시라는 홈 패인 공간이 영화의 중요한 한 축이다. 수련의 일행이 경호의 임무를 맡아 북경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사건은 시작된다. 성으로 둘러싸인 도시, 그 성문 앞에서 수련은 '공문(公文)'을 보여주고, 통과 신호가 내려지면 카메라는 마차의 바퀴를 비춘다. 아니, 그 바퀴 밑의 홈이 팬, 돌로 포장된 도로를 비춘다. 그 홈을 따라 바퀴는 구르고 마차가 간다. 그들의 궤적을 쫓다가 카메라는 새처럼 떠오르며 도시를, 그 도시의 중심인 자금성을 비춘다. 리무바이의 청명검을 훔친 도둑을 쫓는 시퀀스는 다른 방식으로 홈 패인 공간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경공이 안되는 경호대장은 높은 벽 사이의 길을 따라, 그 깊숙이 패인 홈을 따라 달린다. 탁월한 경공술을 써서 날 듯이 도망치는 도둑과 그를 쫓는 수련은 벽들의 홈을 넘기 위해 지붕 위를 달리지만, 끊임없이 그 벽 사이의 길로, 그 깊은 홈 안으로 내려온다. 도둑은 옥대인의 벽 너머로 도망치고, 막은 벽과 닫힌 문 앞에서 수련은 멈출 수 밖에 없다. 카메라는 다시 올라가며 사방의 벽 안에 갇히듯 서 있는 수련을 비춘다.
다음으로, 신장의 사막 내지 초원지대. 용이 아버지의 부임지로 '이사'하면서 마적 반천운으로 불리는 '호'와 만나고 그와 싸우며 그와 사랑하게 되는 공간이다. 관리와 경호대는 거기서도 길을 따라 이동하지만, 마적들은 사방에서 오고 사방으로 흩어진다. 거기서 국가인들은 패배한다. 그곳은 속도에 의해 사방을 동시에 장악하는 자들이 지배하는 공간인 것이다. 호를 쫓아 용이 말을 달리는 곳도 사막이고 초원이다. 이곳은 확실히 유목민의 공간이고 매끄러운 공간이다. 용은 여기서 비로소 자유를, 자유로운 삶과 사랑을 맛본다. 호는 자신이 사막에서 살아온 것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동료들에 대해 말한다. "나를 따르는 자는 나의 형제가 되었지." 그것이 아마도 그가 '마적 반천운'이란 '악명'을 얻게된 비결이었을 게다.
이 영화는 마적들이 살고 있는 사막을 자유로운 삶이 펼쳐지는 세계로 포착한다. 부임하는 용의 대열을 털고 관리들을 죽이지만 반천운은 "여자들은 손대지마"라고 외친다. 용은 빼앗긴 빗 때문에 호를 쫓아 달리지만, 그건 사실은 그에게서 나오는 자유로운 삶의 느낌을 따라가는 것이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강인한 전투력, 탁월한 기마술, 어디로든 달릴 수 있는 드넓은 사막, 그것은 용을 잡아당기는 또 다른 유혹이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호나 용에게 '신장'이란 자유로운 삶과 사랑이 있는 공간이다. 용의 집으로 잠적해 든 호는 말한다. "함께 떠나자. 신장에서 다시 자유롭게 살자." 자포자기한 호가 용의 결혼식을 망치며 뛰어들어 외치는 말도, 용의 말대로 진심어린 마음으로 소원을 비는 말도 하나다. "신장으로 가자."
사막이나 초원을, 혹은 같은 말이지만 마적을 이런 식으로 다루는 것을 무협영화에서 만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무협영화에서 마적은 어떤 식으로든 무사들의 적이다. 대부분 마적은 강호와 무관한 자들이고, 강호의 외부며, 강호를 덮쳐 오는 무뢰한들일 뿐이다. 혹은 무사들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동원되는 존재고, 세상의 평온한 질서를 위협하는 도둑 떼일 뿐이다. 가령 서극의 <도(刀)>에서 마적은 이유 없이 사람들을 잔혹하게 죽이는 끔찍한 악한들일 뿐이며, <동사서독>에서는 마을의 안녕을 파괴하는 존재일 뿐이다. 이와 달리 이 영화는 사막 내지 초원을 매끄러운 공간으로 다룸으로써, 그리고 그것을 무당산과 연결함으로써 강호의 모호한 위상을 분명하게 해준다.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을 구성하는 공간이 있다. 그것은 '산'으로 표상되는 공간이다. 무당산, 무당파의 본거지고, 사고를 친 호를 피신시킨 곳이며, 나중에 수련의 말에 따라 용이 찾아가는 곳이다. 그러나 이것만은 아니다. 리무바이가 용을 제자로 삼기 위해 용과 싸움을 하던 곳은 대나무가 무성한 숲이고 산이다. 용을 찾으러 가는 길, 리무바이가 수련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정자를 찾아가기 위해 카메라는 어부가 그물을 던지는 호수와 그곳을 둘러싼 숲을 먼저 렌즈에 담는다. 신장에서 용을 떠나 보내며 호가 "진심 어린 소원은 꼭 이루어진다"면서 전설과 함께 눈에 담는 것도 구름을 옷 삼고 있는 높은 산이다. 영화 모두(冒頭)에 리무바이가 무당산을 떠나 혼자 찾아갔던 곳도 "고요한 산 속"이었다. 그래서인지 구름이나 물을 동반하는 산의 모습이 적지 않게 등장한다.
산, 아니 숲에 대해 들뢰즈와 가타리는 수직선을 그으며 나무들이 서 있는 공간이란 점에서 중력의 공간이고, 농사짓는 정착민의 공간과 유목하는 초원 사이에 있는 공간이라고 말하지만, 아마도 그것은 서양에서의 숲의 이미지에 기인하는 것일 게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숲조차 이미 산이고, 산은 무공을 익히고 무도를 배우러 가는 곳이며, 리무바이가 용을 가르치려는 마음으로 그와 칼을 부딪히는 곳이며, 더 깊은 도를 위해 리무바이가 강호를 버리고 들어갔던 곳이다. 신장의 전설 속에서 진심 어린 소원을 빌며 자신의 몸을 던졌던 곳이다. 호에게 진실로 소원을 빌라면서 용이 몸을 던지는 곳 또한 무당산이다. 요컨대 이 영화에서, 아니 동양에서 산은 '내공'을 쌓으러 가는 곳이고, '도' 닦으러 가는 곳이다. 즉 앉아서 유목하는 공간, 앉은 채로 모든 상(相)을 떠나는 곳이고, 그런 의미에서 또 하나의 매끄러운 공간이다. 굳이 대비하자면, 초원이나 사막이 외연적이고(extensive) 형태적인 의미에서 매끄러운 공간임에 반해, 산은 내포적 / 내공적인(intensive) 비형태적인 의미에서 매끄러운 공간이다.
그렇다면 강호는 어떤 공간인가? 어디가 강호라는 세계에 부합하는 공간인가? 산? 아니다. 무사나 검객들은 스스로 생산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칼과 능력으로 다른 이들이 노동한 것을 얻어야 산다. 산은 이것을 주지 못한다. 거기는 강호를 떠나려는 사람이 가는 곳이거나, 강호에 들어가기 전에 '내공'을 쌓는 곳이지, 산 자체가 강호는 아니다. 사막이나 초원 역시 아니다. 그곳은 유목민이나 마적이 있는 곳이다. 강호의 검객은 <동사서독>처럼 해결사로 고용된 검객들이 보여주듯이, 마적의 적이지 마적이 아니다. 그렇다면 도시인가? 도시 역시 아니다. 도시는 기본적으로 국가적 공간이고, 국가권력이 장악하고 있는 공간이다. 물론 도시는 강호의 검객들이 드나드는 곳이며, 무술을 가르치는 권력자의 종이 되든 거기서 비축한 돈을 얻는 곳이다. 도시의 병사들은 무사들의 칼이 난무하는 것을 막는 자들이지 무사들이 아니다. 권력자의 사병이 된 무사라면, 이미 그는 강호에서 도시로 이동한 자들(병사의 일종)이지 강호의 무사는 아니다.
4.
강호는 산과 도시 사이에 있다. 산과도 소통하고, 도시와도 소통한다. 강호는 초원이나 사막과 소통하지 않는다. 즉 강호는 유목민의 매끄런 공간과 본성을 달리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강호는 내포적인 유목의 공간인 산과 소통한다. 무당파 검객은 무당산에서 훈련되고 배출되며, 상처 입은 검객은 산으로 탈주한다. 산은 강호인의 '내공'을 제공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리무바이가 보여주듯이 그 내공이 어떤 수준을 넘어서면, 혹은 무사의 도가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 그들은 강호를 떠나 산으로 들어간다. 그런 점에서 산은 또한 무사들이 강호를 등지게 하는 '배신'의 공간이다. 그것은 강호와 소통하고 강호와 포개지지만, 때론 강호와 등을 돌리는 그런 공간이다.
또한 강호는 도시와 소통한다. 이 영화의 시작부분에서 수련은 공물인지 세금인지 모르지만, 북경으로 들어가는 짐을 호송하는 '임무'를 맡아서 수행한다. 물론 돈을 벌기 위한 것일 게다. 그래서 그들은 도시로 들어가는 비축물과 함께 도시로 간다. 아버지의 친구인 페이러는 옥대인의 곁에 있는 도시인이며, 동시에 무당파를 도와주는 사람이다. 그의 집은 도시에 속한 공간이면서 또한 강호와 연결되는 접점이다. 또 리무바이와 수련은 옥대인의 도망친 딸을 찾아주는 일을 맡기도 하고, 국가감찰원이 못 잡는 '살인범'을 대신 잡아주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도시라는 홈 패인 공간과 소통한다. 이 지점에서 그들은 도시의 권력, 국가적 권력과 함께 가고 그것에 포섭된다.
그러나 리무바이와 수련은 도망친 옥대인의 딸을 찾아서 자신의 임무대로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으며, 결혼식을 망친 범인을 자신들의 본거지에 숨기기도 한다. 여기서 그들은 단순히 홈 패인 공간에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은 존재임이 드러난다. 이것이 또한 국가인들이 이들을 근본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기도 하다.
강호로 떠난 용이 처음 들른 곳은 '객잔'이다. 술과 음식, 잠잘 방을 제공하는 곳. 강호의 무사들은 그것을 스스로 만들지 않기에 주점이나 객잔, 여관을 반드시 통과한다. 그곳은 마치 초원의 유목민들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우물이나 샘과 같은 곳이다. 따라서 누군가를 쫓거나 찾으러 나선 '강호인'들은 대개 객잔을 뒤지며 행적을 쫓는다. 그래서 객잔은 수많은 결투와 싸움이 벌어지는 가장 중요한 공간 중의 하나가 된다. 여기서도 강호로 들어가려는 용은 객잔으로 들어가고, 거기서 '사건'을 벌이며, 자신의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다. 용을 찾는 리무바이와 수련도 객잔으로 들어가 그 소식을 듣는다.
객잔, 그곳은 시장 안에 있는 공간이고, 시장의 일부다. 시장은 필요한 물건을 따라, 혹은 팔 물건을 들고 상인들이 모이는 공간이다. 그곳은 상품의 흐름이 모이고 흩어지는 공간이고, 그것을 따라 사람들의 흐름이 흐르는 공간이다. 그것은 도시현상 그 자체는 아니라고 해도 가장 도시적인 현상의 하나다. 정치적인 권력의 흐름과 더불어 도시를 지배하는 경제적 권력이 직접 작용하는 곳이다. 강호인들은 도시의 국가인들과는 다른 방식으로지만, 시장이라는 공간과 이렇듯 겹치고 소통한다.
홈 패인 공간과 강호인의 이 이중적인 관계를 잘 보여주는 것은 지붕 위의 공간이다. 청명검을 들고 도둑은 벽을 타고 올라 지붕 위로 달린다. 벽 사이의 길, 그 깊게 홈 패인 공간은 그들에게 필수적인 자유로운 운동과 속도를 불가능하게 하고, 모든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여지를 빼앗을 뿐 아니라, 끊임없이 그들을 사람들의 '시선'속에 가두기 때문이다. 그것은 도둑질한 무사의 경우만이 아니다. 자객의 임무든, 그것을 추적하는 역할이든, 탁월한 검객은 벽을 타고 오르며 지붕 위를 달린다. 용을 찾아온 호도 약간 미숙하지만 벽을 타고 그것을 넘어 다닌다. 이런 점에서 강호의 무사들과 홈 패인 공간은 근본적으로 합치하지 않는다.
지붕 위의 공간은 도시 안에 있고, 홈을 파는 도시의 벽들 위에 있지만, 도시의 홈 패인 공간과 다르다. 그것은 강력하게 홈이 패인 공간 위에서 그 홈을 넘쳐흐르기 위한 공간이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홈 패인 공간 안에 매끄러운 공간을 만드는 방법처럼 보인다. 적어도 그것은 중력에 반하는 공간이고, 중력을 이기는 속도가 없으면 머물 수 없는 공간인 것이다. 하지만 지붕 위의 공간은 근본적으로 불안정한 공간이다. 무사들은 그리로 이동하고 거기서 다투기도 하지만, 계속 거기에 있을 순 없다, 필경 다시 내려와야 한다. 또한 그것은 위태로운 공간이다. 자칫하면 추락할 수 있는 공간인 것이다.
도시 위에서 도시와 겹치면서, 혹은 소통하면서(용과 수련은 벽을 오르내리며 싸운다) 만들어지는 공간, 중력을 이기는 속도와 공력이 없으면 이용할 수 없는 공간, 하지만 결국 다시 내려오면서 벽 사이의 홈 안으로 이어지는 공간, 그것이 바로 무사들이 만드는 공간의 성격을 특징짓는다. 그것은 매끄러운 공간과 홈 패인 공간 사이에 있으며 그것들과 각각 소통하는 공간. 사막과도 다르고, 산이나 도시와도 다른 공간, 강호는 그런 중간지대를 형성한다. 강호가 갖는 복합적인 이미지, 강호가 포함하는 다양한 양상의 삶, 그것은 강호가 갖는 중간지대적인 이 특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어디와 어디를 잇는가, 혹은 어디와 겹치고 어디와 소통하며 사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성격을 갖는 삶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혹은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어느 방향을 향하는가에 따라, 다시 말해 홈 패인 공간을 향해 가는가 아니면 매끄러운 공간을 향해 가는가에 따라 무사의 도가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되기 때문이다.
5.
<와호장룡>은 이 여러 개의 공간들 사이에서 상이한 방향을 그리는 선들의 교차와 충돌, 수렴과 방향전환을 펼쳐 보여준다. 매끄러운 호반을 빠르게 패닝하며 무당파의 도장에서 시작하는 영화는 무당산에서 저 매끄러운 공간을 향해 용이 몸을 던지는 것으로 끝난다. 마치 다양하고 이질적인 공간을 그 매끄러운 공간으로 감싸거나 뒤덮으려는 듯이. 하지만 그 사이를 용이라는, 무술을 배웠으나 무도는 배우지 못한, 또한 강호를 꿈꾸지만 강호를 아직 모르는 인물을 따라 공간을 가로지르며 간다.
출발점은 홈 패인 공간, 북경이라는 도시의 치안담당자인 옥대인의 집이다. 혹은 그 옆에 사는 페이러의 집이다. 하지만 그 도시의 중심조차 적어도 두 개의 탈주선이 관통하고 있다. 옥대인의 집에 숨어사는 '푸른 여우'가 그 하나다. 그는 무당파에 들어갔으나 여자라는 이유로 무술을 가르쳐 주지 않았던 리무바이의 스승 강남학을 독살하고 '무당비결'을 훔쳐 달아난 사람이고, 용의 '눈'을 빌어 무예를 연마하며 용을 가르쳤던 스승이다. 이는 도시 속에 숨어 있는 도시의 외부다. 그것은 원한에 의해 스승을 죽이며 시작했다는 점에서 원한과 복수, 미움과 증오로자기 고유의 선을 그리기 시작하지만, 바로 그로 인해 또 다른 원한과 복수, 미움과 증오를 야기하며 그에 쫓기는 선이다. 그것은 강호안에 있으며 강호라는 공간을 짜는 한 축이지만, 동시에 죽음으로 강호를 뒤덮고 강호를 파괴하려는 파괴와 죽음의 선이다.
또 하나의 탈주선을 그리는 것은 용이다. 그는 부와 권력, 가족과 제도에 둘러싸인 삶을 떨치고 자유로운 삶을 꿈꾼다. 그는 강호가 바로 그런 세계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 자체로 긍정적인 탈주선이지만, 불행히도 죽음의 선을 그리는 선과 포개지며 그를 스승으로 삼았다. 이로 인해 거듭하여 그 파괴와 죽음의 색조에 빠져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은 그와 다른 본성을 갖는다. 수련도 리무바이도 이를 정확하게 알아 본다. "푸른 여우도 너의 깨끗함을 더럽히진 못해." 리무바이는 떠났던 강호로 다시 돌아오면서까지 그를 그 파괴의 선에서 분리하려 한다. "안 그러면 그녀는 독을 품은 용이 될 거요." 닥쳐온 결혼식은 홈 패인 공간에 갇힐 것인가, 아니면 "자유로운" 강호로 떠날 것인가의 선택을 강요한다. "신장으로 가자"며 결혼식의 대열에 끼어 드는 호는 자유로운 삶으로 용을 부르는 촉발이 된다.
리무바이는 지붕 위를 떠도는 용을 산으로 인도하려 한다. 리무바이 자신은 강호에서 그 외부로, 매끄러운 공간으로, 득도의 세계로 떠나려 했지만, 완전히 떠나는데 실패한다. 두 사람 때문이다(물론 그 또한 스승의 '복수'를 떨치지 못했지만, 그것은 강호를 떠나려는 그의 행보 자체를 막지는 못했다). 하나는 수련. 평생 사랑하면서 말 한 번 못한 채 가슴속에 품고 살아온 사람. 그로 인해 그는 "사방엔 온통 빛뿐이고 시간도 공간도 사라진" 득도의 문턱에서 멈추어 선다. "슬픔, 결코 떨치지 못할 상념"이 그 빛에 스며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는 강호를 떠나 수련에게 가려했던 것이리라. 그런데 거기에 용이 끼어 든다. 훌륭한 바탕을 갖고 있으며 좋은 근기를 가졌지만 스승을 잘못 만나 잘못 배운 탓에 죽음과 파괴의 선에 사로잡힌 용을 제자로 삼아 다시 가르치려 한다. "해서 안될 것은 해선 안된다. 절제 없는 욕심을 버려. 자기 생각을 버려야만 자신을 찾을 수 있다."
절대의 문턱, 득도의 문턱 앞에서 그는 다시 세간으로 내려가고, 거기서 다시 강호로 되돌아간다. 그 돌아감은 득도를 향해 강호를 떠나는 무사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강렬하고 인상적이다. 푸른 여우의 독, 그 미움과 원한의 독이 온 몸에 퍼져 죽기 직전 사랑을 고백하려는 리무바이에게 수련이 하는 말은 가슴 아프게 감동적이다. "마지막 남은 호흡을 아껴 득도의 경지에 오르세요. 저를 위해 쓰지 말고 최후의 호흡으로 해탈하세요." 하지만 리무바이는 용을 위해 강호로 돌아왔듯이,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더욱 가슴 아플 여인을 위해 마지막 호흡을 쓴다. "나는 평생 동안 당신을 사랑해 왔소. …… 나의 영혼은 당신이 있기에 죽어서도 외롭지 않을 거요." 도에 대한 집착마저도 버린 도인의 경지일까? 아니면 사랑 앞에서 도를 놓친 속인의 경지일까? 어쨌든 그가 무당산을 나와 더 깊은 산, 더 높은 산으로 오르려던 것, 강호를 떠나 절대적인 차원의 매끄러운 공간으로 향하던 것과 이 두 번의 '내려옴'은 결코 다르지 않아 보인다. 거기서 우리는 차라리 오르내림에 자유롭고 삶과 죽음에 자재로운 경지를 본다. '내공적인' 매끄러운 공간, 혹은 절대적인 매끄러운 공간.
리무바이는 그렇게 다시 강호로 내려옴으로써, 자유로운 삶을 찾는 용의 탈주선에 새로운 결정적인 방향을 부여한다. 결코 쉽사리 바뀌지 않는 용의 고집과 집착, 그것은 보검에 대한 집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시 자신에 대한 집착이고 고집이다. 아집(我執)과 아만(我慢), 그것이야말로 그 모든 세상사를 고통의 바다로 만드는 요체가 아니던가! 자신을 가르치고 자신을 살리려던 리무바이의 죽음, 그리고 그 앞에서 누구보다 더 슬픔과 원한에 사무치지 않을 수 없었을 수련의 '용서'. 그것은 용의 집요한 고집과 집착을 녹여 버린다. 자신의 득도마저 버렸던 리무바이처럼 수련이 말한다. "마지막으로 부탁하건대, 앞으로는 네 자신에게 진실하게 살아." 그리고 호가 숨어 있는 무당산으로 가라고 일러준다. 진실한 사랑, 진실한 자유를 찾아가라고. 그리고 용은 비로소 무당산, 그 높은 산을 오른다. 그는 수련이 한 말의 의미를 잘 안다. 그래서 호에게 진심 어린 소원을 빌라고 하고는 그 높은 산에서 자신을 던진다(이렇게 해서 무당산은 '신장'으로 이어진다). 마치 리무바이가 자신을 버리며 용으로 하여금 산에 오르게 하려 했듯이, 이제는 용이 자신을 버린다. 그것이 자신에 진실하게 사는 길이라는 걸 깨달은 것일까? 무아(無我). 이제 그가 떠가는 곳은 하늘, '아(我)'를 버린 자들만이 떠갈 수 있는 저 매끄러운 공간이다. 리무바이가 가려던 곳. 바로 거기로 용이 간다. 그리고 그를 따라, 구름을 따라, 허공을 나는 카메라를 따라 우리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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